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의 12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그는 뿌리까지 썩어버려 이빨 빠진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러시아 제국을 되살리기 위한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부패한 귀족들과 부농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인해 천천히, 확실하게 몰락하는 러시아 제국을 위한 개혁이 실패하고 사방에 정적을 두게 되었다
결국 반쪽짜리 개혁으로 끝나 좌절만을 겪어야했던 알렉산드르 2세의 행보는 러시아 내부의 전제군주정에 대한 불신만 키우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대중들이 군주제에 등을 돌렸다고 판단한 인민주의 혁명가들이 제국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차르에 대한 암살 시도를 실시한다
수 많은 암살 시도에도 천운이 도왔는지 알렉산드르 2세는 죽음으로부터 피해갔지만 정작 암살범들은 잡지 못하고 혁명세력에 대한 강경한 대처로 군주에 대한 반발심만 키우는 등 악순환만 이어져갔다
차르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혁명세력에 대한 유화책을 펼쳤고 실제로 이는 큰 효과를 거두어 과격파를 제외한 혁명가들은 황제에 대한 공격을 거두었다
이 중 수 년간 차르에 대한 암살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테러 단체 ‘인민의 의지’ 세력은 차르의 정책으로 지지자들이 줄어드는 것을 큰 위기로 받아들였고
대중들을 직접 수면 위로 끌어들여 대대적인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해선 더 크고, 확실한 암살 시도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상황을 그린 삽화. 왼쪽의 쓰러진 남성이 암살자 흐리니에비에츠키, 중앙의 쓰러진 수행원을 부축하는 남성이 알렉산드르 2세다
그리하여 1881년 3월 1일 (율리우스력) 황제가 거리 행사를 끝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루트를 미리 확보한 인민의 의지 단원들이 사제 폭탄을 소지한 채 미리 매복하고 있었다
이때 차르는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면 테러범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친척인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 대공녀와 시간을 갖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결국 테러범들이 현장에 도착해 매복할 시간을 주고 말았고 오후 2시 15분 경 황제의 행렬은 폭탄테러로 무너지고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뒤바뀌었다
하지만 1차 테러 당시 황제는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찰과상 외에는 멀쩡했고 심지어 테러범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테러에 휘말린 무고한 민간인들과 호위병들을 걱정하며 피해자들을 수습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암살범들에게 좋은 기회였고 방탄 마차에서 나와 피해자들을 수습하는 차르를 향해 두번째 폭탄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차르는 팔 하나와 다리 두개가 절단되고 얼굴과 배가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차르는 여전히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고
피를 흘리며 헐떡이는 차르는 겨우 숨을 이어가며 ‘짐은 궁전에서 죽고 싶노라’ 는 말을 힘겹게 남겼다
신하와 호위병들에 의해 급하게 수습되어 겨울궁전에 도착한 알렉산드르 2세는 사건 발생 9시간 뒤 붕어하였다
차르 암살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인민의 의지는 크게 기뻐하며 대중들이 제정을 끝장내기 위해 거리로 나설 것이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키기는 커녕 오히려 차르의 죽음에 큰 충격에 빠지고 온 제국이 비탄에 잠긴 것이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민중들은 테러 현장에서 피해를 입은 인민들을 위해 솔선수범하게 현장을 지휘하는 신-차르가 불한당들에 의해 매우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큰 슬픔에 빠졌고
이러한 과격파들의 행동에 온건주의자들은 그들을 외면했고, 보수주의자들은 피의 복수를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는 ‘인민을 위한 개혁을 주도하였지만 인민들에게 배신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천명하고 개혁정책의 일부를 철회, 자유주의자들을 극렬하게 탄압한다
결국 혁명가들이 원하던 제정폐지와 민중의 사회진출은 그로부터 30년은 더 지난 뒤에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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