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1605년 무렵,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는 조선의 두만강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면서 수많은 번호들을 흡수하는 동시에 조선의 변경 지역을 압박했다. 부잔타이의 조선에 대한 공세는 1603년 무렵에는 압박과 소규모 교전선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으나, 1605년에는 동관을 함락하기까지 하여 극심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부잔타이의 이러한 행동은 곧 당시 건주의 군주였던 누르하치에게도 전해졌다. 사실, 부잔타이 본인이 누르하치에게 본인이 조선의 동관을 함락한 사실을 알리며 그 약탈품의 일부까지 전해주었다. 그것은 겉으로는 자신을 살려준 은인께 선물을 전달해 주는 것이라곤 하나 실제로는 과시, 선전의 효과를 누린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부잔타이의 조선 방향을 향한 세력 확장에 대해 큰 경계심을 가졌다. 비단 부잔타이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만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부잔타이와 조선간의 충돌이 자신과 조선간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 문제에 대해 부잔타이의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동시에 조선측에 자신과 부잔타이의 행동간의 무관함을 알렸다.
누르하치가 조선에 자신과 부잔타이의 행동간에 상관이 없음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잔타이로부터 지속적으로 침공을 받고 있던 조선측에서는 누르하치의 대응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조선은 누르하치가 부잔타이와 결부되어 있으며 부잔타이의 이번 공격 역시도 누르하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했다.1사실, 부잔타이의 동관 공격뿐만이 아니라 1603년부터 존재했던 번호 공략과 조선에 대한 압박 모두 누르하치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2
그러나 그것은 조선측의 오판이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와 정략동맹 관계를 몇 번이고 체결한 인물이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였을 뿐, 그들은 확실하게 경쟁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측의 오판 배경은 그들이 변경의 첩보와 정보 수집에 기반하여 건주-울라간 관계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1605년 당시까지 조선은 건주, 울라와 지속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다만 건주, 울라가 서신을 보내오면 그에 대해 답변을 하는 선에서 그들의 외교적 접근에 대처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조선으로 복귀한 포로의 보고, 건주나 울라에서 온 여진인들의 보고, 혹은 조선의 변장들이 자체적으로 수집한 정보를 기반으로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관계를 파악했다.
조선이 그제껏 수집한 정보들의 취합 결과에 따라 조선은 누르하치와 부잔타이가 진작에 통혼을 한 관계라는 것을 파악했다.3물론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관계가 일반적인 '우호 관계'가 아닌 것 역시도 파악했으나4 그렇다 하더라도 부잔타이의 조선 변경에 대한 공격에 누르하치가 개입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확실하게 하지 못했다.
누르하치와 부잔타이간의 통혼 관계에 관한 정보뿐만이 아니라, 로툰과 부잔타이가 동시에 조선의 번호들을 공략하는 상황 역시도 조선의 오판에 부채질을 했다. 로툰은 당시 누르하치의 수하로서 번호의 철거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는데5, 부잔타이의 번호 철거 작업과 그 시기가 겹침으로서 로툰과 부잔타이가 동시에 번호를 공략하는 상황이 형성되었다. 조선은 이러한 상황에서 두 세력의 번호 철거작업이 각각 독립된 행동이 아니라 연계된 행동이라고 판단했고, 로툰의 상위자인 누르하치가 부잔타이 역시 움직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상황들로 말미암아 누르하치가 부잔타이의 번호 철거 및 조선 공격과 연결되어 있으며, 설사 누르하치가 부잔타이의 이번 공격과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누르하치가 부잔타이와 통혼관계에 있고 동시에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은 확실하니 명나라를 통해 누르하치를 개유하면 부잔타이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6
그에 따라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요동아문에 자문을 보내어 누르하치 개유를 요청했다. 개유 요청의 근본적 명목은 앞서 설명했듯이 '명이 누르하치를 통제할 수 있고 누르하치는 부잔타이를 통제할 수 있으니 누르하치 개유를 통하여 현재 조선의 북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해결에 도움을 달라'는 것 이었다. 해당 개유는 음력 8월에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개유를 요청한 문서 자체는 음력 7월자로 표기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면 음력 8월 4일까지 개유 문서가 송부되지 않은 정황이 확인되기 때문이다.7
요동 아문에서는 오래지나지 않아 조선의 개유 요청을 직접적으로 전달 받았다. 이후 요동측에서는 조선측의 요구에 따라 누르하치에 대한 개유를 진행하기 위해 순무 조즙의 지시 아래에 지휘 맹승훈이 누르하치에게 파견되었다.
누르하치에게 파견된 맹승훈은 조선의 개유 요청 논거를 언급하며 누르하치를 선유했다. 누르하치는 급작스러운 개유에 대해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본인과 관계도 없는 일이며, 동시에 자신 역시 그리 좋게 여기지 않던 일에 대해 명나라가 조선의 요청을 받아 선유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누르하치로서는 상당히 난처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누르하치는 이 문제에 대해 지금 조선을 공격하는 것은 해서여진의 부잔타이이며 자신이 관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아예 세력이 다른 이들임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맹승훈이 누르하치와 부잔타이가 상호간 통혼을 통해 친족관계를 형성하였으므로 이점을 들어 부잔타이를 통제할 것을 선유하자 누르하치는 현재의 사태에 대해 조선이 일정 부분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누르하치는 조선이 울라의 달자들(번호를 지칭한다)을 데리고 있는 것에 대해 부잔타이가 그들을 철거하기에 앞서 먼저 대화를 위해 사신을 파견했는데 조선이 그를 함부로 잡아 죽였으므로 부잔타이가 그것을 명분 삼아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며, 또 조선측에서는 이 전쟁의 해결을 위해 칙서 150여장을 발급하여 부잔타이에게 건넸고 그로서 본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는데 왜 이 문제를 가지고 자신에게 개유를 요청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반박했다.8
여기서 누르하치가 말한 '조선이 부잔타이의 사신을 죽였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일로서, 1601년 무렵 울라가 조선 변경에 보낸 장수 만도리와 그 이하 10여인(혹은 2인)을 살해한 사건이다.9 부잔타이는 실제로 이를 명분으로 삼아 1603년 조선을 군사적으로 압박했기에 누르하치의 말은 최소한 표면적으로 사실에 가까웠다. 또한 후자의 이야기 역시 절반은 사실이었는데, 누르하치에게 선유가 진행될 당시 조선은 건퇴 전투의 결과와 부잔타이의 요구로 인하여 울라측에 1백여첩의 직첩을 보내고 강화를 맺을 것을 확정 지은 상황이었다.10 비록 누르하치가 말한 것보다 수량은 적고, 또 아직 지급은 안된 상황이었으나 최소한 누르하치의 발언과 맥락은 일통하다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의 적극적인 항변으로 인해 이성량과 조즙은 상황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동시에 조선의 자문이 총독군문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이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조선은 요동아문에서 보낸 회첩에 대해 해명을 하는 동시에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조선의 곤경을 누르하치가 의도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누르하치의 외교적 역량이 상당히 뛰어난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살펴지는 것이 돋보인다. 비록 요동총병 이성량과 요동순무 조즙이 여진 문제가 조정에 상주되는 상황을 원치 않아 누르하치의 해명을 명목으로 삼아 조선의 자문이 계요총독아문에까지 전해지게 하지 않은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누르하치의 해명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건대 꽤 준수한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
각주
1.사대문궤 권 46 만력 33년(1605년) 7월 무일
2.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9월 3일, 선조수정 38년 음력 8월 1일
3.1603년 이난에 대한 공초(등록류초 14책 변사 갑진년(1604) 4월 22일)
4.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7월 16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 음력 8월 26일
6.장정수, 宣祖代 末 朝鮮의 對明 ‘虜情’ 보고와 그 여파,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51, 2019, p.75
7.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8월 4일
8.사대문궤 권46, 만력 33년(1605) 9월 18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15일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