1612년 음력 7월, 제주도에 류큐 사신단이 표류해왔다. 그들은 1610~12년에 명나라에 입조했던 류큐 사신단이었으며 류큐로 돌아가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까지 밀려온 이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조선군에게 나포,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도주했으며, 오직 소수의 표류민들만이 제주도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 조정의 조치 끝에 명나라로 다시 보내졌고 그 곳에서 다시 류큐로 보내졌다
이 이후 류큐측에서는 조선에 대해 사례를 표했다. 기록에 따르면 해당 표류민들을 구출하고 다시 돌려보낸 광해군대에 사례가 한 차례 행해졌으나 이는 조선측의 기록에서 쉽게 살펴지지 않는다.1 하지만 인조대에 류큐가 사례를 한 것은 확실히 파악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대왕행장에 류큐가 본인들의 표류 사신단원들을 송환해준 것에 대해 사례를 한 것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2 연려실기술에도 동일한 기록이 존재한다.3
그렇다면 인조 시기에 있었다는 류큐의 표류민 쇄환에 대한 사례는 정확히 어느 시기에 어떤 형태로 누구에게 이루어졌을까. 「인조대왕행장 」과 『연려실기술』을 함께 살펴보자면 이들은 북경에 간 사신을 통하여 조선에 예물과 자국의 자문을 전하며 1612년에 있었던 표류민 사건에 대한 사례를 표했다고 한다. 또한「인조대왕행장」에는 그 시기가 특정되지 않지만 『연려실기술』에서는 무진년(인조 6년/1628년)에 이러한 사례를 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술을 신뢰하자면 이들은 1628년에 조선측에 사례를 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무진년 기록 모두 류큐가 이 시기에 북경의 사신단을 통해 조선측에 무언가를 했다거나 조선에 돌아온 사신단이 류큐측의 사례에 대해, 혹은 류큐측 사신단과의 만남과 같은 것에 대해 언급한 기록같은 것이 살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의아한 점이다. 만약 연려실기술의 기술대로 실제로 무진년에 이러한 사례가 있었다면, 인조대왕행장에 실릴 정도의 정권홍보사례이니만큼 무언가 자그마한 기록적 실마리라도 남아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진년이 아니라 다른 시기에 류큐의 조선 사신들에 대한 사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정의 실마리는 바로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그 자문에 (쇼호가) 대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말이 있고'라는 문구이다. 해당 문구로 말미암아 당시 조선 사신단에게 사례를 했다는 류큐의 사신단이 명나라에 파견된 이유가 본인들의 왕이 바뀌었음을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특정할 수 있다.
류큐의 사신단이 해당 목적으로 명나라에 입조한 경우는 조선의 기록에서 살펴진다. 1627년 음력 5월 18일 대사간 김상헌이 말하기를 1627년 명나라에 입조한 류큐의 사신단의 주목적은 쇼호왕이 즉위한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4 쇼호가 즉위한 것은 1627년으로부터 수년 전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명나라에 왕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입조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류큐가 사실상 사쓰마의 지배 하에 있었던 탓에 명과의 교류가 지연된 탓으로 판단된다.
해당 사신단은 1626년에서 1627년까지 북경에 체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조선에 사례를 했다는 류큐의 사신단은 무진년이 아니라 병인년에서 정묘년 사이에 명나라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겹치는 시기에 북경에 갔던 조선의 사신단은 앞서 언급한 대사간이자 성절사 김상헌과 동지사 남이웅이었다. 류큐의 사신단은 이들과 만나 이들에게 지난 1612년에 있었던 표류민 쇄환건에 대하여 사례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도 김상헌과 남이웅이 귀국한 뒤 갑작스럽게도 류큐가 보내왔다는 명목의 예물이 왕실종친 및 고위관료들에게 분배된 기록이 살펴지는 것을 보자면 이 예물이 바로 류큐 사신단이 조선의 사신단을 만나 1612년의 일을 거론하며 사례한 예물이라고 볼 수 있다.5 북경에서 류큐 사신단과 만난 김상헌과 남이웅등은 류큐 사신단을 만나 그들로부터 답례 예물을 받고 귀환하여 그것을 조정에 바쳤고, 그것이 인조에 의해 분배된 것이다.
김상헌의 문집인 『청음집』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 여실히 살펴진다. 청음집에 실린 조천록을 살펴보자면 김상헌이 류큐의 사신을 북경에서 만났다는 기술과 함께 그에게 준 시가 실려 있다.6이를 통해 김상헌이 류큐의 사신과 만나 시를 전해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류큐의 사신들과 교류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류큐 사신들로부터 사례를 받은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류큐측이 조선의 대명사신들에게 1612년에 표류당한 자신의 사신들 일부를 돌려보내준 것에 대해 사례를 한 시기는 1626년 말에서 27년 초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필자는 1626년 말에 사례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고 파악하는데, 김상헌이 류큐 사신 채전에게 시를 준 것이 1626년 말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김상헌이 채전에게 시를 준 것은 아마도 류큐 사신단이 김상헌을 포함한 조선 사신단에게 사례명목으로 예물을 준 것에 대한 답례와 감사의 표시였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아마도 1626년 말엽에 사례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보다 높을 것으로 보인다.
1. 홍진옥, 「‘琉球 세자 살해설’과 김려의 <유구왕세자외전>」, 『대동한문학회』, 대동한문학 47, 2016, p.128.
2. 『인조실록』「인조대왕행장」
3. 『연려실기술』 별집 제 18권 「변어전고」
4. 『승정원일기』 인조 5년 음력 5월 18일
5. 『승정원일기』인조 5년 음력 5월 20일
6. 『청음집』 권 9 「조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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