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
스스로에 대해 사유하는 블록버스터
극장에서 <베를린>을 흥미롭게 보고 난 후 첩보영화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 너무 오래 아껴두다 까먹고 있던 <007 스카이폴>(이하 스카이폴)을 보았다. 아, 우아한 블록버스터라는게 가능하구나. 영화라는 매체도 역시 모든 예술매체와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대해 고찰할 수 있고 그것이 잘 될 경우 좋은 영화로 평가받는다. 철학적 주제에 대한 탐구 뿐만 아니라 영화 작품이 포함된 장르에대한 치열한 고찰 끝에 만들어진 장르영화나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그것을 비틀기까지 사유의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스카이폴>은 자신외에는 누구도 사유할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출발한다. 스스로의 정체성, 즉 50주년을 맞이한 블록버스터 첩모물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영화는 보지 못했다.
50년의 전통은 많은 것을 남겼다. "본드, 제임스 본드" 라는 자기 소개방식, 수 많은 본드 걸들, 비밀무기,
위기의 상황에도 유머를, 그것도 고급 유머를 하는 여유, 마티니, 벤틀리.... 식상한 동시에 매력요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유해 보는 것은 사색에 공간을 내줄 여유가 없는 <본>시리즈나, 배우의 매력 하나만으로 이어져온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007>시리즈 만의 특권이다. 배우가 바뀌어가며 쌓아온 전통. 시대가 변화하고 그 전통이 발목을 잡을 때가 되면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켰다. 피어스브로스넌의 007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고 있을 때 <007>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이제는 유치하다는 말을 들은 <007>특유의 과장된 액션을 버리고 <본>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몸으로 부딪히는 거친 액션을 취했다. 그러한 변화에 맞춰 매끈한 CEO와 같았던 피어스브로스넌이 맡았던 제임스 본드는 007보다는 악역에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들은(양복은 잘 어울리지만) 다니엘 크레이그로 변화하였다. M역을 맡은 주디 덴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뀐 듯한 새로운 <007>에 신세대 펜들은 환호했지만, 기존 펜들에겐 '과연 이것이 007인가'하는 의문을 품게 해줬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007, 그러나 전통과의 단절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였다.
<스카이폴>은 50주년 기념작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시리즈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길을 닦는 일을 2시간 동안 모자람도 과함도 없는 우아함 속에서 해낸다. 제목이 뜻하듯 추락한 007과 MI6의 재기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것을 상징하는 <007> 특유의 오프닝 장면은 그것만으로 전율을 주기에 충분할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재기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반성을 동반했다. 007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목숨을 좌우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인가. 마치 냉전이 끝난 시기 <007>의 존재 의의가 무엇인지 묻는 듯한, 냉전이 끝난 시기 그림자 속에서 일하는 MI6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스카이폴>은 끊임 없이 묻고 답한다. 그것을 위해 MI6의 위협 역시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는다. 그 과정에서 <007>의 국적, 즉 영국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영국인들이 <007 스카이폴>에 보낸 사랑은 그 보답이었다. <스카이폴>은 자랑할만한 영화다.
<스카이폴>의 M은 역대 어느 걸에도 뒤지지 않는 매력을 발휘한다.
<스카이폴>은 지금까지의 <007> 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뿐만 아니라 '50년 동안 이어져온' <007>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007, M, Q등 고정 캐릭터를 배우를 바꿔가면서 생명을 이어온 시리즈에 대해 감독은 '세대교체' 를 통해 말한다. 오랜기간 M을 연기하며 <007>의 중심을 잡아준 노배우 주디덴치와 <퀀텀 오브 솔러스>부터 <스카이폴> 사이의 세월이 얼굴에 각인된 007 다니엘 크레이그의 앙상불은 시대의 흐름에 대해 느끼게 해줬다. 그렇게 일단락이 되는 <007>의 한 세대, 동시에 새로운 세대이면서 <007>의 전통인 매력적인 캐릭터 Q와 머니페니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전통의 끝은 새로운 것을 불러오고, 새로운 것은 잠시 잊혔던 전통을 부활시켰다. 그 교차점에 존재하는 <스카이폴>은 기존 007의 팬이라면 실로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두 '젊은' 캐릭터
그렇다고 <스카이폴>이 자신에 대해 자문 자답하기만 하는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다. 비록 스케일은 기대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잘 설계된 액션 장면들, 빛과 그림자를 적절하게 활용한 유려한 촬영, 영화의 우아함을 배가해주는 음악, 청문회 장면에서 보여주는 멋진 편집까지 흠 잡을 데가 없는 월메이드 블록버스터로서 <스카이폴>은 재미있는 영화다. 혹시 이번 편의 스케일에 만족하지 못한 분들이라도 <스카이폴>이 탄탄하게 다져놓은 기반 위에 높고 화려하게 솟아오를 새로운 시리즈를 기대해보자. 앞으로의 50년을 향한 반석이 된 <스카이폴> 이후의 작품들이 <스카이폴>에 누를 끼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차기작 소식은 언제나오는거야?
그래 <007>를 탄생하게 했다는 면에서는 대영제국 너희들 짱먹어라!
p.s. <스카이폴>이 어떤 블록버스터에서도 느끼지 못한 우아함을 느끼게 해줬지만, 그래도 '재미' 라는 면에는 이 좀 더 재밌었던 듯 합니다. <카-지-노 로얄> > <스카이폴>>>>>>>>>>>>>><퀀텀 오브 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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