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치곤 글이 좀 많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실 분들에게 미리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폰 사내카페 점장 스프링필드는 여섯시가 넘도록 한구석 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업은 벌써 집어치운지 오래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손님들은 눈으로 시계바늘을 밀어 올리다시피 다섯 시를 기다려 후다닥 나가 버렸다.
"스프링필드는 안나가니?"
이제 마감을 해야 할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투의 카리나의 말에, 스프링필드는 정갈하지만 어딘가 구겨지고 더렵혀진 작업복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 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나가야죠."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그녀는 어슬렁 일어섰다. 그리 할 일도 없기에 관물대 문을 열고 두 손을 끝에서부터 가만히 원래 복장에 가져다댔다. 전투에 나가지 않은 지 꽤 됬던지라 그저 새옷냄새만 물씬 날 뿐이다. 그녀는 걸려있는 자신의 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싸우기위해 왔을때부터 입었던 옷을, 전투대신 군수를 돌 때도 꾸준히 입었던 옷을 바라본다. 그리곤 문득 가슴 깊숙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려다보았다
절망! 이건 분명히 절망이다!
스프링필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옷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이번엔 거울에 비쳐진 한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스프링필드의 눈을 마주 쳐다보는 그 여인은 얼굴의 온 감정장치를 이상스레 히물히물 움직이며 입을 비죽거려 웃고 있었다.
그것은 약자의 얼굴을 한 여사냥꾼이였다.
볼품없는 총에, 탄약조차 제대로 들어있지 않았고 힘조차 약하여 무엇하나 제대로 사냥하지도 못하며 임무조차 제대로 완수할 수 없는 그러한 여사냥꾼.
히드라? 그건 용기가 부족하다.
만티코어? 힘이 모자란다.
스카웃? 너무 날쌔어서.
E.L.I.D? 그놈들은 너무 많다.
디너게이트? 디너게이트. 그래, 그놈 쯤은 꽤 때려 잡음직하다. 그런데 그것마저 몫에 돌아오지 않는다. 사냥꾼이 너무 많다. 디너게이트보다도 더 많다.
그래도 무어든 들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인은 바위 잔등에 무릎을 꿇고 앉아 냇물에 손을 씻는다. 파란 물 속에 금속녹이 잠겼다. 끈끈하게 여인의 손에 묻었던 녹이 타르보다 더 진하게 우러난다.
무엇인가 때려잡은 모양이다. 히드라? 만티코어? 스카웃? E.L.I.D? 디너게이트?
그런데 여인이 들고 일어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부품. 그것이 어떤 적의 부품인지는 여인 자신도 모른다. 여인은 그 적의 머리도 꼬리도 못 보았다. 누군가 한바탕 쓸어버리고 버린 것을 주워 오는 것이었다.
스프링필드는 옆에 놓인 비누를 집어 들었다. 마구 두 손바닥으로 비볐다. 우구구 까닭모를 울분이 끓어 올랐다.
*
저만치 복도 막다른 곳에, 볼품없어 어떤 숙소에도 넣어놓지 않는 2성가구들로 가득 찬 스프링필드의 숙소 방문이 보였다. 그녀는 때에 절어서 마치 가죽 끈처럼 된 헝겊이 달린 문걸쇠를 잡아 당겼다. 손가락이라도 드나들만치 엉성한 문이면서 찌걱찌걱 집혀서 잘 열리지 않았다. 아래가 잔뜩 잡힌 채 비틀어 진 문틈으로 다른 여자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하나! 박하나!"
미치면 목소리마저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이미 근엄하면서 진중한 그 목소리가 아니고, 쨍쨍하고 어쩡쩡하게 소녀같은 어떤 딴 사람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스프링필드의 얼굴에 걸레 썩는 냄새 같은 것이 확 풍겨왔다. 그녀는 문안에 들어선 채 우두커니 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미이라를 본 일이 있었다. 그건 꼭 솜 누더기에 싸놓은 미이라였다. 금빛 머리카락은 한 오리도 제대로 놓인 것이 없었다. 그대로 수세미였다. 웰로드는 벽을 향해 돌아누워서 마치 딸국질처럼 어떤 일정한 사이를 두고, 박하나 박하나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해골 같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쨍쨍한 소리가 나오는지 이상하였다.
스프링필드는 한구석으로 가 털썩 벽에 기대어 앉아버렸다. 가슴에 커다란 납덩어리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정말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눈을 꼭 지리 감으며 애써 침을 삼켰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저녁 때 일터에서 돌아오면 웰로드가 알아듣건 말건 그래도 '지금 돌아왔어요.' 하고 인사를 하곤 하였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것마저 안하게 되었다. 그저 한참 물끄러미 굽어보고 섰다가 그대로 자기자리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컴컴한 구석에 앉아 있던 IDW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밝고 시끄럽던 그 옛날모습은 어디에 가고 처참한 몰골로 몽유병자처럼 스프링필드의 앞을 지나 나갔다. 부엌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분명 벙어리는 아닌데 IDW는 말이 없었다.
"왔어요?"
스프링필드는 누가 꼭대기를 쿡 쥐어박기나 한 것처럼 흠칠했다.
바로 옆에 비슷한 몰골의 L85A1이 죽은눈을 실눈처럼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프링필드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체 하지메마시떼라고만 불리우는 이 쓰레기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웃어 보이려는 그녀의 얼굴이 도리어 흉하게 이지러졌다.
"박하나! 박하나!"
방가운데서 또 웰로드의 그 저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몇 년을 두고 들어와도 전연 모를 그 어떤 딴 사람의 목소리.
스프링필드는 또 눈을 감았다. 대체핵심코어가 팽팽히 헤어졌다. 두 주먹으로 무엇이건 콱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에 그녀는 어금니를 바스러져라 맞씹었다.
*
좀 춥기는 해도 스프링필드는 자신의 숙소보다 이 바위 잔등이 더 좋았다. 그래 그녀는 저녁만 먹으면 언제나 이렇게 기지 뒤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 위에 두 무릎을 세워 안고 앉아서 하염없이 휑 하게 빈 황무지를 바라보며 저녁을 기다릴 뿐이다. 어느 거리 쯤인지 잘 분간 할 수 없는 저 밑에서 말라비틀어진 식물뭉치가 핑그르르 돌고 멈췄다가 또 핑그르르 들고는 멈추곤 하였다.
스프링필드는 그저 언제까지나 그렇게 그 풀떼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위 잔등이 차츰차츰 식어왔다. 마침내 다 식고 겨우 스프링필드가 깔고 앉은 그 부분에만 약간 온기가 남았다. 이제 조그만 더 있으면 밑이 시려올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하는 수없이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일어섰다. 오래 꾸부려 붙이고 있던 두 다리가 저렸다, 두손을 작업복 호주머니에 깊숙이 찔렀다. 그녀는 밤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바라보던 황무지보다 더 화려하게 별들이 뿌려져 있었다. 스프링필드는 그 많은 별들 가운데서 북두칠성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선을 눈이 닿는 데까지 연장시켰다. 그렇게 정북을 향하여 한참이나 서 있었다. 자신이 인정받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때가 눈앞에 떠올랐다. 자신감에 부푼 체 든 총까지, 아니 그 총에 묻어있던 먼지 한 톨까지도 선히 볼 수 있었다.
으스스 몸이 떨렸다. 한기가 전기처럼 발끝에서 튀어 콧구멍으로 빠져 나갔다. 스프링필드는 크게 재채기를 하였다. 그리고 또 한 번 부르르 몸을 떨며 바위 밑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기지 안으로 들어섰다.
"박하나!"
스프링필드는 멈칫 섰다. 낮에는 이렇게까지 멀리 들리는 줄은 미처 몰랐던 웰로드의 그 소리가 복도 저 끝편에 까지 들려왔다.
"박하나!"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복도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시 발을 옮겨 놓았다. 정말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건 다리가 저려서만이 아니었다.
"박하나!"
스프링필드가 그의 숙소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그만치 그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안된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목소리는 말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옛날 1티어 권총 장군님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렇게 정신 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웰로드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던 말이었다.
보이스 추가, 그리고 메타의 변화. 그것은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도 웰로드에게만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난 모르겠다. 암만 해도 난 모르겠다. 보이스. 메타. 그래 내 목소리가 뭐가 거슬리다고 나에게 채운 서약반지도 뺐어간다는 말이야. 메타에서 밀려났다가 이런 쓰레기 가구짬 맞은 숙소에 날 처박았냐는 말이야..."
죽어도 전장에 돌아가고 싶다는 웰로드였다. 그리고는,
"이게 어딜봐서 전술인형이냐, 고철더미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며 한숨과 함께 무릎을 치며 꺼지듯이 풀썩 주저앉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스프링필드는
"그래도 한때 1티어였잖아요. 메타가 바뀌면 자연스레 지휘관님이 찾으시지 않을까요?"
하고,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숙해지는것이다. 메타 역시 바뀌고 바뀌어 다시 좋은 날이 찾아올 것이다 같은 갖은 이야기를 다 예로 들어가며 웰로드에게 이해시키기란 우중이가 철혈포획을 제대로 수정하여 손보겠다는 개소리를 인식시키기보다도 몇 백 갑절 더 힘드는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했다. 그래 끝내 스프링필드는 웰로드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일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야 스프링필드에게도 웰로드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티어 권총탱의 정점에, 좋은 진형버프와 스킬, 장군님이라는 별명까지 좋은 것이란 것은 다 껴안고 살던 웰로드에겐 막대사탕으로 교환할 가치조차 못느끼는 가구들의 쓰레기장에 버려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을것이다.
"나도 내 목소리가 붙었다는게 기뻐서 울었다. 엉엉 울었다. 나를 신뢰하는 지휘관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려 달려갔다. 그런데 이꼴 좋다. 난 싫다. 아무래도 난 모르겠다. 뭐가 잘못 됐건 잘못 된 너머 세상이데 그래."
웰로드에게는 아무리 해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었다. 목소리를 얻었다고 명성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웰로드는 버려진 숙소로 넘어온 후로 단 하루도 이 '박하나'라는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렇게 지내오던 그 날, 강력하고도 압도적인 정규군의 출현과 말도 안되는 맷집으로 시작된 메타의 변화는, 끝내 스프링필드는 숙소 동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춘전아 이젠 정말 나의 시대다. 저것 봐라. 저렇게 강한 적들에게 이 권총탱 1티어가 나가야 하지 않겠나 야."
그때부터 웰로드는 완전히 정신이상이었다. 지금의 이 전술인형은, 그것은 이미 웰로드가 아니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그것이 스프링필드 자기의 동기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자신의 동기조차 알아 보지 못하는 전술인형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날부터 웰로드는.
"박하나! 박하나!"
하고 저렇게 쨍쨍한 목소리로 외마디 소리를 지를 뿐 그 밖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 스프링필드에게 있어서 지금의 웰로드는, 말하자면 자신의 동기생의 시체에 지나지 않았다.
*
"춘전!"
새삼스레 부르는 다른이의 소리에 스프링필드는 고개를 돌리며 브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도 한 번 재기해 보자. 제길, 남 다 싸우는데 우리라고 밤낮 이렇게만 살겠어? 근사한 가구도 한 채 사구, 장기판만한 숙소패에다 우리들의 이름 석자를, 제길 장님도 보게 써서 대못으로 땅땅 때려박구 한 번 살아보자."
그리폰에 전입온지 몇 년이 넘도록 아직도 출전 한번 제대로 못 한 브렌이 언제나 술만 취하면 하는 수작이었다.
"그리고 보석도 더 모아서 숙소도 하나 더 사자고. 거기다 똥통이나 보관해놓게. 모든 새끼들이 아니꼬와서. 일이야 있건 없건 종일 보석이나 뿌리면서 복도를 들락날락해야지. 제길. 하하하."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은 브렌은 벌겋게 열에 뜬 얼굴을 하고는 황설수설한다.
"또 술 마셨군요."
자체 스펙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안쫒겨나고 웰로드 소대에 붙어있겠다고 아득바득 이를 갈면서 어거지로 궁둥이를 붙히는 브렌의 상황을 모르는것은 아니지만서도 이건 어디서 어떻게 마시는 것인지 거의 저녁마다 이렇게 취해 들어오는 브렌이 몹시 못마땅한 스프릴필드의 말이었다.
"어, 조금했어, 전우들이……."
그것도 들으나마나 늘 같은 대답이었다. 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 술 좀 그만 마시세요."
"전우들과 어울리면 자연히 마시게 되는 걸."
"글쎄 그러니까 그 어울리는 걸 좀 삼가란 말이에요."
"그럴 수도 없고. 하하하."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저 그렇게 어울려서 술이나 마시면 뭐가 되나요?"
"되긴 뭐가 돼. 그저 답답하니까 만나는 거고. 만나면 어찌 어찌하다 한잔씩 하며 이야기나 하는 거지 뭐."
"글세 그게 맹랑한 일이란 말이죠."
"그렇지만 춘전, 그런 친구들이라도 있다는 게 좋지 않아? 그게 시시한 친구들이라 해도. 정말이지 그놈들마저 없었더라면 어떻게 살 뻔했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 키만 멀데같이 크고 쓸 데도 없는 기관총 들고 다니는 가슴 큰 년, 지는 환영받는줄 아는데 아무도 관심조차 안 주는 년 그런년들. 무식한 년들, 참 시시한 년들이지. 죽다 남은 년들. 그렇지만 춘전, 그놈들 다 착한 년들이야. 최소한 남을 속이지는 않거든. 써먹을데가 없을 망정. 하하하하 전우, 전우."
브렌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향해 만취한 웃음을 내뿜으며 자신의 총을 내던진다.
"박하나!"
아랫목에서 웰로드의 소리를 질렀다.
스프링필드는 슬그머니 방 중앙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나 그렇게 웰로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눈만 껌뻑껌뻑 하고 있었다.
브렌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에 놓인 반쯤 깨진 전구에서 나오는 불빛이 거물거물 춤을 추었다. 브렌은 자신의 제복 주머니에서 술을 꺼내었다. 버려진 수 많은 인형들의 손을 거쳐가 손때가 잔뜩 묻은 싸구려 술병을 좋다는 듯 병나발을 잡고 거칠게 입 속으로 들이넣는다.
"이걸 마셔."
브렌이 자기가 마시던 술병을 스프링필드의 앞으로 내어 밀었다. 스프링필드는 그 여느 것보다 좀 더럽고 싸구려 향이 물씬 풍기는 술병을 바라보곤, 아무 소리도 없이 자신이 타놓았던 커피를 입가에 가져다 댄다. 브렌은 꺼질듯한 빛을 뿜는 전등 아래 무언갈 포기하지 않는 스프링필드의 어깨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호르륵 소리가 났다. 스프링필드는 얼굴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식을대로 식어 차디 찬 쓴 맛을 느끼곤 입에서 떼었다. 브렌은 들고있던 술병을 도루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야릇한 웃음이 -애달픈 아니 그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그런 미소가 천천히 흘러 지나갔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박하나!"
또 한 번 웰로드의 소리가 저 땅 밑에서 새어나오듯이 들려왔다.
"너는 내가 이렇게 술이나 마시는 게 못마땅하지?"
브렌은 반쯤 마신 술병을 자기의 눈앞에 가져다 그 짙은 병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답지 않은 행동이죠."
스프링필드는 여전히 차디 찬 커피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춘전, 너는 언제 코어가 뽑힐 지 모르는 체 커피나 타서 내놓는거랑 전장에서 싸워 공을 세워 인정받는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데?"
"……? 그야 후자가 좋죠. 그래서요?"
그래서 너는 내가 내놓는 커피값도 못 버는 혐성이 잘 나갈 생각은 안하고 술이나 마시는거냐 하는 스프링필드의 눈초리가 번뜩 브렌의 면상을 때렸다.
"그래서 난 술을 택했어."
"뭐가요?"
"너는 날 오해하고 있어."
"……?"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내 캐릭터답지도 않게 술이나 사서 마시겠어. 어쩌다 친구들이 사주는 것이니 마시는 거지. 나도 알고 있어. 넌 언젠가 너를 소대에 채용해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묵묵히 너의 일을 한다는 것을, 그렇지만 너가 그렇게 일을 한다해서, 한사코 같이 마시자는 친구들의 호의, 아니 그건 호의도 채 못되는 싱거운 수작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것을 굳이 뿌리치고 돈도 안되고 의미도 없는 일을 계속 할 까닭도 없지 않아? 이상한 놈들이지. 술 사주고 전투식량도 주는데도 보석은 안주거든."
브렌은 뱅글뱅글 돌리는 술병 안에 찰랑거리는 내용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쨌든 당신도 이제 좀 정신 차려 줘야지 않겠어요. 당신 소대에서 유일하게 전투에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 분이니까요."
"정신 차려야지. 그렇지 않아도 이달 안으로는 어찌되든 간에 결판을 내고말 생각이야."
"어디 새로운 일거리를 구해야죠."
"일거리? 너처럼? 커피값이나 되는 돈 받고 남의 허드렛일 해주는 군수지원같은 일이나 하라고?"
"그럼 뭐 별 뾰족한 수가 있는 줄 아시나요."
"있지. 남처럼 용기만 조금 있으면."
"……?"
어처구니 없는 브렌의 수작에 스프링필드는 그저 멍청하니 브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가엔 아직도 쓴 맛이 맴돌았다. 그녀는 식은 커피를 버리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용기요?"
"어, 용기."
"용기라니요? 설마 무슨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죠?"
브렌의 입가에는 좀 전에 자신의 술 대신 끝까지 자신의 커피를 고집한 스프링필드를 바라보던 때와 같은 야릇한 웃음이 또 소리없이 감돌고 있었다.
"아니지. 엉뚱하긴 뭐가 엉뚱해. 그저 우리들도 다른 인형들처럼 다 벗어 던지고 홀가분한 몸차림으로 달려보자는 것이지 뭐."
"벗어 던지고요?"
"어, 벗어던지고. 이딴 꼬라지에 힘도 없는 날 다시 찾아줄거라는 희망이건 다 벗어 던지고."
"...볼품없고, 힘도 없고, 실력도 없으니 다시 찾아줄거란 희망도 버리고요?"
"……"
"당신은, 당신은……."
"……."
브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만은 똑바로 스프링필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나 살자면 저도 벌써 훨 나아졌겠죠."
스프링필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나 라니?"
"원래의 제 자신을 다시 찾아줄거라는 희망을 버리면 말이에요!"
흥분한 그녀의 큰 목소리에 브렌은 지금까지의 시선을 앞으로 죽 뻗치고 앉은 자기의 발끝으로 떨구었다.
"나도 널 존경하고 있어. 고생하는 너를, 용케 이 고생을 참고 견디는 너를. 그렇지만 넌 약한 인형이야. 용기가 없는 거지. 너무 희망이 강해. 아니 어쩌면 심성이 약하면 약한 만치. 그만치 반대로 희망이란 가시는 여물고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
"희망이란 가시?"
"어. 가시. 희망이란 손끝의 가시야.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 희망? 그건 마치 잿더미를 모아 만든 인형같은거지. 탁하고, 검둥투성이인 잿더미 인형에 옷과 리본, 총을 새겨넣은. 검고 탁하지만 꼴에 인형이라고 인형행세는 하고 다니는. 네 자신에겐 네가 만든거니 소중하고 가치있어보이겠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건 그저 쓰레기일뿐이야. 바람만 조금 불면 휭 하고 날아가버리는 잿더미 쓰레기. 그렇지만 그 주인은 그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소중하다고 끈질기고 힘들게 지키려하지. 흥."
브렌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거기 문턱 밑에 둔 술병에 손을 뻗어 한모금 들이킨다.
"박하나!"
웰로드의 그 소리가 또 들렸다. 분명히 자가진단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저렇게 박하나, 박하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웰로드에게는 기억동기화처럼 생리화 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스프링필드는 비스듬히 모로 앉은 브렌의 옆 얼굴을 한참이나 노려보고 있었다. 브렌은 브렌대로 퀭한 두 눈으로 깜박이기를 잊어 버린 채 아까부터 앞으로 뻗힌 자기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브렌에게서 눈을 돌려버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떨구어 턱을 가슴에 묻었다. 브렌은 술병의 술이 다 떨어질때까지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리고 또 말을 계속하였다.
"나도 너의 마음가짐은 잘 알아. 지금은 약해서 카페일이나 하지만 언젠간 너를 다시 불러주어 개조를 시켜주곤 널 다시 전장에 세워 화려한 전적을 남기게 해줄지도 모른다 생각하겠지 . 그렇지, 그런데 그런 희망 하나 품고 살기엔 치루는 희생이 너무 어처구니 없이 크고 많잖아! 당장 너만해도 그렇지. 밤낮으로 커피 내리고 일해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들도 없고, 비전투인원이라며 무시하고, 쓰레기장이나 하등 다를 것 없는 숙소에 처박아놓고, 개조를 받을 돈조차 모을 수 없는 돈이나 받고 카리나에게 부려먹혀지지.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하는데. 그런데 넌 그걸 잔뜩 찌푸리며 참고만 있어. 물론 개조비용도 없으니 그러는 수밖에 없는거지. 그거지. 바로 그게 문제야. 개조를 받아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는네 그 개조비용을 어떻게던 구해야지. 계속 3코어라 불리며 하대받으며 살아야 할 이유는 없는거라고. 기지 밖으로 쫒겨날 순 없으니 남아있어야 하고, 남자니 개조를 받을 돈과 자원이 필요하고. 필요한 돈이니까 구해야지. 왜 우리만이 쓸모없는 희망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해. 희망이란 서로 신뢰를 해야 생기는 것인데, 지휘관이 너를 신뢰라도 하는것 같아?"
브렌은 얼굴을 번쩍 들며 다 마신 술병을 집아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술병은 저 구석으로 또르르 굴러내려간다.
스프링필드는 여전히 턱을 가슴에 푹 묻은 채 묵묵히 앉아 자신의 전용탄을 만지작거린다. 전용장비를 받아 더 강해졌으니 자신을 찾아줄거라는 희망을 품고 일 한지 몇 년이 다되어간가. 그러나 이런 장비로는 자신을 찾아 싸우게 해주지 않을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번번이 언제라도 장착하여 쏠 수 있도록 번들번들 닦아놓는 그녀였다.
"박하나!"
웰로드는 또 몸을 뒤채었다.
"그건 억설이에요."
철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문지를 바른 맞은편 벽에, 쭈구리고 앉은 IDW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빛쳐 있었다. 꼽추처럼 꼬부리고 앉은 고양이인형 그림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괴물스러웠다. 스프링필드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감은 눈앞에 몇 개월 전 잔뜩 들뜬 체 기지 밖을 나서던 IDW의 모습이 선히 나타났다. 잡다한 일을 닥치는대로 하여 모은 돈과 자원을 긁어모아 자신을 위해 나온 개조를 하러 간다고 신이 난 체 난리법석을 떨었던 고양이. 나머지 인원들은 부러워하며 축하해주기 바빴다. 그렇게 IDW는 숙소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IDW가 개조를 받는 일은 없었다. 개조시켜달라고 자원을 들고 지휘관에게 간 IDW는 개조성능이 약하다는 소식을 들은 지휘관의 판단으로 스스로를 위해 번 돈과 자원을 모조리 빼앗기곤 그 자원으로 나강 리볼버가 개조받은 것이었다. 그리곤 여전히 쓰레기통같은 숙소에 버려졌다. 지금 그녀 앞에 쭈구리고 앉은 인형은 그때의 그 인형이 아니였다. 무슨 둔한 동물처럼 되어버린 그 인형. 이제 아무런 희망도 가져보려고 하지 않는 그 인형. 스프링필드는 가만히 눈을 떴다.
"박하나!"
그녀는 흠칠 놀라 환상에서 깨어났다.
"억설? 그런지도 모르지."
한참이나 잠잠하니 앉아 어두운 전구불빛을 바라보던 브렌의 맥빠진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신 말로는 꼭 다시 전장에 나가기 위해선 지휘관님이 아닌 저희 돈으로 개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곤 뭐에요."
"지휘관이 우리같은 놈들에게 신경이라도 쓸 꺼 같아? M14같이 원래도 좋은 애들이나 개조시켜주고는 물고빨고 바쁘지. 우리가 코어반납조차 안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자체를 잊어버린것밖에 안되는 거야. 코어반납하라고 해체기에 들어갈 바에야 어떤 수를 쓰더라도 하루빨리 개조를 받고 전장에 나가야만 하는거지."
"그것이 바로 억설이란 말이에요.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비틀려서 하는 억지란 말이죠."
"글쎄. 마음이 비틀렸다라. 그건 아마 사실일지 모르겠네. 분명히 비틀렸어. 그런데 그 비틀리기가 너무 늦었어. 한순간에 몰락한 웰로드가 저렇게 미치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 아무것도 모르고 미친듯이 일해놓고 지휘관에게 다 뺐긴 그 시끄럽던 IDW가 침묵하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 아니 그보다도 더 전에,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L85A1이 쓰레기통에 박히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
"……."
"……그 보다도 더 전에 썩 전에 비틀렸어야 했을지 모르지. 제조되면서부터 비틀렸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브렌은 푹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후르르 떨고 있었다. 스프링필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지도 몰라요. 그때보다 지휘부엔 저희가 일한 덕에 쌓인 자원들이 넉넉하게 쌓여있으니까요."
"넉넉하게 쌓여있다라. 과연 그 넉넉한 자원들 중 우리에게 써줄 자원은 얼만큼 있을까?"
브렌은 눈물이 글썽하니 고인 눈을 천장을 향해 쳐들며 자기 자신을 비웃듯이 허허 하고 웃었다.
"박하나!"
또 웰로드였다. 브렌은 아래로 눈을 돌렸다. 스프링필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꺼질듯 말듯하던 전등은 이내 퍽 소리와 함께 끊겼다. 방안의 모든 그림자들이 멈추곤 온 숙소를 뒤덮었다. 숙소 전체가 그대로 기울거리는 것 같았다. 그것 뿐 조용했다. 밤이 꽤 깊은 모양이었다. 세상이 온통 잠들고 있었다.
*
점심을 못 먹은 배는 오후 두 시에서 세 시 사이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스프링필드는 그라인더에 잠시 손을 뗐다. 저쪽 구석에 돌아앉은 한양조를 바라보았다. 보리차라도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두 잔까지는 한양조를 시켜서 가져오랄 수 있었으나 세 번까지는 부르기가 좀 미안했다. 그녀는 걸상을 뒤로 밀고 일어섰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출입문으로 나갔다. 복도의 풍로 위에서 커다란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보리차를 찻잔 하나 가득히 부었다. 구수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스프링필드는 뜨거운 찻잔을 손가락으로 꼬집어 들고 조심조심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후 불었다. 마악 한 모금 들이마시는 때였다.
"스프링필드 씨, 전화에요."
한양조가 그녀 앞에 와 알렸다. 스프링필드는 얼른 찻잔을 책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갔다. 수화기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리폰 사내카페 점장 스프링필드입니다. 네? 헌병대요?…브렌이요? 네 같은 숙소입니다. 무슨?……네? 네? 브렌이요? 곧 가겠습니다. 네, 네."
그녀는 수화기를 걸었다. 그리고 걸어놓은 수화기를 멍하니 내려다보고서 있었다.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쏠렸다.
"무슨 일입니까. 브렌에게 무슨 일이라도?"
커피완두를 고르고 있단 G36이 악의없는 날카로운 눈으로 물어본다.
"네? 네, 저 G36씨? 잠깐 카페좀 맡길께요."
그리곤 마시던 보리차를 그대로 남겨둔 채 사무실을 나섰다.
영문을 모르는 동료들이 서로 옆의 사람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는 것이었다.
스프링필드는 한번도 그리폰 헌병대에 호출을 받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며칠전 밤에 취해서 지껄이던 브렌의 말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불안했다. 그런들 설마하고 마음을 다시 먹으며 철호는 헌병대 문을 들어섰다.
재물강도죄
형사에게도 브렌의 사건 내용을 들은 스프링필드는 앞에 앉은 쇼티의 얼굴을 멍청이마냥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핏기가 가셔가는 그녀의 얼굴은 표정을 잃은 채 굳어가고 있었다.
신규 인형들을 뽑기위해 준비시킨 자원들을 눈 깜빡할 사이에 총을 들이밀고 가져갔다는 것이다.
스프링필드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그저 브렌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내린 이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 춘전."
브렌은, 등신처럼 서 있는 프링필드가 도리어 민망한 듯이 조용히 말했다.
"지휘관님 명령이야. 해체해."
쇼티가 문간에 지키고 서 있는 롱티를 돌아보았다.
브렌은 그녀에게로 오는 롱티를 향해 마주 걸어갔다. 브렌은 해체실로 끌려나가다 말고 멈춰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보았다.
"미안하다 스프링필드. 개조를 위해선 뭐든지 할 준비가 되었다 생각했는데, 차마 같은 동료를 쏠 수는 없겠더라고."
뒷문이 쾅 닫혔다. 스프링필드는 그렇게 브렌이 사라진 뒷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참 이상해, 훔쳐갈 거면 다 훔치는게 더 이득일텐데 왜 일부분만 가져간거지?"
조사를 한옆으로 밀어놓으며 쇼티가 중얼거렸다. 스프링필드는 거기 걸상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야, 그래도 꽤 많이 훔쳐간거잖아, 그정도 양이면 한 두 명 정도는 충분히 개조받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더만?"
그녀의 귀에는 롱티의 말소리가 아주 멀었다.
"뭔가가 어설펐어. 정말 안들키고 싶었으면 창고관리자도 쏴버리고 숨는게 더 좋았을텐데."
여전히 그녀는 말이 없었다.
헌병대에서 나온 스프링필드는 어디를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술취한 사람 모양 휘청거리는 다리로 자기 숙소에 가는 복도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숙소에 들어 섰다.
"박하나!"
그녀는 거기 멈춰 섰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그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숨을 크게 내쉬는 스프링필드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코 속으로 흘러서 찜찜하니 목구멍을 넘어갔다.
"바카나, 바카나, 바카나! 대체 뭐가 그렇게 말이 안된다는 거야?! 이미 현실이 되었잖아!"
그녀는 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언제나 존대를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무례하게 말을 하였다.
"어디에 다녀오셨나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G36이 그곳에 있었다. 같이 카페에서 일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뛰어난 상능으로 지휘관의 총애를 받았으며, 제일 먼저 개조되어 아직까지도 전장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녀다. 약지에 끼어진 서약반지에 반사되는 빛에 스프링필드는 황급히 상냥한 미소를 지으려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려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어서 지휘관님께 가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휘관님 한테요?"
"네."
"갑자기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의 개조를 준비하는것 같았어요."
"개조요?"
스프링필드는 눈앞이 아찔했다.
브렌이 잡혀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런 희소식이 들려온 것에 대해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좀전에 아찔했던 정신이 사르르 풀리며 온몸의 맥이 쏙 빠져나갔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머릿속이 깨끗이 개이는 것을 느꼈다.
항상 술에 취한 체 돌아오고 일조차 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알고 지내던, 같이 버림받은 처지에 놓여있어 같은 장소에 일하던 G36보다 훨씬 더 동질감을 느꼈던 동료가 사실상 처형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깨끗이 머릿속이 개인만큼 공허감이 밀려왔다.
"어딜 가시나요?"
G36이 돌아보았다.
"개조..."
"개조받으실 자원도 없으시지 않으신가요?"
"……자원."
그녀는 다시 문안으로 들어섰다. 우두커니 발부리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여기있습니다."
자원교환권이 담긴 봉투를 G36이 내밀었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평상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프링필드는 같이 카페에서 일하고 있지만 자신과 다르게 신임받고 사랑받으며 전장에 나가는 그녀에게 묘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묘한 우정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박하나!"
웰로드가 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동료의 존재가 사라진것에 대한 슬픔을 느낄세도 없이, 스프링필드는 교환권을 든 체 급하게 뛰쳐나갔다. 그녀의 발에 어젯저녁 그녀가 버리려다 만 커피가 그녀의 발에 채여 쏟아졌다.
"박하나!"
쏟아진 커피도, 웰로드의 절규 비슷한 외마디도 뒤로한 체 스프링필드는 달려나갔다.
*
그녀는 퇴역당했다.
"......."
G36의 말은 거짓이 아니였다. 다만 그 개조준비가 그녀를 위한것이 아니였던것 뿐이다. 기억조차 나지 않은, 지휘부를 벗어나 인간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도로를 휘청휘청 걸어서 넓은 사거리로 나온다. 왜 그랬냐고 묻지도 못했다. 자신을 부른 이유는 그저 브렌을 계기로 잊혀진 전술인형들 중 대체핵심을 가지고 있는 인형들로부터 해체퇴역시켜 한양조를 개조시키려는 것 뿐이였다. 희망을 품었었지만, 무엇인가 결국 올 것이 왔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이제는 그리 서두를 필요도 없어졌다는 생각만으로 스프링필드는 사거리에서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사거리를 지나 길거리를 걸어갈 뿐이다. 자전거가 휙 그녀의 팔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멈춰 섰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는 전에 군수지원으로 일했던 공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공장으로 가봐야 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길을 건넜다. 또 한참 걸었다. 그녀는 또 멈춰 섰다. 또 걸었다. 그저 걸었다. 목표도 없으면서 그녀의 발길은 자동기계처럼 상가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문방구점, 라디오방, 사진관, 제과점. 그녀는 길가에 늘어선 이런 가게의 진열장을 하나 하나 기웃거리며 걷고 잇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그녀는 또 우뚝 섰다. 스프링필드는 거기 눈앞에 걸린 간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한 형태의 간판에 전당포라고 써 있었다. 스프링필드는 갑자기 자기 주머니의 무거운 감촉을 느꼈다. 퇴역당했을때 어느 누구도 반납을 신경쓰지 않은 체 자신과 같이 내보냈던 자신의 전용탄이었다. 그녀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탄환 다발이 만져졌다.
그녀는 전당포 간판이 걸린 층계 이층으로 올라갔다.
대머리의 전당포 주인은 탄을 둘레둘레 돌려보며 자세히 살펴본다. 주인은 때때로 흠 하면서 이젠 구하기조차 힘든 구형무기의 탄을 흥미롭게 관찰해가고 있다. 스프링필드는 매시근하니 잠이 왔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흥미롭네요, 이런 오래된 탄은 구하기 힘들텐데."
그러고는 어느정도 되는 돈다발을 책상 위에 놓았다.
"조금만 더 쳐주세요."
"이것도 높게 쳐준겁니다."
"제발요..."
"안됩니다. 이런 물건을 사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총기 마니아들에게는 확실한 어필이 되잖아요."
"안됩니다. 되팔았을때 드린 돈보다 덜 나올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현찰로 즉시 드리는 거잖습니까."
"현찰요? 이렇게 적은 돈을 가지고 말하는 거에요?"
"그래도 안됩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지요."
하는 수 없었다. 스프링필드는 전당포를 나왔다. 또 걸었다. 대체핵심이 뽑힌 자리가 멍하니 아픈 것같기도 하고 또 어찌하면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한손으로 그 자리를 쓸어보았다.
그렇게 얼마를 걷던 스프링필드는 거기에 또 전당포 간판을 발견하였다. 역시 이층이었다.
"안될텐데요."
거기 주인장도 꺼렸다. 스프링필드는 괜찮다고 우겼다. 결국 처음보다는 조금 높게 값을 매겨진 체 자신의 전용탄이 팔렸다. 주머니가 허전했다. 간간이 길을 걸으면서 아직도 쩔그럭거리는 탄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다발만이 그 주머니에 있을 뿐이다. 무엇인가가 있었지만, 주머니가 허전했다. 바로 그때에 번쩍하고 거리에 전등이 들어왔다. 눈앞이 한 번 환해졌다. 다음 순간에는 어찌된 셈인지 좀 전에 전등이 켜지기 전보다 더 거리가 어두워졌다. 스프링필드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다시 떴다. 그래도 매한가지였다. 이건 뱃속이 비어서 그렇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새삼스레, 점심도 저녁도 안 먹은 자기를 깨달았다. 뭐든가 좀 먹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정작 먹고싶은것은 음식이 아니라 술이였다. 벌써부터 마인드맵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다시 음식생각을 했지만 또한번 오한이 전신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다리가 약간 떠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속히 술을 찾아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술집 쪽으로 허청허청 걸었다.
"술 한병."
무슨 음식 이름이기나 한 것처럼 한마디 일러 놓고는 그녀는 식탁 위에 엎드려 버렸다. 그리곤 술병이 탁자에 내려놓아지는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돈을 내고는 브렌이 가져왔을법한 술병을 들고 입안에 쑤셔넣는다.
술집 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머리가 아찔했다. 그녀는 일어섰다. 그리고 문밖으로 급히 걸어 나갔다. 술집 옆 골목에 있는 시궁창에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울컥하고 입안엣 것을 뱉았다. 기묘하게도 입가엔 술의 쓴맛대신 커피의 쓴 맛이 감돌았다. 자신이 타던 커피가 아닌, 태울대로 태운 커피의 쓴 맛. 스프링필드는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일어섰다. 코어를 뺀 자리가 쿡 한 전 쑤셨다. 그러자 뒤이어 거기서 호응이나 하듯이 관자놀이가 또 쑤셨다. 스프링필드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엿다. 이제 빨리 어디로든 가 누워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녀는 다시 큰길로 나왔다. 마침 택시가 한 대 왔다. 그는 손을 한 번 흔들었다.
그녀는 던져지듯이 털썩 택시 안에 쓰러졌다.
"어디로 가시죠?"
택시는 벌써 구르고 있었다.
"그리폰 PMC."
자동차는 스르르 속력을 늦추었다. 그리폰으로 가자면 차를 돌려야 하는 까닭이었다. 운전사는 줄지어 달려오는 자동차의 사이가 생기기를 노리고 있었다. 저만치 자동차의 행렬이 좀 끊겼다. 운전사는 핸들을 잔뜩 비틀어 쥐었다. 운전사가 몸을 한편으로 기울이며 마악 핸들을 틀려는 때였다. 뒷자리에서 스프링필드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S전당포로 가."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팔았던 전용탄이 생각나서였다. 운전사는 다시 휙 핸들을 이쪽으로 틀었다. 운전사 옆에 앉아 있는 조수 애가 한 번 철호를 돌아보았다. 스프링필드는 뒷자리 한구석에 가서 몸을 틀어 박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차는 복잡한 슬럼상가를 돌고 있었다. 그때에 또 뒤에서 스프링필드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X술집으로 가."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탄은 이미 팔렸는데 하고. 이번에는 다행히 차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그냥 달렸다.
"×술집 앞입니다."
그녀는 눈을 떴다. 상반신을 번쩍 일으켰다. 그러나 곧 또 털썩 뒤로 기대고 쓰러져버렸다.
"아니야. 말도 안되"
"×술집입니다. 손님."
조수 애가 뒤로 모을 틀어돌리고 말했다.
"바카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이 말이 안되는 겁니까"
"글세 바카나."
"허 참 딱한 아가씨네."
"……."
"취했나?"
운전사가 힐끔 조수 애를 쳐다보았다.
"그런가 봐요."
"어쩌다 오발탄같은 소녀가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말이 안된다는게."
운전사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스프링필드는 까무룩히 잠이 들어가는 것 같은 속에서 운전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전술인형, 그리폰 PMC소속 전술인형, 싸워야지 돈을 벌 수 있는 PMC의 인형, 싸우지 못하는 인형, 잊혀진 체 쓰레기통에 박힌 인형, 그럼에도 희망같은 거에 온 시간을 건 인형, 그리곤 예정대로 퇴출당한 인형. 너무 많구나. 그래요 전 당신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르겠네요. 분명 보이는 목표물을 향해 쐈을 터인데 말도 안되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네요. 말도 안되죠. 그런데 전 말도 안되는 일이 계속 일어나네요―.
스프링필드는 점점 더 졸려왔다. 저런 것처럼 머리의 감각이 차츰 없어져 갔다.
"바카나."
그녀는 또한번 귓가에 웰로드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푹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차가 네 거리에 다다랐다. 앞의 교통신호대에 빨간 불이 켜졌다. 차가 섰다. 또한번 조수 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체 뭐가 말이 안된다는 거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스프링필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따르릉 벨이 울렸다. 긴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내린, 커피가 아닌 싸구려 술이 그녀의 와이셔츠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채, 교통 신호대의 파란불 밑으로 차는 네 거리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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