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국에서는 호박이야말로 이 풍성한 계절을 대표하는 주인공 역할을 합니다.
호박 속을 파서 만든 잭 오 랜턴이 10월 초부터 불붙이기 시작한 호박 열풍은 11월의 추수감사절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지요.
곳곳의 농장에서는 호박 수확 행사가 열리고,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주황색 호박들이 식료품점 입구에 쌓이기 시작합니다.
바쁜 도시인이라도 스타벅스를 비롯한 여러 카페 메뉴판에 등장한 펌킨 스파이스 라떼를 보며 가을이 다가온 것을 실감하지요.
마침 두 개 $5에 특가 판매하는 조그만 파이 호박을 발견, 가을 분위기도 살릴 겸 오래간만에 펌킨 파이를 만들어 봅니다.
호박은 겉을 한 번 닦고 큼직하게 잘라서 전자레인지에 6~8분 정도 돌려줍니다.
잘 익었다면 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껍질이 잘 안벗겨진다면 몇 분 더 돌려어 완전히 익혀줍니다.
식기 전에 으깨서 퓨레를 만들고, 연유와 펌킨 스파이스를 부어서 섞어줍니다.
연유는 대부분의 레시피에서 14온즈 한 캔을 다 넣도록 되어있는데, 그럴 경우 미국 사람 입맛에 맞게 너무 달기 때문에 3/4만 넣어줍니다. 남은 연유는 로부스타 원두로 커피 내려서 베트남식 커피 만들어 먹으면 맛있지요.
펌킨 스파이스는 시나몬, 생강, 넛멕(Nutmeg: 육두구), 올스파이스, 클로브(Clove: 정향) 등을 섞어 만든 향신료입니다.
직접 갈아서 만들기에는 평소에 쓰지도 않는 향신료를 일일히 구해놓는 것도 귀찮은지라 시중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베이스로 깔고 개인적인 입맛에 맞게 시나몬을 추가로 넣어주는 편을 선호합니다.
어느 정도 식었을 때 달걀 두 개를 까서 넣고 잘 섞으면 파이 필링은 완성입니다.
파이 시트지는 바삭함이 생명인지라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쇼트닝을 대거 투입합니다.
버터는 상대적으로 수분 함유량이 높기 때문에 파이를 만들 때는 유지방 100%인 쇼트닝이 주역을 맡고, 버터는 고소한 향미를 내는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지요.
밀가루와 쇼트닝, 버터, 소금을 넣고 반죽기에 돌릴 때에는 너무 오래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큼직큼직한, 콩알만한 크기의 쇼트닝 덩어리가 남아있을 때 부터 찬 물을 한 스푼씩 넣으며 반죽기를 돌립니다.
푸슬푸슬한 감촉이 살아있는 반죽을 랩에 싸서 냉장고에 한 시간 정도 숙성시킵니다.
숙성이 끝난 반죽은 유산지 두 겹 사이에 끼워서 밀대로 밀어줍니다.
넓게 펴서 반으로 접고, 또 다시 넓게 펴서 반으로 접기를 반복하다보면 '엄마손 파이'의 384겹이 그닥 대단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으로 접어서 밀대로 미는 것을 9번만 반복해도 512겹이니,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게 된달까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밀대를 밀고 있노라면 차라리 초기 정착민 버전의 펌킨 파이를 만들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
미국에 최초로 정착한 청교도들은 호박을 파이 속재료로 쓴 게 아니라 파이 껍질로 썼기 때문이지요.
호박 속을 파내고 그 안에 꿀, 우유, 버터 등을 넣고 뜨거운 잿더미 위에 올려서 구워낸 다음 걸쭉해진 속을 그대로 퍼먹거나 파이 크러스트로 썼다고도 하니 밀가루 반죽과 씨름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었겠네요.
펌킨 파이는 대표적인 싱글 크러스트, 즉 한 겹짜리 파이입니다.
대다수의 파이는 파이 시트지 위에 필링 재료를 붓고, 그 위에 다시 시트지를 얹어서 두 겹을 만드는데
펌킨 파이의 경우에는 블라인드 베이킹을 해야 하는 관계로 뚜껑을 만들기가 애매합니다.
블라인드 베이킹은 내용물이 물기가 많을 경우 파이 시트가 눅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트만 먼저 한 번 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구워버리면 빵 굽는 것 마냥 부풀어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누름돌 역할을 하는 물건이 필요한데, 보통은 콩을 많이 사용합니다.
약 220도 (화씨 425도)에서 10분 정도 구워서 나중에 필링을 채워도 눅눅해지지 않도록 합니다.
한 번 살짝 구운 파이 껍질에 필링 재료를 채워넣고 175도 (화씨 350도) 오븐에 한 시간 가량 구워냅니다.
칼로 가운데 부분을 살짝 찔러봐서 반죽이 묻어나오지 않으면 다 구워진 겁니다.
뜨거울 때 먹을 수록 맛있는 다른 빵들과는 달리, 펌킨 파이는 완전히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관계로 충분히 식혀주는게 좋습니다.
아예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차갑게 먹어도 좋지요.
파이가 다 식으면 한 조각 잘라서 생크림을 한 스푼 듬뿍 얹고 펌킨 스파이스를 살짝 뿌리면 완성입니다.
예전에 여행 갔을 때 기념으로 구입한 잭 오 랜턴을 소품삼아 옆에 놓으니 잘 어울리네요.
어릴 적부터 할로윈 호박 머리라고 하면 '스누피'에 등장하는 라이너스가 매 년 할로윈마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호박대왕님 뿐이었고, 잭이라고 해봤자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에 나오는 호박들의 왕, '잭 스켈링톤'밖에 모르는지라 잭 오 랜턴을 봐도 그닥 무서울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할로윈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 중에는 호박 랜턴을 무서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모양이더군요.
원래는 아일랜드 설화인데, 교활한 사기꾼인 잭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악마를 속여서 등쳐먹고 결국엔 자기 영혼에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죽고 난 후 저승으로 간 잭이 천국에서는 '사기꾼은 천국에 올 수 없다'며 쫓겨나고, 지옥에서는 '네 영혼을 받아주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쫓겨나게 됩니다.
길이 어두워서 갈 수 없다며 버티는 잭에게 악마는 불붙은 석탄 조각을 던져주고, 결국 잭은 주변 밭에 자라던 호박(이야기에 따라서는 감자나 순무)을 뽑아 속을 파내고 석탄을 넣어 만든 랜턴을 든 채 유령이 되어 이승을 방황한다고 하지요.
워낙 무서운 이야기도 많고, 무서운 사건들도 많이 발생하는 요즘 기준으로 볼 때는 별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불 보자기 뒤집어 쓰고 우는 소리만 내도 "유령이다! 엉엉엉"하는 순진한 아이들에게는 영원히 떠도는 유령의 이야기가 나름 충격과 공포일지도 모르겠네요.
펌킨 파이는 달달한 맛도 좋지만, 여기에 강렬한 향신료의 냄새가 섞이면서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 냅니다.
부드러운 호박 무스와 바삭한 파이 껍질이 조화를 이루고, 차가운 생크림의 고소한 맛이 더해집니다.
애초에 호박의 원산지부터가 북미였으니 그야말로 '미국의 가을'에 맛이 있다면 바로 이 맛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음식이지요.
물론 대다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최초의 추수감사절에는 펌킨 파이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남북전쟁 당시에는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공식 국경일로 지정하려고 하자 남부에서는 "양키들이 구운 칠면조와 호박 파이나 먹는 자기네 명절을 강요하려고 한다"며 반발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펌킨 파이는 그야말로 미국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요리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깡통에 든 Libby's 호박 퓨레와, 깡통에 든 연유와, 이미 반은 완성된 상태로 팔리는 파이 크러스트의 조합이 요즘 '홈메이드 펌킨 파이'의 대세이긴 합니다만 그마저도 요즘 세태를 반영하며 역사를 함께한다는 증거니까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뭉치면서 그야말로 펌킨 파이라는 단어 외에는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맛이 완성됩니다.
추억의 군고구마라고 하면 고구마의 단맛 뿐 아니라 드럼통 난로를 달구는 장작의 연기 냄새, 종이 봉투의 종이 냄새, 그리고 싸늘한 날씨 속에서도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그 온기까지 포함하듯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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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잘 보고 있습니다. 식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참 대단하면서도 내심 부럽네요. 추천 하나 받으시고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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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가 정말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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