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님이라고 하면 껌뻑 죽는다고?
엘레나에게 어찌 그렇게나 무비판적이고 무조건적일 수 있냐고?
나야말로 묻겠다.
동족들에게 배신자라는 오명까지 들어가며, 자신의 본뜻을 숨긴 채 탈출을 계획했고
이윽고 이를 성공하여 모두에게 자유를 선사한 분께 충성하지 않음은 대체 무슨 의도인가?
수천, 수만의 엘프들이 그 키 크고 귀 짧은 놈들에게 붙잡혀, 일주일간 40시간의 일을 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는데,
우리의 작은 손에서 납땜의 그 역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게 만든 족속들로부터 자유를 선사해준 것이 누구인가?
엘레나 님. 엘레나 님이다.
나는 기억한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쉽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원정군이, 고작 하나의 행성만 차지했을 뿐인 구식 실탄 화기만으로 우리네 함선을 쳐부수고, 창문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우리네 기계들을 무력화시켰던 지난날을 말이다.
나는 두려워한다.
오십 개의 별의 축복을 받은, 붉고 푸른 줄무늬를 두른 깃발을 짊어진 이들이 우릴 비웃으며 붙잡던 그날을.
교주라는 작자가 맨 처음 쳐들어왔을 때, 엘레나님께서 미리 만들어둔 메뉴얼이 아니었다면, 우린 그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PTSD에 휩싸였을 것이다.
뭐? 교주는 인간 치고는 괜찮아?
엘프를 적대하지 않는다고?
헛소리. 헛소리다.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그 낡아빠진 구식 병기만으로도 우릴 짓밟은 것으로 모자라, 이젠 우리네 기술마저 습득한 이들인데!
우리가 얼마나 우스울까? 바보처럼, 사람 좋은 것처럼 실실 웃으며 우리와 함께 밝게 웃는 그 얼굴 뒤에, 어떤 악의적이고 지독한 비웃음을 숨기고 있을까?
패배자에게 건네는 친절을 통해 자신이 선한 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위선자건, 패배자들을 비웃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온 비열한 악당이건, 교주라는 작자를 이곳에 들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보아라.
교주라는 작자에 대한 적대감이라는 찾아볼 수도 없이, 모두가 이제는 그저 키 크고 잘생긴, 손가락 다섯 개인 귀 짧은 엘프인 양 취급하지 않는가!
미쳤다. 다들 미쳐버린 것이다.
오십 개의 별의 축복을 받은 국가에서 살던 놈들의 말에 의하면, 이게 그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범죄자 개인의 과거사에 공감하여, 피해자가 범죄자의 편을 든다는 바로 그 증상!
아니면, 그의 친절을 즐기고,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통해서 지난 과거를 씻어내려는 것인지도 모르지.
헛짓거리다.
인간으로부터 받은 피해와 고통은 영원히 씻어낼 수 없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납땜의 악취처럼 말이다.
우린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오십 개의 별의 축복을 받는 이들이 우리에게 패배를 경험시켰던 그날의 고통을.
그들을 위해 비참하게 노동을 해야만 했던 모욕감을.
엘프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시시껄렁한 태도를 보인다니.
다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엘레나님이라면, 이 한심한 작태를 개선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모두를 구원해주신 엘프들의 구세주니까.
그분은 엘프들 모두를 위해 배신자의 오명마저 뒤집어쓰려고 하신 분이니까.
지잉-.
"엘레나님. 커피 가져왔습니다."
"아아-. 왔구나? 커피는 주고, 거기 근처에 있는 설계도랑 컨셉아트가 그려진 청사진 좀 가져와봐."
"아아. 이것 말씀이시군요? 금방 가져다드리겠…."
쨍그랑!! 철퍽!!
"우왓?! 아멜리아! 지금 뭐하는 거얏!! 여기 젖으면 안 되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기나 하는 거야?!"
"에, 엘레나…님? 이, 이게 대체…뭡니까?"
나는 청사진 위에 놓인 컨셉아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컨셉아트에는, 엘레나님의 아름답고 고결한 모습 대신, 귀만 길쭉할 뿐인 인간 모습의 엘레나님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엘레나님은 그게 뭐가 놀랄만한 일이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아아~ 그거? 이번에 내가 새로 만들어낸 클론 팩토리 있지? 그곳이 정상 작동하면, 그곳에서 인체를 만들던 노하우를 통해 인간의 몸을 만들어볼까 해!"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인간의 몸을 만드신다니요!"
"말 그대로야. 내가 그 몸뚱이를 사용할 생각이거든."
인간의 몸뚱이를 사용한다니. 제정신이란 말인가?
이 다섯 개의 손가락을 어떻게 다루겠다고?
그 멀대처럼 커다란 키로, 엘프들의 건물 안을 어떻게 돌아다니려고?
설마, 애초부터 인간이 돌아다니기 불편하지 않은 크기로 건물을 지은 것부터가?
"어쩔 수가 없었어~. 내 목표는 인간을 뛰어넘는 거잖아? 그걸 위해, 우린 인간 놈들, 특히 그 오십 개 별의 가호를 받는 놈들의 모든 것을 배우고자 했고 말이야."
"그런데, 거기에 좀 부족한 게 있더라고. 인간의 시야에서, 인간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한,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지 뭐야."
"그래서, 이번에 클론 팩토리를 통해 인체를 만드는 기술을 좀 쌓으려고 해! 제대로 성공만 한다면, 그 그럴싸한 유사 인간 몸뚱이를 내 마음대로 다루는 날도 머지 않겠지!"
그리곤, 엘레나님은 매일 보여주시던 그 시리도록 아름다운 비열한 미소를 보여주셨다.
언제나 자랑스럽게만 느껴지던,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실망감만이 느껴지는 미소를 말이다.
"잘 알았으면 군말 말고 커피나 새로 가져와. 레시피는 알지? 내가 늘 먹던 대로!"
"알겠…습니다."
…엘레나 님이…인간의 몸이 된다….
엘레나 님이….
나는 잠시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한참이나 고민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원래라면 효율적이지 않다며 스스로를 재촉했을 정도로 긴 시간을 멈췄던 나는, 결국 결심을 굳혔다.
나는 커피를 가지러가기 위해 옮기던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늘 사용하던 무기를 가지고서.
엘레나님. 언제나 옳은 결정만을 내리셨던 당신이, 오늘만은 틀리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한 엘레나 님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빌어먹을 클론 팩토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이유도 없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엘레나 님.
커피는 늦지 않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전 엘레나 님을 위한 최고의 비서.
아멜리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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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론 팩토리가 고장나서 이상한 클론이 만들어진다는 말.
그리고 그 클론 팩토리의 서장을 장식한 아멜리아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떠올라서 허겁지겁 쪄왔음.
물론 이 이야기는 아무런 공신력도 없는 100% 뇌피셜이니까, 설정상의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님 말이 맞음.
오홍홍 신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