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이라기엔 아직도 저한텐 잊을 수 없는 슬픈 기억으로 남라있는 일입니다만
최근 예지몽 관련 게시글들이 보이기에 제 경험담도 올려봅니다.
제 경우엔 이가 빠지는 등의 상징도 없었고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간격도 길었지만 이 일은 여전히 생생하네요...
제가 막 스무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전 재수를 하기로 결심하고 용인의 모 기숙학원에서 공부를 하고있었습니다.
기숙학원에 들어가보셨거나 그런 친구가 있으시다면 시스템에 대해 알고계실테지만
기숙학원은 굉장히 빡빡한 매일의 스케줄에 따라 행동하고
집에 다녀올 수 있는 주말도 한달에 한번이었나 두번 뿐입니다.
스케줄 사이사이의 짧은 휴식시간에만 공중전화 사용이 가능하고
모든 휴대폰은 소지 불가였죠.
그래도 생각보단 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수업도 선생님들도 재미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너무나 생생한 안좋은 꿈을 꿨습니다.
아침일찍 일어나자마자 전부 밖에 나가서 체조를 하는 바람에
꿈에서 깬 당시에는 멍한게 개꿈이려니 했습니다만
아침밥을 먹고 수업을 들으려고하는데 계속 생각이 나는 겁니다.
꿈에서의 배경은 제가 머물던 기숙학원이었고 모든게 현실과 같았습니다.
헌데 학원 원내 방송으로 저를 찾길래 원무실에 가보니
집에 빨리 귀가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에 가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꿈이 하도 숭숭하고 또 생생해서 그만 생각을 떨칠 수 가 없어
오전 수업 네시간을 듣는 내내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도 계속 옆에서 울면서 코를 풀고있으니 분위기가 묘해졌고
선생님들도 농담으로 제 기분이 나아지라고 계속 노력하시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꿈을 떨쳐낼 수 가 없었어요.
그 이유는 틀림없이 당시 아버지가 폐암을 앓고계셨기 때문일겁니다.
저는 사실 예체능 계열의 사람으로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고3때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고 모든것이 변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원하는 방향대로, 잘해내서 조금 더 힘이 되어드리자는게
당시의 제 꿈이되었으니까요.
그래도 아버지는 건강해보이셨습니다. 머리도 빠지지않았고
원래 하시던 일도 적당히 하시고 골프를 자주 다니셨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런 꿈이라니...
점심시간이었는지 오후수업을 마친후였는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학원측에선 펄쩍뛰며 안된다고했구요
전화로 집에 확인을 해도 별 차이 없다고 했지만
저는 강경하게 지금 집에 안보내준다면 아예 나간걸로 해도 상관없다고하고
결국 허가를 받고 집에 다녀왔어요.
그리고 집엔 정말 아무일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외려 꿈은 반대라며 싱글벙글 오랜만에 보는 딸얼글에 기분이 좋으신듯했고
어머니도 나온김에 맛있는 것 좀 먹고가라며 귀한 요리들을 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하룻밤을 지내고 머쓱한 마음으로 학원으로 귀환합니다.
이게 봄의 일이었는데 5~6월 사이에 아버지가 전과 달리 상태가 안좋아지셨대서
저는 학원을 끊고 집과 독서실을 왕복하며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머리도 빠지지않고 건강해보이셨지만
아버지는 외출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고 집안에서 기침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걸 보면 제가 더 심란해져서 아버지한테 힘이 되드리긴 커녕
몇마디 나누다가 눈물이 쏟아져서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공부도 전혀 손에 잡히질 않아 밖으로 나돌기가 일쑤였어요.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고 그닥 차도가 보이지 않던 아버지 병셍
한가닥 희망이 생겼습니다. 무슨 신약을 테스트겸해서 사용하게 됐는데
그게 꽤 잘 들었던지 아버지는 많이 좋아보이셨어요.
아버지 생신이 7월 중순이었는데 그때 희망과 의지로 극복해낼 수 있다고
나도 다시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서 기쁘게 해드릴테니
아버지도 힘내주시라는 편지를 쓰고 전 8월에 다시 기숙학원에 돌아갑니다.
학원에선 처음엔 받아주지 않으려했어요.
첫번째론 많이 쉰만큼 진도를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단 이유였고
또 제가 집에 가겠다며 난동을 부렸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 곁에 있어드려야하지 않나는 마음도 있었겠죠.
한명이 큰일이 생기면 그 학생뿐 아니라 한 학급분위기가 다 영향을 받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저대로 필사적이었기때문에 어쨌든 다시 기숙학원에 들어갑니다.
다음 집에 방문하던때에도 아버지는 괜찮아 보이셨고
9월에 접어들어 곧 내 생일이고 집에 가는날도 다가온
그 때 뵙자고 전화를 할 때도 좋아보이셨어요.
그리고 9월 모의평가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다시 입원한 뒤 처음 보는 대형 모의고사라 집중을하고 시험을 쳤고
시험이 끝난후 바로 가채점을 하는데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어요.
예전 점수보다 떨어질 것을 우려했지만 전부 그대로거나 소폭 상향했거든요.
그런데 시험을 보고 저녁식사를 하고 방송이 나와 절 찾더라구요.
무슨일일까 이름이라도 잘못 썼나? 하고 교무실에 갔더니
어수선한 분위기에 빨리 집에 가보라는 말 뿐...
그리고 제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며칠전부터 병세가 급히 악화돼서 중환자실에 가셨다는데
전화해서 알아보니 제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대서
어머니는 제게 알리지도 않고
저는 수능시험 당일도 아닌 모의고사따위때문에
아버지 임종도 못지켜드리게 됐지요.
완벽히 예지몽을 꿨던거에요.
그게 여전히 트라우마가 되어 남아있습니다.
사실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선 이리될 걸 다 알고있었는데
내가 그걸 외면하고 아버지 보기가 힘들어서 학원에 가버린 게 아닌지
오년도 넘은 일인데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최근 예지몽 관련 게시글들이 보이기에 제 경험담도 올려봅니다.
제 경우엔 이가 빠지는 등의 상징도 없었고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간격도 길었지만 이 일은 여전히 생생하네요...
제가 막 스무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전 재수를 하기로 결심하고 용인의 모 기숙학원에서 공부를 하고있었습니다.
기숙학원에 들어가보셨거나 그런 친구가 있으시다면 시스템에 대해 알고계실테지만
기숙학원은 굉장히 빡빡한 매일의 스케줄에 따라 행동하고
집에 다녀올 수 있는 주말도 한달에 한번이었나 두번 뿐입니다.
스케줄 사이사이의 짧은 휴식시간에만 공중전화 사용이 가능하고
모든 휴대폰은 소지 불가였죠.
그래도 생각보단 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수업도 선생님들도 재미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너무나 생생한 안좋은 꿈을 꿨습니다.
아침일찍 일어나자마자 전부 밖에 나가서 체조를 하는 바람에
꿈에서 깬 당시에는 멍한게 개꿈이려니 했습니다만
아침밥을 먹고 수업을 들으려고하는데 계속 생각이 나는 겁니다.
꿈에서의 배경은 제가 머물던 기숙학원이었고 모든게 현실과 같았습니다.
헌데 학원 원내 방송으로 저를 찾길래 원무실에 가보니
집에 빨리 귀가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에 가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꿈이 하도 숭숭하고 또 생생해서 그만 생각을 떨칠 수 가 없어
오전 수업 네시간을 듣는 내내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도 계속 옆에서 울면서 코를 풀고있으니 분위기가 묘해졌고
선생님들도 농담으로 제 기분이 나아지라고 계속 노력하시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꿈을 떨쳐낼 수 가 없었어요.
그 이유는 틀림없이 당시 아버지가 폐암을 앓고계셨기 때문일겁니다.
저는 사실 예체능 계열의 사람으로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고3때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고 모든것이 변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원하는 방향대로, 잘해내서 조금 더 힘이 되어드리자는게
당시의 제 꿈이되었으니까요.
그래도 아버지는 건강해보이셨습니다. 머리도 빠지지않았고
원래 하시던 일도 적당히 하시고 골프를 자주 다니셨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런 꿈이라니...
점심시간이었는지 오후수업을 마친후였는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학원측에선 펄쩍뛰며 안된다고했구요
전화로 집에 확인을 해도 별 차이 없다고 했지만
저는 강경하게 지금 집에 안보내준다면 아예 나간걸로 해도 상관없다고하고
결국 허가를 받고 집에 다녀왔어요.
그리고 집엔 정말 아무일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외려 꿈은 반대라며 싱글벙글 오랜만에 보는 딸얼글에 기분이 좋으신듯했고
어머니도 나온김에 맛있는 것 좀 먹고가라며 귀한 요리들을 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하룻밤을 지내고 머쓱한 마음으로 학원으로 귀환합니다.
이게 봄의 일이었는데 5~6월 사이에 아버지가 전과 달리 상태가 안좋아지셨대서
저는 학원을 끊고 집과 독서실을 왕복하며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머리도 빠지지않고 건강해보이셨지만
아버지는 외출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고 집안에서 기침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걸 보면 제가 더 심란해져서 아버지한테 힘이 되드리긴 커녕
몇마디 나누다가 눈물이 쏟아져서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공부도 전혀 손에 잡히질 않아 밖으로 나돌기가 일쑤였어요.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고 그닥 차도가 보이지 않던 아버지 병셍
한가닥 희망이 생겼습니다. 무슨 신약을 테스트겸해서 사용하게 됐는데
그게 꽤 잘 들었던지 아버지는 많이 좋아보이셨어요.
아버지 생신이 7월 중순이었는데 그때 희망과 의지로 극복해낼 수 있다고
나도 다시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서 기쁘게 해드릴테니
아버지도 힘내주시라는 편지를 쓰고 전 8월에 다시 기숙학원에 돌아갑니다.
학원에선 처음엔 받아주지 않으려했어요.
첫번째론 많이 쉰만큼 진도를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단 이유였고
또 제가 집에 가겠다며 난동을 부렸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 곁에 있어드려야하지 않나는 마음도 있었겠죠.
한명이 큰일이 생기면 그 학생뿐 아니라 한 학급분위기가 다 영향을 받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저대로 필사적이었기때문에 어쨌든 다시 기숙학원에 들어갑니다.
다음 집에 방문하던때에도 아버지는 괜찮아 보이셨고
9월에 접어들어 곧 내 생일이고 집에 가는날도 다가온
그 때 뵙자고 전화를 할 때도 좋아보이셨어요.
그리고 9월 모의평가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다시 입원한 뒤 처음 보는 대형 모의고사라 집중을하고 시험을 쳤고
시험이 끝난후 바로 가채점을 하는데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어요.
예전 점수보다 떨어질 것을 우려했지만 전부 그대로거나 소폭 상향했거든요.
그런데 시험을 보고 저녁식사를 하고 방송이 나와 절 찾더라구요.
무슨일일까 이름이라도 잘못 썼나? 하고 교무실에 갔더니
어수선한 분위기에 빨리 집에 가보라는 말 뿐...
그리고 제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며칠전부터 병세가 급히 악화돼서 중환자실에 가셨다는데
전화해서 알아보니 제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대서
어머니는 제게 알리지도 않고
저는 수능시험 당일도 아닌 모의고사따위때문에
아버지 임종도 못지켜드리게 됐지요.
완벽히 예지몽을 꿨던거에요.
그게 여전히 트라우마가 되어 남아있습니다.
사실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선 이리될 걸 다 알고있었는데
내가 그걸 외면하고 아버지 보기가 힘들어서 학원에 가버린 게 아닌지
오년도 넘은 일인데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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