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세 유교는 신분제를 공고하게 하기 위한 제도 아님?
중세의 일반적인 정의대로라면
보통 중세는 5세기에서 15세기를 의미하고
중국사에서 중세를 말하면
보통 한나라부터 원나라까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의 유교에는 신분제 공고화 그런 거 없었어요.
애초에, 유학을 신분제로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쓰려고 한 게
성리학을 만든 주희(1130~1200)
그리고 양명학을 만든
왕수인(1472~1529)
이 둘인데
이 둘의 이론이 사회 주류가 되는건 15세기에 와서고
이 둘의 이론이 한국 유학 철학의 중심이 되는건
1542년 소수서원의 설립 이후부터임
그 이전에도 고려 말부터 성리학은 영향을 줬지만.
저 둘은 왜 유학을 신분제 공고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는가?라면
"저 둘의 시대는 남송, 명이라는 안정된 시대였거든요"
더 이상 누군가가 칭제하며 반란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서 공고하게 신분제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 유교는 뭐냐면요
훈고학입니다.
훈고학의 제일 큰 특징은
"유교 경전"에 씌여있는 것 외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집주(주석)으로 치고
경전에 써 있는 걸 기반으로 판단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기론이나 심즉리, 격물치지 같은 개념은 이 시대에 없어요.
훈고학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
"누구든 왕이 되든 그 사람이 왕답게 하면 왕이다"라고 주장한 학파입니다.
그래서 중세 유교 이야기할 때 주로 하는 게 원문 인용일 수밖에 없어요.
맹자가 위혜왕의 초청을 받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과인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마음을 다 쏟아 하내에 흉작이 들면 백성들을 하동으로 보내고 곡식을 하내로 보내며 하동이 흉해도 그러합니다. 이웃나라들의 정치를 보면 과인처럼 마음을 쓰는 이가 없는데도 이웃나라의 백성이 줄지 않고 우리나라의 백성이 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맹자가 답하였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격렬한 전투에서 크게 패한 두 병사가 도망을 갔습니다. 한 병사는 백 보를 도망쳤고, 또 한 병사는 오십 보를 도망갔습니다. 오십 보를 도망간 병사가 백 보를 도망간 병사를 향해 비웃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위혜왕이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백보가 아닐 뿐 결국 도망간 것 아닙니까?"
맹자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것을 아신다면 왕이시여,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농사의 때를 놓치게 하지 아니하면 곡식을 이루 다 먹을 수 없으며 눈이 촘촘한 그물을 못에 넣지 않게 한다면 물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을 수 없으며 크고 작은 도끼를 든 사람들을 때를 맞추어서 산림에 들어가게 하면 재목을 이루다 쓸 수 없을 것이니 곡식과 더불어 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을 수 없고 재목을 이루 다 쓸 수 없다면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사지냄에 유감이 없도록 할 것이니 살아있는 이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상사함에 근심이 없도록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다섯 이랑 크기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를 길러 새끼칠 때를 잃지 않는다면 칠십 노인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백 이랑의 땅을 농사 짓는데 농사철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여러 가구의 집들이 굶주림이 없을 수 있으며, 향교의 교육을 엄격히 실시하여 효도와 공경을 거듭 가르친다면 반백의 노인이 도로에서 짐을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을 것이니 칠십 된 자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못하는 자 없습니다. 개돼지가 사람의 음식을 먹되 단속할 줄을 모르며 도로 위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나라 창고를 열 줄을 모르고 사람이 죽거든 곧 말하기를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흉년이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니 이것은 사람을 찔러 죽이고 말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병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왕이 흉년 탓을 하지 않으면 이 천하의 백성들이 (위나라에) 이를 것입니다.
(중략)
"왕은 ‘어떻게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할까’ 말하며, 대부는 ‘어떻게 나의 가문을 이롭게 할까’ 물으며, 선비와 서인들은 ‘어떻게 나를 이롭게 할까’ (라 할 것이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만 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 승의 가문이며, 천 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 승의 가문 사람입니다."
"만에서 천을 취하고, 천에서 백을 취하는 것이 많지 않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의로움을 뒤로 하고 이익을 앞으로 하면, 빼앗지 않으면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자가 없으며, 의로우면서 그 주군을 뒤로 하는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또한 인과 의만을 말씀하실 뿐이온대,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맹자》, <양혜왕> 상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탕(湯)은 걸(桀)을 몰아내고 천자가 되었고, 무왕(武王)은 주(紂)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다" 하던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한 이는 (왕으로써의 권위를 이미 상실한) 필부일 뿐이니, 저는 무왕이 "주라는 필부를 주(誅)하였다"는 말을 들었지, "임금을 시(弑)하였다"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중략)
- 《맹자》, <양혜왕> 하
중세 유교에서 왕의 정당성 이야기할 때 늘 인용되는 양혜왕 조.
여기가 그 유명한 "역성혁명" 조임.
왕이 왕다워야 왕이지 아니면 범부와 다를 바 없다.
즉 신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문구에요.
그래서 이 시대 유학자가
왕후 - 장상의 피가 따로있냐는 진승/오광의 난에
"네가 하는 말은 옳지만 너는 왕답지 못했으니 실패한 거다"라고 평가한 거죠.
근데 대부분은
양란 끝나고 경신대기근까지 지난 뒤의 성리학을 들고 와서
중세 유교는~ 신분제 고착화~ 이러고 있읍니다....
머리가 안 아프겠습니까?
원래 옛날엔 조선 신분제를
근데 최근은 좀 많이 달라진 게 정설입니다
중인계층은 자신들을 오히려 전문직을 가진 자부심있는 계층이라고 보고
오히려 양반으로 올라가는 걸 가문의 수치라고 한 문서도 발견되었구요(....)
양반은 법적으로 양반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자의 3대손"까지고,
사회적으로는 주변 사람들과 양반 사회가 인정하는 집안이었어요.
중인 계급에서 양반으로 생원시/진사시 붙어서 올라가서 군수까지 한 집안도 있습니다.
나중에 족보를 갈아끼워서 원래부터 양반가인 척 나왔지만 옛 족보가 발견되고 초기 일기가 나오면서 확인됐어요.
사실 이건 서양 봉건제에 억지로 맞추면서 일어난 문제라 따로 분석할 필요는 있지만서도요.
이게 조선시대가 철저하게 명예만으로 돌아가는 구조라서 그래요
명예를 잃는 게 죽는 거보다 무섭다고 봐서 삼족이 멸족해도 자기가 옳다고 한 걸 우직하게 밀고나가다 죽는 게 그래서 나오는 거죠
내가 죽고 가족이 노비가 돼도 세상은 우리가 진짜 양반이란 걸 알아줄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 양반들은 여유금액을 무조건 손님들, 그리고 근처 양인들에게 뿌리는 게 일종의 규칙이었구요.
그래서 세종이 양민 위도 아래도 없다(왕족은 법령에서 언급하지 않음) 하고
벌로 인한 관노비 이외를 없애려다가 사노비를 남기기만 한 거임.
오히려 중세 유교가 아직 크던 15-17세기 초반까지는
양인이 세금 덜 내려고 노비가 되는 촌극까지 벌어짐.
다물사리는 윤필이라는 이지도의 사노비와 연애결혼했는데, 그렇게 낳은 6명의 자녀는 일단 원칙적으로는 이지도 소유였음
일단 이지도는 6명치의 세금을 전부 부여하기는 그러니 둘셋 정도만 자기의 솔거노비로 등록하고 말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다물사리가 소송을 제기함
사실 내 어머니는 성균관 관노비였다 그러므로 나는 관노비이고, 우리 자식들은 관노비로 등록되어야 한다고.
자기가 노비라고 소송을 제기한 이 케이스는, 조선시대의 특이한 노비제도 떄문에 일어난 일임
사노비는 일단 노비지만 조선은 법적으로 노비와 양인의 구분을 애매하게 뒀어
법적으로 양인과 거의 같고, 대신 자기 세금을 양반에게 위탁하고, 자기 수입 일부를 양반에게 바치는 대신 일시적으로 돈을 받을 수 있는 거래의 경우가 많았음.
이런 걸 자매노비(스스로 자, 팔 매)라고 함.
참고로 이런 노비들이 얼마나 법적 지위가 낮지 않았냐의 근거로
이숙번의 노비 성폭행 미수 사건이 있음
이숙번은 태종의 공신 중 하나였는데,
이숙번이 자기 사노비를 덮치려다가 사노비가 휘두른 칼에 맞고 상처를 입자
이숙번이 노비를 고소한 사건임
근데 이숙번이 패소함. 노비는 무죄가 되었고, 오히려 이숙번과의 채무관계를 해소시켜줌.
왜냐? 이숙번의 사노비는 법적으로 양인 취급받았거든.
또한 양반이 관노비를 성추행했다가 실형을 받은 사례도 있음.
그래도 죽으니 관을 짜서 묘를 만들어주고 제사를 지내줌.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졌냐면, 조선의 양반-노비 관계는 군신관계로 해석했었기 때문이야
내가 군주고 노비는 나의 신하다. 즉 일본의 가신과 더 비슷한 법적 개념을 가지고 있던 거지.
그래서 16세기에는 노비 인구가 전체의 7할을 넘기 시작하는데,
지방 양반들의 노비로 인한 실질적 사군대 조성 및 세력 강화와
세수 감소를 걱정한 나머지
사노비와 관노비의 세제 혜택을 폐기해버림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냐?
노비가 양반 재산을 들고 튀어서 양반이 경고장을 보내고 소송한 사례가 일어남(....)
17세기에는 진짜 이렇게 노비제도가 기묘하게 되다 못해
우리 노비가 내 땅과 세금을 들고 튀었으니 관은 그놈에게 가서 받아주소 하는 일까지 일어남(....)
사실 이게 진짜 "추노"임
추노는 그러니까, "저 노비가 내 돈을 떼먹었으니 저 놈에게 내 세금을 내게 하소"라고 관에 하는 요청이었고
조선의 관청은 그걸 들어줘서(.....) 거주이전지를 찾아가서 세금 관련 통보를 하고 끝났음.
잡아서 데리고 온다? 그런 거는 매우 예외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서 노비로 떨어진 본인이거나
반역죄급을 저질렀는데 일단 멸족은 면한 그런 경우에나 있었다고 보면 됨.
그러다 보니 이 시대에 오면
노비가 스스로 양인이 됨
연구결과에서는( > Gwyn Campbell의 Structure of Slavery in Indian Ocean Africa and Asia(2004))
단성은 1717년엔 27.6%, 1786년에는 8.8%이고
울산은 1729년엔 13.9%, 1765년엔 2.0%
. 대구는 1732년엔 26.6%, 1789년에는 5.0%
언양의 경우엔 1711년엔 8.2%, 1798년엔 1.4%로 추정함
근데 이게 양란, 대기근으로 완전히 박살남.
노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머슴이 생김.
신분적으론 양인인데 경제적으로 종속당하는 노예와 같이.
양반의 명예 제도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일부 사대부가 권력의 독점을 노림.
암행어사 박문수가 괜히 실적이 높았던 게 아님.
유교의 폐단, 유교의 고착화를 지적하고 싶으면 이 시대를 꺼내오면 됩니다
진짜로 이 시대는 기존 성리학이 썩었다까지 나오며 고증학이라는 새로운 학파가 나올 정도였고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핫한 주제거든요.
요약
"중세" 유교는 성경원본주의자 같은 원시유교에의 회귀를 노리는 학파였음.
우리가 아는 "신분제 고착", "왕-양반-중인-양민-천민"은 근대 유교, 그것도 후기(18세기 중반 이후)에 와서 변질된 형태임
조선 전기 유교는 정말 이게 이렇게 이론적으로 굴러간다고? 할 정도의 완벽한 유교적 이상 운영을 하는 집단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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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pc고 사실 모바일에서도 별로 편하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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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사한 교수님은 송대를 중세로 봤음. 결국 당-오대십국까지는 중세가 맞는데 남송-원 때가 중세가 맞느냐?가 핫한 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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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 점심시간 끝물에 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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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그건 귀찮네 다음에 쓸 땐 왼쪽정렬로 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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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때부터 트렌드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리학이 커졌을 때 이후로 역성혁명이 일어난 건 단 두 번, 명나라의 성립(사실 이땐 그렇게 강하지도 않음)과 청나라의 명나라 지배 때 정도라 그냥 가장 최근의 명/청 기의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그런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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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에서 보기는 그게 더 편하지 않나? | 24.05.21 12:5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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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세가사원
난 pc고 사실 모바일에서도 별로 편하진 않아요. | 24.05.21 12:5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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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앞으로는 왼쪽정렬이 편한가? 늘 가운데정렬로 해옴 | 24.05.21 12:5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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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정렬에 좌우 들여쓰기를 해서 모바일 화면 간격에 맞추는 게 베스트인데 이게 어지간히 귀찮은 작업이라 권하지는 않고 이미지 크기를 줄여서 모바일 화면 간격에 맞추는 게 최선일 듯? | 24.05.21 13: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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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그건 귀찮네 다음에 쓸 땐 왼쪽정렬로 써봄! | 24.05.21 13: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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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 점심시간 끝물에 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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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고학에서 역성혁명 이야기할 때는 늘 양혜왕 조가 나왔지 더 정확히는 훈고학에서 역성혁명을 언급하는 건 언제나 역성혁명이 일어난 뒤의 포장을 위한 것이었지만 말이야... | 24.05.21 13:1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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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때부터 트렌드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리학이 커졌을 때 이후로 역성혁명이 일어난 건 단 두 번, 명나라의 성립(사실 이땐 그렇게 강하지도 않음)과 청나라의 명나라 지배 때 정도라 그냥 가장 최근의 명/청 기의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그런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음 | 24.05.21 13:1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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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사한 교수님은 송대를 중세로 봤음. 결국 당-오대십국까지는 중세가 맞는데 남송-원 때가 중세가 맞느냐?가 핫한 거 같음 | 24.05.21 13: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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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송을 중세로 보는 경우는 송과 거래한 유럽이 중세였기 때문이거든 중국사를 서양사적인 면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면 원까지를 중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함 실제로 원나라는 중세 프랑크 왕국과 구조가 상당히 비슷하게 시작했던 것도 있고 | 24.05.21 13: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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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배우고 있는 입장이라 조심스럽기 하지만 대체로 당송변혁기 기준으로 송대 부턴 근세사로 분류했던 거 같네 시대구분론도 서양사 기준에 맞춰서 분열, 종교, 다소 폐쇄적 농업경제에 중점해서 당대까지 중세로 구분했다고 들은 거 같네 그리고 원나라는 엄밀히 순수 중국사라기 보단 몽골사이고 국가 기조도 유목제국의 성향도 강했으니 송-명 사이에서 순수 중국사로 보긴 애매한 부분도 잇어서 원-프랑크 유사점은 좀 갸웃하게 하는 거 같음 그래도 다른 관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네 감사합니다 | 24.05.21 13:4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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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한국사랑 서양경제사 쪽을 배웠지 중국사는 전부 이쪽에서 곁들이로 배워서 님이 배운 내용이 좀 더 정설일 거임 서양경제사에서는 명백하게 원은 봉건제다! 그래서 중세다! 하는데 그럼 니들 러시아는요?가 되니까. | 24.05.21 14:0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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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북조시대에 이미 맹자의 이론은 충분히 언급되고 있음. 단지 텍스트가 정립되지 않고 십삼경에 못 꼈을 뿐이지 여씨춘추보다도 더 높게 치는 일부 인용문도 있고. 사서장주집주의 주희집주가 가지는 정도의 구속력을 맹자가 가지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설도 있었음. 라기보다 내가 이걸로 배웠음. 나는 그렇게까지 이게 완벽하게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 24.05.21 13:3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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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초기 성리학과 훈고학을 어디까지 구분할 것인가?에 대해서 조선시대의 자료를 바탕으로 배워서 생각한 게 이 쪽이긴 함. 사실 조선시대 자료는 상당히 뒤섞여 있지 . 이미 고려 말기에 성리학이 충분히 세를 얻은 뒤니까. | 24.05.21 13:4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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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맹자가 인용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야 텍스트가 정립될 정도의 주목은 받았으니- 구경에 비해서 주목도가 높았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한대 후기의 금고문논쟁 같은 경우도 경전 전방위에 걸치긴 했지만 주로 주목받는 건 춘추삼전이었고. 그리고 경전 텍스트 이야기를 떠나도 훈고학이 원시유교로의 회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좀 지나친 비약 같은데. 경과 전의 내용을 재구성하는 것부터가 당시 시대 상황에 맞춘 경의 재해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 24.05.21 13:4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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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고학에 대해서 원시유학의 회귀인가 아니면 당대에 맞춘 재해석인가는 교수님들끼리 멱살잡고 싸울 주제니까 ㅋㅋㅋㅋㅋ 조선 유학사를 바탕으로 이야기하면 훈고학이 원시유학의 회귀에 가깝다고 생각함. 과거 성립 초기에 경전을 인용할 때에는 말 그대로의 의미로 인용하는 게 더 중요했기도 했고. 그런데 송 유학을 기준으로왜 성리학이 탄생했냐로 보면 송대 훈고학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기 때문에 성리학이 오히려 원점회귀가 아니냐는 주장도 있고..... 훈고학 초기에는 난 원시유학 회귀가 목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함. 당시 훈고학이 특히 춘추를 가지로 뜯으면서 한 게 문헌 별 교차검증이기도 했잖아. 대학의 친민-신민 관련 양명학과 성리학의 충돌 및 등장을 보면 난 성리학이 오히려 당대의 시기에 맞춰 텍스트를 수정하려 한 거라고 생각함. | 24.05.21 13:4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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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사 쪽에서는 그렇게 보나 보구만. 나는 신유학이 재해석이 맞긴 하지만 훈고학이라고 회귀가 목적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거든. 아무래도 진한제국 이전과 이후에는 황제전제지배라는 선이 있으니까.... 중국고중세사 쪽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는 편이었어. | 24.05.21 13:5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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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양반사 하는 과정에서 조선 초기를 다룰 때 유학사를 다루는데 이 때는 훈고학 = 초기회귀로 보는 게 중설이긴 한 것 같음. 황제전제지배 이게 굉장히 크긴 한데 조선이란 나라에서는 이걸 애초부터 배제해버리니 동일하다고 보는 거 같아 | 24.05.21 14:0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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