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주의라고 써놨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본 글에선 영화의 일부분이 아니라 거의 모든 내용에 대한 글이며
제가 영화를 보고 내린 해석은 당연하지만 정답이나 감독의 의도가
아닐 수 있으며 영화를 감상하실 때 방해가 되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으신분은 읽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예고편에 꽂히기도
했고 칸 경쟁부분에 진출했다고 하여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개봉일날
버닝을 봤습니다.
굉장히 느린 호흡이지만 묵직하게 끌고나가는 연출, 미친 촬영, 훌륭한
연기에 감탄하면서 상영시간내내 빠져들면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왔지만 이 영화는 며칠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는데 이창동 감독은 현실세계를 잘
그리는 감독이라고 들었는데 왜 이작품은 완전 반대의 느낌일까?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인물들은 모두 다 현실세계의
인물이 아닌 느낌을 받았으며 왜 굳이 감독이 그렇게 연출을했을까?
에 대한 의문이 며칠동안 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마치 문예창작과
교수님이 제게 과제를 내준 느낌이었습니다. 평소에 책을 읽지도 않고
깊이가 있는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가볍게 제 해석을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영화내에서 인물의 비현실성이 보였습니다.
해미 - 방금 새로운 친구인 벤을 사겼으면서 종수를 왜 유일한 친구라고
하는가?
왜 우물이 있었다고 했을까?
실종되기 전에 왜 비밀번호를 바꾸고 집정리를 하였을까?
종수 - 군 전역후 자신의 꿈의 실현보다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청춘의 모습은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왜 유독 종수는 더
넋이 나간 모습을 보여준것일까?
왜 종수의 금고엔 나이프 컬렉션이 있을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는건 벤인데 왜 내게 그 이미지가 또렷할까? 해미의 방에
어떻게 계속 들어갈 수 있을까?
벤을 죽인 후 증거를 없애려면 것옷 정도만 벗으면 되는데 옷을 모두
벗는 것일까?
벤 - 슬픔과 눈물이 없는 인간이 가능할까?
자신의 흔적을 왜 종수에게 보여주는가?
종수의 분노의 대상이 된걸 눈치 챈 느낌이지만 왜 경계하지 않는가?
아버지 - 세상에 자존심때문에 1년6개월 징역가는사람이 어디있나?
왜 아들과 대화는 하지 않는가?
어머니 - 자신이 처한 어려움의 해결을 위해 아주 오랜만에 아들을 찾아와서
왜 아들이 보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딴청을 피우나?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면 등장인물들은 매우 극단적인 스테레오타입의 한가지
모습만 보여주는것 같았고 저는 이 인물들이 인간의 각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장면에서의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활활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싸늘한 느낌이 들기보다는 차분하고 마음이 정리
되는 느낌을 받았으며 마지막에 종수가 벤을 찌르고 태우는 모습 역시 비극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린 해석은 영화의 전체적 내용은 종수가 쓴 인간 본성에 대한 소설 속 내용
이라는 결론입니다. 이창동감독님 역시 소설가였으며 소설을 영화적으로 연출해
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물과 사물은 각각의 의미를 상징하는 모습
으로 연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의 내용은 청춘의 박탈감과 분노를 표현했고 비극적으로 끝났다면
소설로 해석을 하면 역설적으로 교훈적인 내용과 해피엔딩에 가깝지 않나 라는
느낌을 받았으며 이창동감독은 정말 천재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본적으론 해미=종수=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에서 떨어져 나와 각각
해미, 종수, 벤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왜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냐면
해미 - 종수의 집을 보면서 "마치 우리집 같네" 라는 말을 합니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은 두 명의 '굶주린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와 리틀 헝거(Little Hunger). 리틀 헝거
는 배를 채울 음식을 원하지만 모든 배고픈 자들의 으뜸인 그레이트
헝거는 '의미'에 굶주려 있다." 해미의 이 대사를 듣고 아 이거 개인이
직접 경험한 내용이 아닌거 같다. 마치 다큐멘터리나 책에 나온 내용
이다 라고 생각 했습니다.
제가 찾아보니 이말은 로렌스 반데어 포스트 라는 사람이 처음 부시맨의
격언을 옮겨으며 웨인다이어의 '세상에 마음 주지 마라'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책의 내용을 한줄로 줄이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라" 며
이책을 해미가 아닌 종수가 읽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해미는 삶의 의미, 꿈, 열정, 빛(그레이트 헝거)
벤 - 자신의 취미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것이라고 했지만 영화에서 비닐하우스
에 불을 붙여본것도 비닐하우스가 활활 타는 모습을 바라본 이미지를 가진
인물 역시 종수이다. 영화 초반에 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것으로 보이는데
(담배 피는데 식후땡 같이 안하기 힘들다라고 생각) 영화 후반부에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마치 종수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심지어 그때의
의상도)
또한 종수의 욕망이 이루어진 상태를 대비적으로 보여줍니다.
물질적으론 파주의 초라한 집과 강남의 고급빌라, 봉고프런티어와 포르쉐
정신적으론 초조하고 불안한 종수와 다르게 여유와 자신감이 넘치며 공항에서
오는길의 대화에선 어머니에게 ~씨라고 부를만큼 친하고, 가족들과의 식사자리
에선 누나 또는 여동생 식사자리에서 삼촌으로서 존재감이 있습니다. 이는 종수의
어머니,누나와의 관계와 상반됩니다.
벤은 욕망, 종수를 둘러싼 현실과 현실의 욕망을 이룬 존재,
그림자(리틀 헝거)
종수 -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윌리엄 포크너라면 그의 작품중 하나인 '헛간 방화'를
모를리 없다. 근처에 비닐하우스가 있는 사람도 비닐하우스에 불을 붙인
사람도 비닐하우스가 타는 모습을 또렷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종수이다.
종수는 인간에서 해미가 떨어져 나가고 벤역시 떨어져 나가
리틀 헝거도 아니고 그레이트 헝거도 존재
메타포들
제 해석을 기반으로 메타포를 추측하였습니다. 당연히 감독의 의도와 다르거나 틀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본작품에서 메타포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메타포가 뭐야? 아 그건 종수씨가 알려줄거야."
이 말과 처음에 '버닝'이라고 영화 제목이 뜨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의 폰트가 인상적
이었는데 옛날 타자기의 폰트 같습니다. 이는 버닝이라는 문학작품 즉 이 영화 내용의
전체가 종수가 자신을 화자로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수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윌리엄 포크너는 "의식의 흐름"으로 유명한 작가인데요.
이 의식의 흐름이란 주인공들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공간이 뒤섞인 등장인물들이
기억하는 크고 작은 사건과 이미지들, 감각들이 꿈처럼 그려지는 기법입니다.
마치 영화 '버닝'처럼
영화 '버닝'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라고 알려졌지만 또하나의
원작이 있습니다. 1938년에 쓰여진 '헛간방화'라는 작품이며 작가는 윌리엄 포크너입니다.
이작품은 윌리엄 포크너 단편선에 항상 들어가 있는 작품입니다. 여담으로 윌리엄 포크너
는 작품활동과 편지를 쓸 때 타자기를 주로 사용했는데 1930s underwood poterble
typewriter를 사용했으며 그 폰트는 영화 버닝에 쓰인 제목의 폰트와 비슷합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타자기와, 그 폰트로 쓴 영화제목, 한글은 적용안되서 영어로 써봤네요)
[나이프 컬렉션]
어디에 쓰이는지 바로 생각나지 않는 열쇠, 잘 가보지 않은 창고와 그안의 금고는
종수(인간)의 깊은 내면을 상징하며 칼은 종수의 분노를 상징, 칼 갯수가 많은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 그리고 욕망도 이루지 못한 인간의 내면에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지 못해서 (태워버리지 못해서) 커져가는 분노를 상징
[흰색 봉고 프런티어와 검정 포르쉐]
흰색 봉고 프런티어는 처음엔 흰색이었지만 때가 타고 찌그러진 차
(문예창작과를 입학할때는 소설가의 꿈이 있고 지금도 막연히 소설을 쓸거라고
생각하지만 하루하루 현실에 쫒겨 첫 문단조차 써내려가지 못한 종수의 상징)
검정포르쉐는 대비적으로 내현실의 초라함을 보여주며 욕망을 상징과 같은 차
봉고 프런티어는 풀악셀 밟아봤자 포르쉐를 못따라가는 것은 현실과 욕망도 역시
이루기 힘든것임을 암시
추격전에서 봉고 프런티어는 포르쉐를 쫒다가 쫒겨 숨는것은 인간이 현실과 욕망을
쫒기도 하고 인간 역시 그것들에게 쫒김을 당하는것을 상징
봉고프런티어 정면의 운전석 아래에 SILENT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기존 상용차보다
조용하다는 뜻의 마케팅적 측면의 글귀지만 삶의 의미와 현실의 욕망사이에서 이도저도
아닌 종수의 침묵의 상태를 상징
[종수가 키우는 소]
소는 젖소이며 마치 종수의 흰색차와 벤의 검정 포르쉐가 뒤섞인 이미지며 이는 삶의
의미와 현실의 욕망이 함께 종수에게 존재하지만 어느것 하나 온전히 가질수 없는
침묵의 상태를 의미하며 소를 파는 장면에서 이 침묵을 깨겠다는 종수의 다짐을 의미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딨겠어?", "우리 모두가 작가이다."]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위의 대사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기억이 나네요.
이작품이 한 인간의 개인사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을 의미함
[벤의 친구들과 만나는 장면]
해미가 말하거나 춤추는 장면, 후반부의 새로운 여자가 말하거나 춤추는 장면에서
벤의 친구들은 비웃거나 듣지않고 벤은 하품을 한다. 이는 우리 주위의 현실은 우리의
꿈에 큰 관심을 가져주지 않음을 의미한다.
[종수의 집에서 3명]
대마를 피우는것은 종수(인간)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것 한 인간속에 종수,해미,
벤은 동시 존재함을 의미
해미는 저물어가는 태양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데 이는 해미가 언급한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의 춤이다. 바로 그레이트 헝거의 눈부신 아름다움 즉 진정한 삶의 의미를 종수에게
보여준다. 종수는 해미에게 반해서 "나는 해미(삶의 의미)를 사랑하고 있어요" 라고 벤에게
말을 하자 벤은 비웃는다. 마치 "소설 그거써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겠냐?"라고 진정한 삶의
의미는 그레이트 헝거만이 가질 수 있는데 종수는 그말을 듣고 해미를 손에서 놔버린다.
"창녀나 그런거야"라는것은 현실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질수 없는 종수가 맘에도
없는말을 한것이다. 마치 포도먹기에 실패한 여우가 "저 포도는 실거야"라는 자기위안과
같이 해미를 떠나보낸다.
[집주위 안개속에서 불탄 비닐하우스를 찾아 뛰어다니는 종수]
막상 해미를 떠나보냈지만 삶의 의미가 아직 내면 깊은곳에 있지 않을까? 라는 심정에
비닐하우스(해미)를 찾아 헤매는 장면
[종수와 벤의 추격전,강둑에서의 2사람]
집주위 비닐하우스 즉 내 내면에서 해미를 찾을 수 없자 현실에서 해미를 찾기 시작한다.
추격전에서 쫒다가 쫒기는 것은 현실을 쫒고 현실에 쫒기는 인간을 의미, 강둑에서 포르쉐
를 사이에 두고 벤과 종수가 함께 있는 장면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과 호랑이
같이 같은존재를 의미함을 상징
[고양이 보일이]
해미와 있을때는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가 해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 미련과 죄책감을 의미. 고양이를 찾았다는것은 반대로 해미를 이제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하며 젖소를 팔아 애매한 나의 마음을 정리하고 현실(벤)에게 분노를 쏟아낼 준비를
한다.
[불태우는 행위]
현실에 대한 분노를 태우는 행위이자 다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받아드릴수 있는 순수의
상태로 돌아가기 의한 치유의 의식이며 삶의 의미를 찾기위한 행위
어린종수에게 어머니는 해미와 같은 존재(첫번째 삶의 의미)이며 아버지는 벤과 같은 존재
(처음으로 나를 둘러싼 현실이며 내 분노를 처음 받아낼 존재) 어머니가 왜 집을 나갔는지
자존심 강한 아버지는 말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종수는 결국 어머니를
(떠난 후에야 비로소 삶의 의미였음을 깨닫게 됨) 떠나게 한것은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분노를 아버지의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성인 종수역시 해미가 사라진 이유는 벤이 해미를 없앴다고 생각하며 벤을 향해 분노를
표출 합니다.
어린종수가 비닐하우스를 태울때도 성인 종수가 벤과 그의 차를 태울때도 옷을 벗고
있는데 이는 먼저 떠나가버린 삶의 의미에 흔적 즉 미련과 죄책감이 종수의 옷을 상징
해 이를 같이 태우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는 이미 종수(인간)에게 떨어져 나간
상처를 봉합하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어린 종수는 물에 젖어 있고 벤을 태운 종수는 겨울에 눈을 맞습니다.
이는 태우는 행위 후 분노가 식어감 (완벽한 치유까진 아니더라도 상처의 봉합)을 의미합니다.
또한 벗은채로 물에 젖거나 눈을 맞고 있기 때문에 몸을 떠는데 이는 해미가 언급한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의 춤과 유사합니다.
부시맨의 전통의식으로써 밤에 불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데 부시맨에도 불은 치유의 의미
이며 그레이트 헝거(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가 되는것을 의미 합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방화'에서도 방화행위는 분노의 표출 뿐 아니라
'preservation of integrity'라는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고 포크너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직역하면 무결성의 보존이라는 뜻인데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한 보호 행동 정도로
해석됩니다.
[종수의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는 종수의 첫번째 해미 (삶의 의미), 소중함이란 함께 할땐 못느끼다가 잃어봐야 느끼는
경우도 있다. 마치 건강과 같이 어머니가 떠나고서야 종수에게 어머니는 첫번째 삶의 의미가
된 것이며 아주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것은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와 같이 살아야하는 상황(현실에서의)을 이겨내기 위해 아버지
에 대한 분노와 함께 어머니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을 태워냈었기 때문에 어릴적 종수의 삶의
의미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종수에게 비친것을 상징
아버지 역시 첫번째 벤 (처음 맞서야 하는 현실), 아버지가 밉지만 현실속에 아버지와 함께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 역시 어머니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과 함께
태워낸 후 차갑게 식은 분노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감을 상징
[벤의 집에 있는 팔찌들]
그동안 종수를 스쳐갔던 많은 삶의 의미들, 첫번째 팔찌는 종수의 어머니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벤의 집에 있는 새로운 여자와 화장통]
영화에서 해미는 처음 종수를 만날때만 화장을 했다. 벤에 집에 있던 새로운 여자는
지금 종수에겐 아무 의미가 아닌 존재지만 벤이 화장을 해주면 종수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로 벤은 종수에게 그녀를 또 다른 해미로 만들어 소개시킬 것이다.
[해미의 방=아프리카]
삶의 의미를 찾는 공간 해미방의 아프리카 대륙 사진, 드림캐쳐, 하루에 아주 짧은
순간만 방을 밝히는 햇빛 처음에 해미가 인도했고 해미가 없을 때 들어가기를
실패하다가 들어가고 나중엔 계속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이곳에서 종수는 리틀헝거(욕망의 실현=자위행위)에서 그레이트 헝거
(삶의 의미=글을 쓰기 시작)로 진화한다.
[벤의 공간]
벤의 공간에선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인간관계도 한층 여유가 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삶의 의미를 얘기하면 벤의 친구들은 비웃고 벤은 하품을 한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장소
[종수의 집]
벤의 집처럼 욕망이 실현된곳도 아니며 해미의 방이나 아프리카처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이곳에서 종수는 그가 키우는 흑백이 섞인 젖소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봉고프런티어 앞의 SILENT처럼 침묵하면서 창고의 금고의 칼처럼 그의 분노만
쌓아놓고 있는 장소
[우물]
해미의 가족들 그리고 이장님이 우물이 없다고 하는게 좀 더 진실에 가깝지만
왜 해미와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것인가? 삶의 의미를 찾아낸
상태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종수 어머니의 기억속에 우물이
마른것은 어린종수가 어머니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을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함께
태워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벤은 종수에게 악의 존재인가?]
제 결론은 아니다 입니다. 벤과 종수는 결국에 같은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종수의
파멸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에서 벤은 종수를 각성을 바라는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해미를 벤에게 보내 그것을 사라지게 만듬으로써 종수에게 아주잠깐 만난
해미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며 종수와 해미에게 너희들이 진정 원하는것을 얻으려면
너희를 짓누르고 있는 돌을 빼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돌을 빼내는 행위는 비닐하우스
를 태우는 행위와 같은 의미이며 그래야만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느낄 수 있다고
벤이 알려줍니다.
"해미에게 종수만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였다"라는 해미의 춤에서 아름다움(삶의 의미)을
본 종수만이 해미를 가질 수 있음을 종수에게 알려주며 태워지길 기다리는 종수의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려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종수를 변화시킵니다.
종수가 자기를 미워함을 감지하면서도 경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팔찌들과 고양이
보일이를 종수에게 보여주면서 종수의 분노를 키우고 담담하게 받아낼 준비를 합니다.
결론은 해미는 양, 벤은 음의 존재로서 무의 존재인 종수(인간)의 성장을 이끌어 냅니다.
글을 마치며
영화가 끝나면 벤과 해미는 없지만 종수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겁니다.
종수의 차에 눈이 쌓이면 차의 흠집도 찌그러짐도 차에 쓰인 SILENT 라는 글자도 눈에
가려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순수의 존재로 성장할 겁니다.
영화 버닝의 메시지를 짧게 줄이면 "삶의 의미를 찾아라. 그게 보이지 않는다면 막고
있는 분노와 미련 죄책감을 태워버려라 그래야 침묵을 깨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라고 저는 해석해 봤습니다. 영화 내용과는 완전 반대네요.
며칠동안 생각한것을 두서없게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지고 중복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부족하고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