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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자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뱃속에서 역겨운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서 날짜를 확인해보았고 이틀 동안 내리 잠만 잤다는 걸 깨달았다.
알콜과 옥사제팜이 만들어낸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자 꼴이 말이 아니었다.이틀 전 입고 나간 셔츠의 소매에 누렇게 뭐가 묻어 있었고,
내 얼굴은 얻어맞은 것마냥 퉁퉁 부어 있었다.
잘 때 자세가 좋지 않았는지, 고개를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근육을 쑤시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또 입천장은 상처가 난 듯 혀에 닿을 때마다 쓰렸다. 수돗물로 입을 헹구자, 주황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너덜너덜한 회색 티셔츠를 입고 팬티 바람으로 냉장고를 뒤졌다.
달걀과 냉동보관용 해쉬브라운를 찾아냈다. 달걀 두 개로 오믈렛을 만들고 해쉬브라운은 겉이 바짝 탈 때까지 튀겼다.
그것들을 케첩 범벅으로 만들어준 뒤, 어느 나라에서 굴려 보냈는지 모를, 이름도 외우기 힘든 싸구려 수입 맥주 두 캔으로 배를 채웠다.
이 정도면 아주 산뜻한 시작이다. 오후 6시이고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긴 하지만 나 같은 놈에겐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지금이 몇 시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긴 잠에서 깨어났으니 이제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실 시간이다.
나는 좁고 더러운 아파트 계단을 걸어 내려와 문을 걷어차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바깥세상으로의 탐험을 시작했다. 엄숙하고 거대한 빌딩 산맥을 사이에 두고 음울한 아스팔트 강물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똑같지 않지만 똑같은 풍경과 사람들.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약 기운에 취해 침대에 누워있고 꿈이 내 모든 감각을 속여 이걸 진짜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마셔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꿈도 목구멍을 지나 뱃속으로 내려가는 그 묘한 느낌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니까. 아! 잊어버리고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사실 난 알콜중독자다.
어쨌든 이 도시의 소음들과 몇몇 거슬리는 풍경들 때문에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졌다.
인도를 침범한 검정 재규어에 앉아 창문을 열고 담배를 태우는 중년 남자,
벤치에 기댄 채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는 후줄근한 차림의 늙은 남자,
망한 옷가게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채 남겨진 마네킹들,
외투를 파고드는 지독한 바람.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극도로 예민하게 변화시키고 결국에는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려면 쳇바퀴를 계속 돌려야 한다.
그럼 더 크고 훌륭한 쳇바퀴에 올라타게 된다.
이건 개 같은 딜레마다. 이걸 끊으려면 오직 죽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많이 죽였다. 주변 인물은 물론이고 주인공도 예외는 없었다.
대부분 자살이나 우연한 사고로 어이없게 죽는다. 아는 사람에게 내 글을 보여주면 왜 이런 식으로 주인공을 죽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고의는 아니었어.’
물론 거짓말이다.
조니가 운영하는 바는 지하철을 타고 세 정거장 거리에 있지만 난 그냥 걷기로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일도 싫고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는 것도 지겹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철 안에 들어가면 스테인리스 쓰레기통 안에 처박힌 기분이 든다. 2분 마다 뚜껑이 열렸다 닫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미칠 것만 같다. 귀가 얼어붙어서 깨질지언정 그건 못 참겠다. 4km가 넘는 거리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번은 늦은 밤, 지갑을 잃어버리고 집까지 2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온 적도 있다.
도중에 맹견을 만나(어떤 머저리가 실수로 목줄을 놓친 것 같다.) 물려 죽을 뻔했지만 차가 쌩쌩 달리는 왕복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내가 죽고 싶어 환장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맛탱이가 간 거겠지.
1시간쯤 걸어 조니가 운영하는 바에 도착했다. 조악한 네온사인 간판과 중세시대 성문을 떠올리게 하는 육중한 철문. 나는 코뚜레처럼 생긴 철문 손잡이를 두 번 두들기고 문을 열었다. 바 너머에는 조니가 등을 보인 채 선반에 놓인 술병들을 조심스럽게 정리하고 있었다.
“마티니 한잔 줘.”
나는 외투를 벗으며 말했지만, 녀석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이 돼지!”
그제서야 조니는 고개를 돌렸다.
“이봐! 말라깽이. 얼마 전 일은 벌써 잊었어?”
“뭔 소리야?”
나는 진심으로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 날 너 때문에 퇴근이 1시간이나 늦어졌다고.”
“뭐?”
그는 양철통을 들어 바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부터 토하려거든 여기다 해. 그리고 너에게 줄 마티니는 없으니까 오늘은 다른 가게를 알아보던가.”
젠장. 마티니를 마실 수 없다니.
그제야 셔츠 소매에 묻은 얼룩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단골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게다가 여기까지 오는 데 3시간이나 걸렸어. 걸어서 왔다구.”
물론 과장된 것이란 건 알고 있겠지만 내 말에 조니는 좀 누그러진듯 했다. 녀석은 못이기는 척 지거를 꺼내 들고 칵테일을 만들 준비를 했다. 보기와 다르게 속은 물렁물렁한 녀석이니까. 조니는 좋은 놈이고 녀석도 나를 좋아한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나는 바 오른쪽 끝자리로 향했다. 묵직한 레밍턴 타자기가 놓인 나의 지정석.
이 자리엔 나 말고는 아무도 앉지 않는다. 타자기 앞에는 작은 글씨로 안내문이 붙어있다.
‘주문하기 전에는 타이핑 금지’
나는 마티니를 기다리며 레코드가 빽빽하게 꽂힌 선반 바로 위에 걸린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 유별나다. 그림이 주는 고독한 정서나 색감... 뭐 그런 것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 호퍼는 젊은 시절 첫 번째 그림을 판 이후 성공할 때까지 10년간 단 한 작품도 팔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안 이후 그와 그의 그림들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신인문학상을 타고 이듬해 장편소설을 낸 후 8년째 술만 퍼마시고 있으니 어쩌면 그가 잘 풀린 시기와 맞아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터무니없는 미신이다.
하지만 당신 주머니에도 은밀한 미신 한 개쯤은 들어 있을 것이다.
쉐이커를 흔들던 조니는 어느새 터벅터벅 걸어와 필스너 잔에 담긴 푸른 음료를 내게 내밀었다. 마티니가 아니라 블루하와이였다. 나는 덜컥 짜증이 났다.
“장난해? 마티니를 주문했잖아!”
“서비스야. 대신 오늘은 3잔 이상 마시지 마.”
“이봐! 진지하게 말하겠는데 난 이런 입가심 음료로...”
“그럼 당장 나가.”
조니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손가락으로 철문을 가리켰다. 녀석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나온 걸 보면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다. 나는 잠자코 블루하와이를 건네받았다. 친절한 조니는 바짝 말린 바나나가 담긴 그릇도 내밀었다. 세상에! 그는 정말 좋은 엄마다.
나는 블루하와이를 한 모금 마셨다. 물론 마티니의 향이 그리웠지만 겨울에 마시는 블루하와이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특유의 청량함과 잔을 내려놓을 때 얼음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도 좋았다. 나는 그걸 맥주 마시듯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켰다. 뱃속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부르르 떨자, 조니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한잔 째라는 신호를 줬다. 젠장! 나는 타자기를 내 가슴 쪽으로 끌고 왔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 느낌이 사그라지기 전에 당장 뭐라도 두들겨야 했다.
“조니! 그 이야기 알아?”
“또 뭐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기로 마음먹었대.”
“그래서?”
“그래서... 뭐 평생을 벙어리로 살았다나.”
조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약속은 지킨 거네.”
“그런 셈이지.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인간이야.”
“오늘 주인공은 벙어리인가?”
“아니. 그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