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stay night [Heaven's Feel]
이상이 아닌 현실을 통해 꽃 피우는 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나날을 꿈꿨다.
살얼음 같은 평온. 쌓여 있는 나무토막 같은 천칭.
잡동사니 위의 요람.
잠들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잔혹하고도 아름다웠던 어제.
-Heaven's Feel-
추풍낙엽 처럼 쓰러져 가는 서번트와 마스터들
알 수 없는 그림자에 의해 뒤틀리는 성배전쟁
마스터가 아닌 시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UBW 애니메이션이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하고 모든 걸 평탄하게 만드는 바람에 원작이 주는 감성을 많이 잃어버렸다면
Fate/stay night [Heaven's Feel]은 길고 난잡했던 원작의 이야기를 잘 정돈하고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는 쪽으로 선택과 집중을 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쿠라를 구심점으로 그려낸 이야기가 어떠했는 지를 아주 개인적인 시선으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원작 헤븐즈 필은 익히 알려진 대로 성배전쟁과 성배의 근원을 다루는 해설 편, 이리야 루트와 끝끝내 자신을 얽매이던 신념을 부정하며 자신만의 정의를 부르짖는 사쿠라 루트가 어른의 사정으로 합쳐진 구조입니다.
그렇다보니 복합적인 인물인 사쿠라의 감정과 비애를 섬세하게 그려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리야와 분량을 나눠먹은 끝에 왜곡되어 전달될 여지가 잔뜩 생겨버렸고
결과적으로 분량은 제일 길지만 이해는 가장 하기 힘든 난해한 루트가 되어버렸죠.
하지만 극장판에서는 이리야의 개인 서사를 앞서 방영했던 제로와 UBW에 맡기고 사쿠라의 개인 서사에 많은 분량을 투자해 원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었습니다.
비극적인 삶을 사는 인물이 많은 페이트에서도 가장 잔혹한 삶을 살아온 것은 사쿠라지 않나 싶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강제로 입양을 당하고 어릴 때부터 음충에 의한 희롱과 양 오빠 라는 작자의 학대도 모자라 양 할아버지인 조켄에 의해 그릇으로서만 인격과 몸을 개조 당하죠.
친언니인 토오사카도 10년 전의 성배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정신병에 걸리는 등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사쿠라가 겪어온 시간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입니다.
사쿠라는 이런 과정을 겪으며 수동적이고 허무한 인간이 되었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헛되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키리츠구가 죽은 후 별난 짓을 하고 다니던 시로를 보고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시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사쿠라의 희망이자 일상을 꿈꾸게 하는 주체가 된 것이죠.
평범한 일상을 바라던 시절은 어릴 때 잊은 지 오래였지만 시로의 집에서 지내며 잔혹한 현실이 아닌 이상적인 일상을 바라게 되었고 그런 감정들이 폭발하며 현실과 충돌하는 것이 헤븐즈 필의 중요 골자입니다.
이번 극장판은 메이저 영상물에서 보여줄 수 있는 수위에서 가능 한 강한 묘사로 사쿠라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시로에 대한 갈망을 진하게 그려내면서 그녀에게 시로가 어떤 존재 인지를 제대로 각인 시켰죠.
토오사카는 사쿠라가 좋아하는 언니이자 자신을 구해길 바랬던 인물입니다. 재능 넘치고 강한 그녀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랬었죠.
하지만 토오사카 당주로서의 위치와 마토 가문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던 토오사카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고 사쿠라가 처한 현실은 지하 깊숙이 숨겨져 알아채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사쿠라와 토오사카 간의 정보 간극이 생겼고 사쿠라는 사쿠라 대로 오해를, 토오사카는 토오사카 대로 거리를 두게 되는 어려운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이건 시로와 사쿠라의 관계가 가속되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극장판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이죠.
이런 바탕들이 있었기 때문에 UBW에서처럼 독백이 상당부분 잘려나갔음에도 시로의 캐릭터는 원작보다 더 잘 살아나게 됩니다.
앞선 리뷰에서 말했듯 페스나는 어찌되었든 주인공 시로의 이야기입니다.
Fate 루트는 자신의 신념과 닮은 이를 바라보면서 성장을, UBW에서는 뒤틀림의 결말을 마주하고 이해자를 만나며 신념의 변화를 겪는다면, 이번에는 신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랑을 만나면서 그걸 부정하는 루트이죠.
UBW와 달리 Zero의 존재가 실이 아닌 득으로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상당히 뒤틀려있던 키리츠구 로부터 받은 정의를 부정함으로서 시로가 완전히 다른 길로 성장한 인물로 그려지거든요.
원작에서는 개념으로서만 존재한 인물의 깊게 알게 되었으니 키리츠구와 시로의 대비가 명확하게 갈리고 이것이 헤븐즈 필이 다른 루트들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원작에서 시로에게 강조되는 인물 상은 방황하는 인물 상입니다. 사쿠라가 검은 그림자임을 눈치 채고 있음에도 눈을 돌리고 부정하며 관계를 맺어 마력을 주면 다 괜찮을 것이라며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꽤 깊게 보여주죠.
하지만 극장판에서는 이 부분이 많이 축소되면서 이전 루트에서 언급되던 영웅이자 구원자로서의 시로의 면모가 더 잘 드러나게 되었다 생각합니다.
이리야로부터 받는 정보로 인한 혼란과 사랑하는 사쿠라의 악행 사이에서 길을 해매이던 방황하는 인물이 잠깐 현실로부터 눈을 돌릴 뻔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목숨보다 소중히 하던 신념마저 부정한 채 나아가는 것은 원작보다 극장판에서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행적이죠.
이전 루트에서 그 뒤틀림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조금씩 변화하는 식으로 이상적인 인물이 되는 결말을 맞이했던 시로는 헤븐즈 필에서 신념마저 부정한 채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사력을 다하는 현실적인 인물이 되면서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쿠라는 끝내 신지와 조켄이라는 악을 끊어내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못했고 결국 자신마저 물들어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근원은 인간의 악의가 뭉친 3차 어벤저이나 결국 그것을 휘둘렀다는 것은 진실이고 죄를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사쿠라를 위해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랬던 언니 토오사카와 희망이자 평범한 일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던 시로가 그녀를 구하는 구도에 집중한 것도 극장판의 좋은 점이었습니다.
토오사카 라는 캐릭터가 원래 가진 냉철함과 칼 같은 성격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남아있는 사쿠라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결국 사쿠라를 찌를 수 없게 만드는 브레이크가 되어 토오사카를 해하지만
이내 도착한 시로가 사쿠라에게 처한 악연이자 잔혹한 운명인 성배라는 법칙을 끊어내는 룰 브레이커로 그녀를 구원하며 사쿠라의 서사는 매듭을 짓죠.
그리고 이제껏 지켜왔던 신념을 전면으로 부정하며 5차 아처의 힘과도 충돌하게 된 시로는 곧 죽음에 이를 것처럼 위태로워지지만 시로가 가진 근본인 스스로에 대한 무자비 원칙을 그대로 따른 채 모든 악의 근원을 제거하려합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대치하게 되는 것은 신념을 부정하며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을 깨닫고 인정하는 시로와 정반대로 악의가 근원적 감정인 사람 키리츠구이죠.
키리츠구의 이야기도 상당부분 축소되었지만 제로에서 더 깊은 이야기를 했었기에 이들의 충돌은 충분히 설명된 하에 이뤄지게 됩니다.
끝끝내 3차 어벤저를 해체하는 것은 모든 미련을 내려놓은 채 각성한 이리야가 행하게 되고 시로는 부정의 댓가로 목숨을 잃지만 부정하던 미래에게 도움을 받아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죠.
헤븐즈 필은 시로 라는 인물이 자신이 가진 신념을 부정한 끝에 진심으로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되는 구원자로서의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방황하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지만 인간의 근원적 감정인 사랑과 희망을 앞세워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Fate/stay night 라는 대장정의 막을 내리기에 적절한 결말이기도 하죠.
사쿠라는 그녀를 둘러싼 악의에 죄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 짐을 지면서도 인간은 살아가야 만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닌 직시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사쿠라는 골방에서 학대받는 혼자가 아니고 따뜻한 가족과 사랑하는 연인을 곁에 둔 사람이기에 속죄와 인정의 길을 걸으며 내일로 걸어 갈 수 있겠죠.
사쿠라에겐 악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의 구원을, 시로에게는 성장하는 인물로서 만이 아닌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완성된 서사를 부여하며 그가 꿈꾸던 구원자로서의 이야기를 선물하는 Fate/stay night [Heaven's Feel]이 말합니다.
적어도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나는 행복하게 있다고 다정한 꿈을 전해줘
당신 곁에 있을게
.
.
.
그 나날은 꿈처럼
(IP보기클릭)118.235.***.***
대가리깨진목각인형
페이트 완결편 같은 소리를 하기도 했어서 힘들겠지만 할아 애니화는 진심으로 보고싶네요. 헤필에서 떡밥도 나름 던졌으니 언젠간 어쩌면.. | 24.03.23 14:32 | |
(IP보기클릭)111.118.***.***
(IP보기클릭)211.210.***.***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4.03.24 08:0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