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영원(永遠)’의 표상은 《우테나》에서는 승리한 “듀얼리스트”가 언젠가 얻게 될 성의 모습으로, 《파이트 클럽》에서는 신용카드 회사의 고층 빌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그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항상 배경 어딘가에 혹은 주변에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보통 사람이라면 닿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빛나는 것(보상)이나 빚(패널티) 등을 계속해서 상키시킨다. 이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계속해서 플레이하도록 유도하는, 게임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이며, 게임이 지속되는 한에서만 영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테나》에서는 성이 마지막에 무너져 사라지고, 《파이트 클럽》에서는 신용카드 회사의 빌딩이 폭파당한다. 이 두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이 영원의 표상이 파괴되며, 플레이어들로 인해 게임이 파산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이 ‘영원’의 표상과 파산을 통해 《우테나》와 《파이트 클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임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낼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이야기를 잠시 돌려 미야다이 신지의 ‘끝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보자.
미야다이 신지가 ‘끝없는 일상’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끝없는 일상을 살아라>는 저서에서 묘사한 1990년대의 일본 젊은이들의 상황이었다. 이 ‘끝없는 일상’의 대립항으로 미야다이 신지는 ‘아마겟돈 (후 공동성이라는) 환상’를 제시한다.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끝없는 일상’과 달리, ‘아마겟돈 환상’은 핵 전쟁과 같은 파멸이 일어나 “세상이 종말을 고해야만 폐허 속에서 단결과 공동성이 부활한다”는 형태의 환상이다.
‘오움진리교 완전 극복 매뉴얼’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야다이 신지는 1995년에 오움진리교에 의해 일어난 ‘지하철 사린 사건’에 주목하면서 이 오움진리교란 종교는 ‘아마게돈 환상’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아사히라 쇼코를 교주로 하는 오움진리교는, 오쓰카 에이지의 지적처럼 “‘음모 사관’과 ‘종말 사상’”을 특징으로, “그것들이 모두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오타쿠계의 하위문화’로부터 직접 ‘인용’한 것이거나 그것의 무의식적인 ‘반향’” 이었다. 오움진리교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이 하위문화=서브컬쳐가 어떤 커다란 이념=신을 대신해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이 없는 사회에서 공동체가 붕괴할 때 우리는 ‘빛나는 공동체’의 환상에 놀아나고 공백이 된 양심의 장소에 ‘가짜 아버지’에 의해 ‘좋은 것’을 이식하게 된다. ‘끝없는 일상’을 견디기 어려워 ‘빛나는 아마겟돈’을 몽상하고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몽상을 현실화’하려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역사의 교훈은 그래도 결국은 ‘끝없는 일상’이 승리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 이번 소동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끝없는 일상’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예전의 아마겟돈 환상도 사다리가 치워진 이상 그 출구 없는 힘겨움은 이전보다 더 심해질 게 뻔하다.
결론을 말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없는 일상을 사는 지혜’다. “끝없는 일상에서 무엇이 좋은 일인지 모른 채 막연한 양심을 안고 살아가는 지혜”다.
- 미야다이 신지, 『끝없는 일상을 살아라 – 오움교 완전 극복 매뉴얼』
이 글의 1 편에서 ‘끝없는 일상’과 게임이 닮아있다고 본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게임의 파산을 그려내는 《우테나》나 《파이트 클럽》은 바로 그 ‘끝없는 일상’의 대척점인 ‘아마겟돈 환상’ 쪽에 있다. 마치 그 증거처럼, 《우테나》에서는 마지막에 ‘바깥 세계’로써 모든 것이 파괴된 ‘황야’가 펼쳐지고, 《파이트 클럽》에선 결말부에 자본주의 사회가 영(0)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우테나》나 《파이트 클럽》은 정말로 미야다이 신지의 말처럼 ‘힘겨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몽상을 현실화’하려는, 오움 진리교와 동질한 상상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오움 진리교 완벽 극복’처럼, ‘끝없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1990년대에 만연했다는 이 상상력은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단정짓기에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
오움 진리교는 위에서 말했듯이 서브컬쳐로 이념=신을 대신하고 있다. 이는 장 프랑수와 리오타드가 말한 “커다란 이야기”의 실추로 인한 포스트 모던적인 상황, 그러니까 “사랑으로 원죄에서 해방된다는 기독교, 노동의 사회화에 의해 착취와 소외로부터 해방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야기, 산업 발전과 경쟁이 빈곤을 해결해준다는 자본주의의 이야기”, 쉽게 말하자면 신이나 아버지가 없어진 뒤의 “무수한 작은 이야기들이 단편적으로 산란되고 있는 상태” 에서 서브컬쳐로 이 결여를 메꾸고자 하는 욕망이다. 하지만 정작 《우테나》나 《파이트 클럽》에서 신에 대한 태도는 ‘메꾸고자 하는 욕망’과는 다르다.
2. 《우테나》와 《파이트 클럽》이 파괴하고 싶었던 것
그래, 너의 왕자님이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 나와 함께 돌아가자. 살아 있으면서 죽어있는 저 닫힌 세계로. / 불쌍하게도. 당신은 저 세계에서만 왕자님인 거네요. 하지만, 나는, 우테나는 나갈 거에요. 바깥 세계로 / 그만둬. 어차피 너희들이 다다를 곳은 세계의 끝이다. /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 그곳에 가는 걸요. 안녕, 나의 왕자님.
-《소녀혁명 우테나 ~ 어돌센스 묵시록》
아버지는 신의 모델이지. 아버지가 우릴 버렸는데 신은 어떨까. / 몰라 / 잘 들어. 신도 어쩌면 우릴 안 좋아할지 몰라. 신이 우릴 거부하고 미워할지도 모르는데 이딴 게 대수야? / 뭐? / 신은 필요 없어 / 그래 필요 없어 / 구원? 구원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해. 우리가 신으로부터 버려졌다고? 그럼 그렇게 내버려 둬!
내게 맡겨봐. 늘 그랬듯이 지금은 반항해도 나중에 감사할 거야 / 타일러, 타일러, 네가 해준 모든 것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이건 지나쳐. 난 이걸 원하지 않아. (중략) 타일러, 내 말 똑똑히 들어. / 좋아 / 내 눈은 떠있어
-《파이트 클럽》
오히려 《우테나》나 《파이트 클럽》은 바로 그러한 신, “커다란 이야기” 따위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왕자님’이 있는 세계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며 이 닫힌 세계가 아닌 ‘바깥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구원 따윈 엿이나 먹으라고” 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우상인 타일러 더든으로 돌아가는 것도 포기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끝없는 일상’이라는 게임의 파탄을 그리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테나》나 《파이트 클럽》이 오움 진리교와 다르다고 하다면, 이들이 공격하고자 하는 게임과 그 게임을 지탱하는 ‘영원’의 표상, 그러니까 ‘끝없는 일상’의 정체를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파이트 클럽》의 경우엔 알기 쉽다. 기호의 차이를 소비하는 바로 그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대해 경멸을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케빈 클라인 광고를 보며 “저래야만 남자인가?”라고 비웃고, 여성들이 지방흡입 수술을 통해 버린 지방으로 만든 비누를 여성들에게 되팔고, 번쩍거리는 애플 사(社)의 제품들을 폭파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엔 ‘영원’의 표상인 신용카드 회사의 빌딩이 파괴된다.
작중에서 타일러 더든은,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영원’이라는 환상에 대해서, “파이트 클럽”이란 게임의 매직 서클을 키워서 자본주의 사회란 게임의 매직 서클과 대결시킴으로써, 그런 것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필요하지도 않음을 《파이트 클럽》은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반면, 《우테나》는 조금 더 복잡하다. ‘영원’의 표상인 ‘성(城)’의 모습이 직접적인 패러디는 아니라고 해도, 디즈니 사(社)의 마크와 닮아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 성이 나타내는 어떤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에 둘은 닮은 형상을 하고 있다. ‘영원’의 표상인 성은 바로 “신데렐라” 환상, 여성은 ‘왕자님’에 의해서 구원받아 ‘공주님’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동화적이고 가부장적인 환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텐조 우테나뿐만 아니라 작중에서는 ‘아리스가와 쥬리’도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왕자님’ 역할을 하고 있다. 우테나만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여성도 ‘왕자님’이 될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이미 성별에 의한 차별이 해소된 공간이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잘라 말하기에는 한 가지 입장이 빠져 있다. ‘영원’히 구원받는 ‘공주님’의 ‘끝없는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히메미야 안시의 입장이다.
여자가 ‘왕자님’이 될 수 있다고 해도, 히메미야 안시는 어디까지나 ‘공주님’으로써 ‘왕자님’에게 복종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바로 그 여전히 약자인 여성을 외면하는 것, 눈을 감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문제에 대해서 《우테나》는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 책임에 대해서는 주인공의 성격을 들여다보면 알기 쉽다.
《우테나》의 당찬 텐조 우테나와 《파이트 클럽》의 소심한 나레이터는 전혀 달라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작품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기억을 부정하며 환상의 인물을 만들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성적 행위에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결투”라는 게임도, “파이트 클럽”이란 게임도, 주인공이 어떤 기억을 부정하고 환상의 인물을 만들지 않았으면 이행되지 않았을 게임이다. 텐조 우테나는 이미 죽은, 자신을 구해준 “진정한 왕자님”인 키류 토우가를 좇아서 “결투”에 참여하게 된다. ‘나레이터’는 자신의 분리된 자아인 타일러 더든과 싸움을 통해 “파이트 클럽”을 시작하게 된다. 즉, 그들은 현실의, ‘끝없는 일상의 힘겨움’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서 ‘몽상을 현실화’하려 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새로운 게임에 몰두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 유혹하는 상대와의 ㅅㅅ에 대한 태도이다. 《우테나》의 텐죠 우테나는 성적인 유혹에 대한 단호히 거부하는데, 이 성적 유혹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역할로써 왕자님이 아닌 스스로의 여성성을 확인하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파이트 클럽》의 ‘나레이터’도 마찬가지다. 타일러 더든에게 성적인 역할을 맡겨 둠으로써 ‘나레이터’는 계속 안전하게 이 “파이트 클럽”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그들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타자(현실의 도덕 법칙을 성스러운 것으로 통합해버린 국가)에 응답하기 위해 여타의 모든 타자(식민지, 여성, 계급)에게 침묵” 한 것이다. (황호덕, 『프랑켄 마르크스』를 참조)
이 ㅅㅅ에 대한 거부야 말로 책임(감)의 결여이며, 미성숙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들이 게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한에서, 그리고 타자가 배제되거나 억압받는 ‘영원’을 욕망하는 한에서, 성숙은 ‘영원’히 지연당한다. 그것이 이 ‘끝없는 일상’이라는 게임의 정체다.
그것은 현실공간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디까지나 매직 서클 안에서만 일어난다. 그것뿐이라면 괜찮지만, 그 매직 서클 안에는 “남자들이 통칭 인간성이라는 이름으로 식민화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특별한 이익에만 봉사하도록 하는” 것 =《우테나》의 가부장제에 의해, ““가짐”이라는 감각의 범주가 모든 범주를 수렴해버리도록 획책하는”파시즘 = 《파이트 클럽》의 소비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타자들이 있다. (엘리자베스 그로스, 『건축 그 바깥에서』 참조)
이 게임의 파산은 ‘아마겟돈 환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런 ‘끝없는 일상’을 거부하고 타자를 마주할 수 있는 ‘바깥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테나》도, 《파이트 클럽》도, 그 ‘끝없는 일상’이라는 게임이 파산하는 그 순간에, 옆에 있는, 자신이 거부했던 바로 그 상대와 손을 맞잡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1990년대, 냉전이 끝나고 “커다란 이야기”가 실추한 포스트모던의 상황, 그리고 경제 침체라는 현실 하에서 “빈곤한 ‘끝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그 게임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에게도 분명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우테나》도 《파이트 클럽》도 그 ‘끝없는 현실’이란 게임과 이를 지탱하는 ‘영원’은 매직 서클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란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매직 서클 안에서 타자에 대한 억압이 이뤄지고 있으며 거기에 플레이어들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1990년대의 마지막, ‘끝없는 일상’이란 게임을 파산시킬 수 있는 1999년의 상상력이었다. 그리고 ‘바깥 세계’에서 이 타자와 대면하는 것으로 《우테나》와 《파이트 클럽》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와의 대면 후에도 여전히 미야다이 신지의 말처럼 ‘끝없는 일상’이 승리가 계속되어 그것마저도 ‘흡수’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상상력과는 달리 현실에서도 단번에 모든 것이 바뀌는 게 아니라, 매직 서클의 관성이 계속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글은 그것을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신작 TVa <유리쿠마 아라시>의 영상 에서 이어가고자 한다.
(이후 논의는 <유리쿠마 아라시>를 봤다는 전제 하에 이어짐으로, 여기서 그만 읽어도 좋다)
<유리쿠마 아라시>에서는 노골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우테나》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우테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춤을 추고, 곰과 인간이란 기호를 산란시켜서 '악'을 배제하는 게임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마지막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로를 마주 본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 본 것만으로, 이 애니메이션은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라시가오카 학원은 파산하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그 장소에 단 두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리쿠마 아라시>에선 삼각형의 구도가 반복된다. 이 삼각 구도의 꼭지점 쪽에는 항상 피고자들이 있고 그 반대편 변에는 배심원이나 판사가 존재한다. 그리고 타자와 마주할 수 있게 된 두 존재들은, 피고자의 자리에 서서 반대편인 '이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시청자는 그 때, 아라시가오카 학원의 학생들과 같은 배심원과 심판자의 대열에 선다. 시청자들과 아라시가오카 학원의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우리가 그들을 '발견'해낼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을 '승인=인정'할 수 있는가?
아라시가오카 학원은 결국 파산하지 않으며, 두 마리의 곰은 죽음을 맞이했다, 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배제의 의식"이라는 '게임'은 '끝없는 일상'으로써 계속된다. 그러나 그녀들은 한 때 심판자의 대열에 섰던 소녀, 아이 우치코라는 목격자를 남긴다. 그녀들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바깥으로'써 아이 우치코는 남는다. 그렇기에 단호한 처형과 배제가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친구의 문"이 열린다.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테나 같은 면에서는 tv판하고 극장판하고 상이하게 다른데.. tv판에서는 우테나가 안시를 결국 구출하지 못하고 어딘가의 세계로 사라지고
우테나가 행방불명 처리 되고 학생들의 이야기에서 그냥 어떤 남자나 만나서 결혼이나 할란다 라는 식의 말들이 나오죠 그리고 안시는
공주의 역활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으로써 움직이길 선언하고 우테나를 찾으러 떠납니다.
극장판에서는 안시가 우테나를 운전하여 성을 탈출하여 자신들만의 다른 장소로 가는걸로 해피엔딩이 되버리는데...
유리쿠마 아라시에서도 뭔가 내용은 다르지만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가 나오는거 같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통상적인 관점, 그리고 그 관점에서 주어진 역활을 벗어나서 스스로가 원하는걸 찾아갈수 있는건가?]
우테나 같은 경우 말씀하셨듯이 남자만 왕자님해? 아니야. 안시에게는 여자가 꼭 공주님 역활을 해야해?
유리쿠마 아라시에서는 인간과 곰이 대립한다고 꼭 끝까지 대립해야 하나?
같은 제작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질문이 가능한가라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파이트 클럽과의 비교를 중점으로 하고 있기에 일부러 tv판에 대한 언급은 피했습니다만, tv판에서도 분명히 (극장판에서 우테나 카와 운전자 안시처럼) 마지막에 그런 역전이 이뤄지지요.
1 편에서 게임과 기호체계에 대해 얘기했는데, '게임'을 우리가 계속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란 질문에 크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아예 안 하고 물러날 수도 있겠고, 이 규칙은 좀 바꾸는 게 어때, 라고 제안할 수도 있겠죠. 아예 안 하는 건 말하자면 급진주의, 규칙을 바꾸는 건 수정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말씀대로, 왕자님-공주님이란 롤 플레이, 곰-인간이란 롤 플레이를 그만두는 것은, 급진주의든 수정주의든 그런 게임의 규칙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15.07.27 00:11 | |
분석력이 대단하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특히 성관계를 꺼린다는 공톰점이 인상적이네요. 우테나가 점점 여자로 변해가는 모습은 충격적이면서도 씁쓸했죠... 그리고 역시 유리쿠마의 결말은 우테나 보다 더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우테나와 안시의 마지막 키스의 의미가 궁금한데 어떻게 보시나요? 당시에는 이성적인 사랑의 의미보다는 이해와 화합의 상징이라고 느꼈는데 감독의 성향과 우테나를 모티브로 한 듯한 유리쿠마의 엔딩을 보니 의문이 생기네요.
저는 명확하진 않지만, 둘 다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둘이 나누는 것이 사랑이긴 한데, 그것이 에로스로써 사랑, 레즈비언의 교감이어도 충분히 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남-녀의 사랑이란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여-여 혹은 남-남의 사랑을 보여준 것(그러니까, 새로운/진정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 15.07.27 00:02 | |
파이트 클럽을 보지를 않아서 우테나와의 비교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리쿠마에서의 삼각형에 주목하신건 놀랍네요. 저번에 신데마스의 연출을 분석하신 분의 글을 읽으며
크게 놀랐었는데, 유리쿠마에도 숨어 있었군요.
다시금 연출의 중요성이란걸 느끼게 되네요.
하나 배워갑니다.
참고 문헌은
권혁태, 『일본 전후의 붕괴 – 서브컬쳐 소비사회와 그리고 세대』, 제이앤씨, 2013
사사키 아쓰시, 『현대 일본 사상』, 송태욱 옮김, 을유문화사, 2009
엘리자베스 그로스, 『건축 그 바깥에서』, 탈경계인문학연구단 공간팀, 그린비, 2012
제스퍼 주울, 『하프리얼』, 장성진 옮김, 비즈앤비즈, 2014
등을 사용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2Yi4_ltiw
일본어가 되시면 이 영상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15.07.27 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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