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세상의 이치(The way of the world)야"
만화책 <강연>1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에는 의의가 없다. 사람은 어떤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 이것이 <강연> 전체를 꿰뚫고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지불해야 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1을 얻기 위해서는 1을 잃어야 하기에 이 법칙은 기본적으로 '제로섬(zero-sum)'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강연>을 보다보면 수학적 혹은 과학적인 지식(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들이라든가, 몸안의 탄소로 무기를 만든다든가)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등가교환의 법칙'과도 상당히 잘 맞는 다. '제로섬'과 같은 '등가교환의 법칙'은 인간의 개입여부와 상관없이 항상 진리다. 예컨대 탄소의 분자구조를 바꾸면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고 연필심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와 상관없이 진리이다. 그래서 수학법칙은 '무시간적'이다. 시간이나 역사개념과 결부되지 않은채로 존재할 수 있다.
여기쯤오면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에는 의의가 없다. 사람은 어떤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라는 대사는 오히려 시간이나 역사 개념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말해질때는 오히려 '무시간적'이 되어버린다.(앞의 것을 '변증법적', 뒤의 것을 '형식논리적'이라 부를수 있을 것이다.) 등가교환의 법칙이 지닌 이 묘한 역설, 무시간적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이라는, 변증법적이면서 동시에 형식논리적이라는 역설은 이 만화의 작가가 얼마나 탁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해준다. 단순한 양극의 대립구도가 아닌 하나의 진술안에 모순되는 두 개의 의미가 공존한다는것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갈등이 외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이 추구하는 그 목표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다. 이는 여타의 소년만화들이 끊임없이 적들을 만들어내며(이러한 예의 가장 끔찍한 표본은 <블리치>와 <신 구미호>다) 이야기를 연명시키는 것과 달리, <강연>의 이야기가 완결적이고 다소 폐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과 에드가 인체연성에 실패한 이유는 '시간적'인 영역까지 '무시간적'인 것으로 오해한데서 기인한다. 에드워드 엘릭이 연성을 하고나서 만나는 소위 '세계'라는 존재가 '진리'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신체를 앗아가는 장면은 그들이 '법칙(진리)'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연금술이 이해하고 분해하고 재구축하는 것이라 한다면, 인체연성을 금지하는 이유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해, 분해, 재구축'의 영역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해될 수 없는 것(혹은 이해하면 안되는 것)을 이해하려는 순간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다시 한번 만화의 대사를 끌고 와보자.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은 없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자면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수를 거쳐야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에드가 '무시간적 진리'를 오해함을 통해 '시간적 진리'로 나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작품내에서 연금술사는 현실에서 과학과 수학의 위치를 포함하고 있다.(라디오를 연금술로 단박에 고치던 에드를 떠올려보자) 비유하자면 고대 그리스에서의 철학처럼 거의 모든 학문을 포함하고 있다. 작중에서 연금술사는 상당히 높은 국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정부 자체가 실상 연금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적어도 작품세계내에서 연금술은 "세상의 이치"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작품 내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근대'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다. 작중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차'가 그것을 증명한다. 주지하다시피 기차는 가장 유명한 근대의 상징이다. 증기기관, 역동성, 승객은 가만히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문의 풍경(이것은 영화에 대한 은유이다). 최초의 영화가 다름아닌 기차가 역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기차를 타고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강연>에서 기차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만화 초반에 기차 속에서 테러리스트를 만나는 장면, 부서진 오토메일을 고치러 기차를 타고 윈리에게 가는 장면 등등. 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전화기, 무기 등도 근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강연>의 세계관은 스팀펑크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은가) 또 끊임없이 민족간의 분쟁이 일어난다는 점 역시도 서구의 근대와 상당히 닮아있다.
더 중요한 것은 '등가교환의 법칙' 역시도 근대적인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치화, 이해 할 수 있다는 믿음,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모든 가치가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교환가치의 체계'에 편입되는 현상 등. 물론 '교환가치'가 모든 상품을 동질화 시키는 것과 달리 <강연>내에서의 연금술은 그정도 힘까지 지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식과 도식과 있으면 짠하고 변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은 상당히 자본주의적 체계와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강연>의 세계관은 '연금술'이라는 만화적 요소만 더해졌을 뿐이지 실상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보자.
1) 아픔을 동반하지 않은 교훈은 없다는 <강연>의 주제의식
2) <강연>의 세계관과 근대의 세계관이 같다는 가정
둘을 종합해보면 근대에 대한 반성은 근대 "속에서", 근대라는 경험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근대를 비판하기 위해 근대 너머의 세계(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과거 혹은 장밋빛 미래)를 무조건적인 선으로 찬양하는 무책임한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세계의 진보는 세계가 지니고 있는 모순이 지양됨에 따라 가능하다고 본 헤겔철학과 닮아 있는 것이다. 헤겔에 있어 '모순'이 진보의 원동력인 것처럼, 엘릭 형제에게 아픔(시간적 진리와 무시간적 진리라는 진리의 '모순성')은 그들이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이다.
뤼시앵 골드만은 근대소설의 주인공들에 대해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타락한 세계와 방법은 자본주의적 근대와 그 근대 속의 원칙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타락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한다. 이를 <강연>에 대입해 말해보자면, '타락한 현실(<강연>의 세계)속에서 타락한 방법(연금술)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나는 내 영혼을 입증하러 떠난다"와도 같은 맥락에 있는 말이다. 현실을 거부하거나 변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영혼(진정한 가치)'을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찾는 '영혼-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
처음에 에드와 알은 단지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연금술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어머니'가 그들이 찾고자하는 진정한 가치일까? 어머니는 하나의 은유이다. 고대로부터 어머니는 '세계'를 의미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이아나, 러시아인들이 조국을 부르는 '어머니 루시' 등. 찾고자 하면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이 어머니는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시간적, 변증법적 의미의 '등가교환의 법칙', 즉 진정한 진리와 동일선상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이를 낳는다는 어머니 고유의 능력은 연금술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인 것이다. 시간적으로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강철의 연금술사 내부에서 어머니라는상징 속에서 하나가 된다. 즉 어머니는 생명의 탄생이라는 최상의 변증법적 가치를 지님과 동시에, 에드와 알에게 있어 그것은 작품의 시작부터 잃어버린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근대소설을 "신에게 버림받은 시대"라고 말한 루카치의 관점과 조응한다. 즉 교양소설과 <강연>에게 있어 어머니의 상실은 작품이 시작될 수 있는(시작되기 위한) 출발점이다.
위 장면에서 첫번째 진리(형식논리적, 무시간적 진리)와 두번째 진리(변증법적, 시간적 진리)는 정확히 대비된다. 전자가 제로썸이라면 후자는 플러스썸이다. 전자가 단순한 변화라면 후자는 생산이다. 전자가 비인간적이라면 후자는 인간적이다. 전자가 개인적이라면 후자는 공동체적이다.
사실 자본주의가 오로지 전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만큼이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산적이며 협업을 필요로하는 체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의 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문제는 근대성이라는 것이 '변화', '역동성', '생산'이라고 할 때에 오로지 자본주의만이 이 근대성의 영향을 받지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다른 것은 다 변하는데 왜 자본주의는 안변하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힘이 바로 저 근대성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역사를 '발전의 도정'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끔 하였고 현 사회는 후에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본주의를 영구불변의 보편적인 체제로 보는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논하기에는 이 자리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는 다른 부분에 좀더 집중하고자 한다.
에드와 알은 어머니(진정한 가치)를 잃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타락한 방법(연금술)을 통해 만들고자 한다. 어머니를 다시 만드는 방법을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머니가 상징하는 '세계'를, 즉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한다.(이것을 라캉적으로 해석하여 대문자 A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에드와 알은 스승 밑에서 연금술을 배울 때 "하나는 전체, 전체는 하나"라는 진리를 배운다. 이것은 동양적인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이 만화의 배경과 다른 요소들을 고려해봤을 때 오히려 지극히 서양적인 깨달음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one for all, all for one'이라는 이 명제는 헤겔의 것이다. 헤겔은 이를 <정신현상학>의 이성 장에서 논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성위에서 참다운 정신인 '인륜성'이 구현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강연>은 에드와 알의 여정을 통해 인륜성(공동체)을 구현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을 끌고 올 필요는 없다. 초등학생정도의 지식만 있어도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제의식을 이해하는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1)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2) 여기서 호문쿨루스의 위치는 어디인가? 다시 말해 호문클루스는 무엇의 은유인가?
3) 만화의 결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1)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에드와 알이다. 혹은 주변인물까지 더해 로이머스탱, 호크아이 등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관대한 독자라면 '모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교양소설'과 유사한 양식을 지닌 것으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진정한 주인공은 누가 되는가? 사실 작품 전체의 비중은 알폰스보다는 에드워드에게 조금 더 치중된 감이 없지않아 있다. 예를 들어 오토메일을 고치기 위해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감을 의미한다. 알폰스는 갑옷 조각들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칠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는 '영혼'을 입증하러 떠날 필요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알이 에드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꽤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사실 육체가 없는 존재, 혹은 육체가 기계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들은 영혼(seele)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 고민을 철학적 논리 위에서 했던 최초의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육체를 기계로 보고 동물들을 해부할 때 동물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기계의 마찰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는 데카르트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일체의 사실(수학적 사실까지도)을 회의하여 명증한 자아, 소위 우리가 코기토(cogito)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생각인 이유는 첫째, '나는 생각한다'에서는 결코 '나는 존재한다'라는 존재개념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이유, 둘째로는 입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자아는 육체의 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아는 육체를 초월한 영혼의 영역이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을 이어주는 부분이 필요한데, 그는 연결부위의 역할을 뇌에 있는 '송과선'이 담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것은 없다.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 전유한 기계속의 영혼(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철학적 개념은 이렇게 탄생한다. 하지만 여전히 영혼(자아)의 입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결국 '나는 존재한다'라는 무시간적, 무공간적 명제가 '나는 앞으로도 현실 속에 존재할 것이다'라는 시간적, 공간적 명제(현실적 명제)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신존재증명'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가 확실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확증은 오직 신의 은총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실상 스콜라철학의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관념론이 '세속화한 신학'이라는 비판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근대에 수학과 과학이 지배적인 가치체계가 되었을 때 근대는 다시 한번 데카르트의 길을 가게 된다. 위 장면의 알폰스와 같이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지 못하는 것을 한나 아렌트는 '데카르트의 악몽'이라 부른 바 있다. 이는 수학과 과학이 처할수밖에 없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수학과 과학처럼 무시간적인 논리체계(물론 양자물리학까지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디까지나 근대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에서는 아주 단순한 것들 조차도 확언하기 위해서는 항상 검증을 거쳐야하며, 그 검증을 거치고 나서도 끊임없이 다시 의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문제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수학적, 과학적으로 검증한 것이 다르다는 데서 기인한다. 즉 우리는 감각적으로는 땅이 평평하다고 느끼지만 망원경을 통해서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 개념의 전도가 일어난다. 이제 "진리는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는 것만이 진리다."
누구보다도 연금술(수학적, 과학적 체계)에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연금술사야말로, 그중에서도 육체가 없는 알폰스야 말로 영혼을 입증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알폰스는 영혼(진정한 가치)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영혼을 입증하는 것은 그의 남은 영혼을 걸어서만 가능하다. 이 역설(마지막 남은 영혼을 버려야만 영혼을 입증가능하다는)을 구현하는 장면이야말로 <강철의 연금술사>가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는 지점이다. 물론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내용은 다른 소년만화에도 자주등장한다. 하지만 단순히 판타지 속에서 모험을 하다가 영혼을 거는 만화와 컨셉, 배경, 캐릭터 설정, 내용, 형식이 조화로운 조응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영혼을 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것은 서사에 종속된 캐릭터(이야기의 차원이 너무 거대하여 캐릭터가 견디기 힘든 경우, 대표적으로 나루토)혹은 캐릭터를 위한 서사(매력적인 캐릭터를 설정하고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그 캐릭터성을 소비하는 만화들)가 아니라, 서사와 캐릭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보자면, 이야기 초반에 쇼 터커 에피소드(나는 이 에피소드가 만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에피소드라고 확신한다)에서 나나를 지켜주지 못했을 때와 어머니를 인체 연성하다 실패했을 때를 제외하곤 에드워드는 단 한번도 자신의 영혼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그 이후로는 한번도 '모험'을 한적이 없다. 모험이란 자신의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강렬한 확신이 밑바탕에 있는 인물들(나루토, 루피, 이치고)은 모험을 모른다. 그들은 입으로만 모험을 하지 그 모험 속에서 단 한번도 자신의 존재자체를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저 세 주인공은 자기 행위에 대한 반성따윈 하지 않는다.(저 세 만화가 삼대장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징후적이라 할 만하다) 저 셋에 비하면 에드워드가 훨씬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마지막에 '진리'와 대면하여 어린소녀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밑바탕에는 항상 나나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알폰스에 비할바는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마지막에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호문쿨루스와 싸우는 에드의 모습은 소설 속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고대 서사시의 주인공(민족의 운명을 담지하고 있는 인물, 이런 인물은 공동체와 자기를 분리하지 않는다)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소년만화라는 매체의 한계에서 오는 어쩔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소년만화의 주인공은 악당을 이겨야하기 때문이다. 반면 알폰스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지불한 탓에 세계 너머에서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형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겼다.(이긴것은 에드워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연성이 성공했는지 안했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단지 믿음을 통해서만 그런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는 것이다. 개인의 극적인 도야, 초월이 아닌 죽음을 향한 그의 도야는 어쩌면 이 세계에서 혼을 입증가능한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2)
이런 점에서 비추어보면 호문쿨루스는 무엇인가? 그를 이해하는 한가지 키워드는 일곱가지 대죄이다. 본래 일곱가지 대죄는 토마스 아퀴나스(그 이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가 규정한 것인데 그 이후로 대죄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로 자리잡는다. 기독교와 근대의 연관성에 대한 유명한 논의로는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그 요지는 세속적 금욕주의가 전통주의적 경제윤리로부터 재화획득을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고 이윤추구=신의 뜻이라는 등식 속에서 자본의 축적과 부의 생산적 사용을 이뤄 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문쿨루스의 정체는 명확해진다. 그는 모든 욕망을 초월한 금욕주의적 자본주의의 화신이다. 모든 인간적 욕망을 자신에게서 분리해내어 신적인 존재(금요주의적 자본주의의 화신)가 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욕망들을 세상에 풀어놓은 다음, 자신의 뜻에 맞춰 대죄를 조작하여 세상을 움직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후에는 스스로가 신이되어 세계를 완전한 원환적 체계 속에 가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자본주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베버 역시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으며, 벤야민 역시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라는 미완성 논문에서 자본주의를 "제의만 남은 종교"로 파악한 바 있다. 사람들을 현자의 돌로 만드는 연금술이라는 것 자체가 '제로섬'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것이 사실 근대 자본주의의 성격이기도 하다. 아동의 노동마저도 착취하여 공장을 돌리는 악독한 부르주아의 이미지를 호문쿨루스에게서 본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본다면 연단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것은 긍정적인 자본주의적 원리, 제로섬이아닌 플러스섬의 수학과 과학일 것이다.
3)
결말에서 실제로 바뀐 것은 없다. 호문쿨루스는 처치했지만 세계는 여전히 분쟁중에 있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질투할 것이다. 굶어죽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며, 악독한 정부관료 역시 또 생겨날 것이다. 실상 에드와 알은 한 것이 없다. 그들이 변혁시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성장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강철의 연금술사>를 '교양소설'로 바라보는 이유이다.
'세상의 이치'를 익히는 것.
'세상'이라는 이름의 '이치'를 익히는 것.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화에서 <강연>은 조금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승리했으나,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리했으나 자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연금술의 세계' 속에서 상상적으로만 승리를 할 뿐, 현실의 맥락으로 들어오는 순간 무능해지기 때문이다. 어떤면에서 말하자면 이 만화는 참으로 정직하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만화인 것이다. 다른 만화였다면 "그렇게 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끝!"하고 처리할 부분에서 현실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다시 에드워드로 하여금 여행을 시작하게 하는 장면에서 끝을 낸다.(여기서도 기차를 타고간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강연> 작가가 지니고 있는 윤리성이다. 멍청한 만화들처럼 "좋아좋아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나쁜놈을 멋지게 박살내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아직 세계는 타락한 상태임을 인지하고 있는 것,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항상 회의를 품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것이다. 아주 묘한 균형감각이다. 위에서 나는 방황하고 있다고 했다. 허나 이것은 이 만화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막말로 현실에서 방황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현실은 언제나 방황의 연속이다. 이것이 이 만화의 대단한 점이다.
루카치는 근대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 나는 이 여행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알고있다. 이 여행의 끝은 나의 죽음, 나의 실패이다. 하지만 결말을 알고 있는 이 여행을, 이 길을 나는 걷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정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나는 내 영혼을 입증하러 떠난다(I go to prove my soul)"
(IP보기클릭)61.81.***.***
알폰스가 자신의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 이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석한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덕분에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IP보기클릭)110.70.***.***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상당히 많죠. 하다 못해 조연처럼 보이는 란팡이나 그녀의 할아버지도 그렇구요. 사실 누구를 중심으로 놓아도 이야기가 상당히 재밌죠 ㅎ
(IP보기클릭)220.121.***.***
전 개인적으로 여기 나오는 인물 대부분이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IP보기클릭)124.59.***.***
첫 째] 인간은 수학적[무시간적] 법칙으로 설명 될 수 없기에 시간적인[변화하는] 존재다.... 로 읽일 수 있구요. 두번째] 양자역학이나 양자 물리학이 전공자들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라 이런 애니 해석에서는 예외로 쳐 두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또 적절합니다. 세번째] 자본주의가 "생산자", "소비자"와 그 사이에 유통자, 재료 수급자 등 여러 직종이 이윤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군집적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대강 설명해드립니다.
(IP보기클릭)211.61.***.***
제가 만화를 자주 안보는 편이긴하지만, 진짜 강연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 17.05.14 04:44 | |
(IP보기클릭)1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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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얼마든지 퍼가셔도됩니다! 출처만 남겨주신다면요 ㅎㅎ | 17.05.14 04:44 | |
(IP보기클릭)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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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가 안된다는 점 중 첫번째에 대해 부연설명하면, 에드는 작중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그 무언가를 땅에서 파내어 뼈를 확인합니다. 그러고나서 뼈가 뭔가 안맞는다는 것을 깨닫죠. 제가 언급한 '두번째는 동일한 성분이어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죠.' 부분이 이 이야기인데 에드와 알은 인체 연성을 할때 재료는 넣었지만, 명확한 주조틀을 만들지는 못한것이죠. 금속으로 칼을 만든다고 할때 이 칼의 이미지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연히 땅에서 파보니 여러가지 뼈도 안맞고, 머리카락 색도 다르고 한 것이죠. 따라서 에드와 알이 못한 것은 우선적으로 이부분을 못한 것입니다. 이부분이 시간적인 영역인가요? | 17.05.14 06: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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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간적이란것은 변증법적인것과도 같다고 이야기했지요. 네이버 사전에도 나와 있지만,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전제 상태에서 결론을 곧바로 도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봐야 그 답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인간을 변증법적 시간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며, 그 시간속에서 겪는 경험들이 어떤한 인간으로 나타날지, 즉 결과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인격을 포함해서)의 형성은 님말대로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인간의 형성이 보편적이라는 것과 우리가 모든 인간 형성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에드와 알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연금술로 짠하고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란 오히려 시간이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않나요. 저는 이런의미에서 시간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은 저도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만, '관측행위' 자체가 결과를 바꾼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의 주요한 결론 중 하나인걸로 압니다. 유명한 것으로 빛의 이중슬릿 실험이 있는데,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실험을 했을때, 이중 슬릿에 빛이 통과하는걸 관찰하면 빛은 입자로 나타나지만, 관측을 하지 않으면 파동으로 나타나 회절효과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관측'이라는 행위(그리고 이 행위는 시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자체가 결과를 바꾼 것이죠. 이런것은 오히려 위에서말한 변증법적이라고 해야지 옳습니다. 세번째는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생각을 미처 못했던 부분이지만 논지에서 어긋나지 않게 대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문쿨루스는 일곱가지 대죄라는 인간적 부분을 자신에게서 분리하여 신적 존재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을 없앴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복종을 시키고자 한 것이죠. 여기에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를 떠올려보면 괜찮은 답이 될 것같습니다. 주인(호문쿨루스)은 노예를 통해서 세계를 향유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세계와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노예를 통해서만 만납니다. 반면 노예(대죄들, 혹은 인간들이라고 말할수도 있겠네요)는 그런 주인에게 종속되어 항상 노동을 해야합니다. 이들은 주인의 삶이 진리이고 자신의 삶은 비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점은!! 어느쪽이든 서로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 나은 존재라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근대사회라는 겁니다. 거기서 이긴쪽이 주인이고 진 쪽이 노예겠지요. 다르게 말하자면 주인은 초월적인 존재 같지만 실은 노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는 노예의 인정을 원합니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제의만을 요구하는 종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이 없이는 유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인정을 원하는 것이죠. 그래서 호문쿨루스는 신이 된다고 말하면서 실은 인간 없이는, 즉 현자의 돌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인겁니다. | 17.05.14 06:06 | |
(IP보기클릭)211.61.***.***
에드와 알은 '주조'를 잘못해서 인체 연성에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연성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체연성을 했던 자들은 예외없이 모두 실패한 것이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했던 것이지요. 오만하게도 인간을 마치 기계마냥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했으니까요. | 17.05.14 06:10 | |
(IP보기클릭)124.59.***.***
ewqty
첫 째] 인간은 수학적[무시간적] 법칙으로 설명 될 수 없기에 시간적인[변화하는] 존재다.... 로 읽일 수 있구요. 두번째] 양자역학이나 양자 물리학이 전공자들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라 이런 애니 해석에서는 예외로 쳐 두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또 적절합니다. 세번째] 자본주의가 "생산자", "소비자"와 그 사이에 유통자, 재료 수급자 등 여러 직종이 이윤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군집적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대강 설명해드립니다. | 17.05.14 06:15 | |
(IP보기클릭)61.77.***.***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안가는것 같기도. ㅠ 두번째 질문에서 제가 '수학과 과학처럼 무시간적인 논리체계' 이 부분을 언급하였는데, 이것이 무시간적이라는 것에 대해 제가 이해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F=dp/dt 라는 식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죠. 이 식에는 시간에 대한 항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식이 본문의 시간적이냐 무시간적이냐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시간적이냐 무시간적이냐를 정하는 것은 이 식을 400년 전에 종이에 썼을때나 지금 종이에 쓸때나 동일한 원리를 담고 있기에 무시간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양자역학에서 말씀하신데로 관측이 중요하기는 한데, 양자역학의 내용(과학적 진리가 있다면)을 지금 종이에 적나 100년 후에 적나 그것은 동일할 것이기에 제가 생각할 때는 무시간적일 것 같습니다. 세번째 답변도 살짝 이해가 안되요..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는 인간을 모방하여 또 인간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모방하죠. 말씀하신데로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는 이들에게서 존경을 얻으려고 하였죠. 이런 관점에서는 말씀하신데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맞습니다. 그런데 노예(7가지 죄악의 호문쿨루스)가 왜 갑자기 인간으로 바뀌나요..?ㅠㅠ | 17.05.14 06:16 | |
(IP보기클릭)61.77.***.***
아 추가로 답변을 달아주셧네요. 세번째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 17.05.14 06:19 | |
(IP보기클릭)124.59.***.***
부연하자면 호문쿨루스는 인간 공동체에서 인간적인 부분을 경시하는 자본주의를[제로섬], 에드와 알이 찾고자 했던 어머니[플러스썸]를 모티브로 하는 공동체는 그 자본주의에 결여된 인간적인 부분을 되찾는 여정이었죠. | 17.05.14 06:22 | |
(IP보기클릭)211.61.***.***
두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양자역학의 원리가 과거의 진리개념과 정반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공리(axiom)라고 표현되는 진리는 자명해야합니다. 무조건 증명이 가능해야합니다. 여기서는 원리가 앞에 있고 관측이 뒤에 있습니다. 반면 양자역학에서는 관측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러한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양자역학의 원리라는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전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의미에서 이건 자명하다는 의미에서의 공리(axiom)이 아닌겁니다. 인간의 대죄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들은 각각의 죄로 상징화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탐욕하고 질투합니다. 신은 안 느끼지요. 마지막에 그리드는 인간들에게 친구라고 말합니다. 그는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신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신은 오로지 일자(一者) 이니까요. 그래서 대죄를 인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 17.05.14 06:22 | |
(IP보기클릭)211.61.***.***
보충 답변 감사합니다! | 17.05.14 06:24 | |
(IP보기클릭)61.77.***.***
공리라는 것은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가 아닌가요? 제가 알기로는 어떤 논리체계에 모순이 없다면 여기에는 항상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자체도 관측으로 인한 귀납적원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F=ma 와 에너지 보존법칙은 동등하며 이는 해밀턴의 변분원리에서 도출이 가능합니다. 또한 이 원리는 양자역학의 기본이 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가 어디에서 출발하였는가는 당연히 에너지 보존법칙입니다. 그럼 인류가 에너지 보존법칙을 증명할 수단이 무엇이 있느냐고 말씀하시면 제가 알기로는 오로지 관측사상 예외가 없었다는 사실밖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17.05.14 06:32 | |
(IP보기클릭)61.77.***.***
음 그러니까 제가 적은 것에 대해 보충 설명을 드리면, 아마 '원리가 앞에 있고 관측이 뒤에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자기파의 발견일 것입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에서 전자기파를 예측하였고, 이를 관측을 통해 확인하였죠. 과학이란 이런 것처럼 예측이 들어맞았을 때 명확하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그전까지 알려진 물리법칙이 필요하고 이러한 물리법칙들은 관측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시작이 플랑크의 복사강도에 관한 식인데 이것 또한 관측에서 시작합니다. 양자역학도 다른 물리법칙들과 동일하게 관측이 시작이고 이후 이론이 세워지고 이를 통해 예측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다른 물리법칙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뭔가 시간적이고 무시간적이고 너무 멀리 온듯한 느낌이 드는건 저뿐인가요..? | 17.05.14 06:44 | |
(IP보기클릭)124.59.***.***
수학이 문제죠.... 블랙홀, 빅뱅, 반물질..... 이런 것들이 관측 이전에 수학적으로 예측이 되었고 수학적 문제가 없다는 판단 하에 실존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이 많았는데 결국 관측으로 완전실존이 증명 되었죠. 이 외에도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힉스입자는 입증 되었던가?? 암튼, 수학이 관측을 넘어서는 그런게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양자 물리학은 그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며 부정한 것을 스스로 철회하게 만들도록 했죠.... 양자물리학은 그 아인슈타인도 충공깽으로 몰아붙일 만큼 기존의 물리학 법칙....즉 진리를 뒤흔드는 새로운 분야가 맞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보존법칙은 관측보다도 수학과 그를 통해 예측, 계산되는 물리학 법칙으로 정의되는 개념입니다. 이게 지구에서 뿐 아니라 우주에 까지 적용되는 것인데 우주 관측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죠. 그래서 태양 코로나의 열역학 법칙 위배 현상의 미스터리를 해명 못 하는 것이구요. | 17.05.14 06:52 | |
(IP보기클릭)61.77.***.***
'양자역학의 원리라는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전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의미에서 이건 자명하다는 의미에서의 공리(axiom)이 아닌겁니다.' 여기에 대해 추가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저것은 dp*dx>=h/4pi 라는 불확정성 원리이죠. 엄청 유명한. 이것은 결국 확률론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확률을 다루는 것은 양자역학뿐만이 아니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학이죠. 수학에서 '주사위에서 6이 나올 확률을 1/6이다.'라고 했을때 이는 자명한 것이 아닌가요? 양자역학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면 불확정성 원리도 자명한 것이 아닌가요? | 17.05.14 06:54 | |
(IP보기클릭)124.59.***.***
근대 시대와 현대 시대의 차이.....본문에는 근대의 개념만 포함한다고 하셨는데. 사실 과학적 상식이라 여겨지던 것 들이 완전한 사실로 판명될려면 시대가 지나야 확실해지는 것이죠. 현대의 새로운 분야와 공식은 지금 시대가 과거로 지나기 전에는 결국 어느 것도 확정 할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 17.05.14 07:26 | |
(IP보기클릭)211.61.***.***
적확한 지적이십니다. 미래라는 속성 자체가 사실 예측불가능을 불러오죠. | 17.05.14 07:28 | |
(IP보기클릭)124.59.***.***
이제 얼른 주무세요;;;; | 17.05.14 07:30 | |
(IP보기클릭)211.61.***.***
넵넵 안녕히 주무시길... | 17.05.14 07:31 | |
(IP보기클릭)61.77.***.***
저는 애초에 시간적이냐 무시간적이냐에 대해서 위와 같이 댓글을 달았었는데 그에 대해 달아주시는 댓글에 대해서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을 적었을뿐인데요.. 저는 시간적이냐 무시간적이냐를 어떤 과학적 원리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에 과학전 원리는 무시간적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을 하였던 것이고, 그래서 양자역학도 과학전 원리이니 무시간적이 아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 답변을 다신건 님이시고 그래서 저도 거기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만큼 나름대로 답글을 달고 지금까지도 님이 다신거 이해해 볼려고 계속 읽어보고 잇는데 대체 제가 뭘 잘못해서 이 글이 더러워진 느낌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요. 위에서 '이성과 관측이 둘 다 맞다면 시간적으로 무엇이 우선하나요? 당연히 이성이죠.그래서 과학에서 관측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과거에는 이성적인 것이 필연성을 지니고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이성이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람이 생각하는 이성이라면 '시간적으로'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저는 이런것이 이해가 안되서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아. 이런 것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게 아니라 더러워진느낌이라고 하시면 뭐 별 수 없네요. 그리고 제가 댓글 단것에서 대체 어느부분이 논지가 바뀌엇는지도 모르겠구요. 모든 과학적 원리는 관측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고 이는 고전역학이든 양자역학이든 동일한데 자꾸 다르다고 말씀하시는것도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암튼 제가 어느부분에서 논지를 바꿧다는 것인데요? | 17.05.14 07:33 | |
(IP보기클릭)124.59.***.***
무시간적다, 라는 것은 쉽게 말해 불변의 진리 이런 것인데 양자역학이 등장한 이후로 아무도 분변의 진리 운운을 못 하게 되었단 뜻이죠..... 심지어 양자 역학 전공자들도. 이게 개척단계의 분야라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을 공식이자 진리"라 말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갑자기 또 양자역학은 사실 "수학적 오류로 일어난 뻘짓이었다!"라는 반전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무시간 적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성과 관측이 둘 다 맞다면 시간적으로 무엇이 우선하나요? 당연히 이성이죠." 이건 좀 종교철학에 가까운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 본문에 데카르트 나오잖아요. 신이 모든 것을 안배하셨고 인간의 이성은 그 은혜의 일부이니 인간의 이성이 계산한 법칙이 맞다고 관측 되었다면 이는 이성을 만드신 신이 미리 다 만드셔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관측결과 보다 이성이 선행된다.... 뭐 이런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헛소리지만 근대시절만 해도 이게 먹혔습니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에 관한 것으로 고전 물리학이 다루던 거시세계와 많이 다를 수 밖엔 없습니다. 미시세계는 중력의 영향력 자체가 이미 거시세계와 다른데 뭘 자꾸 같다고 하세요;;;; 양자는 사람과 달리 날라다닌단 말입니다. | 17.05.14 08:05 | |
(IP보기클릭)61.77.***.***
카톡으로 이야기 할 것 없구요 대충 이해는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뭘 잘못 오해를 했는지도 이해를 했어요. 제가 위에서 전자기파를 예측했다는 말을 썼는데 이는 다른게 아니라 맥스웰의 전자기학에서 전자기파를 예측하고 헤르츠가 전자기파를 발견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다른게 아니라 저거에요. 모든 물리학의 이론은 관측에서 시작해서 가설과 이론단계를 거치고 이것이 확고하게 받아들여질때가 이처럼 새로운 것을 예측할때이죠. 그래서 위에처럼 댓글을 단거에요. 전자기학이라는 원리가 있고 이걸로 전자기파의 존재를 예측하고 이것이 발견되었죠. 양자역학은 이런것이 없나요? 제가 힉스입자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힉스입자도 마찬가지로 '이런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측하고 이것이 발견된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예측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 것이구요. 그리고 이런 이론들은 모두 관측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과학이론은 관측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씀드린거였어요. 또 이러한 이해를 하고 있으니 과학적 원리는 시간에 따라 다르지 않으니 무시간적이 아니냐고 한 것이엇구요. 그런데 님이 쓰신 시간적이냐 무시간적이냐는 다른 것이었잖아요. 고전역학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때 예측이 가능하며 이것이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점.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앞에서 언급하셨나요? 하시긴 하셨죠.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셨나요? 아니 공부를 많이 하셨고 그러면 저보다 잘 알테니 제가 댓글을 달면서 무엇을 오해했는지 다 보이셧을 것 아니에요? 저는 원리와 예측에 관해서 과학이론의 발달과정으로 이해를 한 것이었고 님은 어떤 사건에서 원리와 예측이 어떻게 되는가를 이야기 하신거죠. 제가 잘못이해를 하고 있는것이 보였을 건데 다른이야기만 잔뜩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중간에 뭔가 너무 멀리 온 것 같다고 하였고. 제가 뭘 잘못 이해를 하였는지는 알고 계셨을건데 그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안주시다가 마지막에 답변을 주시면서 하시는게 눈이 없냐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요? 제가 앞서 단 댓글에서 과학적 진리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니 무시간적이 아니냐는 이야기는 굉장히 앞부분에 하였었고 이것을 딱 보면 님이 알고 있는 무시간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아시면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주시면 되는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나요? | 17.05.14 08:32 | |
(IP보기클릭)211.61.***.***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도 컸네요. 이제 그만하죠 | 17.05.14 08:38 | |
(IP보기클릭)211.61.***.***
말심하게 한것도 죄송합니다. 그러니 저희가 서로 공격적으로 주고받은 댓글은 지워주실수있나요? | 17.05.14 08:39 | |
(IP보기클릭)124.59.***.***
암흑물질도 아직 발견 전임에도 수학적으로 증명 되었다면서 과학계는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죠. 물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힉스 입자도 발견 전에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과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우주 물리학이나 천체 물리학이 이런 부분이 심합니다. 애초에 관측이 힘드니 수학 공식에 의존하는 현실이죠. 블랙홀도 직접 형태를 봐서 입증 된 것이 아닙니다. 감마선 방출로 위치 특정이 되는데 이게 블랙홀 외에는 다른 천체가 낼 수 있는 감마선과 에너지가 아니라 해서 블랙홀 맞다고 과학자들끼리 결론이 난 것이죠. 우주 만원경으로 전파만 잡은거고 육안 확인이 불가능한데 말이 관측이지. 퀘이사의 경우는 더 심하고..... 또다른 관측 없는 과학적 사실로 태양계를 포함한 은하단, 대은하단이 전부 중력의 영향으로 나선 운동을 하며 움직일 것이다란 모델인데 이것도 직접적인 관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냥 계산으로 나온 것이지. 이는 컴퓨터의 발달도 큰 이유가 됩니다. 앞으로 양자컴퓨터가 양산되면 더 심해지겠죠. 양자역학의 경우는 전공자들도 뭘 함부로 말 할 수 없을만치 기존의 물리학과 다른 점이 많다고 하니 뭐 어쩌겠습니까. | 17.05.14 09: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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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감사합니다! ㅠㅠ 그런건 따로 없고 그냥 디시인사이드만 하고있습니다 ㅎ | 17.05.14 06:34 | |
(IP보기클릭)211.61.***.***
아 현재는 대학원생입니다..ㅎㅎ | 17.05.14 06:38 | |
(IP보기클릭)39.113.***.***
애니메이션을 본문처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글들이 가끔 올라오더군요. 이전에 어떤 분이 '유리쿠마 아라시'라는 작품의 해석을 한 글때문에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관련한 책을 찾아봤었는데 헤에에장님의 글을 읽고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관심이 생겼네요. 조만간 구매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 17.05.14 06:43 | |
(IP보기클릭)211.61.***.***
지라르의 이론도 상당히 매혹적이죠! 희생양 뿐만 아니라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도 루카치와 이어지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17.05.14 07:00 | |
(IP보기클릭)222.234.***.***
(IP보기클릭)61.81.***.***
알폰스가 자신의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 이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석한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덕분에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IP보기클릭)110.70.***.***
재밌게 봐주셨다니...정말 감사합니다!! | 17.05.14 15:15 | |
(IP보기클릭)59.20.***.***
(IP보기클릭)110.70.***.***
호엔하임의 기준에서도 바라볼 수 있겠네요 ㅎㅎ 저는 알의 입장이 좀더 끌려서...ㅎ | 17.05.14 15:16 | |
(IP보기클릭)211.111.***.***
(IP보기클릭)110.70.***.***
어떤 의미에선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만화를 봤다고도 말할 수 잇겟네요 ㅎㅎ | 17.05.14 15:17 | |
(IP보기클릭)220.121.***.***
전 개인적으로 여기 나오는 인물 대부분이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IP보기클릭)110.70.***.***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상당히 많죠. 하다 못해 조연처럼 보이는 란팡이나 그녀의 할아버지도 그렇구요. 사실 누구를 중심으로 놓아도 이야기가 상당히 재밌죠 ㅎ | 17.05.14 18:30 | |
(IP보기클릭)220.121.***.***
대부분 고뇌끝에 해답을 찾아가기때문에 정말 주인공이 정확히 누구라 정하기도 힘든 작품 아니었나 싶습니다. | 17.05.14 18:31 | |
(IP보기클릭)110.70.***.***
동감합니다 모두 여행길에 올라있는 여행자들이죠 | 17.05.14 18:33 | |
(IP보기클릭)220.121.***.***
정말 버리는 캐릭터가 하나도 없어서 모두가 인상깊었죠.. | 17.05.14 18:35 | |
(IP보기클릭)118.217.***.***
(IP보기클릭)110.70.***.***
감사합니다 ㅠㅠ | 17.05.14 18:30 | |
(IP보기클릭)118.45.***.***
(IP보기클릭)110.70.***.***
저도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면 정말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걸 깨닫곤합니다! 재밌게 읽어쥬샤서 감사합니다!! | 17.05.14 19:12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175.223.***.***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7.07.22 08:49 | |
(IP보기클릭)117.111.***.***
(IP보기클릭)117.111.***.***
아 젠체하며 쓰느라 이거를 잊었네요 같은 장르의 다른 창작물과 비교해 언급하는 부분에선 확고한 오타쿠적 철학이 느껴지기까지 하는게 정말 멋진 리뷰입니다 모름지기 오타쿠라면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리뷰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 17.07.13 17:04 | |
(IP보기클릭)175.223.***.***
동감합니다! 신화와 철학은 하나의 세계관이지요. 헤겔이 말하길, "철학이란 시대의 자기인식이다". 만화라 할 지라도 거기엔 하나의 세계관이 있을 것이며, 그 만화를 읽는 독자 역시도 세계관을 가지고 있죠. 그 두 세계관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고 경험하는 것이 독자의 큰 기쁨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 17.07.22 08: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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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마음껏 퍼가셔도됩니다. | 18.03.21 18: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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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 동의해주신다니 너무 기쁘네요! 워낙 깊이있는 작품이라 여러가지 해석방식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18.03.21 18: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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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초반부에 '등가교환의 법칙'이 시간적이면서 무시간적이라는 말, 심지어 거기 덧붙여 변증법적이면서 형식논리적이라는 설명이 왜 필요한가요? 그 내용이 오류라는 것이 아닙니다. 태도가 현학적이라는 거지요. 등가교환의 법칙이 '강연'의 핵심 테마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독자는 아마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리뷰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이 변증법적인 동시에 형식논리적이어서 그 역설이 작중에 반영된다고 생각하는 독자 역시 없다 해도 무방할 겁니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리뷰의 문장이 오류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작가가 작품 표면에 꺼내놓지 않은 것을 캐치하고, 나아가 의미를 자의적으로 부여한다 해도 그것이 잘못된 감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감상이 아니라 지식으로 해석을 구축해 작품을 규정 짓는 행위라면, 나아가 현학의 힘으로 지배감과 승리감을 얻기 위한 행위라면 위에 인용한 수전 손택의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 멋대로 지레짐작해 비난하나요? 리뷰어의 태도가 '열린 감상자'라기보다는 '규정하는 해석자'에 가깝다는 건 그저 제 뒤틀린 심사의 호도일까요? 리뷰 곳곳에 "호문쿨루스의 정체는 명확해진다", "연단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등 판결문 같은 단언조가 가득한데요? 말 나온 김에, 호문쿨루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이야말로 손에 꼽힐 억지입니다. 안 그래도 위에 댓글로 질문하신 분이 계시네요. 답은 한층 더 과하게 지식의 권위에 의존하는 걸로 보이고요. 도대체가 그런 식으로 갖다 붙일 수 없는 해석이 있기나 할런지 의문입니다. 시작은 베버, 반문하니 헤겔, 또 반론하면 아마 아도르노라도 들고 오실 겁니다. 호문쿨루스가 자본주의의 은유여야만 이 리뷰를 완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요. '강연'은 근대성에 관한 이야기여야만 할 것이고요. 그 시작은 리뷰어께서 '강연' 배경에서 근대를 떠올렸다는 데 있을 겁니다. 아니, 그 이전에 리뷰어께서 근대성과 그 비판에 관해 공부하신 바가, 그래서 과시하실 바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단지 본인이 아는 바를 떠올리며 감상하는 것이라면 그건 독자의 자유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해석이라 주장하자면 그만한 타당성이 요구됩니다. 리뷰에서 든 근거로, 기차라거나 이광수의 무정, 영화, 뭐 많이 있군요. 그런데 일본 만화계에는 '강연'과 유사한 배경을 차용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이 작품들 또한 근대를 논하는 것입니까? 상당수 서브컬쳐 작품에 중세-근대 배경이 차용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적당한 매혹과 낭만을 주기 때문입니다. 만화 장르의 관행만으로는 충분한 반론이 아니라 칩시다. 다른 작품이 어쨌건 간에 '강연'은 다를 수도 있겠죠. 그런데 호문쿨루스는, 그리고 세계관 중추인 연금술은 그야말로 중세를 암시하지 않나요? 아니 그건 자본주의라고요? 아퀴나스와 베버를 어떻게 잘 통해 보면 기독교란 연결고리가 발견된다고요? 그냥 중세-근대 구분이 모호하다고 뭉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군부독재라는 강력한 배경은 왜 세계관으로 해석하지 않았죠? 호문쿨루스 군정을 전복하고 인간 군정으로 나아가는 결말이, 자본독재를 넘어서면 파시즘독재가 온다는 비관적 메시지로 읽힐 수 있지 않나요? 이 해석에 대해 터무니없다 하실지 상이한 해석이라 존중하실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어느 쪽이든 그리 바람직해 보이진 않습니다. 전자라면 내로남불인 것이고, 후자라면 (움베르토 에코가 해석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바,) 예술 텍스트의 소통 기능을 무위로 만드는 과격한 해석의 자유일 것이거든요. | 21.03.18 22: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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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본인도 별반 다를 거 없는 비평가였던 수전 손택 말고도, 비평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던 많은 지식인 작가들(쿤데라라거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거나) 역시 이런 유형의 '지식인의 해석'에는 반대했습니다.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태도를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똑똑한 리뷰의 곤혹스러운 특징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내용과 자의적인 해석을 섞어 놓고, 반론하기 어려운 고급 교양을 잔뜩 범벅시켜 아교마냥 튼튼히 감싸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 아니다 싶은 부분은 안 보이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예술일 텐데, 거기다 이게 지식인이 쓴 글로 보이면 상당수 독자들은 대충 탄복하며 굴종합니다. 아니, 자의적인 해석이나 고급 교양, 지식인이라는 게 뭐 죄라도 되는 일이겠습니까? 문제는 저 '굴종'입니다. 자유로우니 상이하느니, 취향이니 존중이니 다 이해하는 사람들도 내심 미학적 감식력의 우열을 의식합니다. 감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동시에, 해석의 승패도 존재하는 것이 예술 수용 시장의 실상이지요. 많은 작가들이 '지식인의 해석'을 배격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이 오만하게 발화되는 순간 다수의 독자들 눈에 안개가 깔리는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뭔가 있다'는 미망에 홀리는 거지요. 현학이 독자들의 해석 능력을 뭉개고, 해당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예술 전반에 지적 허영의 안개가 깔립니다. 감상자들은 해석력의 우열 투쟁에 휘말리고, 그저 솔직하게 다가가려는 작품도 뭔가 있어야 하게 되며, 작가들이 원하는 예술적 소통에 오히려 장해가 생깁니다. 무슨 순수예술도 아니고 서브컬쳐에서 우려하기엔 거창하다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저도 이 드물게 거창한 서브컬쳐 리뷰에 반발하는 겁니다. 등가교환의 법칙이 '강연'의 핵심임은 자명합니다. 작품을 지배하는 설정이며, 여러 안타고니스트들과의 갈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극복해야 할 테제죠. 단순한 교환 법칙을 넘어 인간적 성장 원리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면 됩니다. 무시간이니 형식논리니 꺼낼 것 없이요. 알폰스의 고민을 공각기동대의 주제나 데카르트의 고찰과 연관 짓는 것도 분명 적절합니다. 그러나 '강연'에서는 작가가 안배한 매력적인 설정에서 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내적 딜레마로, 그 깊이가 깊을지언정 결코 작품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리뷰에도 언급되듯 에드워드는 그 고민을 별로 안 하거든요. 다른 여러 매력적인 캐릭터들도 물론이고요. 반론하실 수 있겠습니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그 정도면 됩니다'를 왜 제가 정하냐고요. 또 알폰스를 주인공으로 여기는 것 정도는 감상자에게 허용된 자유 아니냐고요. 예, 그런데 그게 호문쿨루스=자본주의까지 논증하려는 욕심일 때는 문제인 겁니다. 재삼 밝히건대 이 리뷰는 하나하나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거나, 해석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거나, 상당한 수준을 갖췄다 인정받을 지식의 나열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종합되어 '지식인의 해석'이 됩니다. 그냥 뭐 대단히 똑똑해 보이는 리뷰 정도면 저도 재밌게 읽고 지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근대성을 소위 야마로 잡아서, 야마를 살리기 위해 지식이라면 뭐든 끌어다 붙이며, 작가가 작품에서 보여준 수많은 이야기들, 심지어 매우 선명하게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까지 집어 삼키며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이거!'라고 선언하는 리뷰를 보니,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존중 존경을 표하지만 실상 찍어 눌려 굴종하는 반응들을 보자니 그리 좋아하지도 않던 수전 손택의 말이 너무 와닿아서 이런 얘기라도 하고 싶어지더군요. | 21.03.18 22: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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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런 리뷰를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런 비평을 공박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그렇겠지만) 우스꽝스럽게도 지적 권위주의를 지적하는 저 자신이 곳곳에 지식의 권위를 드러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리뷰의 힘에 압도당했을 사람들 눈에 조금이나마 더 진지하게 읽히기 힘들거든요. 또한 어쩌면 저만큼이나, 혹은 저보다 더 '강연'을 좋은 작품으로 여기고 애정을 가지며, 악의 없이 많은 수고를 들여 길고 짜임새 있는 글을 작성한 리뷰어와 그것을 읽고 반응한 독자들을 통째로 깔아뭉개는 발언을 해야 하죠. 이 모두가 '지식인의 해석'에서 시작되는 문제입니다. 예술 감상의 장을 지적 우열의 콜로세움으로 변모시키는 효과로 인해서요. 상술했듯 이런 비평은 지식의 권위와 해석의 자유 존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유리한 방식으로 모두 선점하기에, 저 자신이 콜로세움에 뛰어들어 지식의 권위를 휘두르고 해석의 자유를 어느 정도 공격하지 않고는 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렇게 공격적인 글을 굳이 남기는 것은, 본문과 댓글 반응에서 유난히 태도의 위선이 눈에 밟히기 때문입니다. 대등한 소통의 형식에 숨은 학식의 권위주의가요. 리뷰어께서는 댓글로 저마다의 다양한 시각과 세계관을 인정하는 멘트를 남기셨습니다만, 제게는 그 역시 지식인의 학습된 교양 면피로 보입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걸 아시는 거죠. 본문에서도 댓글에서도 계속 보이는 것은 대체로 지식의 무게를 끌어와 위에 서려는 모습이거든요. 본원으로 돌아가, 이 리뷰는 해석이나 비평보다는 '지식인의 유희'로 분류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 행위가 어디 잘못됐나요. 다만 짚고 갈 것은, 해석이나 비평이 작품을 더 잘 살펴보려는 노력이라면(이때 시각의 다양성에 의해 작품의 의미는 확장되겠죠), 이 리뷰는 (그러한 해석적, 비평적 활동 역시 상당히 눈에 띔에도 불구하고) 리뷰어 자신의 지식을 탐닉하고 재정리하는 행위에 가깝다는 겁니다. '강연'을 참고자료 삼아서요. 이는 지식을 참고자료 삼아 작품을 탐닉하는 행위와 다릅니다. 제가 보기에, 전부는 아닐지라도 리뷰의 상당 부분에서, 리뷰어께서는 자신의 지식을 새롭게 이해하고 확립하는 것을 '강연'을 보다 잘 이해하는 것보다 우선시합니다. 나아가 그 지식 체계를 잘 정리해 설득하고 인정받으려 하고요. 이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 리뷰를 읽는 많은 분들이, 적지 않은 확률로 제가 위에 주절주절 늘어놓은 문제 어딘가에 발이 빠질 겁니다. 압도당하고, 작가가 그런 의미를 넣었나, 내가 진정한 의미를 놓치는 건가, 이게 깊이 숨긴 의미가 맞나, 나도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압박을 받겠죠. 댓글로는 그냥 새로운 시각을 잘 봤다거나 존중 존경을 표하고 말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과하게 예민한 것은 사실로 확인된 지 오래입니다. 혹여 제가 과민반응한다 느끼시는 분들은 과민하구나, 하고 지나가시면 됩니다. 반박 사절 같은 건 아니니 마음에 안 들면 뭐라 하셔도 되고요. 다만 언제 읽을지는 모릅니다. | 21.03.18 23: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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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댓글을 달았다가 계속 확인하러 오게 될 것 같아 지웠습니다. 5년 전의 글에 신경을 쏟기에는 체력도 시간도 부족하네요. 지적하신대로 '지식인의 유희'라는 것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당시 저는 제가 배운 것을 남에게 알리고픈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미 지적하신 것처럼 하나 배우면 그걸 어떻게든 다른 것들에 적용해서 응고된 형태로 남긴 후 보다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도로님이 제 개인적 태도(본문과 댓글에서 보이는 위선과 지적 과시의 교묘한 결합)를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반박할 거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 인정하는 바입니다. 다만 '해석'의 문제를 거론하셨으니 여기에 대해서만 짧게 대답하고 더 이상의 댓글을 달지 않겠습니다. 저는 해석의 다양성이니, 열린 감상이니 하는 것들을 혐오하는 인간입니다. 애초에 열려있다는 것과 닫혀있다는 것이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거짓 대립이 세워지고, 또 서로 싸웁니다.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천사나 신은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구속된 존재인 인간만이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합니다. 열린 감상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겠죠. 오직 닫힌 해석만이 열린 해석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열린 감상 대 규정적 해석(왜 앞은 감상이고 뒤는 해석인지 궁금하군요) 거짓 이분법을 세우고 저를 한쪽으로 매도하는 도로님의 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는 못하겠군요. 여기서 님의 댓글에서 가장 문제적인 부분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님에게서 '규정적 해석'과 ‘지식인의 해석’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댓글을 읽다보면 저의 단정적인 태도가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지적 과시가 문제인 것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님께서는 그 둘이 겹쳐졌기에 문제라고 답하겠지요. 만약에 제 글이 어느 한 쪽이었다면, 그러니까 지적이진 않지만 단정적이거나, 지적이지만 단정적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긴 댓글을 남기지 않으셨겠죠? 문제는 이렇게 저를 규정하신 후에 제 글의 근본적인 동기나 구조마저도 지적 과시욕의 표현으로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분명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 있기에 저로서는 전적으로 부정하진 못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도로님은 글쓴이인 저와 제 글에 대한 비평을 하는 과정에서 오로지 글쓴이의 심리적 요인이라는 협소한 범주로만 제 글을 ‘해석’하는 셈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비어즐리가 의도의 오류를 말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님께서 경계하는 자의적 해석도 문제지만, 그 같은 기계적 해석도 문제 아니겠습니까. | 21.04.09 02:49 | |
(IP보기클릭)121.155.***.***
만약 제 글에 정말 심각한 오류와 문제가 있다면, 어떤 부분에서 논리적 비약이 있는지 지적해주시면 될 문제입니다. 만약 제 태도가 문제라면 이미 하신 것처럼 저의 위선과 지적 허세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시면 됩니다. 다만 그 둘을 결합할 때는 부디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조금 더 첨언하자면, 제가 원하는 것은 해석의 최종적 근거, 최종적 지평입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역사’라고 믿습니다. 이에 대한 짧은 글을 발표해보려고 조금씩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일본에서 소년만화는 기본적으로 근대국민국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소년’이라는 범주의 문제죠), 이런 점에서 소년만화는 근대교양소설의 맥락과도 어느 정도 연결됩니다. 수십 년 동안의 소년만화를 분석해야 좀 더 정확하겠지만 전체적인 밑그림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려져 있습니다. 소년만화는 만화의 주인공이 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라고 거칠게나마 이야기할 수 있고, 그렇다면 강연금이 보여준 두 주인공의 괴리(서사시적 주인공/근대소설적 주인공)는 소년만화라는 장르내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지평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이건 도로님이 만들어낸 기괴한 예시인 군부정권이 강연금의 세계관이라는 해석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쯤이면 왜 님의 해석은 과잉된 해석이고 제 해석은 타당성이 있는 해석인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강연금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인 결말에서 소년만화의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배신한 것은 역사적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군부정권을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무력합니다. 반면에 근대와 교양소설이라는 범주를 끌고 온 제 관점은 유효하구요. 제 관점에서 다른 소년만화들도 잠시 언급할 수 있겠군요. 왜 오즈카 데사무의 <정글대제>는 ‘정글’이라는 투쟁의 공간을 필요로 했고 정글과 어울리지 않는 ‘사자’를 주인공으로 필요로 했는지, 왜 나루토와 원피스의 주인공은 ‘왕(호카게, 해적왕)’이 되려하는지, 간츠나 진격거는 코스믹 호러를 표방하는 듯 보이다가 왜 결국 그저 그런 소년만화의 결말로 봉착하게 되었는지(코스믹 호러는 소년만화와 양립가능한지) 등을요. 강연금으로부터 관심을 뗀지 너무 오래라 다시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제가 강연금의 한 부분이나 상징, 은유들을 곡해했을 수는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면 글이 ‘기-승-전-자본주의’처럼 보이기도 하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는 여전히 제 글은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고요. 그래서 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정작 제 글의 어느 부분이 구체적으로 잘못 되었는지, 왜 그러한 부분들이 논리적 비약인지는 언급하지 못하는 님의 댓글이 아쉽습니다. “재삼 밝히건대 이 리뷰는 하나하나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거나, 해석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거나, 상당한 수준을 갖췄다 인정받을 지식의 나열이죠.” 이런 말 몇마디로 퉁칠 게 아니라는 건 님 스스로 더 잘 아실 겁니다. | 21.04.09 02: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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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롤스
소위 말하는 뽕이나 대리만족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지요 ㅎ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21.08.18 19:16 | |
삭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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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리스록하트
마음껏 퍼가셔도 됩니다~! | 21.08.18 19: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