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하자면 굉장히 논란이 있는데
영조가 화협옹주를 싫어했다는 대목이
왜냐하면 그게 하필이면 한중록에만 나옴.
정작 실록에서는 영조가 화협 옹주가 진 빚을 탕감해주는 부분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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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당상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화협 옹주방(和協翁主房)에서 각전(各廛)에 외상(外上)을 진 것이 매우 많습니다. 서원(書員) 전세범(全世範)이
시민(市民)들을 침학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만약 무겁게 감죄(勘罪)하지 않으면 뒷사람을 징계할 수 없게 됩니다."
하고, 또 현목(玄木) 20동(同)을 화협 옹주방으로 보내어 즉시 환상(還償)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세범의 한 짓이 매우 무상(無狀)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징속(徵贖)시키지 말고 무거운 쪽을 따라 엄중히 다스리게 하라."
화협 옹주방의 외상을 갚아주고, 균역을 실시한 뒤의 폐해에 관해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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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싫어하는 딸이라서 찾지 않았다는 한중록의 기록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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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화협 옹주(和協翁主)의 집에 거둥하려 하자, 부교리 채제공이 재차 차자를 올려 간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중략)
임금이 특별히 취소하고 초모(貂帽)를 하사하였다.
옹주의 집에 들어가 밤이 깊도록 궁으로 돌아가지 않자, 약방·정원·대신이 모두 청대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에 비로소 어가를 돌리었다.
화협 옹주의 집에 거둥하려 하자 채제공이 간했으나 따르지 않고 신하들을 벌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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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서는 집에 찾아가서 동이 틀 무렵까지 머무르다가 돌아가기도 하는데다가
화협 옹주가 죽은 날에는 집에서 오랫 동안 머무르고 제삿날에도 굳이 옹주의 집을 들리는 모습을 보임.
한중록에 나오는 것과 상당히 상치되는 실제 기록.
사실 00년대 초반에는 한중록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상당히 많았음.
최근에 다시 한중록이 주목을 받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전히 한중록의 기록을 믿기 힘들다는 여론이 많은데
왜냐하면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이유는 궁극적으로
사도 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영조에게 있고
그날 일물(뒤주)를 가져오고 사도 세자를 집어넣는데 가담한 자신의 아버지 홍봉한이 책임이 없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것도 있음.
일단 한중록이 그런 의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말년에 저술된데다가
근본적으로 한중록 자체가 판본에 따라 내용이 다른 대목이 상당히 많음.
그러다보니 사도 세자에 대한 광증이나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구는 장면의 경우에는
대개 영상화, 매체화 할때는 극적인 요소다보니 한중록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한중록 자체는 다른 기록과 상당히 상치되는 부분이 더러 있어서
있는 그대로 믿기 힘든 부분이 많음.
덕분에 한동안 노론 음모론자들이 한중록을 폄하하기도 해서 꽤 난감하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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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조선시대 왕 중에선 선조/인조 다음으로 영조를 싫어함. 군사부일체인데 아비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가 왕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들 무슨 소용임. | 22.10.01 23:2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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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부일체를 오해하는 거 같은데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면 오히려 아버지로써의 역할보다 임금으로써 냉철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로 후계자를 계승하는 임금의 역할이 아버지의 역할보다 더 중요하게 이해됐음. 그래서 영조가 그렇게 해도 아무도 안 나선 거. | 22.10.01 23:2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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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긴 한데 자기 늦둥이한테 저러는 거 보면 인간으로선 소름이 끼침.. | 22.10.01 23:3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