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 시립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근무하는 40대 후반의 남자입니다. 현재 미혼이며 결혼 경력도 없습니다.
이 나이에 미혼인 건 직장 주변에서도 거의 저뿐이고, 지인이나 친구들이 종종 중매 이야기를 꺼내지만
왠지 결심이 서지 않아 지금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된 이유는, 과거에 겪은 어떤 일이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 자체에 강한 거부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제 마음 정리도 겸해서 그때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시간 때우기 정도라도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 실제 괴담에 흔히 나오는 병원 관련 무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의사라 그런 쪽을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웃음)
이번 이야기는 귀신 얘기가 아니라 제가 과거에 사귀었던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직 20대 중반의 레지던트였을 때, 나루미라는 여성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만난 계기는, 지인이 “숫자 맞추기”용으로 부른 합석 파티였습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상태로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나루미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 당시 제가 좋아하던 아이돌과 겉모습이 약간 닮아 있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신경이 쓰여서 제가 먼저 말을 걸었고, 뜻밖에도 대화가 잘 맞아서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흔한, 전형적인 연애 패턴이었죠.
아시다시피, 레지던트의 업무는 상당히 힘듭니다.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만들어 그녀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물론 일반 커플처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요.
나루미는 저보다 세 살 어렸지만 꽤 여러 직업을 경험한, 겉보기와 달리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집안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중학교 졸업 후에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온실 속 화초처럼 보였는데 외모와 달리 꽤 고생한 타입이었습니다.
저는 반대로 톱니바퀴처럼 공부만 하느라 아르바이트는커녕 놀 시간도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제가 나루미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사귄 지 3개월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무렵, 그녀의 강한 요구로 우리는 반동거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그녀가 결혼을 암시하는 행동을 자주 하기 시작한 겁니다.
솔직히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3개월인데요?
“의사 선생님의 아내가 된다니 꿈만 같아.” 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하더군요.
당시의 저는 레지던트로서 하루하루가 너무 분주해 결혼 따위를 생각할 틈도 없었고
무엇보다 일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루미와의 사귐은 가벼운 연애 정도라고 생각했고
그녀도 같은 생각일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나루미는
“결혼식장은 여기로 정해놨어.”
“가족과 친구들도 결혼을 기뻐해 주고 있어.”
이런 식으로 외곽부터 차근차근 포위해 오는 행동을 했습니다.
공공연히 결혼 정보 잡지를 읽어놓기도 하고, 당시 그녀의 입버릇은 “빨리 아기 갖고 싶어.” 였습니다.
뭐랄까…
그녀의 계산적인 속내가 보오는 것 같아 보기 싫었습니다.
‘이게 본성인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루미에 대한 제 마음은 급속도로 식어갔고, 완전히 정 떨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슬슬 끝내야겠다.’ 라고 결심한 건 여름이 지나 쌀쌀한 기운이 느껴질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휴일, 카페로 나루미를 불러 이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프로포즈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라 기대감으로 빛나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변하더니, 곧바로 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그 충격도 컸겠지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싫어, 싫어” 하며 계속 머리를 흔드는 그녀를
꾸준히 설득했고 결국 그녀는 받아들였습니다.
방에 있던 그녀의 물건들도 전부 택배로 돌려보내고 그때는 나름 깔끔하게 정리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3일 정도 지나자 나루미에게서
“다시 시작하자.”
“한 번만 더 얘기하자.”
이런 메일과 전화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쉽게 포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레지던트로서 과중한 업무를 하고 있었고, 체력에 자신 있던 저조차
마음과 몸이 점점 지쳐갔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병원이 임대해 준 연립주택이었는데, 나루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을 찾아오거나
제가 출근하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등 스토커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는 무슨 짓을 당해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끝까지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나와 나루미 사이의 공방이 이어졌고, 드디어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어느 밤, 언제나처럼 나루미에게서 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전화가 왔을 때
전는 결국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너랑은 완전히 끝났어. 이 이상이면 경찰 부른다.”
그러면서 덧붙였죠.
“의사 아내라는 지위가 갖고 싶을 뿐인 너 같은 사람이랑 누가 다시 만나겠냐.”
지금 생각해도 꽤 심한 말이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나루미는 정곡을 찔린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마지막에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고 스스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후로는 전화나 메일도 오지 않고, 물론 집에 찾아오는 일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나루미에게서 해방되었고, 골칫거리가 사라진 전 오롯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평온하게 살겠지.’ 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었던 저의 생각은
역시나 너무 안일했습니다.
막다른 곳에 몰리고 잃을 것이 없어진 사람의 무서움을 그때서야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던 12월 중순. 그날은 보고서 작성 때문에 늦게 잠들었는데,
중간에 깨어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었고, 잠든 지 2시간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왜 깼느냐면, 이상한 악취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전 작은 변화에도 금방 눈을 뜨는 편이라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 벌떡 일어났고,
곧바로 냄새가 알코올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 침실을 나오자 바닥에 액체가 뿌려져 있었습니다.
옷깃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나서 어두운 거실을 보니 한 여성이 등을 보인 채
가운데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전신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 순간 귀신인가 싶었지만 체형을 보고 바로
나루미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으니 아마 울고 있었겠죠.
너무도 예상 밖의 상황을 겪으면 사람의 뇌는 정지하더군요.
몇 초 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습니다.
“너… 여기서 뭐 하는—”
막 말을 꺼내려던 순간,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순간적으로 이해하고
곧장 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직후,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고
주변이 마치 대낮처럼 밝아졌던 것이 기억납니다.
충격으로 넘어지며 제 셔츠에도 불이 붙었지만,
달리면서 옷을 벗어던지곤 상반신을 벗은 채로 밖으로 피신했습니다.
다른 방 주민들도 금방 밖으로 뛰쳐나왔고, 한밤중임에도 몰려온 구경꾼들과 함께
창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나오는 방을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이미 신고한 덕인지 곧 사이렌이 들리고 소방차가 도착해
진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불길은 주변으로 번지기 전에 잡혔으며, 이웃들에게 인명 피해는 없었고,
팔과 등만 가벼운 화상으로 끝났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구급대원 말로는, 조금만 더 늦게 도망쳤어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물론 나루미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나루미에게는 예전에 스페어키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헤어진 뒤 제대로 돌려받았지만 아마 몰래 복사본을 만들어 둔 모양입니다.
그걸로 집에 숨어 들어왔던 거죠.
그날의 소동으로 사후 처리와 경찰의 장시간 조사 등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현장 상황과 검시 결과 등을 토대로
‘연애 감정의 파탄으로 여성이 자포자기하여
방에 불을 질렀다’
라는 결론으로 피의자 사망 상태에서 서류만 송치되며
사건은 일단락됐습니다.
당시엔 정말로 일에 집중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어떻게 사람은 ‘방에 몰래 들어와 방화를 하고
동반자살을 시도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될까요? 생각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원한을 품어도 정도가 있죠.
그런 무서운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함이 밀려옵니다.
이상이 나루미와 저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입니다.
자, 여기서 조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나루미가 그런 방식으로 저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도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가장 정신적으로 괴로웠던 건—
불타버린 제 방에서
“시신 4구”가 발견됐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만…
나루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
이 가족 네 명이 그때 제 방에 숨어 들어와 있었던 모양입니다.
방은 어두웠고 상황도 상황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병을 앓아 일을 할 수 없었고, 여동생도 선천적인 병을 가지고 있어서
그 가족은 행정의 지원으로 근근이 생활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즉, 처음부터 나루미는 저에게 가족 전체의 미래를 떠넘길 속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별 이야기를 듣고, 재결합도 절망적이라는 걸 깨달으며,
미래를 비관해 가족 모두와 함께 저를 데리고 죽으려 한 거겠지요.
‘가난하면 마음이 둔해진다’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일이 제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이별 선언이 방아쇠가 되어 나루미의 가족 전체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미혼입니다.
상대뿐 아니라, 그 상대의 가족까지 정상적인 사람들인지
확인하지 않고는 쉽게 마음을 열 수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걱정하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훨씬 편하더군요.
여러분도 직업이나 지위에 끌려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정말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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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쌍뇬이었네 화자 일찍 탈출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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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쌍뇬이었네 화자 일찍 탈출해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