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국왕을 응시하며 되물었다.
"마왕과 결혼하라고요? 제가요? 왜요?"
집무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일일이 검토하던 국왕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게 마왕이 제시한 종전의 조건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저를 마왕에게 팔아넘긴다는 말씀이죠?"
서류를 넘기던 국앙의 손이 일순간 멈칫한다.
국왕은 의자에 앉은 채로 슬쩍 용사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팔려가는 게 아니라 결혼이네. 자네의 희생... 아니, 결혼으로 수많은 이들이 잃었던 평화를 되찾을 걸세."
"알겠습니다."
"이해했나?"
국왕의 물음에 용사가 허리춤에 든 성검을 꽈악 움키며 나지막이 대답한다.
"결혼으로 위장해 은밀하게 마왕의 목을 베어오라는 뜻, 이해했습니다. 한치의 실수도 없이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
집무실 안에 근엄한 정적이 감돈다.
국왕은 이런 대화가 익숙한 것처럼 한치의 일그러짐 없는 표정으로 어린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듯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제 성검을 쓸 필요는 없네. 당연히 마왕의 목을 벨 필요도 없고. 자네의 임무는 그저 마왕의 배필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으로 모두가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네. 이해하겠나?"
국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드래곤에게 삼켜져 간신히 배를 가르고 탈출 했을 때, 고블린 닮은 서큐버스에게 홀려 동정을 빼앗길 뻔 했을 때보다 더 격렬한 감정이 용사의 심장을 옥죄었다.
"차라리 마왕과 동귀어진 하겠습니다."
성검을 쥔 용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본 국왕이 붉게 충혈된 눈을 잠시 감으며 조금 부드러운 어투로 말한다.
"그대는 지난 10년간 용사로서 수많은 마족을 토벌하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수호했지. 자네가 처음 성검을 쥐었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나?"
"..."
"성검을 쥔 순간부터 그 어떤 희생과 고통도 감내하며 오롯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성검을 휘두르겠노라. 자네가 한 말이네."
"그러니 성검으로 마왕의 목을 베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찾겠습니다."
스윽-
"용사 엘리안."
자리에서 일어난 국왕이 천천히 걸음하며 용사를 마주보고 섰다.
왕과 이렇게 가깝게 마주본 게 언제였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안하다며 격려해줄까? 아니면 자랑스럽다며 안아 줄까?
"혹시 사고라도 치면 안되니 성검은 회수하겠네."
북받쳤던 감정을 잔인하게 짓밟는 한마디.
참다 못한 용사가 성난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어내듯이 소리친다.
"아버지!! 진짜 이러실 거예요?!!"
그의 고성에도 국왕은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회수한 성검을 용사의 손길이 닿지 않는 책상 아래에 두며 퉁명하게 대답했다.
"나의 만류에도 끝내 용사가 되겠다고 고집부린 것은 너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아들아,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그렇게 용사는 화려한 장식이 수놓인 마차를 타고 당당히 마왕성채 정문으로 입성했다.
용사가 볼모로 잡혀왔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는지 흉흉하게 생긴 마족들이 용사를 쳐다보며 비웃듯이 수군거렸다.
'저 ㅆㅂ 마족 새끼들이...'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향했지만, 묵직한 성검대신 거치적거리는 옷자락만 잡힐 뿐이었다.
철창 속에 갇혀 시선 유린을 당하는 엘프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는 순간.
당장 주먹으로 저 혐오스러운 마족들의 이빨을 다 털어버리고 싶은 감정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마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마왕성 내부는 의외로 밝고 화려한 분위기였다.
오히려 바닥과 벽의 고풍스러움은 왕성보다 낫기도 했다.
"확 다 부숴버릴까?"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자, 앞에서 누군가 답하듯이 불렀다.
"용사 엘리안. 마왕님께서 기다리신다."
마왕 다음으로 마왕성 최고 전력인 5군단장.
흔히 오악이라 불리는 5명 중 4명이 열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용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 아직도 4명이냐? 이젠 오악이 아니라 사악으로 불러야 되겠네."
"이..."
"그만. 마왕께서 기다리신다."
오악 중 하나는 이미 용사에게 토벌되었다.
단순한 도발에 발끈한 4군단장 하우레스가 튀어나가기 직전, 1군단장 아르네가 그를 제지하며 냉소적으로 용사를 노려본다.
"나 이제 마왕 부군인데 다들 태도가 너무 경박하네."
아르네는 대꾸없이 몸을 휙 돌려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용사는 피식 웃는 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녀의 뒤를 잇따랐고, 곧 마왕의 집무실로 보이는 문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라."
문 앞까지 용사를 안내한 아르네는 더 꼴보기도 싫다는 듯 걸음을 돌려 유유히 사라졌다.
'하.. 내가 오악의 안내를 받으며 제 발로 마왕의 집무실로 들어가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 단검이라도 하나 챙겨올 걸 그랬나?'
조심스럽게 생각하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가 집무실?
집무실인데 왜 책싱이나 서류가 없고 큰 침대만 덩그러니 있는 걸까.
원래 마족은... 마왕은 침대 위에서 업무를 보는 건가?
"왔어?"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근육질의 곱상한 청년이 침대에 앉은 채로 용사를 바라보며 웃었다.
"피곤하지? 좀 잘래?"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태도에 용사는 오감을 집중하며 혹시 모를 기습이나 함정에 대비했다.
"경계하지 않아도 돼. 널 해칠 생각은 고블린 손톱만큼도 없으니까."
"넌 누구지? 마왕은?"
"내가 마왕인데?"
마왕이라고? 저 남자가? 그럴리가 없다.
용사는 주먹에 푸른 오러를 은은하게 휘감으며 대꾸했다.
"내가 아는 마왕은 암컷이다. 너는 누구지?"
"사람에게 암컷이라니 너무하네."
까딱-
마왕이 작게 손짓하자 용사의 몸이 공중에 낮게 떠오르며 순식간에 마왕의 코앞까지 끌어당겨졌다.
"윽...!"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귀엽네."
소름끼치도록 달큰한 향기.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마왕의 달뜬 눈을 마주한 용사는 왠지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오싹한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본문
[잡담] "마왕과 결혼하라고요? 제가요? 왜요?" [6]
2026.03.22 (12: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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