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유산
남자는 성실한 노예라네. 주인의 땅에서 목화와 옥수수를
키운다네. 목화는 주인을 부자로 만들고 옥수수는 가축과
남자를 매년 살찌우지.
물론 가끔은 매질을 당하기도 한다. 존, 존! 오전부터 내
아내를 훔쳐보다니! 그게 급하면 당장 가서 너의 여자에게나
들어가라! 남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아내를 눕힌다네. 마님의 양배추를 손질하고 돌아온
아내를 때린다네. 오전에 마님은 어떻게 입었지? 무슨 색
을 입었어? 엎드린 아내가 기름에 볶은 양배추 채의 향기
를 떠올리는 시간
남자는 곧 바지를 올리고 점심을 먹고 밭으로 돌아가네.
양배추 요리는 마님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옥수수는 남자
와 아내를 매년 살찌우지. 그리고 그녀는 자기 개를 목숨처
럼 아낀다.
남자는 성실한 노예라네. 목화가 끝나고 옥수수가 끝난
땅에다 아내와 개를 먹일 고구마를 기르지. 주인은 고기가
필요하면 사냥을 떠난다네. 물론 가끔은 존의 아내에게 들
어가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다네. 여자와 개가 도망치지
않는다면. 모든 마지막이 그렇듯, 모든 것과 함께 성과 집이
불타버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 돌 하나
도 돌 뒤에 남지 않고 무너져버린 아주 오랜 시간
주인도 노예도 다 죽었고,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
무도 모르지.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책 속에, 영화 속에, 머
릿속에. 끝까지 나름 행복했던 남자의 이야기와, 양배추와
개를 소중히 키웠던 여자의 이야기가 매년 우리를 살찌우지.
김상혁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시인선 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