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원래 제목은
《파이트 클럽》과 《소녀혁명 우테나 ~ 어돌센스 묵시록》로 본 ‘끝없는 일상’이라는 게임
이었는데 너무 길다고 짤렸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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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혁명 우테나> 북미판 DVD 1권의 표지.
왜 여성인 우테나가 이 그림에선 '왕자님'처럼 보이는 걸까?
1. 들어가며.
체스 게임 안에서 말들은, 처음부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 혹은 ‘형식 체계’(크리스 크로포드) 안에서 그 기호의 차이를 통해서만 고유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호의 차이를 통해서 뿐이다. 이 기호의 차이를 통한 정체성의 확인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에 대해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는 상품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차별, 차이를 표현하는 행위”라고 했다. 소쉬르가 체스와 언어활동 사이에 유사성을 발견했던 것처럼, 장 보드리야르 역시 소비를 “커뮤니케이션의 교환시스템으로서 끊임없이 발신되고 수용되는 기호의 코드로, 즉 언어활동”이라고 보고 있다. 소비 사회란 이름의 ‘게임’에 참여한 소비자는 계속해서 그 기호의 차이를 쫓는다.
테니스 연습이 있는 날엔 마찌아(Magia), 휠라(FILA) 테니스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보통 때는 기분에 따라서 보트 하우스(Boat house)나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옷을 입기도 한다. 치마는 이에 맞추어 하라주쿠(原宿)의 바클레이(Barclay)에서 사는 게 좋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이나 알파 큐빅(Alpha Cubic)이다.
- 다나카 야스오, 《난토나쿠, 크리스털》, 新潮社,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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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표로 가득 찬, 《파이트 클럽》의 "나레이터(에드워드 노튼)"의 방.난 이케아 가구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중략) 신제품이나 특이한 건 꼭 사야 직성이 풀렸다. 클립스크 사무가구, 호버트렉 운동기구, 녹색 줄무늬의 ‘오마샵’ 소파, 종이로 만든 환경친화형 ‘리슬림파’ 램프. 어떤 식기가 나를 잘 표현해 줄까?
- 《파이트 클럽》 中
소비자들은 이러한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자기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기호의 차이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기호의 차이는, 어디까지나 소비력 = 경제적 풍요로움이 뒷받침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안에서 그만한 소비력을 가지지 못했거나, 혹은 그만한 소비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경우 개인은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정체하고 만다.
위의 인용 중 첫 번째 것인 다나카 야스오의 《난토나쿠, 크리스털》은 일본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1980년대의 버블을 유지하지 못하고 1990년대부터 경기침체에 들어선다. “1980년대의 풍요로운 ‘끝없는 일상’이 1990년대 이후에는 빈곤 속의 ‘끝없는 일상’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 ‘끝없는 일상 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가 『끝없는 일상을 살아라 – 오움교 완전 극복 매뉴얼』(筑摩書房, 1995),에서 1990년대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전공투 운동을 비롯한 정치운동도, 소비사회를 지탱했던 버블 경제도 종말을 고한 상황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진 1990년대의 젊은이들이 서브컬처 속에서 다람쥐처럼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1990년대 일본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은, 게임의 규칙이나 형식 체계가 변하지 않는 한 전체 구조는 변하지 않으므로 처음부터 그것은 정체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체스에서 폰이 상대편 칸의 끝까지 도달하면 퀸으로 승격(promotion)될 수 있지만, 여전히 퀸만이 팔방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을 갖고 있듯이.
1999년. 1990년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해에, 일본에서는 TV 애니메이션 《세일러 문》 시리즈의 감독을 맡았던 이쿠하라 쿠니히코에 의해 극장판 애니메이션, 《소녀혁명 우테나 ~ 어돌센스 묵시록》(이하 《우테나》)가 만들어진다. 《우테나》는 TV 애니메이션 <소녀혁명 우테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약 40화에 가까운 TV 시리즈를 전부 담는 대신 90분이란 러닝타임에 맞추어 크게 각색을 한 작품이다. 《우테나》가 직접적으로 소비사회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게임의 형식 체계와 그 파산을 다루고 있기에 그 시대성이 깊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미국에서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이 개봉한다. 이 두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라는 미디어, 그리고 순정만화(일본에서는 少女漫畵라 불린다)와 마초적인 여피 판타지란 장르에서부터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게임, 그 형식 체계, 그리고 게임의 파산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치를 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테나》가 게임을 다루는 방식과 ‘끝없는 일상’의 문제를, 《파이트 클럽》이란 보조선을 이용해 다뤄보고자 한다.
2. 게임 공간의 경계선 "매직 서클"
《우테나》와 《파이트 클럽》에서는 어떤 게임이 반복해서 일어나며, 이 게임을 통해 점점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우테나》에서는 그 게임이 “장미의 신부”인 ‘히메미야 안시’를 걸고 검으로 싸우는 “결투”이고, 《파이트 클럽》에서는 그것이 직접 주먹으로 지칠 때까지 하는 싸움인 “파이트 클럽”이다. 이 두 게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게임 공간과 현실 공간을 구분짓는 “매직 서클”이란 개념을 기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매직 서클”이란 게임 학자인 제스퍼 주울이 『하프리얼』란 저서에서 제안한 것이다. 제스퍼 주울에 따르면 게임 규칙이 적용되는 가상 세계가 실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데, 매직 서클은 그 “게임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고전적인 게임(스포츠, 보드 게임 등)의 경우, 실제 공간 안에 게임이 발생하는 게임 공간이 있는데, 매직 서클은 이들 사이에서 “어디까지가 게임이고 게임이 아닌지 게임의 경계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 테면 축구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경기가 중지되는 규칙은 게임 공간과 실제 공간과의 연관성을 설명해주는 규칙이다.
매직서클의 범위의 규정에 대해서는, 역시 제스퍼 주울이 제시한 게임의 결과(Outcome)와 그 결과로 인한 결과(Consequence)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하, 결과(Outcome)은 결과(O)로, 결과(Consequence)는 결과(C)로 표기한다).
결과(O)는 게임의 규칙에 의해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으로, 게임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일어난 결과(O)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C)는 매직 서클의 바깥 = 현실 공간에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 이 결과(C)가 타협 가능한 것이어야만 유희로써 게임이라 부를 수 있다고, 제스퍼 주울은 주장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에서 승패의 결과(O)는, 규칙에 따라 승리, 패배, 무승부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승패의 결과(O)로 인한 결과(C)는 제각각으로, 단순한 친선 경기라서 현실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도박의 대상이 돼서 판돈이 걸릴 수도 있으며, 때로는 두 국가가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같은 중대한 결정을 위한 승부가 될 수도 있다. 반면, 전쟁은 규칙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는 결과(O)가 결과(C)와 직결되어 버리므로 유희로써 게임이라 부를 순 없다.
“결투”의 경우, 게임의 플레이어인 “듀얼리스트”는 “결투”의 결과(O)에 따라 승자가 “장미의 신부”이자 이사장의 딸인 히메미야 안시를 얻게 된다. 이때에 “듀얼리스트”는 “영원, 기적, 빛나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을 손에 넣는다는 결과(C)를 얻으므로 이 세계의 크기와 매직 서클의 크기는 일치한다.
반대로, “파이트 클럽”의 결과(O)는 누군가가 졌다고 스스로 표시하거나 쓰러지는 것에 의해 판단되지만, 그 결과(C)는 또 다른 규칙인 “절대로 파이트 클럽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에 의해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스토리의 진행에 따라, 《파이트 클럽》의 경우에는 게임 공간이 현실 공간만큼 넓어지는 매직 서클의 확장이 일어나고, 《우테나》의 경우에는 반대로 매직 서클의 축소가 일어난다.
3. 매직 서클과 신체(身體)
여기서 결과(O)와 결과(C)를 잇는 중요한 요소는, 전쟁과 게임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체’이다. 게임공간을 다루는 규칙에는, 인간의 신체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축구에서 태클 등으로 선수가 다쳤을 때 경기는 일시 중단되고, 때로는 태클을 한 선수가 패널티를 갖게 되기도 한다. 즉, 이 신체가 불가역한 변화를 겪을 때 결과(O)는 결과(C)와 직결하게 된다. 따라서 신체는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보디빌더 시절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이것은 몸이 변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하지만 이는 환상으로, 신체는 실제로는 계속해서 유연하게 변화한다. 근육질의 보디빌더의 몸을 생각해보자. 이 보디빌더의 몸이야 말로 물리적, 화학적(스테로이드) 요소로 변화한 몸이다. 여성학자인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이 보디빌더의 몸을 들어 『건축 그 바깥에서』란 책에서 “스테로이드 신체는 문자 그대로 무한정 유연한 것으로서의 신체를 입증한 것이며, 신체의 어쩔 수 없는 유동적인 재현 혹은 의미론적 상태를 입증”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간극에 있는 신체를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서,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게임을 그려나간다. 《우테나》에서 나타나는 것은 극단적으로 기호화된 신체다. 예를 들어, “결투” 주인공인 텐죠 우테나는 결투 도중에 머리가 길어지고 옷이 바뀌기도 하지만, 이는 “아무런 흔적이나 잔여 없이 그리고 아무런 파급효과 없이” 일어나기에 “탈신체화”적인 , 기호적인 성격을 갖는다. 또한, “결투”는 “파이트 클럽”과 달리, 직접 서로의 몸에 검을 찔러 넣거나 베거나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꽂은 꽃이라는 상징을 떨어뜨리는데 있다.
반면, “파이트 클럽”에서는 계속해서 상처 입는 신체가 등장한다. “절대로 파이트 클럽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룰을 갖고 있는 파이트 클럽에 대해 주인공인 ‘나레이터’를 포함한 그 회원들이 “파이트 클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멍들고 부상당한 얼굴을 통해서 뿐이다.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폭력과 거기서 수반되는 고통, 그리고 바로 그 고통이 ‘거기에 있음’을 알리는 흔적인 상처. 《파이트 클럽》의 상처 입는 신체와 가장 대조가 되는 장면으로, 《우테나》에서는 히메미야 안시의 죄를 나타내는 찢겨진 등의 상처는 생생하다기보다는 타원형의 구멍으로 표현된다.
반면, “파이트 클럽”에서는 계속해서 상처 입는 신체가 등장한다. “절대로 파이트 클럽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룰을 갖고 있는 파이트 클럽에 대해 주인공인 ‘나레이터’를 포함한 그 회원들이 “파이트 클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멍들고 부상당한 얼굴을 통해서 뿐이다.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폭력과 거기서 수반되는 고통, 그리고 바로 그 고통이 ‘거기에 있음’을 알리는 흔적인 상처. 《파이트 클럽》의 상처 입는 신체와 가장 대조가 되는 장면으로, 《우테나》에서는 히메미야 안시의 죄를 나타내는 찢겨진 등의 상처는 생생하다기보다는 타원형의 구멍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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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테나》의 상처와 《파이트 클럽》의 상처
이렇게 신체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다르지만, 《우테나》도 《파이트 클럽》도 매직 서클로 작동하는 고정된 신체를 공격한단 점에서는 일치한다.
《파이트 클럽》에서 상처 입는 신체가 등장하는 이유는, 신체는 파괴되기 마련이며 그로써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것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타일러 더든의 사상이다. 나레이터의 집은 그렇기 때문에 폭파되어야 하며, 파이트 클럽은 치고 받는 장소이고, 때로는 싸움에서 일부러 지기도 한다.
반면, 《우테나》에서 등장하는 기호적인 신체들은 그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서 등장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결투”는 복장에서부터 이 게임의 등장인물들이 맡은 역할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히메미야 안시는 기다란 드레스를 입고 티아라를 쓰고 있어서, 구해지는 ‘공주님’이라는 역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이 게임의 플레이어들이라고 할 수 있는 “듀얼리스트”들은,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어깨에 깃이 달린 상의와 ‘바지’를 입으며 검을 들고 있기에 공주를 구하는 ‘왕자님’ 역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테나》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기호들을 전부 뒤집는다. 드레스를 입고 티아라를 쓴 히메미야 안시가 실은 바로 ‘마녀’였음이 밝혀지며, 운전대를 잡고는 거칠게 액셀을 밟는 체이싱 시퀀스가 나온다. 여기서 왕자님이어야 할 텐조 우테나는 오히려 자동차가 되어 히메미야 안시에게 몸을 맡긴다.
《파이트 클럽》이 있는 것을 기계적으로 비춘다는 영화의 장점을 살려 유동적인 신체를 적극적으로 노출시켰다면, 《우테나》는 애니메이션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기호성을 활용해, 오히려 고정된 신체란 기호를 산란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다른 방향에서 고정된 신체를 공격한 두 작품은, 신체 뿐만 아니라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환상 그 자체, ‘영원(永遠)’을 향해 칼날을 돌린다.
(2편으로 이어진다는 거, 알고 계실 까시라까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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