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 7권, 선조 6년 7월 1일 기묘 3번째기사
김성일(金誠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어느날 경연에서 묻기를, "나를 전대의 제왕과 비교해 볼 때 어느 군주와 비슷한가?" 하니,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십니다." 였는데, 성일은 아뢰기를, "요순(堯舜)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순(堯舜)과 걸주(桀紂)가 그렇게도 비슷한가?" 하니, 성일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천품이 고명하시어
요순(堯舜)이 되시기에 어렵지 않습니다마는 스스로를 위대하게 여겨 간하는 말을 거부하시는 병통이 있으니,
이는 걸주(桀紂)가 멸망한 이유가 아닙니까."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堯舜)이라는 대답은 임금을 격려하는 말이고 걸주(桀紂)라는 말은 경계시키는 말입니다."하니, 상이 숙연한 태도를 지었다.
너 요순 기질 있는데 걸주가 될 수도 있다고 ㅅㄱ 참고로 실록에는 딱히 화 안내는데
김시양의 자해필담과 유성룡의 서애집의 기록에 의하면 순간 선조가 분노해서 신하들이 분노했다가 유성룡의 저 말 덕분에 화가 풀렸다고
광해군일기[중초본] 13권, 광해 1년 2월 5일 정사 3번째기사 1609년
백유양의 자식은 여립의 조카 사위로 일가(一家)의 인연을 맺어 조정의 시비와 임금의 거조를 통지하지 않음이 없어 〈오가는〉 간찰(簡札)이 〈수백 리 밖에〉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이 총애를 잃었고 주상(主上)의 혼미함이 날로 심해진다."는 등의 말로 편지를 써서 여립에게 주었으니, 그가 적과 함께 일을 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의 부도(不道)함이 심하다.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 5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1690년
백유양은 역적 정여립(鄭汝立)에게 가까이 사귀었다. 정여립에게 보낸 글에 부도(不道)한 말이 많이 있었는데, 선조(宣祖)가 그 가운데에서도 심한 것을 진한 먹물로 문질러 없애고 국청(鞫廳)에 내렸으나, ‘이 사람은 시기하고 혼퍅하여 임금의 도량이 조금도 없다.[此人豺忌狠愎少無人君之量]’는 열 두 자는 먹이 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전하였고, 드디어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다. 선조가 역률(逆律)로 논단(論斷)하라고 명하였을 때에 정철(鄭澈)이 간쟁(諫爭)하기를, ‘경악(經幄) 사이에서 한 정여립이 나온 것도 이미 불행인데 어찌 다시 두 정여립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므로 임금이 함부로 군다고 꾸짖었는데,
백유양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아들 백수민이 정여립의 조카 사위였는데 기축옥사 때 백유양이 정여립에게 보낸 서찰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문제의 서찰에서 백유양은 선조보고 공빈김씨 소생 인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은 무시하면서 인빈 김씨 소생 자식들만 귀여워 하고
날이 갈 수록 정신이 안 좋아지고 있다고 디스를 하지 않나
심지어는 그냥 이 사람이라고 호칭하면서 시기심 많고 모질며 고집이 강하고 임금으로서의 도량이 없다고 디스하였다
참고로 백유양은 정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곤장에 맞아 죽었고 아들들인 백진민 백흥민 백수민 역시 곤장에 맞아 죽었다.
근데 후자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이순신에게 한 짓이랑 원흉을 선무1등 공신에 봉한 것을 생각하면
백유양이 선조의 인물됨을 제대로 꿰뚫어 본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