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나는 침대 시트와 베드 스카프, 이불을 단단히 묶어 만든 줄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객실 창문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누워 그대로 곯아떨어진 돼지들이 보였다. 부랑자가 시끄럽게 코를 골았지만 이미 깊이 잠든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안경도 벗지 않은 채 잠든 의사 양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을 탈출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저 멍청이들 교육이나 열심히 하라고. 난 이 미친 저택에서 나갈테니까.
응접실 창문을 활짝 열고 정문 쪽을 살펴보았다. 낮에 정문을 지키고 서있던 하인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곧바로 발코니 난간에 줄을 묶은 뒤 아래로 던졌다. 줄이 바닥끝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내려간다면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진짜 문제는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이런 정신 나간 짓은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고막이 울릴 지경이었다. 나는 시트가 난간에 제대로 묶였는지 몇 번 확인한 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줄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오른발을 난간 밖으로 뻗었다. 결심이 서자 두려움과 함께 생각이 사라졌다.
다행히 침대 시트는 내 무게를 버텨주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나뭇가지에 붙은 애벌레처럼 느린 속도로 내려왔다. 2층을 지나 1층에 도달했을 무렵, 무의식적으로 땅을 바라보았다. 거의 다 도착한줄 알았는데 아직도 꽤 높았다. 문득 의사양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객기를 부리다 목뼈가 부러지는 겁니다. 첫 해부실습 시간에 나온 시체의 사인이 바로 그거였다고요!’
그때 팔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줄이 미끄러졌다. 손아귀에 힘을 쥐고 겨우 줄을 다시 붙잡았지만 떨어질 때 왼쪽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비명이 튀어나올 뻔 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몸부림치며 주변을 살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밤이었고 저택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나는 분수대 쪽으로 향했다. 분수대 주변의 화분들을 담벼락으로 끌고 와서 그곳들을 차곡차곡 쌓아 단을 쌓고 담을 넘을 계획이었지만 접질린 발목 때문에 좀처럼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나는 사타구니까지 오는 화분의 흙을 퍼내고 담벼락으로 끌고 갔다. 발목 통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도자기 화분은 더럽게 무거웠다. 겨우 하나 옮겨놨을 뿐인데 땀이 쏟아져 셔츠를 흥건히 적실 정도였다. 발목만 안 다쳤다면 이 개고생은 안했을 텐데! 담을 넘을 높이만큼 화분을 옮겨야 했다. 계단을 쌓는데 12개의 화분이 필요했다. 결국 1시간이 넘게 걸렸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저택에서 내려올 때 쓴 침대시트를 화분 맨 아랫단에 고정시켜뒀기 때문에 시트를 담벼락 너머로 넘기고 조심히 내려가기만 하면... 근데 저게 뭐지? 담벼락 너머 손전등을 든 하인들이 개를 이끌고 주변을 순찰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가까웠는지 개가 재채기 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나는 무릎을 굽힌 채 담벼락에 몸을 바짝 숨기고 그놈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한 놈이 자리를 비울 때 쯤이면 다른 놈이 와서 내 탈주로를 막았다.
점차 시간이 지나자 나는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담벼락을 넘다가 아까처럼 착지를 잘못해서 양쪽 발목이 아작 난다든지, 겨우 담벼락을 넘고 도망치다 개한테 물려서 꼴사납게 비명을 지른다든지... 나는 점점 두려워졌다. 이곳을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고 배고픔이 밀려왔다. 그러자 문득 응접실에 가득 쌓여있는 고기 덩어리와 술이 생각났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말 웃기게도 군침이 돌았다.
나는 화분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온몸에 흙을 잔뜩 묻힌 채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정말 다행히 정문의 문은 열려 있었다. 혹여 하인들에게 들킬까 극도로 조심하며 홀을 지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오른쪽 복도 끝에 도착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멈춰있었다. 나는 홀로 돌아와 중앙 계단을 오르는 모험을 해야 했다. 절뚝이는 다리로 2층에 도착했을 무렵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히치콕의 목소리였다. 나는 계단 난간에서 손을 떼고 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향했다.
희미한 가스램프가 밝히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자 커다란 창문을 통해 멀리 작은 집이 불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커다란 장식장 뒤에 몸을 가린 채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는데 히치콕이 창문 앞 소파에 앉아 불타는 집을 바라보며 시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집사 놈이 히치콕의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이 서있다.
“장관이구먼.”
히치콕이 말했다.
“오늘은 바람이 불러서 그런지 불이 잘 붙는군요.”
집사놈이 말했다.
“그래. 그 건방진 작가 놈을 넣고 같이 태워버렸으면 더 좋았을텐데. 히히히!!”
히치콕이 낄낄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털이 곤두선 내 몸을 휘감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하인을 시켜 나를 붙잡아 온 다음에 저 불구덩이에 쳐 넣을 것만 같았다. 천천히 뒤로 물러난 뒤에 난 성큼성큼 계단을 밟고 3층으로 향했다. 발목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객실을 막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응접실로 향했다. 문득 머저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다들 일어나요!!”
내 고함소리에 벅스버니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뭐야?”
그리고는 시계를 보더니 언짢은 얼굴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지금 주인장이 날 죽이려 한다고!”
그 말에 바닥이 널부러져 있던 부랑자를 비롯해 나머지 인원들도 눈을 떴다.
“정말 죽일지도 몰라. 우린 지금 갇혀있고... 지금 밖에서 놈들이 불을 지르고 있다고!!”
나는 불이 났던 집 방향을 가리키며 길길이 뛰었다.
“꿈 꿨소?”
정신과 의사가 말했다.
“꿈이라니? 지금 내 옷 안보여요? 흙투성이잖아. 밖에 나갔다 오는 길이오.”
“그럼 어디서 불을 지르고 있는데?”
응접실 창문을 통해 밖을 두리번거리던 피글렛이 물었다.
“그 쪽이 아니라... 아... 계단을 통해 내려가서 2층에 가면 볼 수 있소.”
나는 그들을 재촉해 복도로 이끌었다. 그리고 복도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돌렸는데...
“응?”
“또 뭐야?”
벅스 버니가 앙칼진 목소리로 날 다그쳤다.
“아니... 이게 왜 이러지?”
나는 손잡이를 연신 세게 흔들어댔지만 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뒤에선 이들은 날 죽일듯이 노려보다 바라보다 응접실로 향했다.
“저 양반 점점 미쳐가는 구만.”
맨 뒤에 있던 부랑자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이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작은 소동극이 벌어졌다. 고개를 앞뒤로 까닥이며 졸던 벅스버니가 쥔 담뱃재가 카펫에 떨어져 불이 났던 것이다. 벅스버니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내며 폴짝 뛰었고 부랑자와 피글렛이 화가 난 침팬지처럼 불이 난 카펫을 거칠게 밟아댔다. 나는 술잔을 뿌리려는 주황머리를 가까스로 말렸다. 하마터면 그 둘은 통바베큐가 될 뻔했다. 불이 꺼지자 그들은 다시 낄낄거리며 술을 마셨다. 나는 술 한잔을 들이키자마자 내 방으로 돌아와 염병할 타자기를 두들겼다.
***
다음날 아침, 우린 1층 식당에서 히치콕과 함께 식사를 했다.
“오늘 공연이 매우 기대가 되는군.”
그는 들뜬 얼굴로 말했다.
“어제 그 사람들은 누굽니까?”
집사가 내 말을 히치콕에게 전달하는 동안 나는 또다시 물었다.
“우리처럼 속아 넘어간 사람들입니까?”
히치콕은 해맑게 웃었다.
“어제 밤, 타자기 두들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던데... 오늘 공연이 무척 기대됩니다.”
“이봐! 그쪽이 먼저 어겼으니 이 계약은 무효야! 돈은 필요 없어. 난 나갈 테니까.”
“그건 허락할 수 없소.”
‘허락’이란 단어에 내가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나는 발로 탁자 밑을 세게 차올렸다. 그러자 접시들이 들썩거리며 정신과 의사가 탁자 끝에 놓아둔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허락? 엿이나 먹어!!”
나는 될 대로 내라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하녀가 권총을 꺼내 내 관자놀이에 들이밀었다.
“그 감정이 연극에 실려 있었으면 좋겠군요.”
히치콕은 키득 웃으며 굴을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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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