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 국내에 정식 발매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슈타인즈 게이트'는 '카오스 헤드'의 뒤를 이은 MAGES.(5pb.)와 니트로플러스와의 두 번째 합작 타이틀로, 아키하바라의 한 서클에서 우연히 만들어낸 물건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그리는 작품입니다. '과학 어드벤처'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카오스 헤드와 슈타인즈 게이트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스치듯 아주 약간의 접점을 보여주긴 하지만 사실상 별개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나 캐릭터 등 직접적인 연관 없이 독립적인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슈타인즈 게이트 본편의 캐릭터들이 그대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러브 코미디 콘셉트의 공식 팬디스크 작품인 '슈타인즈 게이트 비익연리의 달링(이하 비익연리의 달링)'은 원래 일본에서는 본편과는 어느 정도 차이를 두고 발매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슈타인즈 게이트 본편과 함께 자막 한글화를 거쳐 같은 날 발매되었습니다. 또한 슈타인즈 게이트 본편과 비익연리의 달링 두 작품 모두 PS3와 PS Vita 양 기종으로 동시에 발매되었으나 세이브 파일이나 트로피 시스템을 공유하지 않고 각각 별개의 타이틀로 구분됩니다.
과학 어드벤처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슈타인즈 게이트. |
낯익은 얼굴이긴 한데…. |
슈타인즈 게이트는 이젠 일본에서도 주류 장르가 아님에도 전 기종 합쳐서 4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으며, 애니메이션과 소설 등 다양한 미디어 전개가 이어졌습니다. 국내에서는 장르의 특성으로 인해 게임보다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처음 접한 사람들이 많은 타이틀이라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비익연리의 달링과 '슈타인즈 게이트 변이공간의 옥텟(이하 변이공간의 옥텟)', '슈타인즈 게이트 선형구속의 페노그램(이하 선형구속의 페노그램)'이 제작되는 등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를 좋아한다면 반드시 플레이해야 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실 2014년인 지금에 와서 '게임'이라는 형태의 슈타인즈 게이트는 관련 작품을 제외하고 본편 단 하나의 타이틀만 두고 보더라도 그리 신선한 콘텐츠는 아닙니다. 2009년 Xbox 360으로 원작이 발매된 이래 2010년에는 PC 버전이, 2011년에는 PSP 버전과 iOS 버전으로 발매되었고 2012년에는 PS3로, 2013년에는 PS Vita로 발매되는 등 지난 5년 동안 다양한 기종으로 해마다 꾸준히 출시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뒤를 이은 관련 작품인 비익연리의 달링(2011년), 변이공간의 옥텟(2011년), 선형구속의 페노그램(2013년) 역시 발매된 지 꽤 시기가 흐른 타이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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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판으로 다운로드 버전이 발매된 iOS 버전 슈타인즈 게이트. |
8비트의 맛을 듬뿍 느낄 수 있는 변이공간의 옥텟. |
하지만 '한글판'이라는 단어가 타이틀 설명문에 붙는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간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된 슈타인즈 게이트 시리즈는 iOS로 출시된 슈타인즈 게이트 단 한 작품으로, 콘솔 버전으로는 한글화는커녕 국내에 정식 발매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한글화의 중요도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중요한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이며, 자막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2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루하게 버튼 하나만 눌러야 하는 게임이기에 한글화라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정식 발매의 의미 자체가 없는 타이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장르에 비해 텍스트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크다. |
게임 내 등장하는 단어의 뜻을 정리한 TIPS 리스트. |
게임이라는 형태를 하고 있기에 어느 요소 하나 불필요한 것은 없겠지만,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에서는 결국 시나리오의 중요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인과 이를 살려주는 성우들의 연기, 쾌적한 유저 인터페이스는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평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슈타인즈 게이트는 이들 요소에서 무난하게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슈타인즈 게이트의 가장 큰 매력은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를 바탕으로 풀어내는 스토리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예쁜 얼굴만큼이나 그림도 무척 잘 그릴 듯한 목소리다. |
사실 다른 캐릭터들과 휴대폰으로 메일(문자)을 주고받는 내용에 따라 이야기에 변경이 이루어지는 '폰 트리거' 시스템을 제외하면 슈타인즈 게이트의 시스템은 평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냥 ○ 버튼을 눌러가며 캐릭터들끼리의 대화를 읽는 것이 게임 진행의 99%라고 할 수 있으며, 슈타인즈 게이트를 통해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처음 접하는 유저들은 당혹감마저 느낄 수준입니다. 휴대폰으로 문자가 오면 이를 확인하거나 답장을 하고 가끔 상황에 따라 전화를 걸거나 받고 단어 해설(TIPS) 알림이 뜨면 이를 확인하는 것이 조작의 전부니까요.
챕터 7까지의 엔딩에서는 유저의 개입이 거의 없는 편. |
나한테 하는 소리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아프다. |
결국 대부분의 텍스트 어드벤처가 그러하겠지만, 슈타인즈 게이트는 음성이 지원되는 디지털 소설책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주제의 스토리와 일러스트레이터 Huke의 개성적인 캐릭터 디자인, 유명 성우들의 능글맞은 연기는 일상 생활에 가까운 이야기를 다루는 4챕터만 넘기면 5챕터부터 많은 사건이 급격히 발생하면서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총 6개의 엔딩은 희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지극히 비극적이기도 하고 처절한 고민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안타까운 결과로 마무리되면서 주인공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줍니다.
세계선 변동률 1%를 넘기기 위한 사투. |
20~30시간 정도 걸리는 소설책을 읽는 느낌. |
슈타인즈 게이트는 PS3와 PS Vita라는 하드웨어가 아니더라도 이미지의 해상도와 캐릭터 음성의 음질만 타협한다면 PS1이나 SS 시절에 등장할 수도 있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성능적으로는 PS3나 PS Vita 모두 차고 넘치는 데다 고사양을 요구하는 게임은 아니기에 양 기종 모두 로딩 문제도 없고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해상도와 깨끗한 음질로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큰 화면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PS3 버전도 나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끊어서 플레이하기 편한 PS Vita 버전이 슈타인즈 게이트라는 작품에는 더욱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PS3 버전이나 PS Vita 버전이나 이식 자체는 문제없이 이루어져서 쾌적하게 플레이할 수 있다. |
일본의 아키하바라를 무대로 한 슈타인즈 게이트는 대학생이면서도 여전히 중증의 중2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의 '미래 가젯 연구소'라는 수상한 서클에서 만든 전화렌지(가칭)의 뜻밖의 기능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그리고 있습니다. 내용 누설로 인해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무언가를 하나 바로잡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하나 희생해야 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한 오카베 린타로의 짧으면서도 매우 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멋진 목소리로 중2병 대사를 줄줄 읊는 오카베 린타로. |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로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
본 작품은 여러 주제를 게임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기관이나 화제가 되었던 인물을 약간 비틀어서 소재로 활용하고 시간 이동이나 음모론, 각종 과학 이야기를 진지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이야기를 섞어서 풀어냅니다. 과학 어드벤처 시리즈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임에도 하나의 주제에 대해 심오하게 파고들고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로 설명을 곁들입니다. 망상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저 막 던지는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사전 작업을 거친 후에 전달한다면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자칫 중2병의 망상에 지나지 않을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탄탄한 기둥을 세우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으며, 착실하게 단어 해설도 해주기 때문에 너무 어렵지 않게 게임이라는 형태의 콘텐츠를 플레이하는 데 문제 없을 정도로 게이머들을 납득시킵니다. 또한 소설이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게임'이기에 더욱 확실히 체감할 수 있는 '세계션 변동'의 연출과 이야기 전개는 게임이라는 콘텐츠와 그에 어울리는 스토리의 결합이 다른 장르의 매체보다 훨씬 큰 시너지 효과를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도 온다. |
뚯뚜루~☆ CG 100% 컴플리트 축하한답니다♡ |
공략법을 알아도 실력이 안 되면 클리어할 수 없는 게임은 많지만 슈타인즈 게이트는 A4 용지 한 장에 적힌 공략법만 있다면 플래티넘 트로피를 딸 수 있는 게임입니다(물론 공략법을 모르면 엄청 헤맬 게임이기도 합니다). 그냥 텍스트를 읽고 이해할 수 있고 버튼을 누를 최소한의 체력만 있다면 누구나 클리어 가능하고 모든 콘텐츠를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동안 국내에서는 그 최소한의 두 가지 조건 중 하나인 언어 문제로 인해 슈타인즈 게이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만약 안드로이드폰만 썼다면 iOS 버전 한글판도 딴 나라 이야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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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box 360 버전이나 PSP 버전이나 한글화는커녕 정식 발매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
그런 상황에서 발표된 슈타인즈 게이트의 한글화 뉴스는 여러모로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콘솔용 슈타인즈 게이트 시리즈 자체가 한글화가 힘들 것 같은 작품이기도 한데다 그 출처 또한 최근 몇 년 동안은 한글화와 거리가 멀어 보이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국내에는 정말로 오랫만에 이쪽 장르의 게임이 한글화되는 데다 슈타인즈 게이트와 비익연리의 달링, 선형구속의 페노그램까지 세 작품이 한꺼번에 한글화될 것이라는 뉴스를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드디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도 β세계선으로 변경되는 건가 경악하는 게이머들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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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인즈 게이트 본편과 동시에 정식 발매된 비익연리의 달링. |
선형구속의 페노그램 역시 한글판 발매 예정. |
게다가 번역 자체의 수준도 매우 좋은 편입니다. TIPS 카테고리를 포함해서 워낙 텍스트의 양이 방대한 게임이기 때문에 약간의 오타(하지만 끔찍하기도 한)와 오역은 있지만 초기 iOS 버전에서 볼 수 있었던 이상한 번역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특히 일본인이 사용하는 인터넷 용어를 국내 실정에 걸맞게 바꾸기도 하면서 제법 분위기에 어울리는 문장으로 다듬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한국 게이머들, 그리고 슈타인즈 게이트에 흥미를 가질 만한 게이머들에게 익숙한 단어나 표현은 굳이 바꾸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기도 하는 등 융통성 있는 한글화 작업을 했습니다.
아예 게임 내에서 모 사이트를 본뜬 @채널을 이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
힘ㅋ이ㅋ넘ㅋ친ㅋ다ㅋ. |
비슷한 부분이 많긴 하지만 애초에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는 언어를 번역하는 데다 게임 내 골수 마니아가 사용하는 일본식 인터넷 용어 같은 경우는 더더욱 국내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단어가 많은 걸 생각하면 적절한 번역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읽을 수 있는 미니 소설이나 iOS 버전에서는 그냥 넘어갔던 이미지 등의 한글화도 함께 처리된 것도 이번 PS3/PS Vita 버전 슈타인즈 게이트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발매 전 한글화 퀄리티에 대한 우려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도 한글화되었다. |
이런 부분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한글화. |
다만 슈타인즈 게이트 한글판에서 아쉬운 부분은 번역 부분이 아니라 텍스트 출력 부분에 있습니다. PS3 버전은 큰 문제가 없지만 PS Vita 버전은 자막 위에 작은 자막을 달아서 달리 발음하는 단어가 나올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글자 크기가 너무 작아서 작은 글자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주인공의 중2병 단어가 대부분이고 음성으로 해당 단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니 시나리오 이해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부분이지만 PS Vita로 처음 슈타인즈 게이트를 접하는 게이머들에게는 아쉬운 부분일 수 있습니다.
아예 글자 자체가 너무 작아서 일그러진 상태. |
사실 PS3 버전도 너무 작게 느껴지긴 하지만. |
일본에서는 4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왕성한 미디어 활동을 펼치는 작품이긴 하나, 여전히 국내에서 텍스트 어드벤처는 주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국내 비디오 게임 시장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슈타인즈 게이트 시리즈의 한글화 자체가 그저 놀라운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타이틀 자체도 완전 신작이 아니고 약간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슈타인즈 게이트는 텍스트 어드벤처라는 장르에서 최상위권에 놓을 수 있는 타이틀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발매 전 우려와는 달리 한글화 퀄리티 역시 기대 이상의 수준을 자랑합니다. 장르에 대한 선입견만 없다면, 그리고 아직 슈타인즈 게이트라는 작품을 플레이하지 않은 상태라면 충분히 플레이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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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별개 작품도 아니고, 원 소스 멀티 유즈인데... 애니가 혐한논란이 터지면 게임에도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이 생기는건 당연합니다. 남에게 사라마라까지 할 수야 없지만, 그걸 무뇌라고 표현하는 건 좀.. 어떨런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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