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 원더가 트레이너에게 스카우트된지 약 반년쯤 지났을 때, 조금 더 정확히는 아사히베 스테이크스의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일주일 후.
“트레이너 님, 좋아해요. 저와… 연인이 되어주실래요?”
그래스 원더는 그렇게 말했다. 트레이너와 근사한 저녁을 먹고 귀가하던 도중, 달빛이 비추는 텅 빈 트랙 위에서.
불퇴전, 괴물 2세…
꽤나 살벌한 수식어가 많이 붙어있던 그녀였지만.
“우으으…”
기세 좋게 말해놓고서는,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꼬리를 불안하게 흔드는 것이 딱 그 나이때의 소녀다웠다.
“그렇구나. 고마워, 정말 기뻐.”
그런 그래스가 참 귀여워, 트레이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럼…!”
“하지만.”
승낙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는 그래스. 그러나 트레이너는 손가락을 들어올려 그녀의 흥분을 진정시켰다.
“그래스의 연인이 될 수는 없어. 교원과 학생의 입장 차이도 있거니와, 10살 가까이 차이나잖아.”
“중앙 트레센에 담당 트레이너와 교제하는 우마무스메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저희 부모님도 정확히 10살 차이시지만 아무 문제 없이 화목하신걸요?”
정론을 꺼내든 트레이너에게, 그래스는 논리정연하게 맞섰다.
“네 나이 때의 아이들은 다른 감정과 호감을 혼동하는 일이 흔해. 분명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이 바뀔걸?”
“아니에요! 저는 진심이라구요! 제가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어도, 사랑이 뭔지는 알아요!”
트레이너가 두 번째로 꺼내든 카드에는 다소 기분이 상했는지 꽤나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트레이너 님. 괜히 말 돌리시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저를 좋아하시는지, 아닌지!”
그래스가 트레이너의 손을 꼭 붙잡고 재차 촉구한다. 트레이너는 조금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물러서지만, 그래스는 트레이너가 물러선 만큼 그를 쫓으며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역시나 불퇴전의 우마무스메… 호락호락하지가 않군.’
트레이너가 상황을 타개할 계책을 짜낸다. 물론 자신도 그래스가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아름답고 강한 우마무스메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트레이너로서 담당 우마무스메와 교제하는 것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 무턱대고 승낙할 수가 없다. 세간의 인식이나 나이 차이는 둘째치고, 연인 놀음을 하다가 만에 하나 그래스의 최고 퍼포먼스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역사에 이름을 새길만한 자질을 가진 그래스를, 그저 그런 우마무스메로 기억되게 만든다면?
그것은 트레이너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자신은 한 명의 남자이기 전에 그래스 원더의 트레이너이니까.
“음… 그럼, 이렇게 할까?”
트레이너가 잠시 생각하다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네가 트레센을 졸업할 때까지 그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사귀는 걸로. 하지만 만약 그 전에 그래스의 마음이 바뀌어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나든, 이 마음은 변함없을 거라고요!”
자신의 진심을 얕보는 듯한 발언에, 그래스가 단호하게 외친다.
“그래. 그럼 아무 문제 없겠네. 그래스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테니까. 그렇지?”
“앗….”
이 대답을 노렸던 걸까? 트레이너가 기다렸다는 듯 덧붙인다. 그래스를 일부러 발끈하게 만들어 스스로 약조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자승자박에 빠졌음을 깨달은 그래스가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방금 그리 대답해 놓고 지금 당장 교제하자는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이라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나도 알아, 그래스. 그래스가 쉽게 마음을 바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마음이 변치 않는 것과 지금 사귀냐 마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그래스가 그 점을 지적하면 트레이너도 별달리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그렇기에 트레이너는 그래스의 손을 붙잡고 말을 잇는다.
“난 그래스가 트레센에서 보내는 6년동안, 네가 트랙에서 최고로 빛나게 만들어 주고 싶어. 그래스는 가장 소중한 나의 담당 우마무스메니까.
그러니까 대답은 조금만 기다려 줘. 그럴 수 있지?”
트레이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치사해요. 트레이너 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고집부릴 수가 없잖아요.”
그래스는 마지못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그의 손가락에 걸었다.
‘...뭐, 그 고지식할 정도로 올곧은 당신에게 전 반해버린 거지만요.’
하지만 트레이너의 따뜻하고 굵은 손가락과 맞닿은 느낌이 그저 좋아서, 그녀의 얼굴은 금세 풀어졌다.
‘그래요. 6개월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서로를 알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트레이너 님이 절 기다리게 하신 만큼, 제게 푹 빠지게 만들거에요. 각오하시라구요!’
그래도 역시나 그래스 원더라고 할까. 그녀는 사실상 완곡한 거절이나 다름없던 대답에도 의지를 불태웠다.
“트레이너 님, 여기요.”
“응?”
단단히 내건 새끼손가락을 풀고서, 그래스는 트레이너에게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해주셔야죠. 가장 소중한 당신의 담당 우마무스메잖아요?”
“하하, 역시 못 당하겠다니까.”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그래스를 보며, 트레이너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꺼이 에스코트 해드리죠. 소중하고 소중한 그래스 원더 양.”
“후후, 좋아라.”
달이 아름다웠던 어느날 밤, 트레이너와 그래스는 손을 꼭 맞잡고 귀가했다.
그 맞잡은 손이 6년 후의 대답을 약조하는 것만 같아, 그래스 원더는 트레이너와 연인으로서 함께 걷는 미래의 자신을 그리며 꿈결 같은 황홀경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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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 님. 이번주에 개봉한 로맨스 영화가 꽤 평이 좋던데, 같이 보러 가요!”
“트레이너 님이 드시는 크레이프, 맛있어 보여요. 제 것과 한입 바꿔먹지 않으실래요?”
“네, 트레이너 님. 오늘도 스페짱이… 아, 벌써 잘 시간이네요. 트레이너 님과 전화하다 보면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니까요. 트레이너 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스 원더의 고백 후 약 1년간, 두 사람은 사실상 유사 연인 관계가 되어 둘만의 추억을 잔뜩 만들었다.
연인의 증거라 할 수 있는 몇몇 요소-커플링, 키스, 그리고 그 이상의 스킨십 등-을 제외하고는, 당장 내일 결혼한다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만한 거리감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두 사람은 일과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자유시간동안 착 붙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걸을때는 팔짱을 낀 채 발걸음을 맞추었고, 뭐라도 먹을라치면 언제나 커플메뉴, 심지어는 외박을 한 것도 여러번이었다.
둘 중 하나가 조금만 자제력을 잃는 순간 선을 넘게 될 모양새였지만, 트레이너도 그래스도 그 방면으로는 매우 뛰어났기에 꽤나 오랜 시간동안 둘의 관계는 평행선을 그렸다.
그래도 두 사람은 그 거리감에 더없이 만족하며 행복에 겨운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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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복되는 나날 속,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트레이너 님.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시네요?”
어느 가을날, 왜인지 매우 들떠보이는 트레이너에게 그래스가 물었다.
“응? 그래? 좀 티 났나? 하하, 별거 아니야.”
트레이너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래스는 어쩐지 조금 석연찮은 감정이 피어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번 주 주말에 같이 식사하지 않으실래요? SNS에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발견했거든요. 여기에요.”
“아… 미안, 그래스. 이번 주말은 일이 있어서 안될것같아.”
“으음… 그러신가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거기에 그래스의 데이트 제안을 거절하기까지. 그래스는 불쑥 자라난 서운함을 삼켜야만 했다.
“자! 그럼 트레이닝하러 가 볼까? 오늘은 파워 트레이닝하는 날이니까 스트레칭을 더 신경써서 하자!”
“....”
어째서일까. 이런 경우에 트레이너는 항상 왜 함께할 수 없는지를 말해주었는데. 오늘은 티가 나게 말을 돌리며 자리를 피한다.
“으음….”
그래스의 서운함이 점차 의혹으로 자라난다.
앞서 걸어가는 트레이너를 당장 잡아세우고 이것저것 캐묻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 유치하고, 또 아이 같다.
연인이라면, 어른이라면, 사랑하는 이를 신뢰해야겠지.
연인도, 어른도 아닌 그래스는, 그렇게 되뇌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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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그라스, 오늘은 trainer랑 date 안합니KA?”
휴일임에도 외출하지 않는 그래스에게, 룸메이트인 엘이 물었다.
“아, 엘 짱. 트레이너 님은 오늘 바쁜 일이 있으시다네요….”
확연히 의기소침해진 그래스가 조용히 답했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의구심이 그녀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탓이다.
“바람맞았습니KA? 그럼 저랑 taco 먹으러 갑시DA!
Death sauce가 맛있는 restaurant를 압니DA!”
“아니, 바람맞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애초에 사귀는 사이도 아니… 후우.”
엘의 놀림에 발끈하는 그래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덧붙인 한마디에 스스로 상처받고 만다.
“...그래도, 뭐, 좋아요. 가 볼까요.”
그래, 어쩔 줄 모르는 이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그런 매운 음식이 제격일지도 모른다. 그래스는 그리 되뇌며 엘의 뒤를 따라 외출했다. 평소보다 가벼운 메이크업, 평소보다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Yay! 역시 이겁니DA!! Taco에는 Death sauce를 듬뿍 뿌려야 제맛인겁니DA! 자! 그라스도!”
엘이 타코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데스소스를 뿌린다. 척 보기만 해도 혀가 아려올 정도로 매워 보였다.
그래스가 엘에게서 소스 통을 받아들어 자신 몫의 타코에 소스를 뿌리려 하던 순간이었다.
“Heh? 저거 그라스네 trainer 아닌가YO?”
“어…?”
엘이 손가락을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그래스의 트레이너가 있었다. 그래스와 데이트할 때 입던 옷을 입고, 처음 보는 낯선 여자와 팔짱을 끼고서.
트레이너의 어깨에 기대다시피 해서 걷는 여자, 그리고 그런 여자의 무게를 기꺼이 견디며 함박웃음을 짓는 트레이너.
“후후후… 우후후후후….
이번 주말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했더니… 바람?”
그런 트레이너를 보며, 그래스는 음산하게 웃음지었다.
“Kya?!”
그래스의 손에 들린 데스 소스 통이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힘없이 으깨진다. 피처럼 붉은 소스가 그래스의 손아귀 틈사이로 주륵 흘러나왔다.
찌릿찌릿대며 머리칼을 곤두세우는 살기,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싸늘한 냉기에 엘의 귀가 쭉 접혀내려간다.
“그…그라스? 진정하시는겁니DA.
그러다가는 내일 newspaper에 실리는 겁니DA….”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직감한 엘이 그래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나, 무슨 말씀을. 저는 완전 침착하다구요? 엘짱.”
“히이이….”
그렇게 말하는 그래스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정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신호였다. 일전에 그녀가 가장 아끼는 꽃병을 산산조각내본 엘은 알 수 있었다.
“그래요… 정말정말 혹시나 오해일지도 모르니까, 조금 지켜볼까요.”
그래스는 식사 대금과 소스통 값을 지불한 뒤 트레이너의 뒤를 밟았다.
두 남녀가 우선적으로 향한 곳은 어느 레스토랑이었다.
그래스가 오늘 트레이너와 가고 싶어했던, SNS에서 유명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말이다.
그래스는 순간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녀는 분노가 임계점을 뛰어넘으면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진다는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 행선지는 트레이너와 그래스가 자주 가던 크레페 가게.
또 그 다음 행선지는 트레이너와 그래스가 즐겨 가던 카페.
또 또 그 다음 행선지는 트레이너와 그래스가 종종 거닐던 강변.
십대 우마무스메의 마음을 산산이 깨뜨리고 자근자근 짓밟는 일련의 광경을 보면서도, 그래스는 어째서인지 침착했다.
‘후후, 그래. 결정했어요. 울며 엎드려 빌 때까지 절대 봐주지 않고 괴롭혀드릴게요. 어른이라면 엇나간 연인을 바로잡아줄 수도 있어야겠죠.’
타오르는 우마소울과 솟구치는 복수심이 격한 슬픔과 상실감을 억누르고,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덕이었다.
그래스는 트레이너가 예의 그 여자를 호텔 입구까지 바래다주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간다면 나기나타를 가져와 객실 문을 부수고 난입할 작정이었으니까.
“후우, 지친다. 변한게 없다니까, 참…”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트레이너가 툴툴대며 문을 밀어 열었다.
“제가 아닌 여자와 하는 데이트는 즐거우셨나요? 트레이너 님.”
“우아악!!”
불을 켜자 방의 중앙에 숨죽이고 서있던 그래스가 입을 열었다. 트레이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ㅁ, 뭐야, 그래스. 네가 여기 왜 있어? 기숙사 통금 시간 지나지 않았어?”
“말 돌리셔도 소용없어요! 최소한 찔리기는 하시나 보군요! 이 바람둥이!!”
그래스는 그 반응에 더욱 확신을 얻고 트레이너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겼다.
“악! 잠깐만, 그래스!”
“변명하지 마세요. 트레이너 님이 오늘 하루종일 뭘 하시는지 제 두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오늘 하루종일? 나 차 몰고 다녔는데?”
“우마무스메의 각력을 우습게 보지마세요?”
그래스가 트레이너를 침대 위로 던져버린 후 미리 챙겨둔 밧줄로 양손을 포박한다.
“각오하시는게 좋을거에요. 저 정말로… 정말로 화났으니까요.”
그래스는 트레이너의 양팔을 침대 프레임에 묶어 고정한 뒤, 그 위에 올라타 강압적으로 말했다.
“어… 그래스? 근데 설명 좀 해주지 않을래? 네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
“여기까지 와서 시치미떼시는 건가요? 오늘 저를 바람맞히고 다른 여자와 불륜했잖아요!!”
그래스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진다.
“뭐어? 불륜이라고? 잠깐만, 뭔가 오해가…”
“오해요? 오해라고요? 저와의 약속은 어린애랑 한 말장난이었나요?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을 오해라는 한마디로 지워버릴 생각인가요?”
그래스가 북받쳐오르는 감정에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연인이나 다름없던 그간의 시간을, 자신이 소중히 간직해 온 약속과 감정을 오해라 말하다니.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해명할 기회를- 우웁!”
그래스는 더 이상 입을 여는 것도 허락치 않겠다는 듯 트레이너와 거칠게 입을 맞췄다.
온 점막 하나하나, 마지막 한 방울의 타액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기세로 혀를 힘껏 내뻗고 이리저리 휘젓는 그래스.
“푸핫! 하아, 하앗… 응읍!”
숨이 차서 시야가 새하얘질 때까지 트레이너의 입속을 유린하고, 잠시 입술을 떼 숨을 고르고, 곧이어 다시 반복한다.
앞뒤 가리지 않는 키스에, 트레이너와 그래스의 입가는 서로의 타액으로 완전히 젖어들었다.
“하앗, 트레이너 님, 트레이너 니임♡”
그래스의 첫키스는 더없이 서툴고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진심을 생생히 드러내 주었다. 가득히 차오르다 못해 흘러넘치는 애정, 질투, 독점욕, 정복욕, 그리고 조금 더 본능적인 이런저런 욕구… 그 모든 것이 뒤얽힌 검고 질척이는 감정.
“변명만 하는 못된 입은, 이렇게 막아버릴 거에요…♡”
그래스는 트레이너의 넥타이를 마구잡이로 풀어버린 뒤 그의 입에 재갈처럼 물렸다.
“읍! 으읍!”
“아직도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그럼… 다 끝나고 들어드릴게요.”
트레이너는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지만, 그 무력한 저항은 우마무스메의 근력 앞에서 머리칼을 간질이는 산들바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스는 오히려 그의 미약한 저항을 흥분의 기폭제로 삼아 충동을 아낌없이 해방했다.
트레이너의 발버둥이 잦아들자, 그래스가 트레이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어 그림자를 드리웠다.
“....”
그래스의 길고 윤기나는 머리칼이 사락이며 트레이너를 간질인다. 그래스는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숨을 헐떡이는 트레이너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황홀감에 휩싸였다.
“그 못된 도둑고양이가… 내 트레이너 님에게 더러운 흔적을 남겼는지 확인해야 해….”
격한 흥분과 부족한 호흡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된 그래스가 제멋대로인 핑계를 대며 트레이너의 옷을 찢어버리다시피 벗긴다.
“그 여자의 냄새가 맨몸에 스며들지 않은걸 보면… 일선은 넘지 않은 모양이네요.”
그래스가 트레이너의 맨몸에 코를 박고 일심분란하게 숨을 들이마신다. 자신이 미처 보지못한 사이에 그 여자와 망측한 짓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의 체향이 조금 위험한 감각을 일깨웠다. 한조각 남아있던 이성이 깨끗이 증발하고, 암컷으로서의 본능만이 남아 그녀를 충동질한다.
“...꿀꺽…♡”
이윽고 그래스의 시선은 조금 아래, 아까부터 그녀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던 트레이너의 단단한 것으로 향했다.
“연하의 여자에게 농락당하면서도 이렇게나 흥분하다니… 절조 없는 어른이네요….”
다소 노골적인 손길이 트레이너의 성난 분신을 어루만진다. 이미 한계에 가까웠던 트레이너는 넥타이를 물어 끊을 기세로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버텨야만 했다.
“오늘 버릇을 완전히 고쳐 드리겠어요.
이 난봉꾼…♡”
완전히 포식자의 눈을 하게 된 그래스가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트레이너 위에 올라탔다.
“읍… 읍!!”
트레이너는 여전히 눈빛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했으나, 그래스는 그 무언의 메시지를 간단히 무시하고 그대로 허리를 내렸다.
(대충 격렬한 기승뾰이 씬)
“이제… 아셨겠죠… 트레이너 님이… 누구의 것인지….”
온통 땀범벅이 된 그래스가 트레이너와 이마를 맞추며 말했다.
“두번 다시…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 마세요. 그때는 저도… 제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트레이너의 목을 감싸안으며 엉겨붙는 그래스.
“그래스… 오해야… 정말로….
그 사람은 내 친누나란 말야….”
격렬한 뾰이 도중 넥타이를 어떻게든 벗겨낸 트레이너가 띄엄띄엄 말한다.
“…누나라고요? 트레이너 님의?”
순간, 땀으로 젖어 번들거리던 그래스의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터질듯이 박동하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어 시커먼 심연 속으로 처박히는 것 같았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죠… 트레이너 님?”
그래스의 입이 망연히 벌어진다. 방금 그 말은 트레이너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둘러댄 변명이길 바라며.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그래스….
난 너를 배신하는 짓 따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울음을 참으며 띄엄띄엄 고하는 트레이너의 태도에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누나가 미국에서 일하다 오랜만에 날 보러 온다길래… 근방을 관광시켜준 것 뿐이야….
믿어 줘, 제발. 그래스….”
억누르던 트레이너의 눈물이 끝끝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래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
“죄, 죄송해요. 트레이너 님!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스는 안색이 새파래진 채로 트레이너를 구속한 밧줄을 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트레이너에게 도게자했다. 꽤나 매니악한 광경이었지만, 이런저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제멋대로 트레이너를 의심하고 몰아붙인 것도 모자라, 그의 몸을 억지로 취한 것이다. 따귀를 맞고, 경멸과 비난을 받고, 절연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아, 아니야…. 내가 제대로 설명 안하고 얼버무린 잘못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어나 줘, 그래스.”
트레이너는 되려 쩔쩔매며 그래스를 일으켜 세운다. 그 배려가 그래스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이토록 배려넘치고 친절한 남자를 상처입히다니. 없던 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일백 번, 일천 번 배를 갈라 사죄하리라.
“흐으으… 으흐으으으으윽, 흐어엉–.”
“그래스? 그래스! 울지 마, 난 진짜로 괜찮으니까! 응?”
죄악감이 그래스의 마음을 처참하게 짓뭉갠다. 결국 그래스는 트레이너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잘못한 주제에 제멋대로 운다는 사실이 더없이 수치스럽고 또 한심하지만, 한번 터져나온 눈물을 멈출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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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래스 원더 양!!!!!!! 진짜 그래스 원더 양이네요!!!!
TV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예쁘고 귀여워요!!!! 제가 진짜 그래스 원더 양 팬이거든요!!! 그래스 원더 양이 출전한 경기는 다 녹화해서 시간 날 때마다 보고요!! 굿즈도 무조건 다 사고요!! 그리고 또…!!”
다음날, 트레이너와 그래스는 도둑고양이- 즉 트레이너의 누나를 보러 갔다. 그녀는 그래스를 보자마자 눈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뜨이더니, 그래스의 양손을 꽉 붙잡고 장장 2시간 동안을 떠들었다. 대부분 그래스 원더에 대한 극찬이었다.
“음… 너도 봐서 알겠지만, 누나가 그래스의 극성 팬이거든. 이런 식으로 귀찮게 할 것 같아서 둘러댄 거였어. 그래스도 괜히 신경쓰게 되지 않을까 했고.”
트레이너의 누나를 겨우겨우 떼어내고 돌아가는 차 안, 트레이너가 조수석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래스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멋대로 트레이너 님의 마음을 의심해서…. 트레이너 님께 그런 심한 말을 하고 심한 짓을 해서….
절 용서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시는 트레이너 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셔도 받아들일게요….”
그래스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사죄한다. 어른이니 연인이니 하며 제멋대로 트레이너를 상처입힌 스스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도 그래스의 마음을 확인해서 좋았는걸.
기대했던 첫경험은 아니었지만… 그건 앞으로 차차 맞춰가면 되고, 그렇지?”
트레이너는 도로가에 차를 세운 뒤 그래스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나 심한 짓을 했는데….”
“심한 짓이라니. 좋아하는 여자와 몸을 맞대는걸 어떤 남자가 싫어하겠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난 기뻤어. 그래스가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줘서. 질투라는 감정은 사랑 없이 생겨날 수 없는 법이잖아? 그러니까 그래스가 그렇게나 질투했다는건 그만큼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나야말로 그래스의 마음을 가볍게 생각해서 미안해.”
“....”
진짜 어른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어른인 척 하던 자신은 얼마나 미숙하고 또 어리석었나. 이런 부족한 자신을 기꺼이 감싸주는 이 남자에 비하면, 나는 한낱 사고뭉치 꼬맹이에 지나지 않는구나.
트레이너를 보며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에, 그래스는 더없이 부끄러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래스의 머릿속에 가장 강하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라는 것이었다.
미숙하고 서투른 자신 곁에서 언제나 지켜봐주는, 이런 태양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이런 태양 같은 사람이 부족한 나를 좋아해 주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래스는 마침내 눈물을 그치고 환히 웃어보였다.
“그래스가 알려준 레스토랑, 정말 좋더라. 누나도 엄청 마음에 들어했어.
다음 주말에 같이 가지 않을래? 그래스하고도 같이 먹고 싶어.”
“네… 네에…. 얼마든지요. 좋고 말고요.”
그래스가 눈물자국 남은 얼굴로 끄덕이며 트레이너의 품에 안긴다. 트레이너는 그래스의 울음이 그쳤음을 기뻐하며, 사랑해 마지않는 최고의 애마를 온 힘을 다해 감싸안았다.
그래스가 트레이너에게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고 그의 진짜 연인이 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였다.
그래스가 트레이너와 가고 싶어했던, SNS에서 유명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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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주워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래 내가 써옴
순애최고!
당신도 순애최고라고 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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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쳐드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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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쳐드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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