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
-첫 키스는 끝나지 않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비는 평생 단 한 번의 소원이야.
축제의 마무리 행사인 캠프파이어에서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카구야와 시로가네
하지만 아직 사귀는 건 아니다.
키스는 했지만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상태인 카구야와 시로가네는 끝끝내 연인이 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러브 코미디라는 장르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시츄에이션이란 시츄에이션은 10년 전에 다 해봤고
이야기에 던져놓을 수 있는 캐릭터랑 캐릭터는 다 러브 코미디의 주연을 해봤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카구야 님은 고백 받고 싶어’는 이미 한계에 도달한 러브코미디를 1,2,3기에 거쳐 양 장르의 균형을 이리저리 잘 드리블하며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빚어내 이례적일 정도의 완성도 를 선보였습니다.
그런 카구야 님은 고백 받고 싶어의 사실상 애니메이션 완결작이 된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 -첫 키스는 끝나지 않아-’는 어떠했을까요?
극장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본편 애니메이션이 어떤 빌드업을 거쳐 피날레를 장식했는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1기는 설정과 캐릭터들의 개성을 중심으로 해서 코미디에 집중했고, 2기에서는 이미 설명한 개성을 바탕으로 각 개인의 서사를 풀어내며 주변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깊게 조명했습니다.
1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 다 같이 개그를 치던 와중 가장 돋보였던 치카였다면 2기에서는 각자 분량을 받아 개인의 서사를 풀어낸 미코와 이시가미 였던 것 처럼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대전제인 카구야와 시로가네의 연애 서사를 게을리 했는가? 그건 절대 아닙니다.
시로가네와 카구야는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크게 상반되는 캐릭터이고 이는 과거회상이 나올 때마다 강조되는 설정입니다.
1기에서는 그저 서로가 다르기에 끌린다는 식으로 묘사했다면 2기에서 카구야와 시로가네 둘 개인의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지만 주변인물인 미코와 이시가미, 하야사카 등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시로가네와 카구야가 어떤 인물인지를 직간접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이시가미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 2기에서는 카구야와 시로가네는 원래 보여주었던 일면이 아닌 색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죠.
사람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던 카구야는 이시가미의 진심을 보고 최선을 다해 그를 도우며 냉정할지언정 무정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시로가네는 그간의 노력파 이미지 이외에는 그리 특별할 것 없이 개그적으로 그려졌지만 절망하던 시기의 이시가미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 주었던 따뜻한 인물이자 그저 노력만하는 바보가 아닌 다른 경지를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1기와 2기에서 주연인 카구야와 시로가네의 캐릭터를 줄줄이 설명하는 것이 아닌 다른 캐릭터들의 시선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둘의 매력에 공감할 수 있었고 3기에서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도 납득할 수 있는 것이죠.
3기는 아예 원작에서도 최고점이었던 문화제 편을 위해 모든 걸 투자합니다. 이제껏 언급 정도로 넘어가던 시로가네와 카구야의 과거, 현재의 심리와 관계의 진전이 필요한 당위성까지 충분한 분량을 부어서 화려한 피날레를 만들어내죠.
여기서 문제는 이게 결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총 3 시즌에 걸친 빌드업 과정과 원래 목적의 달성으로 화려하게 마무리 된 이야기를 다시 펼쳐내는 것이죠.
원작에서는 시로가네의 심리묘사와 카구야와의 관계에 대한 충분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맞이한 채 문화제가 끝났기에 얼음카구야 편이 필요했지만 이미 연출 등으로 카구야와 시로가네로 할 수 있는 심리묘사란 심리묘사는 다 해놓은 터라 문제가 생겼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시로가네와 카구야가 서로에게 끌린 이유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시로가네는 카구야의 차가운 인상에 거부감을 먼저 느꼈지만 학생회 인원이 위험할 때 거침없이 더러운 연못에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그녀의 용기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카구야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 새로운 경치를 보여줄 수 있는 시로가네의 그 특별함에 반했습니다.
그런 반했다는 감정은 시간이 지나며 여러 부분을 사랑하게 되는 씨앗이 되고 이 둘의 이야기를 3기 내내 풀어내며 이 둘이 그저 상반된 서로가 아닌 점차 닮아가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얼음 카구야 편은 애초에 원작 문화제 편에서 카구야가 집중 조명 된 탓에 가려져 있던 시로가네의 뒷면을 조명하는 파트이다 보니 양 쪽 균형을 잘 맞추어 보여준 애니메이션의 흐름에서는 도돌이표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물론 카구야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가면과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를 연출로 잘 빚어낸 극장판도 좋았지만 반대로 시로가네의 분량이 충분했음에도 카구야의 아성에 밀려 그저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준 것을 재방송하는 듯한 시로가네의 심리묘사가 저는 아쉬웠습니다.
이렇다보니 애니메이션에서 충분한 분량과 템포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착실히 그려내었는데 극장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이미 지나온 이야기의 위기 파트로 되돌아가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이게 극장판이 애니메이션에 비해 크게 부진한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TV 스페셜로 방영한 탓도 있지만 결국 결말을 본 이야기를 최후반만 딱 때서 다시 반복하는 건 그리 흥미롭지 못하거든요.
물론 원작이 이런 흐름이었고 작품 내에서도 후속작에 대한 떡밥을 많이 깔아두었기에 후속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어찌되었던 ‘카구야 님은 고백 받고 싶어’ 이기 때문에 반갑고 또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원작 또한 이쯤부터 쭉 내리막을 걷다보니 여기서 끊어주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는 것도 미덕이 아닐까 싶네요.
여전히 즐겁고 사랑스럽지만 결국 도돌이표인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 -첫 키스는 끝나지 않아-’ 가 말합니다.
물론 그 풍선은 무척 멋졌고, 로맨틱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아요. 이렇게 평범한 것도, 저는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니까."
-시노미야 카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