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상수리나무 숲이 시키는 대로
두 사내는 묵묵히
구덩이를 팠다
거긴 오래전부터 도적들의 숲이어서
재물을 빼앗기고
손과 발이 묶인 채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구덩이는 금세 나무뿌리와 돌이 걷힌 다음
검은 입을 쩍 벌렸다
차 뒤 트렁크에서 피 묻은 마대 자루가 질질 끌려
나왔다
삶은 아름다워라!
높은 담벼락의 성에서
살짝 빠져나온 공주는
환호작약 나비 떼를 따라가는데,
세상 그 많던 돈과 보물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봐 넌 누굴 원망할 자격도 없어 게다가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비열하게 목숨까지 구걸하다니,
사내 하나가 담배 꽁초를 구덩이에 던졌다
꽃, 별, 종교, 국가…… 강아지들!
마대 자루 속 꿈틀거리는 것도
이제 최후의 발악만 남은 것 같았다
구덩이가 푸하하하 웃었다
송찬호
분홍 나막신, 문학과지성 시인선 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