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칼부림 中, 동생 슈르가치와 장남 추영에 대한 살해를 거론하는 누르하치. 16세기 말 여진과 이후 17세기의 후금에서는 '대계'를 위해 가족을 죽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건주의 작은 버일러에서 시작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나중에 가서는 청의 개국시조로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호칭되는 누르하치는, 여느 건국군주들처럼 여러 충직하고 뛰어난 장수들을 본인의 산하에 많이 두었다.
수많은 누르하치 산하 장수들 중 가장 뛰어나고도 충직했던 다섯 명은 통칭 다섯 대신(sunja amban)에 선정되어 누르하치의 정무와 군사를 도왔고, 후금 건국 이후에는 구사이 어전(Gvsai ejen)등의 무관직을 수행하며 누르하치의 정복활동과 국가 통치를 보조했다.
그 중 한 명은 누르하치가 1583년 최초로 거병을 했을 때 부터 그를 섬겼던 뇨후루 씨족의 어이두(Eidu)였다. 그는 뛰어난 용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무척이나 강직했다. 덕택에 누르하치로부터 줄곧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 어이두의 둘째 아들은 다키(Daki)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어렸을 적 부터 누르하치에게 귀여움을 받아 그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다키는 성장한 뒤에는 누르하치의 다섯째 딸1과 혼인관계를 맺어 어푸(Efu, 부마)까지 되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게 총애를 오래토록 받은 탓인지 성격이 안하무인하여 자신의 처도 함부로 대하고 다른 왕자들에게도 예의가 없이 무례하였다. 그러면서도 능력은 필부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저 부친과의 혈연과 장인의 은혜만을 믿고 있었다.
어이두는 그런 둘째 아들을 언제나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 비록 당장은 본인의 주군인 누르하치가 다키를 총애하고 있어 큰 문제가 없었으나, 다키의 안하무인적 행동이 계속되어 후에 누르하치의 역린을 건드리거나 타이지와 버일러들, 즉슨 누르하치의 아들들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다면 다키는 물론 자신의 가문까지 모조리 박살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이두는 자신의 아들을 여러 차례 타일렀으나 다키는 듣지 않았고 여전히 본인의 방자함을 세간에 드러내었다.
자신이 아무리 타일러도 다키가 말을 듣지 않음에, 결국 어이두는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치닫았다. 가문과 국가를 위해 '과감한 행동'을 하던가, 아니면 혈육의 정을 온존하고 파멸로 향하던가.
어느 날, 어이두는 다키를 집안 연회에 불러내었다. 그리고 연회가 무르익었을 때 쯤, 다키를 포박했다. 그 때 어이두는 다키의 오만방자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본디 있을 수 없으나 국가와 가문을 위해 지엄한 결정을 내린다'며 다키를 내실로 끌고 들어가 죽였다.
그리고 누르하치에게 가서 그간 다키가 저지른 일에 대해 사죄하며 본인이 다키를 죽였음을 고했다.
누르하치는 다키의 죽음과 그 전말에 대해 전해 듣고 순산적으로 놀라 탄식을 내뱉었으나, 이내 어이두의 충심에 대해 큰 칭찬을 하였다. 그로서 누르하치의 어이두를 향한 신뢰와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다키가 본인의 부친 어이두에게 살해당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다키의 처였던 누르하치의 다섯째 딸이 죽은 시기를 감안하여 후금이 건국되기 전이라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청사고 어이두 열전(額亦都 列傳)에 다키의 살해에 관한 이야기가 사르후 전투와 심양-요양 침공전 사이에 실려 있는 것에서 착안하여 이 사이에 다키가 죽었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단, 후자의 경우 사르후 전투와 심양-요양 침공전 사이에 이야기가 실려 있을 뿐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근거가 없다.
다키가 언제 죽었건간에, 어이두는 본인의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임으로서 가문과 국가의 문제를 제거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충심을 증명하고 가문과 국가를 지켰다. 그러나 본인의 아들이 아무리 무뢰한이었기로서니, 자신의 아들의 피를 본인의 손에 직접 묻힌 그의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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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모친이 기야무후 교로씨이고, 동복 언니로 무쿠시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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