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1200년전 헤이안 시대의 천재 문인으로
시인으로도 유명했고
관료로도 승승장구해서 재상에까지 올랐지만
당시에 그가 주장한 여러 개혁정책이
귀족들의 이익을 깎아먹는 것이었기에
일왕의 사돈이자 반대파인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음해로
거의 유배에 가깝게 좌천되어
멀리 떨어진 큐슈에서 한을 품고 쓸쓸히 죽음
여기까지면 뭐 굴원도 생각나고
썩은 정치에 희생된 천재 얘기에 그치겠지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고 나서 일본에는
대규모 역병과 각종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났고
심지어 어느 날은 대낮에 일왕의 궁궐에
번개가 내리쳐서 많은 신료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일어남
예로부터 벼락은 신이 내리는 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포는 대단했음
특히 미치자네가 좌천된 뒤
미치자네가 뭐하고 있는지 감시하라는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명령을 이행한
후지와라노 기요쓰라는
벼락을 직통으로 맞아서
입은 옷은 모조리 불타고
가슴이 찢어진 처참한 상태로 즉사했고
4년 뒤인 913년에는 토키히라와 결탁하여
미치자네의 자리를 꿰어찬 우대신 미나모토노 히카루가
사냥을 나갔다가 늪에 빠져 익사하는 사건이 터지고
923년에는 토키히라의 사위인
황태자 야스아키라 친왕이 20세로 요절하고
925년 야스아키라 친왕의 아들이자 토키히라의 외손자인
황태자 요시요리 왕이 만 3세로 요절함
계속해서 일어난 흉사 때문에
이것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원령이 일으킨
복수라는 공포가 귀족 사회에 밀려들었음
사후 100년 뒤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원한이
정화되었다고 여겨지고 나서부터는
원령이 아니라 학문의 신이자 벼락의 신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입시철에는 학문의 신인 그에게
입시 합격을 비는 신도들이 몰려서
미치자네의 신사가 북적북적 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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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했으면 됐다 이건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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