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이후 기세가 오른 만주의 독립군은 점점 더 강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당시 적백내전이 한참이던 러시아의 연해주로 건너가게된다. 때마침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 또한 반식민주의를 표방하며 제정 러시아가 빼앗은 청나라 땅 일부를 중국에게 돌려주는 제스처를 취하자 이에 기대를 품고 만주 독립군들의 연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은 연해주로 이동하게 된다.
문제는 연해주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당시 연해주는 일본군의 도움을 받는 백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소비에트 적군 휘하의 빨치산들이 이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었다.
연해주에도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바, 적잖은 수의 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이 적군에 소속되어 싸우고 있었는데, 바로 이 적군 소속 한인들에게서 문제가 터진다.
1919년 11월 트랴피친(윗 사진)이 이끄는 약 2천명 규모의 빨치산 부대(이 중 한국인 2백명)는 연해주 하바롭스크 부근의 니콜라예스크 항구를 공격한다.
이곳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은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트랴피친 부대의 입성을 허가한다. 그러나 시내의 백군 세력과 그에 협조한 민간인들을 죽인 트랴피친은 반대로 일본인에게 총부리를 돌려 니콜라예스크 시의 주민 상당수를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몰살시킨다.
피해자는 백계 러시아인과 일본인이 다수였으나, 이러한 참상을 볼 수 없어서 일본인을 보호해주었던 한인 주민들 또한 죽임을 당했다. 대략 7천명의 러시아인과 5백여명의 일본인, 그리고 3백여명의 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학살에 트랴피친 부대 소속의 한인 부대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박일리야(윗사진)가 이끄는 사할린 의용대 부대원들은 트랴피친의 열렬한 지지자로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러시아 부대원들이 민간인 학살을 망설이자 스스로 나서서 대신 죽였다고 한다. 심지어 같은 한국인을 죽이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박일리야가 이끄는 사할린 의용대의 한인 부대원들은 아편중독의 불량배들이 많던 중국인 부대원들과는 달리 엄정한 기율을 유지하고 정신무장도 충실하게 되어있었다. 이를 마음에 들어한 트랴피친은 사할린 의용대를 특히 아꼈으며, 심지어 같은 나라사람인 러시아인 부대원들보다도 더 믿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의용대원들은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트랴피친이 내린 학살 명령을 더욱 충실히 이행하기도 했다.
이에 경악한 다른 한인 부대원들은 학살을 거부했으며, 나중에 진상을 알게 된 소비에트 정부가 학살의 주동자인 트랴피친과 그 측근들을 재판할 때 증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박일리야는 트랴피친 체포에 앞장섰던 박바실리를 비롯해 트랴피친에 반대했던 한인 부대원들을 보복살해한다.
결국 도를 넘어선 빨치산들의 행동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소비에트 정부는 트랴피친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부대원들(박바실리 휘하 한인들 포함)로 하여금 체포명령을 내렸으며, 이에 트랴피친과 그의 아내를 포함한 부대 수뇌부 10명이 사형당하면서 이 잔혹극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정작 학살을 직접 실행했던 박일리야 휘하의 사할린 의용대는 이름만 '니항군'으로 바꿔 그대로 살아남아 러시아의 한인 독립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참고로 학살이 벌어진 니콜라예스크의 한자식 이름이 바로 니항이다. 자신들이 학살을 벌였던 곳을 따서 부대명을 개명했다는 점에서 박일리야와 그의 부하들의 마인드가 어떠했는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할린 의용대는 다른 러시아 내의 한인 독립군들과 연합하여 연해주로 들어온 대한독립군단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일본의 압력과 내부정리를 이유로 소비에트 정부가 무장해제 및 적군으로의 배속을 명령했을때, 김좌진과 더불어 앞장서서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박일리야였다. 군단 사령부가 일단 무장해제명령을 따르기로 하자 박일리야는 휘하의 니항군을 동원해 무장해제명령을 따르려던 한인 부대원들을 체포한다.
이에 러시아 적군은 다시금 무장해제를 명령했으나 니항군은 이에 불응, 결국 공격을 가하여 약 2백명이 사살당하고 8백명이 포로로 잡힌다. 주동자라고 볼 수 있는 박일리야는 만주로 도망쳐 살아남는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유시 참변이다.
이로 인해 한국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공산주의는 일제랑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고, 반공주의자인 김구와 이승만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다.
러시아로 이동했던 간도 독립군 상당수는 다행히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직전 심상치 않음을 알고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두번 다시 독자적인 수천명 규모의 부대를 만들 수 없었다(한국 광복군의 최대 7백명이었으며, 연안의 조선인 부대는 중국 공산당 휘하였으니 논외로 본다).
박일리야는 자유시에서 탈출한 뒤, 1921년 제3차 전한군사위원회 위원, 1922년 고려혁명군정위원회 군정위원, 1924년에는 대한혁명통군부 중동 부사령관(中東 副司令官) 등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8년 사망했다.
부족하게나마 3줄 요약해보자면
1. 러시아 연해주에서 민간인들 많이 죽였던 한인 독립군이 있었다.
2. 근데 그 독립군 부대가 나중에 연해주로 피신해온 대한독립군단에 합류한다.
3. 다른 부대들은 동의한 걸 무장해제 못하겠다고 불응했다가 러시아군 공격받고, 독립군들은 뿔뿔히 흩어짐.
참고로 이거가지고 '독립군이 민간인 학살했다!!!' 라고 호들갑떠는 수상한 종자들이 인터넷에서 종종 출몰하는데, 그 학살했던 '독립군'들은 같은 한인도 죽였고, 그거 막으려던 다른 한인 독립군들도 죽였다. 그리고 간도에서 왔던 독립군들은 해당 사건과는 무관하다.
다만 조선독립을 명분으로 활동했고 기강도 잘 잡힌 부대였기에, '독립군들 중 일부 분파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맞는 말이다. 만주 한인들을 등쳐먹었던 김좌진 못지않은 독립운동사의 흑역사지만, 잘 알려져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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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건 흑역사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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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도 그런 깽판치고 싶었던 범죄자들이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 가면 민심을 많이 잃었다고 함. 김구도 동학농민군 접주까지 했던 인물인데, 그런 점이 부끄러웠다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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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게 간사해서 독립군은 그냥 명함이고 현실 GTA5 했던 놈들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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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대라해도 20세기임. 킹덤은 기원전인데... 물론 홍범도처럼 나중에 강제이주당하긴 하지만 저 때당시엔 아직 레닌 시대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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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건 흑역사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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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게 간사해서 독립군은 그냥 명함이고 현실 GTA5 했던 놈들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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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도 그런 깽판치고 싶었던 범죄자들이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 가면 민심을 많이 잃었다고 함. 김구도 동학농민군 접주까지 했던 인물인데, 그런 점이 부끄러웠다고 말함. | 20.05.27 10:2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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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무슨 일이든 항상 벌레는 꼬이게 되어있음... | 20.05.27 10: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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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대라해도 20세기임. 킹덤은 기원전인데... 물론 홍범도처럼 나중에 강제이주당하긴 하지만 저 때당시엔 아직 레닌 시대였음. | 20.05.27 10:4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