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드라는 1969년부터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카페란다. 이것을 조현숙씨가 1973년에 인수하여 한 동안 운영하다가 연세대생들의 등쌀에 소주, 막걸리 집으로 바꾸었다. 훼드라에 처음 드나든 연대생들은 사회학과 76학번 윤후덕(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권기성 등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딱히 운동권 술집이었던 것은 아니고, 70년대 말 연세대 동아리 인간문제연구회가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다른 동아리들도 떼 지어 와 매일 저녁 떠들고 노래 부르고 하니 다른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손님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더란다. 그래서 할 수없이 연세대 운동권 전용 술집으로 되었다는 것.
“지금도 그 학생들 기억합니까?”
“그럼요. 77학번 평화문제연구회 김상규씨가 오면서 김치걸(78학번, 현재 변호사)씨가 왔는데 김치걸이가 제일 말 안 들었어요. 매일 십여 명이 몰려와 막걸리 두 세 병 놓고 밤늦도록 노래만 부르고, 김치걸은 손, 몸 흔들어가며 노래하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전축 스피커도 이겨냈어요. 그리고는 나가면서 술값은 외상! 이러는 거예요. 학도호국단장 문종렬, 차승훈, 이성헌, 총학생회장 송영길, 우상호, 정명수, 평문회장 곽영진, 모두 생각나지요. 특히 탈반 학생들은 얼마나 시끄러운지-- 매일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80년대 초까지 연세대에는 노래패가 없었다. 당시 서울대는 ‘메아리’, 이대는 ‘한소리’라는 노래패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82년 축제든가 양희은씨의 공연이 있었단다. 이를 계기로 가정 좋고 얌전하던 가정대생 배인효와 안치환이 주동이 되어 연세대 노래패 ‘울림터’가 만들어졌고, 훼드라는 당연히 ‘울림터’의 아지트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학생회 자치활동을 군사체제로 바꿔 통제하기 위해 총학생회를 폐지하고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당연히 학도호국단은 학생들로부터 완전 외면당하였는데, 전두환 때부터 풍부하게 예산을 쓸 수 있는 학도호국단을 장악, 학생운동에 활용하자는 전략적, 실용적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운동권 학생 중에서 학도호국단장에 입후보할 자격이 있는 3.0 이상의 학점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 수소문 끝에 기독학생회 회장인 문종렬이 3.0을 넘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입후보를 강권, 그로 하여금 운동권 학도호국단장 시대를 열게 했다.
1981년은 학생운동사에서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전두환은 권력이 어느 정도 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판단되자 몇 가지 유화 제스처를 썼다. 그중 하나가 졸업정원제를 도입, 대학 입학생 숫자를 2배로 늘린 것이다. 79학번 곽영진, 황언구, 81학번 이석주, 김형식, 김석동, 박혜경 등과 함께 만났던 다른 자리에서의 한민호의 말이다.
“그 전까지는 신입생들을 학생운동에 가담시키려면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81년에 신입생이 2배로 느는데, 이 입시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서울대, 연고대 모두 대부분의 학과가 미달되었지요. 우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제 정말 ‘민중’들이 들어오는구나. 서클마다 수십 명의 신입생이 몰려 왔으니까. 그래서 성적이 아래인 얘들부터 선발했지.”
81학번 이석주가 단호히 반박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나는 영진이 형 고교 후배인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다가, 영진이 형이 2차로 훼드라로 나를 데리고 왔어요. 여기서 고교 때는 듣지 못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멋있었어요. 그래서 바로 평화문제연구회에 들어갔지요.”
“황언구는 공대생인데 왜 방언연구회에 들어갔는지 알아? 방언연구회에 문과대, 특히 국문과 여학생들이 많이 있어서였지.”
결국 1981년을 기점으로 두 배로 늘어난 대학 정원이 학생운동권에도 질과 양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한 것이었으니, 전두환의 유화책은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자충수가 된 셈이다. 연대의 경우, 1981년 11월 79학번 양경희의 학생회관 추락 시위사건까지는 경찰에 밀렸으나, 이 사건을 기점으로 무승부가 되고, 이후부터는 계속 경찰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이후 연대 운동권이 전국 학생운동의 주도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
당시 연대생이었던 전두환 대통령의 둘째아들 재용 군도 훼드라에 한번 왔었다고 한다.
“재용이가 친구 두 명과 같이 왔어요. 경호원들은 밖에 서 있고. 조용히 막걸리를 시켜 마시고 있는데. 정외과 학생인가, 한 친구가 다가가더니, 전두환을 막 비판하며 들어보라고 하더군요. 전재용은 가만히 있었고, 그렇다고 경호원들이 저지하지도 않았어요.”
훼드라 아줌마 조현숙씨
연대생들로부터 훼드라가 마음 놓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술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화여대 학생들도 많이 왔지만, 매상은 안올리고 노래만 불러 아주머니는 그리 탐탁지 않아 했단다.
“학생들이 그렇게 드나들면 외상도 많았을 텐데요. 외상 하고 감옥 가고, 그러다 보면 떼인 것도--”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그때는 개인보다 동아리별로 장부를 달아놓고 외상을 했는데, 어느 때가 되면 선배들이 와서 해결하고 그럽디다. 감옥에 가면 외상값도 탕감했어요. 그거 언제 받겠어요? 외상장부가 있었긴 했지만, 87년인가, 큰 장마에 온 집 안에 물이 들어 외상장부가 다 볼 수 없게 젖어 버렸어요. 요즘 가끔 그 학생들이 와 그때의 외상값이라며 얼마 주고 가기도 하는데, 나는 모르지요. 연고전이 끝나면 엄청 몰려와 마셔 대는데 술값은 전혀 받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면 나중에 쿠사 선배인 조남준(경영 68학번, 현재 풍진ID 대표)씨가 갚아요.”
한민호군이 옆에서 거들었다.
“82년에 평화문제연구회도 훼드라에 외상이 꽤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 평문 회장이던 곽영진이 꾀를 내어 1일찻집을 열어 외상을 모두 해결했어요. 81, 82학번 여학생들을 미인계로 써서--- 지금 돈으로 1, 2백만 원 쯤 되었던 것 같은데 주인 아주머니가 아주 감격해 했지요.”
그러나 81학번 이석주는 곽영진에 영웅담에 대해 다른 ‘증언’을 한다.
“영진이 형은 돈이 없으면 나에게 시계를 주며 전당포에 가 돈을 만들어 오라고 시켰어요. 어찌어찌해서 내가 돈을 꽤 많이 만들어 와요. 그러면 그 돈으로 독수리다방 아래 카페에 가서 맥주 사마시고, 돈 떨어지면 훼드라에 와서 외상 해서 아줌마가 막 화를 낸 적도 있어요.”
남의 가게에서 밥 먹듯이 외상질에 시끄럽게 굴고
외상값 갚는 방식도 어휴 감옥가면 받지도 못하니 탕감하고
미인계 1일 찻집 자랑이다 시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