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년, 홍건적이 20만 대군세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죠.(놋다리밟기가 이 때 생겼습니다) 그리고 4명의 장군이 각기 군세를 이끌고 고려 수도인 개경을 탈환합니다. 이 4명은 총병관 정세운에 안우, 이방실, 김득배의 3원수였습니다. 이들의 명성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정세운은 간신 김용과 맞먹을 정도로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고, 도원수 안우, 원수 이방실, 김득배는 고려의 3원수라 불리며 칭송받았습니다. 최영과 이성계는 그 당시에는 신흥 무장세력에 불과했죠.
이들은 개경을 탈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개경을 탈환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네 장군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이유는 전임 총병관으로서 홍건적을 막는 데 실패한 간신 김용이 네 장군에게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까봐 왕명을 위조해 안우, 이방실, 김득배 장군에게 보냅니다. 왕이 정세운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이죠. 결국 정세운 총병관은 세 원수에게 살해됩니다. 그리고 하극상을 일으킨 세 원수도 살해됩니다. 선임자였던 도원수 안우는 죽을 때 죽더라도 공민왕에게 변명이라도 해보고자(김용의 흉계를 밝히기 위해) 공민왕을 찾아갔지만 공민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살해됩니다. 그리고 이방실과 김득배 원수 또한 살해됩니다. 충분히 일군을 지휘할 수 있는 원수들이 정치적 음모에 희생당한 거죠. 이 사건은 당시 신흥 무관세력에 불과했던 최영과 이성계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역성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왕이 원수들을 믿지 못하고 변명도 듣지 않고 죽이는데 장수가 왕과 고려라는 국가에 충성할 이유가 있냐는 것이죠. 김득배의 문생이었던 정몽주 또한 이 사건을 크게 개탄했습니다.
고려라는 국가 자체가 귀족연합체 성격의 봉건국가였기에 중앙군의 취약은 멸망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고 변란 때는 장군 개개인이 알아서 병사를 징집하고 보급을 해야 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세라는 시기에 일군을 이끌 수 있는 장군들의 존재는 중요했기에 4원수의 허망한 죽음은 고려 멸망의 큰 원인이 됐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4명의 원수가 살아있었다면 공민왕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수도 있고 최영과 이성계 또한 성장속도가 훨씬 느려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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