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인벤에 올렸던 단편 소설입니다.
완전히 터져버리고 더 이상 발을 담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여기 옮기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퇴고 및 수정을 거친 다음에 기존 글은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후속작도 여기 이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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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쉬여.
대영주께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내셨습니다. 전대의 티리온 경에게 파멸의 인도자를 물려받으시고, 군단이란 이길 수 없는 적 앞에 둘로 갈라져던 호드와 얼라이언스를 빛의 이름 아래 하나로 규합하시어 악마들과의 전투에도 선봉장으로써 활약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그의 위상을 넘볼 수 있겠습니까. 은빛십자군, 구원자, 혈기사, 제가 속해있는 태양길잡이까지. 모든 성기사들 그리고 영웅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깊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단은 패배했고, 호드와 얼라이언스는 다시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 많은 성기사들이 각자의 진영으로 흩어졌지만 대영주 님과 소수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가기로 하셨죠. 저 역시 그 분과 뜻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저는 그대 앞에서 저의 소중한 부족과 동족들을 지키기로 맹세한 몸. 그리고 얼라이언스는 그들을 위협하려 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고민이 있었지만 전 호드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저의 무기는 방패입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누군가를 상처입히는게 아닌 지켜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어쩌면, 불타는 군단과의 전투에서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대영주께서 실현하시려는 평화가 더욱 간절해지곤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계속되는 증오와 갈등 앞에 무력해지기에 더욱 간절히 그대 이름을 외칩니다.
안쉬여
전 언젠가 반드시 대영주님께 돌아가 그 분을 보좌하고 싶습니다. 함께 평화를 위한 길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여전히 두 진영 사이의 휴전과 동맹은 있을지라도, 종전과 평화는 없을지니.
부디 이런 저를 용서하소서. 서로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는 모든 이들을 비춰주시고 그 곁에 영광이 함께하길 축복하소서.
위의 로돈의 기도문처럼 많은 성기사들이 각자의 진영으로 흩어졌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그리마로 떠나려는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하려 적은 기도문이었지만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그였기에, 로돈은 잠시라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싶었다. 그는 그가 맡은 후방 보급이라는 임무를 정말 성실하게 완수했다. 칼림도어 전역의 중립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얼라이언스들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고블린들의 중장비 보급 계약을 성사시켰으며, 무엇보다 부서진 섬의 높은산 타우렌들이 호드 측에 합류하게 된 것 또한 로돈의 공이 컸다.
이렇게 호드를 위해 그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였지만 역시 마음 한 구석의 고민은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도 전쟁을 멈출 방법은 없을까. 평화를 위한 조금의 노력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깊숙히 박혀 빼지 못할 못처럼 남아있는 미련이었다.
로돈은 코도를 타며 오그리마의 거대한 입구 앞을 지나갔다. 정예 경비병들이 그를 알아보고 경례를 올렸다.
"록타르, 형제여. 수고가 많으시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대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인력들이 붐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훈련의 기합소리가 울려퍼지고 장비들을 손질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마치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처럼 험악한 분위기였다. 로돈은 그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대족장이 바뀌고 나서 분위기가..."
로돈은 수 많은 인력을 헤치고 오그리마 지하의 어둠의 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흑마법사들과 주술사들이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무슨 의식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일단 최대한 방해가 안되는 한에서 조심히 들어갔다. 확실히 전쟁 분위기라서 그런지 신비로워보이던 정령술도 무언가 강력한 힘을 갈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어쨌던 그들을 뒤로 하고 로돈은 늘 그랬듯이 임시 의뢰소로 가서 받은 임무를 완수하고 새로운 임무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간 의뢰소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데즈코 씨?"
"로돈! 이게 얼마만인가?"
데즈코는 로돈을 알아보고 잽싸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로돈은 당연히 반가움에 잽싸게 받았다.
"언제 판다리아에서 돌아오셨습니까?"
"좀 지났지.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길래 무슨 상황인지 살펴보려 잠시 들렀네. 군단과의 전투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얼라이언스라니... 솔직히 조금 갑작스럽다네. 아무리 일시적인 동맹이었다지만, 이렇게 쉽게 깨질 줄이야."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로돈은 반가움은 잠시 접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데즈코는 잠시 말 없이 로돈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를 보였다.
"난 더 이상의 전쟁과 학살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네. 내 일이 바쁜 것도 있지만, 그 일로 인해 느낀 것이 많아서 말이야."
"대영주 님과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당연하지. 곧 대영주 님을 찾아뵈긴 해야겠군."
둘은 그 자리에서 근황과 사담을 이어가다 데즈코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만 가야겠군. 만날 친구들이 여럿 있어서 말이야. 한창 전쟁 준비중이라면 아포니도 이 곳에 와 있을테니 그녀도 한번 만나야겠지."
"그럼 나중에 여관에서 뵙겠습니다. 한 잔 해야지요."
"알았네, 알았어. 하하하!"
데즈코는 로돈을 향해 손을 흔들고 어둠의 틈 밖으로 향했다. 로돈은 데즈코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의뢰소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로돈 씨."
"안녕하십니까."
의뢰소 직원인 여성 트롤이 로돈을 반겼다. 로돈은 그녀에게 임무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그녀는 대충 한번 훑어보더니 곧바로 보상금이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수고하셨어요. 잠시 대기해주시면 의뢰 목록을 챙겨올게요."
"알겠습니다."
직원은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 사이 로돈은 주머니의 금액을 확인했다.
"30 골드...수리비로는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가뜩이나 이번 임무로 다녀온 곳이 험하기로 소문난 운고로 분화구라 이리저리 구르고 부딪히다보니 판금 갑옷에 흠집이 많이 나서 낡아진 감이 있었다. 그쪽 임시 야영지에서 수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업무를 담당하는 자들이 하필 바가지 귀신이 무더기로 씌여진 고블린이라 적자가 날 것 같아서 오그리마까지 어떻게든 버틴 것이었다. 그런데 기껏 받은 돈은 많이 애매하니... 그저 술값과 숙박비를 뺀 나머지 금액 안에 모든 장비들을 수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로돈은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에 그녀가 나왔지만 왜인지 늘 가지고 나오던 의뢰 목록이 아닌 다른 두루마리 두어개를 들고 나왔다.
"저, 의뢰 목록은 어딨습니까?"
"아 그게, 로돈 씨가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은빛 성기사단에서 로돈 씨에게 개인 의뢰를 신청해서요. 혹시나 같은 이름인 줄 알고 확인해봤는데 로돈 씨가 맞다고 하네요? 히히히."
그녀는 소름끼치게 웃었다. 로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에게 트롤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뭡니까? 그 의뢰라는게."
로돈이 묻자 그녀는 곧바로 가져온 두루마리 하나를 펼쳤다. 두루마리 안에는 노스렌드의 지도가 담겨있었고 그녀는 한 지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노스렌드의 줄드락이라고 아시죠? 한번 가보셨나 모르겠네. 여긴 과거 저희 종족 사촌쯤 되는 드라카리 트롤들이 세운 나라인데 스컬지들에게 거의 멸망해버린 곳이죠. 물론 리치 왕 사후에 그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일부 언데드들이 아직 남아있어서 은빛십자군이 몇 년 전부터 그들을 토벌하러 나간 상태거든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달 전에 귀환 명령을 보냈지만, 전달하러 간 전령이 실종되었어요. 명령도 줄드락에 닿았는지는 알 수가 없구요. 그래서 은빛 성기사단이 얼라이언스 측에 먼저 의뢰를 넣었고 진상을 파악하려 인력을 파견했지만 역시 파견한 인력도 아무 소식도 없이 실종당했다고 하네요."
여직원은 안타깝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로돈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줄드락 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의뢰는 거절해야겠군요. 아무리 과거의 동맹이었다지만 은빛십자군은 얼라이언스들이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적군을 돕는 행동은 상식에서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로돈은 씁쓸한 심정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의뢰를 신청하신 고객께서 이걸 보여달라고 하셨어요."
로돈은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잠시 살펴보았다. 둘둘 말린 고급 양피지의 가운데에 촛농으로 찍힌 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그제야 잽싸게 양피지를 펴고 두루마리를 펼쳐 필체를 확인했다. 예감이 적중했다.
"대영주 님?"
태양길잡이 로돈.
이걸 읽고 있다면 지금 자네의 결심이 바로잡혔다고 믿어도 되는거겠지. 그렇기에 나는 고민이라네. 지금 호드를 위해 싸우는 그대에게 얼라이언스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행동인지, 아니면 우리 은빛 성기사단의 이기적인 행동인지. 나 역시 한 때 내게 소중한 이들만을 지키고자 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있네. 그렇기에 더욱이 빛 아래 뜻을 같이 했던 자들을 버리고 싶지 않아.
물론 자네 결정을 원망하는 것은 아닐세. 다만 내 곁에서 늘 했던 말이 있었지. 나와 뜻을 같이 하고 싶다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어 더 이상 그 누구도 상처입게 하고 싶지 않다고. 빛 아래 모두가 하나로 뭉쳐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고.
평화를 위한 행동은 그리 어렵지 않다네, 로돈. 그저 서로의 갈등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호드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자네는 평화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어. 이 의뢰를 거절한다고 해도 말일세. 부디 복잡한 고민에 갇혀서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들지 말게나.
우린 다시 빛 아래 하나로 뭉칠것이니.
편지의 맨 밑에 대영주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로돈은 숙연하게 편지를 다시 돌돌 말았다.
"갈등을 줄인다라... 내가 너무 안일했군."
로돈은 편지를 직원에게 돌려주고 결심에 선 듯 말했다.
"하겠습니다. 제가 그들을 구출하러 가도록 하죠!"
로돈의 표정이 한 층 밝아진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덩달아 웃으면서 추가적으로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그럼 추가 임무를 드릴 수있겠네요.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추가 임무요?"
그녀는 임무가 적힌 종이를 꺼내들었다.
"노스렌드의 북풍의 땅 지역의 타운카 부족을 찾아가셔야 해요. 호드 가입 및 보급 계약이 만료된 상태라 갱신이 필요하거든요."
"그쯤이야, 익숙하죠."
로돈은 임무 보고서 양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목례를 한 다음 의뢰소를 나가려는데 직원이 그를 붙잡았다.
"아 그리고 마지막!"
"네?"
"이번 임무에 동료 한 분이 더 붙을거예요. 한 둘이 실종된 게 아니라 역시 개인을 보내면 위험할 것 같아서요."
"동료... 라니요?"
"실례합니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누군가가 의뢰소 안으로 들어왔다. 혈기사단의 징표가 그려진 판금 갑옷을 입고 포니테일을 한 금발의 여성 블러드 엘프였다.
"...블러드 엘프?"
혈기사와 눈이 마주친 로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녀가 들어온 시점부터 의뢰소 안의 분위기가 싸해지고 있었다. 사실 의뢰소 안에 있는 3명 중에서 제일 불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자는 로돈 밖에 없었지만. 혈기사는 무표정으로 로돈을 한번 짧게 흘겨보더니 그대로 의뢰소 직원에게 다가갔다.
"이 분인가요?"
"네, 맞아요. 로돈 씨라고해요."
직원은 씨익 웃으면서 로돈 쪽으로 손짓을 했다. 로돈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지만 어쨌든 먼저 손을 내밀었다.
"태양길잡이 소속의 로돈이라고 합니다."
"레아나예요."
한 쪽은 매우 떨떠름하게, 그리고 한쪽은 정말 아무 감정도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악수를 했다. 분위기가 괜히 더 싸해지는 것 같다.
"대영주께서 가장 신뢰하시는 성기사라고 들었는데, 실망스럽지는 않네요. 뭐, 딱히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 네..."
로돈의 신경을 긁는 말투와 목소리였지만 애써 참으려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럼 얼굴 확인도 했으니, 내일 노스렌드로 갈 때 다시 뵈요."
"그럽시다."
레아나는 끝까지 조금의 표정 변화없이 유유히 의뢰소를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로돈은 의뢰소 탁자를 쾅! 치면서 외쳤다. 직원은 방심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하필 블러드 엘프입니까? 예? 왜요? 호드에 지금 그렇게도 인재가 모자란 실정입니까?"
"아니, 그게...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냐고요! 당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블러드 엘프들이 어떤 족속인지!"
"로돈 씨, 저는 의뢰를 중간에 중개할 뿐이예요. 이건 다 의뢰인 측에서 결정한 사안이라..."
"그럼 동료 얘기는 제일 먼저 해주셔야지요! 노스렌드에 있는 내내 같이 있어야 할 동료가 블러드 엘프였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전 절대로 수락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제 아무리 대영주 님의 요청이라고 해도요. 암요!"
직원은 심히 당황했다. 고고하다는 성기사가 이토록 흥분한 건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도 하고 그게 로돈이라는 사실이 믿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로돈을 설득했다.
"하아, 로돈 씨. 이 임무는 의뢰인이 먼저 레아나 씨에게 임무를 부여하시고 같이 할 동료로 로돈 씨를 추천하셔서 레아나 씨가 오그리마로 오신거예요. 그 노고가 지금 무시되는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저는 중개인일 뿐이예요. 문제가 있다면 제가 아니라 의뢰인하고 상의해야 할 부분이라구요."
로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영주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로돈이 블러드 엘프를 언더시티의 악취보다 훨씬 더 싫어한다는 것을.
사실 블러드 엘프는 호드 내에서도 그리 좋지 않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허영심이 강하고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천시하는 것까지. 다른 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자기 종족만이 전부이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족속들이라 알려져 있었다.
단지 알려져 있다는 정도라면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조금의 기회라도 있었지만, 블러드 엘프와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된 모험가들만큼 그들의 실체를 잘 아는 자들은 없다. 로돈도 그 중 하나였다. 특히 장가르 습지대의 포자 동굴이나 스컬지의 저주를 받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무덤 같은 사지를 함께 탐험할때는 스트레스가 2~3배는 쌓였다. 당장 공격을 해야하는 상황에 자기 옷을 먼저 챙긴다던지,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 아프다며 징징거린다던지, 기껏 여러공격에서 지켜주면서 고마워하기는 커녕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라던지. 블러드 엘프를 싫어해야하는 이유라면 정말 차고 넘쳤다. 그것은 아마 로돈 뿐만 아니라 같은 호드인 오크나 트롤, 고블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돈은 스스로를 애써 억누르고 이어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대영주 께서는 내가 블러드 엘프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블러드 엘프와 같이 행동하도록 하신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참자... 참는거다... '
마음의 결정을 내린 로돈은 단호하게 직원을 향해 쏘아붙였다.
"좋습니다. 하겠다고 한 이상 성실히 임해야겠지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앞으로 동료가 붙을 임무라면 무조건 누군지부터 먼저 알려주셔야 하고 그게 블러드 엘프라면 저는 무조건적으로 거절하겠습니다. 설사 대영주 님이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신다 해도 말이죠. 알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당연하죠."
대답을 여러번 확실하게 들어두고 나서야 로돈은 의뢰소를 나올 수 있었다. 당장 블러드 엘프와 함께 다니는 것도 골치 아프지만 당장 줄드락의 임무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로돈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실종되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몇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리치 왕이 노스렌드에서 영향을 행사하고있다 하기는 무리가 있다.
그는 예전에 부서진 섬을 탐험할 때 죽음의 기사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리치 왕에게 힘을 부여받고 그 힘으로 리치 왕과 맞섰던 자들. 그들에게서 가히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로 전사했다고 알려진 볼바르 폴드라곤 경께서 다음 리치 왕이 되셨다고 했다. 그 분께서는 칠흑의 기사단과 계약을 맺어 아제로스 전역의 잔존 스컬지들을 흡수하여 군단과의 전투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고, 이어 새로운 4인 기사단을 창설했는데 그 중에서는 판다리아에 있었던 내내 충돌이 잦았던 나즈그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로돈은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밖에 납득하지 못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당장 그 곳에서도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일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의심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 죽음의 기사가 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당장 스컬지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럼 그들은 왜 실종당한 것인가? 스컬지가 아닌 다른 세력인가? 아님 스컬지들이 기어코 리치 왕의 통제에서 벗어난건가? 가능하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통제에 벗어난 스컬지들에게 습격을 받지 않았다면, 몇 년을 파견 나갔던 성기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귀환 명령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까.
역시 확신을 얻으려면 직접 줄드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픈 블러드 엘프를 데리고... 로돈의 심정이 착잡해졌다.
"하아, 안쉬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로돈은 탄식하듯 짧게 기도를 올리고 어둠의 틈 밖을 나왔는데 주변에서 들리는 소란이 아까와는 좀 달랐다.
"뭐지?"
관중들이 한 구역을 둥그렇게 애워싸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로돈은 관중 속을 비집고 들어가 상황을 보고자 했다.
"역겨운 엘프 같으니!"
"네녀석이 왜 여기 있는거냐!"
로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까 의뢰소에서 만났던 레아나가 홀로 관중에게 둘러쌓인 상태로 던진 달걀과 토마토를 맞고 있었다. 물론 거기의 모든 관중이 그녀에게 욕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두 세명의 오크들이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말리지 않고 있었다. 몇몇은 오히려 레아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고있었다.
"거기 엘프! 너 얼라이언스의 첩자 아니냐? 너와 네 종족들이 우리 호드를 위해 한 게 뭐가 있지?"
"따지고보면 트롤한테서 나온 녀석들이 뭐가 고상한 척 해대는 것이냐!"
"꼴도 보기 싫다! 당장 꺼져!"
오크들은 계속 모욕을 뱉으면서도 레아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과 옷이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도 닦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크들이 계속 달걀과 토마토를 던지다 기어코 길바닥의 돌맹이를 집어들어 던지고 말았다. 돌맹이는 빠른 속도로 포물선을 그리며 레아나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돌이 머리에 박히는 소리가 아닌 단단한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멈추시오!"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레아나는 자신의 앞에 드리운 그림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던 그녀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지금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분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는거요?"
로돈은 방패로 그녀를 가리면서 소리쳤다. 오크들은 소리쳤다.
"타우렌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당장 비켜!"
"아니, 난 알아야겠소. 이유가 타당하다고 느끼기 전까지 난 절대 비키지 않을 것이오!"
오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명 단순히 블러드 엘프를 싫어하는 사적인 감정으로 시작했을 일이 뻔했다. 그냥 한번 걸어본 시비를 묵묵히 받아주니 이어계속해서 모욕을 뱉다 주변 관중들의 관심을 받았고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진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오크들 또한 흥분했는지 강경하게 나왔다.
"한번 해보자는거냐, 소대가리?"
"대체 왜 그 녀석을 감싸주는거지? 여자친구라도 되시나? 크하하하!"
그 말을 들은 로돈은 방패로 레아나를 감싸면서 허리춤의 둔기를 집었다. 방패에 비해 한없이 작은 둔기였지만 로돈은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곧바로 로돈의 둔기는 태양빛을 흡수하여 밝게 빛이 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관중들의 시선을 빼앗을 찰나에 곧바로 땅바닥에 내리쳤다.
콰앙! 하고 울리는 굉음과 함께 빛이 로돈과 레아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어 로돈과 레아나가 서 있는 땅이 태양빛을 받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굉음만으로도 모두를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로돈은 둔기를 오크들에게 겨누면서 소리쳤다.
"이 자는 나와 같이 신성한 빛의 힘으로 여기 모두를 지킬 의무를 지닌 성기사이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호드를 위해 헌신할 임무를 받은 동료다! 네놈들의 사적인 감정에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이유만으로 다른 종족을 매도한다면 너희들이 가로쉬와 다를 게 뭐가 있지? 명예를 중시한다던 네놈들의 행동은 전혀 명예롭지 못하다!"
그러자 시비를 걸던 오크들도, 주변에서 경멸의 시선으로 구경하던 관중들마저 얼이 빠진 듯 했다. 레아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로돈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에잇! 더러워서 진짜..."
"거기 엘프! 운 좋은 줄 알아라."
오크들은 끝까지 사과는 한 마디도 안하고 적반하장 식으로 응수하더니 관중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관중들도 조금씩 웅성거리다가 이내 하나 둘 해산하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관중들이 빠지자 로돈은 방패를 치웠고, 그제야 레아나는 얼굴과 옷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데는..."
레아나는 로돈이 손을 내밀려고 하자 툭 치면서 말했다.
"참 대단하시네요. 이런 보여주기식 연기라니. 정말 잘 먹혀들어간 것 같아요. 안 그래요?"
로돈의 이마에 핏대가 쭉 올라왔다.
"지금, 뭐라고...?"
"됐고, 앞으로 이런 지나친 관심은 사양하겠어요. 어디까지나 이번 임무만 동행하는 사이니까. 알겠어요?"
레아나는 고맙다는 인사 없이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레아나에게 생겼던 조금의 연민과 동정심이 순식간에 증발하자 로돈은 어이없고 당황스러워서 주먹을 꽉 쥐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부들거렸다.
"크하하하, 오늘 일어난 소동이 바로 자네 때문이었구만!"
"그렇게 웃어넘길 일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데즈코 씨.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이 솟구친단 말입니다."
밤이 깊어지고 오그리마의 어느 선술집에서, 로돈과 데즈코는 한창 오늘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확실히 블러드 엘프들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이 서투르긴 하지."
"많이 서투른 게 아니라 아예 그런 개념이 없는 것 같아요! 어찌 그렇게 이기적이고 오만한지. 지금까지 정말 제대로 됨됨이가 박혀있는 블러드 엘프는 리아드린 님과 대영주 님 빼고는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데즈코는 로돈의 투정을 전부 들어주면서 맥주를 연거푸 들이마셨다. 계속된 수다로 로돈의 화가 좀 풀린 듯 하자 데즈코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영주께서 왜 자네 곁에 굳이 그 혈기사 친구를 붙여두셨는지 이해가 갈 것 같군."
"무슨 말입니까?"
"자네가 평생을 바쳐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데즈코가 취했다고 생각한 로돈은 대충 대답하려다가 혹시 몰라서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
"당연히 평화죠. 전쟁도 없고 상처도 없는."
"전쟁이 없는 평화라... 그럼 당장 얼라이언스와의 전쟁부터 멈추고 싶겠군. 안 그런가?"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전쟁으로 일어나는 피해가 얼마나 큰데 어찌..."
"그 전에, 우리 호드는 평화롭다고 할 수 있는가?"
데즈코는 로돈의 말을 끊고 갑자기 훅 들어왔다. 로돈은 순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아닐거야. 오늘 그 혈기사 친구에게 일어난 일만 해도 평화와는 거리가 멀고 멀지. 당장의 감정이 앞서서 모욕을 쏟아내면, 그것이 갈등을 일으키고 커지면 전쟁이 되는 법이라네. 넓게 본다면, 얼라이언스와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도 이와 많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후후,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나?"
데즈코는 로돈의 빈 술잔에 맥주를 가득히 따라 부었다.
"자네는 너무 멀리 있는 산을 보고 있어. 아직 숲을 벗어나기는 커녕 나무 한 그루에서 맴돌고 있는데 말일세. 자네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당장 자네가 해결할 수 있는 갈등부터 찾는게 가장 올바른 게야."
"크하, 그러니까 그게 블러드 엘프들인거구요. 맞죠?"
"그렇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가? 하하하하."
데즈코는 로돈의 술잔에 혼자 팔을 내밀어 건배를 하고 들이마셨다. 로돈은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데즈코와 헤어지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취한 로돈은 계속 비틀거렸다. 여전히 자신의 놓치고 있는 것들이 신경쓰였다. 평화를 위한다면서 정작 같은 호드 내에서 필요한 평화는 찾지 못했다. 오늘 있었던 것만 해도 블러드 엘프는 어쩌면 로돈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탄압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블러드 엘프를 싫어할 줄 알지,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모르고 있었다.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안쉬여... 늦은 밤이라서 제 목소리가 닿질 않을 것 같군요...'
노스렌드로 출항하는 비행선은 내일 오후였다. 내일 다시 만난다면 좀 자세하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블러드 엘프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로돈은 겨우 여관에 도착해서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없다고요?"
"에... 최근에 여기 묵었던 투숙객 중에서 블러드 엘프는 없습니다만?"
"그럴리가..."
여관주인은 장부를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로돈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노스렌드로 가는 날에 만나자고 먼저 약속했던 아가씨가 애초에 여관에 머물지 않았다고?
"혹시 오그리마 내에 여기 말고 다른 여관은 없습니까?"
여관주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흐음, 저기 골짜기 쪽에 고블린들이 사는 쪽으로 가보쇼. 대부분 여기 아니면 거기 묵을진데."
"알겠습니다."
로돈은 숙박비를 내고 여관을 나와서 고블린들이 모여 사는 정기의 골짜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부터 요상한 음악소리가 들려오자 거의 다다랐음을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블린들이 이른 아침부터 술과 음식을 먹고 강물에서 뛰놀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거닐자 여러 고블린들이 로돈에게 치근덕대기 시작했다.
"여, 타우렌 친구! 에일 맥주가 세일이야. 한 잔 받아보라고!"
"여기왔으면 잠시 쉬다가야지! 내가 싸게 해줄게. 응응?"
"죄송합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로돈은 정중히 거절하고 골짜기를 두리번거리며 레아나를 찾았다. 한참을 고블린들 사이를 거닐다 문득 유독 큰 파라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블린이 한 5명은 들어가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큰 파라솔이었다. 혹시나 해서 가보니... 웬 블러드 엘프가 선글라스를 끼고 비키니 차림으로 파라솔 아래 누워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옆에 고블린들이 서비스해주고 있는 건 덤이다.
로돈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도끼눈으로 노려보자 시선이 느껴진 레아나는 선글라스를 아래로 살짝 내리고 로돈을 바라보았다. 누군지 못 알아보고 잠시동안...
"...아! 어제 그 타우렌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쪽이야 말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곧 노스렌드로 가는 비행선이 오는데."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됬나... 알겠어요. 하암, 조금만 더 쉬고..."
레아나는 그대로 다시 선글라스를 쓴 다음 양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누웠다. 로돈은 다신 느끼지 않을 줄 알았던 절망감을 맛보았다.
"아, 안쉬여..."
아무래도 로돈은 아직 블러드 엘프를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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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개운하다."
레아나는 일광욕을 마치고 샤워까지 말끔하게 한 다음 갑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물론 로돈은 그 동안 계속 발을 구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기다리고 계셨네요? 비행장에 먼저 가 있으시라니까."
"아뇨. 차라리 이러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아서요."
로돈은 레아나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가죠."
둘은 나란히 비행장으로 향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오그리마는 어제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블러드 엘프한테 대놓고 시비를 거는 놈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 위에서 로돈은 사이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레아나는 별 개의치 않은 듯 했다. 그는 어제 데즈코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레아나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크흠, 레아나... 씨?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왜 여관에 안 묵고 고블린들 사이에 껴 계셨습니까?"
"그게 왜 궁금해요?"
레아나는 대답 대신 말대꾸를 했다. 로돈은 곁눈질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일부러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제가 먼저 물어봤잖습니까. 대답하는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제가 아는 블러드 엘프들은 고블린들 근처에도 안 가서 말이죠."
"어제 저한테 일어난 것만 봐도 딱히 대답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직접 두 눈으로 봤잖아요. 여기의 모두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로돈은 어느 정도 납득했지만 레아나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떻게든 그녀의 신경을 긁으려고 애를 썼다.
"허, 저라면 뻔뻔하게라도 그 오크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것 같습니다만? 냄새나는 고블린들 사이에서 하룻밤을 보낼 바에 말이죠."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말씀이네요."
"네?"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화약 만지고 진흙탕에서 구르는 고블린들이면 모를까. 이런 대도시 안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고블린이 아제로스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청결한 법이죠. 청결하지 못하면 누가 그 고블린의 서비스를 받고 돈을 주고 싶겠어요? 게다가 받는 돈만큼 최고의 서비스를 해주는 종족도 고블린 밖에 없는데."
레아나는 너무나 잘 안다는 듯이 대답했다. 로돈은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아, 그렇습니까? 그것까진 제가 잘 몰랐..."
"그쪽은 블러드 엘프부터 이젠 고블린까지 차별하시나봐요. 그렇게 냄새 타령 하실거면 트롤 냄새는 대체 어떻게 참으셨을까? 아하하하!"
레아나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로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고는 가뿐히 그를 앞서갔다. 로돈은 완전히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둘은 승강기를 타고 오그리마 절벽 정상으로 올라갔다. 수 많은 병사들과 모험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둘은 정신없는 틈을 비집고 노스렌드로 가는 비행장으로 올라갔다.
"흐음, 간신히 시간 내에 도착한 것 같군요."
"그러게요. 이렇게 서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쉴 수도 있었는데. 누구 때문인지..."
레아나가 팔짱을 끼고 하는 말 한마디마다 로돈의 속을 벅벅 긁었다. 애초에 씻고 옷 입는다고 하는 시간만 더 줄였다면 훨씬 더 먼저 와서 기다릴 수 있었을텐데. 레아나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던 로돈은 지금 굉장히 시간에 쫒겨 온 것이다.
괜한 말싸움을 하면 자기가 제일 지친다는 걸 아는 로돈은 다른 급히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나저나 노스렌드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 이번이 두번째 여행입니다만?"
"흐음, 저도 두번째지만 한번은 꽤 오래 머물렀던 편이죠. 아마 지금까지 한 고생 중에서 두 세번째로 제일 힘들었던 것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로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고생을 했다면 얼마나 했다고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심정이었다.
"저기 오는군요."
저 멀리서 비행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로돈과 레아나 앞에 멈춰섰다. 비행선이 정착하자마자 고블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신가 친구들, 노스렌드로 가고 싶다면 빨리 올라오라구!"
"그럼 가시죠."
로돈이 비행선에 발을 디디자 고블린이 갑자기 로돈 옆에 착 붙어서 말을 건넸다.
"이봐 타우렌 친구, 원래 비행선 운영은 오그리마에서 전액 지원해주기 때문에 와아아아안전 무료라구. 알고 있지?"
"아, 네 물론이죠."
"그.런.데!"
고블린은 손바닥을 척 내밀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추가요금만 지불하면 '특급 1등석'에 모셔줄 수 있어! 그리 안 비싸! 단돈 1골드면 충분하지!"
고블린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 로돈은 불안감이 들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1등석? 그것도 특급?"
근데 그 말에 레아나가 혹하고 말았다. 그녀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래, '특급 1등석!' 관심 있나?"
로돈의 예상 밖이었다. 레아나는 자기 가방에서 1골드짜리 금화를 튕겨 고블린에게 건넸고 고블린은 그걸 좋다고 넙죽받았다.
"그럼 어디 그 자랑하는 '특급 1등석' 구경 한번 해볼까요?"
"아 물론! 자 자, 이리로 오라구."
"저기... 레아나?"
"걱정하지 마세요. 돈 아꼈다가 어쩌시려구요? 이럴때 미련없이 써주고 호사를 누리면 되는거예요. 알겠어요?"
레아나는 로돈을 뒤로 하고 가뿐히 고블린을 따라갔다. 로돈은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지나고 선장의 우렁찬 명령이 울렸다.
"그럼 출발! 노스렌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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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욱, 우웨엑!"
"괜찮으십니까?"
"마, 말 시키지마요... 우웨엑!"
드라노쉬아르 비행장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레아나는 무지개빛 토사물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고 로돈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고 있었다.
"그러길래 누가 그런 말을 함부로 믿으라 했습니까?"
"으억, 솔직히... 누가... 알고 있었겠어요...? 그 1등석... 이라는게... 설마 비행선... 맨 꼭대기였을... 줄은... "
"그 고블린은 정작 제일 신났던 것 같습니다만?"
척 봐도 고블린이 운영하는 비행선에서 1등석의 기준은 고블린으로 정해지는 건 당연했다. 누구는 멀미 때문에 죽도록 고생할 자리일지라도 누구들는 제일 신나게 즐기면서 갈 수 있는 자리일테니. 암튼 로돈은 레아나가 고생하는 모습이 은근 쌤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드시면 먼저 요새 안의 여관에 가 계시는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지금 오느라 밤이 다 되서 내일 이른 아침에 출발해야하니까요. 전 볼 일을 좀 보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거듭되는 구토로 인해 아까까지 윤기가 좔좔 흐르던 레아나의 얼굴이 금세 수척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비틀비틀거리면서 요새 안쪽으로 들어갔고, 로돈은 그제서야 노스렌드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추위로군.'
로돈은 처음 노스렌드에 도착했을때가 떠올랐다. 스컬지에 잠식당한 네루비안들이 요새 앞마당을 습격해서 모든 병사들이 애를 먹었을 당시였다. 그땐 그 시체거미들을 상대하는게 너무 막막했는데, 이제 와서는 너무 허전할 정도로 앞마당이 텅 비어버렸으니... 오히려 그래서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정도로 지금 스컬지들이 약해져 있는 상태일텐데 대체 은빛십자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싶어서 보내는 전령들도 하나같이 실종되버린 상태니...
레아나가 있는 숙소로 가기 전에 로돈은 요새 전체를 한번 쭉 둘러보았다. 요새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게서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리치 왕을 상대할 땐 최전방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이젠 노스렌드의 물자를 오그리마로 보급하는 후발대로 전락해버렸으니, 그 용맹하던 호드의 전사들도 이곳에선 하나같이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별다른 정보 없이 근황만 반복해서 듣던 도중 의무장교의 직책을 맡고 있는 노쇠한 트롤 주술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치 왕의 통제에서 벗어난 스컬지? 확실히 그들은 무서운 존재일세. 어느 죽음의 기사가 일러주길, 리치 왕이 그들을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불타는 군단의 편이 되었을거라 하더군.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네."
"그럼 통제 받지 않은 자들이 존재할거라고 생각됩니까?"
"흐음, 예외란 있는 법이지. 정령들이 분노로 미쳐 날뛰기 전까지 그 누가 눈치를 챘겠나. 필멸자들을 위해 산과 강을 만들어 자비를 베풀어주시던 넬타리온께서 데스윙이 되어 나타나기도 했으니... 다만 자네 말대로 그렇게 단순히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네."
"왜 그렇죠?"
"지배받지 않는 스컬지들은 무조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네. 분노, 파괴... 그들 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들이지. 한둘이면 모를까, 수백 수천마리의 스컬지들이 휩쓸고 지나가게 된 자리에 남는 것이 뭐가 있겠나? 또한 그런 상태라면 어떤 형태로라도 지금쯤이면 소식이 닿았을걸세."
"그렇다는 것은..."
"통제를 받지 않는 스컬지는 존재하지 않네. 다만 리치 왕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받고 있는 것이면 모를까... 최소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자들 보단 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누군가겠지.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네."
주술사와 헤어지고 로돈은 생각을 정리했다. 가능성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정말 그 누구에게도 통제 받지 않는 수백마리의 스컬지들이 줄드락을 습격하여 은빛십자군은 물론 그들에게 귀환 명령을 전하러 간 전령과 얼라이언스 조사 단원까지 전부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리치 왕이 아닌 누군가 스컬지를 이용하여 줄드락의 안팎을 차단한 상태이거나. 그 두 가지 가능성만이 지금 놓여진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두 가지 전부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시신을 수습한다고 확정짓는다면 여유를 둬도 된다.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최소 한 두명의 생존자는 줄드락에서 고립되어있다고 봐야했기에, 로돈은 차마 그들이 죽었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었다. 어차피 최대한 빠르게 줄드락으로 가야하는 건 마찬가지. 후자의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고 해도 전자의 임무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 판단되었다. 그렇기에 로돈은 급히 노스렌드 지도를 보고 동선을 파악한 다음 시간을 계산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타운카르 마을을 거쳐서 줄드락으로 가려면 1분 1초가 급했다.
로돈은 한숨을 푹 쉬며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기도를 올렸다.
"안쉬여, 죽음은 그대의 태양빛 아래 무력할지니..."
1시간 후, 로돈은 평복 차림의 레아나와 마주쳤다.
"예? 곧바로 떠난다구요? 아까는 분명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우리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진데 조금이라도 지체할 순 없잖습니까."
레아나는 팔짱을 끼고 얼굴을 가득 찡그렸다.
"아니, 그래도 저녁은 먹고 가야되는거 아닌가요? 여기서 타운카 부족이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가면서 쫄쫄 굶을 생각인거예요?"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무리해서 속을 다 게워내라고 했습니까? 어쨌든 움직여야 하니 짐 다 챙겨오세요. 출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 알겠어요."
레아나는 투덜거리면서 여관 쪽으로 돌아갔다. 로돈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첫 만남은 거의 얼음 방패마냥 차가운 철벽과도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행동이 로돈에게는 살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로돈은 블러드 엘프가 하는 행동을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자기 성격에 안 맞고 협조를 제대로 안해주는 모습에는 여전히 언짢게 느껴지지만,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주먹이 날리지 않는 것이 어디인가.
10분 정도 지나자 갑옷 차림의 레아나가 출구 쪽으로 나왔다.
"가시죠. 급하다면서요."
그녀가 걸을때마다 허리춤의 작은 상자가 매달린채로 흔들렸다.
"그 상자는 뭡니까?"
"네?"
로돈이 레아나의 허리를 가리키자 레아나는 상체를 숙였다.
"어머, 이게..."
레아나는 곧바로 상자를 허리에서 떼내어 가방에 넣었고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일 날 뻔했네."
그렇게 말할뿐이었다. 상자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없이. 로돈은 대충 말하기 싫은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귀찮아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지금이 새벽쯤 됬으니 타운카르 마을에 도착하면 이른 아침일 듯 했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로돈은 어느 정도 추위와 허기를 견딜 수 있는 듯 했지만 레아나는 그렇지 못했다. 역시 아까 오후에 했던 구토가 문제였다.
"으드드드...추워... 배고파..."
"참으셔야 합니다. 이제 반 정도 왔다구요."
"앞으로 반이나 더 걸어가야 한다고요? 그냥 여기서 얼어죽는게 훨씬 더 낫겠네요!"
레아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로돈은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솔직히 본인도 지치긴 매한가지였다.
"아, 안되겠군요. 잠시 쉴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잠깐..."
레아나가 잠시 로돈의 앞길을 팔로 막았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먹잇감을 확실하게 찾은 듯한 매의 눈빛...
"로돈, 저기 보여요?"
레아나는 저 멀리 꿈틀대는 무언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로돈이 손벽을 이마에 붙이고 확인해보니 그녀가 가리키는 건 엄청난 털복숭이에 매우 커다란 엄니를 가진...
"매머드?"
"시선 좀 끌어줘요."
"네?"
로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레아나는 앞으로 달려갔다. 방금까지 지쳐서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는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차게.
"으랴아압!"
이어 레아나는 엄청난 고함으로 매머드를 도발했다. 뭣도 모르고 도발에 이끌린 매머드는 그대로 그녀에게 돌진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매머드의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매머드가 압도적인 크기로 커지면서 달려오는데 어째서인지 레아나는 진작에 로돈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히 분노에 차서 앞으로만 달리는 매머드의 앞에는 로돈만이 남게 되었다.
"이, 이런...!"
로돈은 황급히 방패를 꺼내들었다. 겨우 전신을 가린 찰나에 매머드가 방패에 부딪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로돈이 방패 신세가 되었을 정도로 굉장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매머드는 쉬익쉬익 입김을 내면서 계속 로돈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힘이라면 둘째가 서러운 로돈조차 겨우 버티는 정도였다. 로돈이 레아나의 존재를 급하게 찾을 즈음에 위쪽에서 기쁨에 가득찬 함성이 들렸다.
"오.늘. 저.녁.은...!"
레아나가 거대한 도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매머드 파티다!!"
콰앙! 하는소리와 함께 레아나의 도검이 매머드의 몸통을 반으로 갈랐다. 주변의 눈먼지들이 잦아들고 나서야 로돈은 방패를 치우고 넋이 나간 채로 두동강으로 시체가 된 매머드와 레아나를 바라보았다.
"빛이여, 이 불쌍한 생명을 인도하시길..."
짧은 기도를 마치자 레아나는 바로 태연하게 고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로돈,어디 불 좀 지펴주세요. 이 녀석 다 먹고 갈테니까."
"자, 잠시만요."
"네?"
"으음, 맛있어!"
"천천히 드세요. 양은 많으니까."
레아나는 스테이크를 한 움큼씩 잘라서 계속 입에 넣었다. 갓 잡은 매머드의 신선한 고기, 멀고어의 싱싱한 야채, 그 밖의 특제 향신료와 양념장, 그리고 일류 요리사의 솜씨까지. 모든게 로돈에게 갖춰져 있었다. 또한 항상 기본적인 식기 또한 가지고 있어서 먹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로돈은 스테이크가 구워지는 동안 남는 부위를 해체하여 잘게 다지고 향신료와 주변에 쌓인 눈을 넣어서 스튜로 끓이기 시작했다. 고소하고 풍미 가득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스튜는 이따 야식으로 먹고 남은 고기는 따로 챙겨야겠습니다. 이놈을 다 먹어치우려면 여기서 야영을 할 수밖에 없겠군요."
"음, 찬성!"
레아나는 고기를 입 안에 가득 머금은 채 손을 번쩍 들었다. 그나저나 레아나는 먹는 양이며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블러드 엘프들이 먹는 식사량을 한참 뛰어넘는 것 같았다. 이러다 마치 로돈이 먹으려고 남겨놓은 것 까지 전부 먹어치울 기세였다.
"그나저나, 이런데 피 냄새 풍기게 내버려두면 늑대들이 몰려오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걱정 안해도 되요."
"네?"
"여기 노스렌드 지방의 늑대들은 낮에만 다니거든요. 털 색깔이 밝다보니까 밤에 돌아다니면 천적들의 눈에 쉽게 띄니까요."
"천적들이요?"
"뭐, 마그나타우르라던지. 얼음 트롤들이라던지. 아니면 우리라던지."
레아나는 마지막 '우리' 라는 말과 함께 반 정도 뼈가 남은 매머드를 가리켰다. 로돈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허, 농담으로 하는 말이겠죠?"
"글쎄요? 하하하!"
레아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빠른 속도로 고기를 집어먹었다. 스튜가 거의 다 완성될 즈음에 레아나는 배를 만지고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 잘 먹었다."
로돈은 레아나가 참 특이하다는 듯, 한편으로는 잘 먹어줘서 흡족하게 듯이 바라보다 마저 통 안의 스튜를 젓고 있었다.
"고마워요."
"네?"
"고맙다구요. 밥 맛있게 해줘서."
로돈은 귀를 의심했다. 블러드 엘프한테 감사를 받다니. 생전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별 말씀을..."
"스튜 다 됐어요?"
"네, 거의 다... 또 드시려고요?"
"잘 먹었고 밥 맛있다고 했지, 배 부르다고 한 적은 없거든요?"
레아나는 냉큼 접시를 들고 스튜를 퍼서 담은 다음 호호 불며 입에 넣었다. 아직 뜨거웠다.
"아뜨뜨뜨... 맛있다..."
"거, 엄청 잘 드십니다?"
로돈은 이번에는 기다란 빵을 꺼내서 뚝 잘라 한 쪽을 레아나한테 건넸다. 그녀는 냉큼 받아들고 스튜에 찍어 먹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멀었어요. 이정도로 먹고 다니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버티고 살아요?"
"이미 충분히 많이 드셨잖습니까? 지금까지 먹은 것만 해도 저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습니다만?"
레아나는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을 치면서 말을 장황하게 이어갔다.
"모르시는 말씀. 가시덤불 골짜기에서 두 달을 표류한 적 있었는데 그 중에 거의 한 달은 근처의 랩터랑 퓨마 사냥하는데 쓰고 나머지 한달 중 보름 정도는 강물에서 살면서 물고기만 잡아먹고 살고 그랬다구요.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웃긴 건 거기가 길을 잘못 들은 곳이라는거예요. 얼라이언스 눈을 겨우 피해서 빛의 성소로 도착하는데만 꼬박 반 년이 걸렸는데, 가는 길에 멧돼지랑 거미랑 랩터랑 그리핀이랑 올빼미야수 등등... 아마 제가 안 잡아먹는 애들 세는게 더 빠를지도 몰라요. 게다가 재수가 없는 날에는 근처에 약초랑 버섯을 무더기로 뜯어먹다가 사경을 헤맬 지경이었으니... 제가 지금까지 돌아다니고 살아남으려 발악하면서 느낀게 뭐냐면 바로 체력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고 그 체력을 얻으려면 무조건 죽기 살기로 먹고 봐야한다는거죠. 진짜예요!"
레아나의 너무나 당당한 수다에 로돈은 어이가 빠졌는지 스튜를 입에 가져가려는 채로 굳어버렸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블러드 엘프한테서 저런 장황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거 확실히, 당신은 제가 아는 블러드 엘프들과는 다르군요."
"감히 지금 누굴 누구랑 비교하는거죠? 앉아서 책만 읽고 마법 좀 쓴다는 쫌생이들하고는 수준 자체가 다르죠! 그런 놈들은 아마 사지에 떨어져서 배고프면 그냥 굶어죽겠다고 할 놈들인걸요."
레아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이 가득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스튜에 계속 빵을 적셔서 먹고 있었다. 근데 로돈은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레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어째서 가시덤불 골짜기에서 표류를 하게 된겁니까? 일반적으로는 잘 가기 힘든 곳인데..."
"아 그건, 정말 운이 없던 사고였어요. 그냥 차원문 사고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이제와서 따져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레아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렇습니까...?"
레아나는 그저 정신없이 스튜를 떠먹을 뿐이었다.
---
그렇게 밤은 깊어갔고 로돈의 불침번만 남긴 채로 레아나는 깊이 잠에 들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저녁 즈음에 잠들었던 레아나는 밤이 되고 새벽이 될때까지 잠들었다. 그러다...
"...엄마."
스스로 잠꼬대로 뱉은 말에 그녀는 흠칫하면서 깨어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자신이 얼마나 잠들었는지 생각하는 와중에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로돈이 등을 돌려 앉고 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아, 네..."
느낄 수 있었다. 로돈이 갑자기 좀 이상하다는 걸.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잠꼬대를 하시더군요. 어머니를 찾고 계시는 듯한..."
그 말에 레아나는 뻘쭘해서 머리를 매만졌다. 분위기를 바꾸려 목소리를 올렸다.
"그, 그래서 뭐요? 이젠 고작 잠꼬대 한 것 가지고 트집 잡을건가요? 막 아직도 엄마나 찾는 철 없는 꼬마 정도로..."
"가족을 그리워 하는 일을,어찌 부끄럽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로돈은 하늘의 별을 향해 손을 낮게 들어올리고 손에 쥔 눈을 날렸다. 눈들이 바람에 날려 가루가 되었고 이내 사라져갔다.
"누군가에겐, 평생 그리워할수 밖에 없을진데."
레아나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로돈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고,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다.
"이봐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잖아요. 안 그래요?"
"......"
로돈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무거워진 입을 열었다.
"제 목숨은 지금까지 두 번 구원받았습니다. 첫 번째 구원을 받기 전까지, 제겐 빛을 위한 헌신이 아닌 오직 가족에 대한 사랑 뿐이었죠. 어머니, 아내, 그리고 아들까지. 농사를 짓고 채집을 하고 그날 저녁을 잔뜩 들며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저를 반겨주었죠. 저녁상을 가득 채우고 오늘 있었던 일만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밤을 새기도 했지요. 너무나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그저 평범했고... 행복한 삶이었죠. 그렇기에, 정말 바보같이... 앞으로도 이 목숨이 다 할때까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진...
그날도 지난 날들과 똑같을 줄 알았습니다. 약초와 과일을 잔뜩 들고 돌아간 집에... 가족들이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수 많은 켄타우로스들의 말발굽 자국들, 그것들에 짓밟혀 불에 타고 있는 집터, 그리고 창칼에 무수히 도륙당한 시체들만이 싸늘하게 식어있었습니다.
전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착각이라 믿고 싶었습니다. 제가 미쳤다고, 어디서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이라도 먹었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때 제 곁에는 제가 잘못 보고 있었다고 말해줄 이도 없었죠.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가 이끄는 길은 복수 뿐이었습니다. 평생 피 한 방울 닿지 않았던 쟁기와 낫은, 얼마 지나지 않아 켄타우로스들의 피로 물들었죠. 제 분노가 사라질때까지. 가족을 잃게 만들었던 켄타우로스들에 대한 분노와, 가족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제 자신에 대한 분노들을 모두 털어버릴때까지.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까스로 이성을 찾았을때는, 갓 태어난 어린 켄타우로스의 시체가 난도질을 당한 상태로 제 발 밑에 놓여져 있었을 뿐. 그제야 피냄새가 느껴졌고, 그건 제 온 몸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 많은 피가 제 온몸을 덮고 있었는지, 털이 피에 떡져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둘러본 주변은, 도저히 이성을 유지하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들이 제 가족을 짓밟아 놓은 것 보다 더 처참하게, 그들의 피로 얼룩져있었고 저의 분노로 짓밟혀 있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런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었을까. 복수를 이뤘다고 해도 나의 가족이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없는데. 오히려 저는 그들과 똑같은 죄를 지었고, 그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버렸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죽음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라 믿기도 했지만, 이 모습 그대로 죽어서 가족들을 만난다면 저를 반겨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는 그대로 제가 죽인 시체들을 뒤로 하고 그저 발걸음이 닿는대로 걷고 또 걷고... 지쳐 의식을 잃을때까지 걸었습니다. 누군가 이런 제 모습을 볼 바에야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었죠. 그러나 신은 저를 쉽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구원이었죠.
그 때 처음 만났습니다. 케른 님을. 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소리쳤죠. 왜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냐고. 나는 더 이상 살 이유도, 살 가치도 없는 존재인데. 너무 많은 생명을 죽이고 이젠 돌아갈 곳 조차 사라져버렸는데. 그때 저는 케른 님 앞에서 그간 쌓였던 울분을 모조리 토했습니다.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케른 님은 오히려 제 어깨에 손을 얹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자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잘 모른다네. 그렇기에 난 자네의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줄 수 없어. 하지만 이건 말해줄 수 있지. 생명과 삶이라는 건 그 누구도 함부로 단정 짓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네. 자기자신도 포함해서 말이야.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단정짓는다면, 자네는 자네의 죄를 속죄할 기회조차 잃어버리는게야.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일세.'
이어서 몸 추스리고 원한다면 자신이 이끄는 부족에 몸을 담아도 좋다 하셨죠. 블러드후프의 전사가 된 저는 그렇게 케른 족장님의 곁에서 제 분노를 다스릴 수 있었고, 지금까지 분노에 휩싸여 죽인 생명들에 대한 속죄를 이어갔죠.
그러나 그 삶도 차마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오그리마에서 케른 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죠.
저는 덜컥 겁을 먹었습니다. 제 분노를 막아주는 거대한 방패가 사라지고 말았으니, 다시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피폐해져가는 삶을 살 것 같았습니다. 검과 창을 쥐는 것이 두려워진 저는 어쩔 줄 모르다가 그림토템 부족이 쳐들어오기 직전에 마을을 빠져나가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 누가 저를 쫒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제 스스로 만들어낸 마음 속의 공포에 쫒기고 있었죠.
가족들이 그리웠습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결국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길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말았습니다.
그때 제게 두 번째 구원이 주어졌죠.
너무나도 눈부셨던 빛 아래서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태양빛. 안쉬께서 제게 내리시는 계시를.
곧바로 달려온 길을 돌아가서 바인 님을 뵈었고, 안쉬께서 내려주신 빛으로 그림토템의 추적자들을 처단했습니다. 그리로 바인 님께 무릎을 꿇고 탈영에 대한 사죄를 빌었고 재차 케른 님께 받은 은혜를 평생토록 타우렌과 블러드후프 부족에게 갚겠다는 맹세를 올렸습니다. 전 바인 님을 겨우겨우 테라모어로 모실 수 있었고, 이어 그림토템 부족은 패배해 바인 님은 무사히 족장의 자리에 오르셨죠.
안쉬께서는 말씀해주셨습니다. 저의 사라지지 않을 방패가 되어주겠다고. 그러니 저 또한 누군가의 사라지지 않을 방패가 되라 하셨죠. 항상 자신에게 기도하여 구원과 영광을 얻으라고. 태양빛이 닿는 모든 곳에서 저와 함께 있어주겠다고 하셨죠. 저에겐 정말 절실했던 두번째 구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순간도 저의 죄를 잊지 않았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속죄하며 살다 나중에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저를 반겨줄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죠."
로돈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레아나는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여러 생각이 오고가던 레아나는 묵묵히 로돈의 등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로돈은 솔직한 심정 같아선, 레아나가 뒤에서 따뜻하게 안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퍼억~!'
하지만 로돈에게 날아온건 따뜻한 포옹이 아닌 그녀가 휘두른 도검의 칼등이었다. 로돈은 방심하던 찰나에 그녀가 휘두른 방향으로 나가 떨어져서 눈 속에 쳐박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참, 무슨 얘기 하시나 했더니. 그런 삼류 신파극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제가 감격이라도 받아가지고 뒤에서 포옹이라도 해줄 줄 알았나요? 지금 그 표정이 딱 보기 좋은데."
"사, 삼류...?"
로돈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저 기분 나쁜 얼굴에 방패라도 던져야 할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후, 미치겠네 이거..."
레아나의 표정은 금세 굳어지고 이내 한 손으로 자기 머리를 쥐고 있었다.
"이리 앉아봐요. 그쪽 할 말 다 끝났으면 내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까."
로돈은 화가 가득찬 표정으로 팔짱을 낀 다음 모닥불 앞에 레아나와 마주보고 앉았다.
"좋소. 그쪽 이야기는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하도 잠꼬대로 엄마 타령하길래 기껏 가족 생각 나서 젖은 감성 다 날려버릴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 아니면 바로 타운카르 마을로 떠날 터이니!"
씩씩대는 로돈에 비해 레아나는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아까 드라노쉬아르 요새에서 떠날때 가방에 넣었던 상자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계속 매만지더니 이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들은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해도 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죠. 하지만 가끔 그 본적도 없는 얼굴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요. 동족이 학살당하고 고향이 파괴되는 순간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걸까.
그땐 순식간이었어요. 수 많은 언데드들이 제가 사는 마을을 휩쓸어서 집을 불태우고 이웃을 학살하면서도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순 없었죠. 그저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엄마의 절망 가득한 얼굴을 그때 처음 봤어요. 항상 절 보면 웃어주시기만 했으니까. '괜찮아. 걱정하지마. 모든게 잘 될거야' 도망치던 내내 엄마가 저에게 해주신 말이었어요. 저에게 웃어보이셨지만 슬픔과 절망 가득한 두 눈 만큼은 감추지 못하셨죠.
행여 놓칠까봐 항상 제 손을 꽉 붙잡아주셨던 엄마는 어느 순간 제 손을 놓고 제게 이걸 쥐어주셨어요. 그리고 웃는 얼굴로 꼭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피난의 세월은 너무나 길고 길었어요. 그 동안 의지가 약한 자들이나 제 또래 어린 애들은 마력 중독에 미쳐가기도 했지만 저는 의외로 멀쩡했어요. 나중에 알게됬는데 저는 마력에 재능이 없다고 하더군요. 엘프들 몇 천 중에서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경우라고 하네요. 암튼 그것 때문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된다 생각했는지 저는 아웃랜드로 넘어가지는 않았고 아제로스에 남아있기로 했죠.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저는 실버문에서 엄청난 차별과 멸시를 받았어요. 부모도, 가진 것도 없고, 마법도 쓸 줄 모른다니. 어떻게 무시하기 딱 좋은것들만 모여있을까. 제가 길바닥에 나뒹굴고 골목길에 웅크리고 있어도 제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어요. 불쌍하다면서 동정 아닌 동정을 뿌리고 다니는 쫌생이들은 가끔 봤어도.
그렇게 아무 미래 없는 제게 손을 내밀어주신게 리아드린 님이었어요. 지금도 존경하죠. 갈 곳 없는 저를 거두어주셨으니까. 저는 일단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캘타스 왕자가 므우루를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아웃랜드로 급히 파견 나가서 무너진 태양 공격대에 편입되었고, 어찌저찌해서 태양샘을 정화할 수도 있었죠.
거기서 갖은 고생을 하고 실버문에 돌아오자 저는 느꼈어요. 혈기사단에 속해서 사는 건 내 삶이 아니라고. 내가 아닌 남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기 싫다고. 그래서 탈영을 계획하려는데 저는 리아드린 님의 명에 따라 정신 없이 노스렌드의 차원문으로 들어가버리고 어쩌다보니 잿빛 선고단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죠. 거기서 딱 하나 얻은게 있다면 그때 지금의 대영주 님과의 인연을 쌓을 수 있었던거? 물론 그것마저도 비행포격선 전투 이후에 연락이 끊겨 리치 왕이 죽고 나서야 다시 뵈었지만.
그 때 대영주 님께 제 심정을 토로했어요. 호드고 동족이고 뭐고 나한테 해준 것이라곤 무시와 멸시 뿐인 것들을 전부 다 때려치고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고. 그러자 대영주 님은 명쾌한 답을 내렸죠. 그럼 벗어나라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깨달아야 한다 하셨죠. 그 말을 듣고 저는 실버문으로 돌아가는 차원문을 타지 않았어요. 대신 정말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가 보았죠. 먹을 게 부족했으면 주변의 동물들의 씨를 말렸고 돈이 부족했으면 울둠에서 바늘 찾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렇게 노잣돈이 쌓이면 쌓이는대로 썼어요. 먹고 마시고 쓰고 즐기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 내가 힘들게 번 돈이니까 당연히 내가 만족할 곳에 써야한다고 생각했죠.
가로쉬가 테라모어를 개발살내고 오그리마에 깽판을 쳐놓건, 다른 드레노어에서 강철 뭐시기들이 쳐들어오건, 전 저랑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지냈어요. 그러다 대영주 님의 편지를 받았죠. 티리온 경 께서 돌아가셨다고. 부서진 섬이란 곳에서 불타는 군단이 쳐들어온다고. 지금 단 1명의 용사도 절실한 심정이라고. 부름에 꼭 응해주었으면 한다고 했죠. 그래도 이렇게 간곡하게 요청하시는데, 고민 끝에 돕기로 했어요. 물론 어딘가의 충성심이나 정의실현은 눈꼽만큼도 없고 그냥 돈이나 좀 챙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요. 그 때 빛의 성소로 가려 근처 마법사에게 차원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뭐가 꼬였는지 건너와 보니까 가시덤불 골짜기였던 거예요.
암튼 군단은 물러났고... 다시 얼라이언스와 호드가 싸운다고 하네요. 저는 대영주 님 처럼 중립으로 남았어요. 그들이 친하게 지내건 치고 박고싸우다 자멸하건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때문에..."
레아나는 고개를 살며시 떨구고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상자 속의 작은 수정이 푸른 빛을 내면서 이어 음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행복해야되요. 반드시... 행복하게 살거라구요...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레아나의 목소리가 점점 울먹거리다가 이내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 혼자서... 날 이렇게... 사랑해줬는데... 내가... 내가..."
레아나는 계속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닦다가 무릎을 모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 보고싶다..."
로돈은 숙연해진 분위기에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슬며시 감았다.
"어쨌든, 전 저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거예요. 누가 절 어떻게 생각하던 아무 상관 없이. 당신도 예외는 아니죠. 알겠어요?"
로돈은 레아나가 말을 잘 이어가다 저런 식으로 끝내버리니 기분이 팍 상했다.
"그래도, 제가 이런 얘기 하게 만든 건 당신이 처음이네요. 대영주 님이나 리아드린 님한테도 안했는데."
레아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로돈은 모닥불을 휘적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흠, 제 이야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들어줄 만 했군요."
"뭐야, 아까 삼류라고 한 거 아직도 삐져있는거예요 지금?"
"누,누가 삐졌다고 했습니까?"
"맞네. 하하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자 저 멀리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이만 출발합시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잠깐, 아침은 안 먹어요?"
둘은 다시 짐을 챙겨들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로돈은 레아나를 더 이상 어색해하지 않았다.
---
"반갑습니다. 호드의 사절단이여. 현자 하늘땅이라 합니다. 족장님께서는 잠시 부재중이시라 제가 잠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로돈과 레아나는 아침 일찍 타운카르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먼저 접한 하늘땅이 그들을 반겼다.
"태양길잡이 로돈이라 합니다. 이쪽은 혈기사 레아나라고 하고요."
"반가워요."
"레아나, 시간이 좀 걸릴듯 하니 여관에 먼저 가서 방 좀 2개 잡아서 쉬고 계십쇼."
"아 진짜요? 그럼 그렇게 하죠!"
레아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로돈은 하늘땅의 안내를 받으며 천막으로 들어갔다. 둘은 작은 원탁에 마주보며 앉았다.
"우리 부족은 호드에게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죽은 자들에게서 저항할 능력을 갖추고 다시 재건할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과찬이십니다. 부족민들의 열정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죠."
하늘땅은 차를 내오면서 로돈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로돈은 짐가방 속에서 계약서 묶음을 꺼냈다.
"몇 년 전에 호드 측에서 찾아온 용사님들 덕택에 타운카 대족장께서 무사히 귀환하실 수 있었고 그 덕택에 저희 호드에 가입하실 수 있었죠. 그리고 그 가입 계약이 며칠전에 만료가 되서 다시 재계약을 하러 온겁니다."
"그거야 당연히 연장을 해야죠. 어디다 서명을 하면 되는겁니까?"
"잠깐."
하늘땅은 펜을 잡고 서명 기입란을 찾다 로돈이 잠시 그의 손을 잡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현재 저희 호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얼라이언스들과 말이죠. 때문에 한 명의 전사, 한 자루의 창, 한 발의 포탄, 한 끼의 식사도 매우 간절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로돈은 진지한 얼굴로 계약서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리고 이 계약서에는 지난번 계약과 동일한 내용에 호드를 위해 상당량의 물자를 보급하겠다는 조항이 붙어있습니다."
"그렇군요..."
"아,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쇼. 물론 보급 조항은 저와 합의 하에 취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저희 호드가 패배하게 된다면, 타운카르 마을의 부족민들의 안전 보장이 매우 힘들어지게 됩니다."
"흐음..."
하늘땅은 말 없이 계약서를 들고 조항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로돈의 말은 사실이었다. 취소를 할 수 있다는 것 까지. 하지만 하늘땅은 굳은 결심을 한 듯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태양길잡이시여, 저희 부족민은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나타나 저희의 터전을 위협하기 전까지. 그들과 싸우면 죽을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에 그들에게 맞서려는 다른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죠. 허나 호드의 용사님들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맞서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그저 뺏기고 도망칠 뿐이라고. 그러니 제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하늘땅은 망설임 없이 서명 기입란에 싸인을 했다.
"저희는 이미 한 번 호드를 위하여 피의 맹세를 올린 바, 그러니 모든 것을 헌신하겠습니다. 호드를 위하여."
"호드를 위하여. 형제여."
로돈은 착잡한 심정을 걷고 미소를 보였다.
"그럼 먼 길을 오셨는데 오늘 하루는 여기서 묵고 가시는겁니까?"
"아,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줄드락에 저희의 구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곧 출발을..."
"줄드락이요?"
줄드락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갑자기 하늘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 곳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이런... 이런 말을 하게 되서 유감입니다만, 구조를 기다린다는 이들은 이미... 아무도 살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어느샌가 줄드락 전체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니, 그 안개 속으로 들어간 이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할 수 밖엔..."
"안개라뇨? 줄드락이 넓은 지역은 아닌지라 안개가 자욱해도 웬만큼은 나올 수 있잖습니까?"
"저희 부족민 중 하나가 그리 믿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안개가 끼기 시작한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혹시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흐음...대략 한 달 전 쯤이었을겁니다."
로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한 달이라면 귀환 명령을 전하는 전령과 얼라이언스의 모험가들이 실종된 시기와 겹쳤다. 즉, 안개가 원인은 확실했지만... 그것만으로 납득을 하긴 힘들었다. 안개가 특정 한 지역에 가득히 껴 있고 그 지역의 특성을 무시할 정도로 방향 감각을 없앤 수준이라면 마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데, 마법으로 만든 안개는 제 아무리 오래 가봤자 3일이 고작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은빛십자군 대원들 전체가 한 달 가까이 어떤 외부 물자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였다면...
"...그럼 정말 전부 죽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군요."
로돈은 좌절 가득한 표정을 감추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늘땅은 그의 어깨에 손을 갖다댔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요."
로돈은 한 숨을 길게 한번 뱉었다. 그리고 좌절 가득한 표정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우...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늦더라도 줄드락으로는 가야겠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안개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것만이라도 밝혀내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해야겠지요."
"그대 뜻이 그렇다면... 그럼 그리 급하게 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괜한 조급함은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니 잠시만이라도 편히 쉬다가시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로돈과 하늘땅은 서로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로돈은 그날 간만에 개운하게 씻고 미룬 잠을 자고 일어나니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은 대원들을 생각하니 잠깐의 편안함은 곧 괴로운 감정으로 변해버렸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저 후회밖에 할 수 없어서 더 괴롭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로돈은 담요 위에 누워서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다 누군가 천막 밖에서 그를 불렀다.
"로돈? 안에 있어요?"
레아나였다. 입안에 비스킷을 우물거리고 한 손에는 비스킷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여기 족장님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어제께까지 가장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재촉하던 자가 가장 의욕 없이 늘어져있네요 지금."
레아나는 비스킷 봉투를 로돈 쪽으로 내밀었다. 로돈은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에 손을 뻗었다.
"누가 의욕 없다고 했습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뿐 입니다. 곧 출발해야지요. 줄드락으로."
"가서 뭘 할 수 있긴 해요? 우리도 실종될 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가면 대영주 님께 뭐라 변명을 합니까? 실종될까봐 무서워서 시체 수습도 못했다고 해야합니까? 일단 그 곳으로 가면 사건의 진상이라도 파악할 수 있겠죠."
"어련하시겠어요."
레아나는 살짝 웃으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마침 하늘땅 님이 와이번을 2마리 빌려드린다고 했거든요. 늦어도 해 지기 전까진 회색 구릉지를 지나야 할 거 아니예요?"
"알겠습니다."
둘이 대화하는 동안 레아나의 손은 쉴 새 없이 봉투와 입 사이를 돌아다녔다. 로돈이 그걸 지적하자 화들짝 놀라며 되려 역정을 냈다.
"근데 엄청 드십니다?"
"시, 시끄러워요! 말했잖아요. 안 먹으면 버틸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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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뒤, 모든 준비를 마친 로돈과 레아나는 그들을 마중하러 나온 타운카르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 하늘땅 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뵙도록 하죠."
"별말씀을."
레아나는 이미 와이번 위에 올라탔고 다른 한 마리에 로돈이 올라타려는데 갑자기 부족민 중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잠시만!"
로돈이 갑자기 와이번에 타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입니까?"
"혹시 작은 녹색 친구도 호드 친구입니까?"
"작은 녹색 친구...?"
정황상 고블린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고블린도 호드에 소속해있는 친구죠."
"얼마전에 그 작은 녹색 친구가 고룡쉼터 사원으로 간다고 저한테 설레발을 치고 길을 떠났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서 말입니다. 가는 길도 험하고 위험한 괴물들도 많은데 잘 도착했는지 확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로돈은 약속을 받고 그제야 와이번 위에 올라탔다. 와이번은 날개를 한번 쭉 펴더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와이번은 빠른 속도로 창공을 가르면서 날았다.
"아 상쾌하다! 확실히 걷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아요?"
레아나는 기분이 좋은 듯 로돈 쪽으로 소리쳤다.
"거 꽉 잡으세요! 자칫하다 떨어지면 어쩝니까?"
로돈의 잔소리는 레아나 쪽으로 닿질 않았다. 레아나는 기분이 좋은 듯 계속 와이번에게 박차를 가했다.
"이야하! 달려라 달려!"
정신 없이 날아가는 와이번을 타고 둘은 용의 안식처의 고룡쉼터 사원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 나니 레아나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우웨엑...웨엑...!"
"그러길래 무리하지 마셨어야죠. 비스킷 먹은 거 그렇게 다 토하잖습니까."
"시, 시끄럽... 우웩..."
"암튼 좀 쉬십쇼. 전 여기 사원 관리자 분을 좀 뵙고 오겠습니다."
레아나가 기둥에 대고 계속 구토를 하는 동안 로돈은 사원의 고룡 사제를 만났다.
"고블린? 그러고보니 황천빛 사원의 대사제 측에서 오기로 한 전령이 고블린이라 알고 있네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네."
"그렇습니까? 하긴, 타운카르 마을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 마련이니..."
"무슨 일 있는가?"
"아, 저희는 타운카르 마을에서 오는 길인데 마을 주민 중 한 분이 이 곳으로 올 예정인 고블린이 걱정된다길래 확인 차 들렀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정 늦어진다 싶으면 우리 측에서 찾을터이니 자네들은 가던 길 가게나."
"알겠습니다."
고룡 사제와 헤어지고 로돈은 다시 와이번을 주차해놓은 곳으로 갔다. 갔더니 레아나가 수척한 얼굴로 기둥 밑에 앉아서 헥헥거리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하... 말 시키지마요."
"근데 어떡하죠? 저희 이제 바로 출발해야하는데."
"네...?!"
레아나는 심히 당황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로돈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원래 동선을 따르자면 이 쪽의 회색 구릉지로 가서 드락타론 성채 쪽을 거쳐 가야하지만 시간도 아끼고 레아나 씨 상태도 좋지 않으니 아예 줄드락 쪽으로 직진하는게 더 좋을 듯 싶습니다."
레아나가 떨리는 손으로 지도에 손가락을 그었다.
"아니... 진작 이쪽으로... 가는게... 낫잖아요... 왜 굳이..."
"와이번들도 쉬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하늘 골렘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용의 안식처와 줄드락의 경계는 산맥이 높아서 와이번들도 높게 날아야하는데 이게 와이번들한테 무리가 꽤 심하다는거죠.
"으어억..."
"암튼 출발합시다. 와이번에 타세요."
"싫어... 싫다구... 안 탈거야..."
레아나가 안 타려고 뻐기자 로돈은 그녀를 강제로 기둥에서 떼 놓아 와이번 위에 앉혔다. 레아나는 저항할 힘도 없이 그대로 와이번의 등짝에 엎드렸다.
와이번은 다시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레아나는 아까처럼 즐거워 하는 기색 없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와이번 등에 얹혀갔다. 로돈은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길뿐이었다.
지도에 의하면 줄드락 쪽 경계 산맥에 거의 다 도착한 상태였다. 로돈은 산맥을 넘으려 와이번의 고삐를 쥐었는데 갑자기 눈 앞에서 빛이 솟아올라와 로돈의 앞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길래 급히 와이번을 멈춰세웠다.
"뭐지?"
로돈은 빛을 쏘아올린 쪽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동굴 같아보이는 구멍이 보였다.
"레아나, 방금 보셨습니까? 빛이..."
그녀는 와이번의 등에 엎드린 채로 여전히 반응할 한 가닥의 기운도 남지 않아보였다. 로돈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와이번을 동굴 쪽으로 하강시켰다. 동굴에 다다르고 로돈은 와이번에서 내려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안 쪽에 무언가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거기 누구 계십니까?"
로돈의 목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리자 형체가 갑자기 로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굉장히 헐레벌떡 달려오는 형체는 다름 아닌 고블린 여사제였다.
"아, 이럴수가! 그렇게 갖다 바친 공물들이 아깝지 않았구나!"
고블린은 그대로 로돈의 품에 안겼다. 본래 흰색이었던 사제복은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정말 감사해요. 친구! 이대로 고립되서 모아둔 돈들 쓰지도 못하고 죽는 줄 알았어요!"
고블린 사제. 정황상 이 친구가 아마 타운카르 마을에서 고룡쉼터 사원으로 가려던 고블린인게 확실했다.
"저, 여기 오기 전에 고룡쉼터 사원에 잠시 들렀습니다만 거기로 가던 길이셨습니까?"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로돈과 고블린은 동굴에서 그간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고블린의 이름은 레자. 황천빛 사원에서 공허의 힘을 억제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대사제와의 회의를 통해 용의 영혼의 힘을 빌리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청동용군단의 수장인 노즈도르무에게 대사제의 간청을 전하러 가던 도중 달라란에서 순간이동 사고가 일어나 타운카르 마을로 떨어졌고, 이어 어떻게 걸어서 오다가 어디서 잘못 들렀는지 산맥을 올라가기 시작해 결국 여기 이 곳에 고립되어 구조 신호로 빛을 쏘아올리다 로돈이 그걸 발견하고 온 것이라고 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길을 잘못 들으면 이 곳으로 오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냥 보이는 길만 쭉 걸어가도 고룡쉼터 사원에 도착할텐데...
"암튼 이제라도 이렇게 만나게 되서 다행입니다. 그 타운카 친구가 당신이 많이 걱정된다고 했거든요."
"그러게요! 이제 고룡쉼터 사원으로 갈 수 있어요."
"그치만..."
로돈은 고민에 빠졌다. 레자를 고룡쉼터 사원으로 데려다주고 다시 오기엔 시간이 너무 낭비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레자를 데리고 줄드락으로 들어가자니 방금까지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자에게 다시 사지로 가자고 하는 꼴이었다.
고심 끝에 로돈은 레자의 결정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제님, 저희는 지금 가면 다신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곳에 가려 합니다. 그 곳에서 불쌍하게 죽어간 대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죠. 당장 한 시가 급한 와중이라 당신을 고룡쉼터 사원으로 데려다드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대로 혼자 가실 수 있다면 말리지 않겠으나, 저희와 동행을 하시겠다면 태양길잡이의 명예를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예? 흐음..."
레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그쪽에서 수습해야되는 시체의 상태가 온전하다면 제가 부활 주문을 걸어드릴 수 있어요. 제가 도움이 아예 안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도 혼자 고룡쉼터 사원으로 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으니..."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로돈은 레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럼 가죠! 제 와이번에 타시면 됩니다."
레자는 '대신 1명당 10골드를 받겠다' 라는 말을 이어붙이기도 전에 로돈에게 이끌려 와이번에 올라탔다.
"저기, 엎드려 계신 분은?"
"아, 레아나라고 합니다. 혈기사 소속이죠. 지금 속이 좀 안좋아서 저러는거니 걱정하지는 마세요. 자. 출발!"
"우와악!"
로돈은 와이번들에게 박차를 가했다. 와이번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용의 안식처와 줄드락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줄드락은 그 밑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마치 안개 바다였다. 가능하면 하늘 위에서 모든 걸 확인하길 바랬지만 그럴 수 없다는걸 잘 알기에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와이번 두 마리는 타우렌과 고블린 그리고 블러드 엘프를 태우고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안개 앞에서는 한 치 앞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했다. 독한 냄새까지 나는 듯했다.
이어 땅에 도착하자, 로돈은 와이번들을 전부 다시 하늘 위로 올려보냈다.
"수고했다. 이제 너희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렴."
"으어억, 죽는 줄 알았네..."
레아나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듯했다.
"아까 그렇게 게워내고 또 비워낼 게 있습니까?"
"시끄러워요. 남 일이라고 그렇게 막말하면 되는 줄 알아요?"
"그나저나 진짜 한 치 앞도 안 보여요. 여기서 그 친구분들을 어떻게 찾죠?"
"일단 가죠."
셋은 안개 속을 그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땅의 흙은 축축했고 가끔 보이는 돌바닥에는 이끼가 껴 있었다. 몇 시간을 걷고 걷다 지루했는지 레아나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니까 로돈. 당신이 추측한대로라면 리치 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언데드가 이 지역을 안개로 장악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독 이 지역만 안개로 둘러싸이고, 특히나 여길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죠. 분명 어떤 사악한 마법사의 농간 일 것 같습니다."
로돈과 레아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레자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대신 표정을 한 가득 찡그리고 있었다.
'아, 괜히 따라온다고 했어...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하는거지? 그냥 온전한 시체 살려주고 돈 좀 받아볼까 해서 따라온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룡쉼터 사원으로 갈걸... 여기 있는게 더 위험한게 아닐까? 여기 벗어날 수 있긴 한거야? 어쩌면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 시체처럼...'
"사제 님, 잘 따라오고 계십니까?"
"아, 예! 예, 물론입죠! 지금 가고 있습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십쇼. 그래도 걸은 게 있으니 지금쯤이면 뭐라도 발견..."
'타앙!'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로돈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로돈은 갑자기 오는 통증에 급히 왼쪽 어깨를 감쌌다.
"로돈 씨! 괜찮아요?"
"끄윽, 괜찮습니다. 갑옷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거기 누구냐!"
레아나는 등의 도검을 뽑아들고 전방에 소리쳤다. 그러자 저 멀리 안개 속에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다름아닌 은빛십자군 전사 2명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은 처음에 그들을 보고 바로 경계를 올렸다. 한 명은 망치와 방패를, 다른 한 명은 총을 들고 있었다.
"타, 타우렌? 블러드 엘프까지?"
"뒤에 고블린도 있어!"
로돈은 순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은빛십자군들이 살아있다는 것에 반가워 당장이라도 저들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저들의 경계와 레아나의 반응, 그리고 자신의 왼쪽 어깨의 부상 때문에 당장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로돈은 안간힘을 써서 외쳤다.
"잠깐만요, 저희는 여기 줄드락에 파견 나온 병사들을 구조하라는 대영주 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경계를 풀어주십시오!"
로돈은 오른손으로는 어깨를 감싸고 왼손으로는 레아나를 막아선 채로 소리쳤다. 둘은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가 싶더니 이내 총과 칼을 거두고 한 명은 로돈의 곁에 와서 그를 부축했다.
"이거, 죄송하게 됬습니다. 경계심에 쏜 총알이 하필 구세주에게 가다니."
"죄송하다면 다예요? 총알이 당신네들 구세주 머리로 날아갔으면 어쩔 뻔했나요?"
레아나는 심술맞게 굴었지만 로돈은 되려 침착했다.
"아닙니다. 크게 다치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를 따라오세요. 대장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가는 길에 레자는 로돈을 치료했다. 그리고는 나중에 도착해서는 돈을 요구했지만.
로돈과 레아나와 레자, 그리고 은빛십자군 둘은 이내 십자군 전진기지에 도착했다. 사실 전대 리치 왕이 다스리고 드라카리 트롤들이 활개를 칠 때의 전진기지였지, 지금은 그저 잔존 스컬지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겨진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대략 10여 명의 십자군 병사들이 진이 다 빠진 상태로 좀비처럼 안개 속을 거닐고 있었다. 얼굴도 수척하고 걸음걸이도 느려터진게 당장 스컬지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할 듯 했다.
"대영주 님 께서도 그렇게 걱정하고 계시다니. 이거, 인기가 너무 많아도 문제로군."
로돈은 그 곳의 대장인 성전사 맥켈라르를 만나자 당장 반가움보다는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전부 죽었을거라 생각한게 틀려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상태가 꽤 심각하군요."
"우리가 햇빛을 받지 못한게 벌써 1달이 넘었소. 웬만한 놈들은 물론이고 좀 버틸만 하다는 녀석들 조차 미쳐가는 실정이니..."
"이 안개를 빠져나가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요?"
레아나가 질문을 던졌다.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오. 일단 안개 때문에 주변 지형을 파악하는게 힘들고, 스컬지들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기습을 당하기도 쉽지. 게다가 깊이 가면 갈 수록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확률 마저 희박해진다오. 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떠난 병사들만 벌써 반이 넘었고, 그들 전부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않았소."
"앞서 은빛 성기사단에서 전령와 얼라이언스 측에서 먼저 파견을 보냈는데 이 곳에 도달하긴 했습니까?"
"아니, 안개가 드리운 이후로 여기까지 온 건 당신네들이 처음이오."
"역시 보통 안개가 아닌 건 확실하군요."
로돈은 가방을 벗어서 땅바닥에 턱! 하고 내려놓은 다음 소매를 걷었다. 레자의 치유를 받은게 효과가 있었는지 왼팔을 가뿐히 빙빙 돌렸다.
"암튼,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하도록 합시다. 레아나, 좀 도와주세요."
로돈은 가방에서 각종 조리도구와 식자재를 꺼냈다. 식자재 중에선 레아나와 같이 먹었던 매머드 고기까지 잔뜩 있었다. 레아나가 불을 지피는 동안 로돈은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레자는 지친 병사들을 치유하고 돈을 잔뜩 걷어들였다.
"로돈, 나무가 축축해서 불이 안 붙어요!"
"어떻게든 해보세요!"
레아나가 부싯돌을 계속 부딪히다 화가 나서 바닥에 냅다 던져버리고 이번에는 도검의 칼등을 나무토막 위에 대고 열나게 비벼대기 시작했다. 레아나가 안간힘을 짜내고 짜내어 계속 비비니 연기가 피어올랐고 이내 불이 올라왔다. 이어 로돈이 커다란 냄비 안에 각종 재료를 잔뜩 넣은 다음 지쳐 쓰러져있는 레아나에게 다가왔다.
"거 봐요. 잘 붙잖습니까?"
"허억, 허억... 그럼 다음부터 당신이 하던가요!"
어쨌든 곧이어 수프가 완성되자 고소한 냄새가 안개와 섞여 퍼지기 시작했고, 배식은 레자가 담당했다.
"그릇 들고 줄 서세요! 나눠주는 건 특별히 공짜니까!"
방금까지 좀비처럼 걷던 병사들이 각자 그릇을 챙기고 헐레벌떡 레아나의 앞에 줄을 섰다. 한 명 한 명 전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릇에 수프를 가득히 받아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살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전부 받고 이어 마지막으로 맥켈라르도 수프를 받았다. 그가 수프를 한 숟갈 퍼서 입 안에 넣자 감격과 탄식이 섞인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야,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게 정말 며칠만인지 모르겠군. 보급이 원천 차단된 상태라 있는 식량을 줄이다 줄이다 결국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드시니 다행입니다. 음식은 아직 많이 있..."
로돈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뭔가 등짝이 싸해지는 걸 느끼더니 곧바로 레아나에게 소리쳤다.
"레아나! 수프에 손대지 마십시오!"
"에?"
레아나는 배식을 정리하고 이제 막 대형 냄비에 남은 수프를 퍼서 입에 갖다 댈 참이었다. 로돈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듯이 레아나의 숟가락을 뺏었다.
"이번 한번만 좀 참으면 안되겠습니까? 여기 병사들은 한 달 가까이 굶고 지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아니, 아까 그렇게 고생했는데 저는 한 끼도 안 준다고요? 여기 밥만 주러 온 게 아니잖아요. 숟가락 이리 돌려줘요!"
로돈은 단호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머리위로 쭉 올렸다. 레아나는 그걸 잡겠다고 로돈에게 폴짝폴짝 달려들었고, 레자와 맥켈라르가 보기엔 그 모습은 흡사 고양이 같았다.
"아 진짜 쪼잔하게 구네! 많이 안 먹는다고요! 나도 공평하게 수프 한 그릇 먹겠다는데 왜 말리는건데요!"
"그쪽이 많이 안 먹는 정도를 셋으로 나누면 여기 병사들의 삼시세끼가 되는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좀 만 참으시라구요!"
"아 그냥 다 같이 굶어죽겠다고요? 그거 좋네요! 그냥 묻힐 자리만 바뀌는거지, 어차피 굶어 죽으나 안개 속에서 헤매다 죽으나 다 똑같으니까요! 흥!"
레아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대 자로 뻗었다. 숟가락을 돌려주고 수프를 먹게 해주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을거라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로돈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로돈은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육포와 비스킷입니다. 아까 타운카르 마을에서 챙겨온건데, 이걸로 어떻게..."
레아나는 빛의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돈이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챘다.
"감사해요~!"
그리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육포와 비스킷을 입 안에 넣었다. 로돈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그대로 맥켈라르와 레자에게 돌아갔다.
"저 친구, 내가 아는 엘프들이랑 좀 다르구만?"
"그러게요. 그렇게 고상하던 블러드 엘프가 아니예요."
둘은 입을 모아 로돈에게 말했다. 로돈도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저도 저런 블러드 엘프는 살아 생전 처음 만났습니다. 어찌 그렇게 식탐이 많고 고집이 쎈지..."
로돈은 자리에 앉자 레아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레아나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저런 별난 엘프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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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비추지 않는 곳의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오랜만에 포식한 병사들은 천막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고 맥켈라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단하게 배를 채웠을 뿐인 로돈 일행은 기지 중앙에 따로 모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안개 속을 탐사하도록 합시다."
"괜찮겠어요? 이 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잖아요."
"뭐라도 해야죠. 어차피 죽을거라면 아무것도 안하고 죽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긴, 그건 그래요."
로돈과 레아나는 무덤덤하게 대화하고 있었지만 레자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아, 어쩌지...? 난 남겠다고 해야하나? 그럼 따라서 나온 의미가 없잖아... 너무 치사하게 보려나? 죽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고...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지...?"
"사제 님은 위험하니 돌아가계셔도 상관 없습니다. 게다가 대사제 님으로부터 특명을 받으셨잖습니까. 제일 목숨을 보전하셔야죠."
레자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왠지 남겠다고 했다간 지금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레아나가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할 지가 너무 두려웠다. 결국 레자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무, 무슨 소립니까! 같이 빛을 섬기는 입장으로써! 황천빛 사원의 사제로써! 저 또한 당신들과 같이 할 의무가 있습니다!"
"으흠, 정 그러시다면야..."
"뭐, 좋아요. 혼자 죽는 것 보다야 길동무 둘 붙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안 그래요?"
"히익...!"
레자는 한 껏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레아나가 그녀를 놀리는 재미가 좀 붙은 것 같았다.
"그럼 출발하죠."
셋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이른 밤에 출발해 늦은 새벽이 지나가도록 걸어서 축축하고 불길한 흙이 덮힌 땅으로 가게 되었다. 로돈은 지도를 꺼내서 걸어온 방향과 거리를 대충 측정해서 위치를 파악했다.
"여기가 대략... '스림의 최후'라는 땅이겠군요."
"역시 새벽 밤에다 안개 때문에 주변이 보이질 않네요."
"여기서 좀 쉬면 안될까요...? 이 상태에서 더 멀리 갔다간 위험할 것 같은데..."
레자가 지치고 겁을 먹은 듯한 얼굴로 로돈에게 간청했다. 확실히 로돈도 더 움직이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도록 하죠."
레아나는 아까 저녁거리를 만들고 남은 불씨를 써서 모닥불을 피웠다.
"그걸 용케 살리셨습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쉽게 죽게 냅두면 허무하잖아요. 수고 좀 했죠."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은 셋 중에서 아직 팔팔한 레아나와 달리 로돈과 레자는 조금 많이 피곤한 듯 했다. 둘의 상태를 둘러본 레아나는 자진해서 나섰다.
"흐음, 이번에는 제가 불침번을 서도록 할게요. 두 분의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으니."
"그래주시겠습니까?"
"고마워요. 레아나 양."
둘은 감사 인사를 하고 레아나를 남겨둔 채 모닥불을 앞에 두고 드러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레아나는 둘이 잠든 걸 확인하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타닥, 타닥하는 소리에 맞춰 나무들이 재가 되어 가라앉는 걸 계속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집중이 흐트러졌다.
"..."
처음에는 귀를 가볍게 건드는 바람소리 정도로 느껴졌다.
"......"
그 바람 소리는 아주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레아나의 귀에 도착했다.
"...리 와."
이어서 바람 소리는, 그녀가 가장 간절하게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가 되어버렸다.
"...이리 와."
"엄...마?"
"이리 와... 이리오렴..."
레아나는 아무런 기척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에 홀린 듯 소리의 근원지로 발을 옮겼다. 그녀의 풀린 두 눈에 비친 건 끝을 알 수 없는 안개 속 어둠이 아닌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고향 쿠엘탈라스의 들판이었고, 그 들판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자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엄마...!"
그녀는 간절함과 그리움에 북받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다가가면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터억!'
"꺄아악!"
돌부리였다. 레아나는 평화로운 들판에 설마 존재할까 싶었던 큼지막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그대로 축축한 땅바닥에 코를 박고 넘어졌다.
"끄응, 아이고 머리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아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을 알 수 없는 안개 속 한가운데였다.
"여긴...? 로돈? 사제 님?"
뭔가에 홀려 그들과 멀리 떨어졌다는 걸 깨달은 레아나는 급하게 경계 태세로 들어가려 등의 도검을 붙잡았다.
"키에엑!"
"치잇!"
뒤였다. 구울이 먼저 등 뒤를 덮치기 전에 재빨리 뒤로 돌아 큰 사선베기로 구울을 반으로 갈랐다. 간신히 위기는 모면했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울의 울음소리 때문에 앞으로가 문제였다.
"키에아악..."
"크에에에..."
레아나는 빠르게 눈알을 굴려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둘러보았다.
"하나, 둘, 넷, 여섯, 열... 이거 몇 마리야 대체...!"
그녀는 결사의 각오로 도검을 부여잡았다. 눈을 감고 다신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빛이여, 전 이미 혈기사로써 그대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하지만..."
"캬아악!"
레아나는 구울이 달려올때마다 하나씩 침착하게 베어넘겼다.
"그대가 진정 자비로운 존재라면, 부디 제게 저들을 심판할 자격을 부여하소서!"
기도의 외침을 끝마치자 레아나의 도검에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레아나는 본격적으로 안개 속 구울들에게 달려들었다.
"오너라 이 망할 것들아!!"
"케아아아악!"
짧고 긴박감 넘치는 전투였다. 사방에 구울 시체가 레아나의 도검에 썰려 바닥에 쌓였다. 아직도 레아나를 노리는 구울들은 한참 남았지만, 본능적으로 레아나가 위험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아까보단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이럴게 아니라... 힘이 더 빠지기 전에 도망쳐야 되는데 길을 알 수 없으니... 운 좋게 찾아간다고 해도 가는 길에 이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고 도망치다 쫒길 수도...'
뭘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나마 최선의 가능성이라면 자신이 없는 걸 로돈이 발견해서 찾으러 와주는 것 밖에 없었지만, 지금쯤 깨어났는지 아닌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꺄아아아아아악!"
순간 어느 방향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레아나가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가 바라본 안개 속에서 자신의 크기의 약 1.5배 정도로 거대한 밴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밴시는 아까 비명을 지른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레아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알겠다. 네가 이 안개의 원흉이구나. 그치?"
밴시가 레아나의 말을 알아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잠시동안 레아나와 밴시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돌 뿐이었다. 그 사이에 레아나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밴시를 처치할 수 있다면... 이 안개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공격해야하나? 밴시는 실체가 없으니 그냥 휘둘러봤자 의미가 없을텐데... 어쩌면...'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레아나는 고민 끝에 결심을 옮기려 했지만, 정말 타이밍이 안 좋게도 선공권은 밴시에게로 넘어갔다. 밴시의 비명이 큰 파장을 일으키며 레아나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파장은 이어 주변의 안개까지 걷히게 만들었지만 그건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주변의 안개가 걷히니 한참 처치했다 믿었던 구울들은 레아나를 포위하고 있는 구울들의 반의 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레아나는 허탈함에 다리가 후들거렸고, 비명 소리에 귀까지 울려서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최대한 정신을 다잡으려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케에엑!"
구울이 한 마리 달려오자 침착하고 확실히 베었던 아까와 달리 겨우겨우 칼을 휘둘러서 베어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방심한 탓에 측면에 오는 공격을 허용하고말았다.
"꺄악!"
레아나는 그대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하필 가방 끈이 찢어져 안의 내용물들이 바닥에 쏟아지고 말았다.
"아, 안돼!"
그녀는 필사적으로 내용물 쪽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 앞에 지켜야 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오르골 뿐이었다. 레아나는 양손으로 잡던 도검을 오른손에 쥐고 왼손에는 오르골을 꽉 쥐었다.
"이것만큼은 절대...!"
레아나가 지금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눈치챘는지 구울들의 총공격이 시작했다. 레아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그들과 맞섰지만 역시 현저하게 힘이 부칠 수 밖에 없었다. 기어코 그녀는 지금까지 잘 막아오던 구울의 손톱을 옆구리에 내주고 말았다.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레아나는 무릎을 꿇고 칼을 놓은 다음 옆구리에 손을 갖다댔다. 피가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게 느껴졌다. 게다가 레아나의 손에는 피 뿐만 아니라 역겨운 구울의 진액까지 섞여있었다.
"허억, 허억..."
점점 숨쉬기마저 힘들어지고 있지만 그럴 수록 더 필사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엎드리면서 왼손에 쥐고 있던 오르골마저 놓쳤다.
"안돼... 엄마..."
의식을 잃기 전 레아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굴러 떨어진 오르골과 그것을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는 그녀의 손 뿐이었다.
레아나는 결국 눈을 감았고 굴러간 오르골은 바닥에 부딪혀 그 뚜껑이 열려버렸다. 이어 오르골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든 걸 지켜보면서도 일체 감정 변화가 없던 밴시가 음악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이 구울들은 다 죽어가는 레아나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먹어치우려 했다.
밴시는 아까 질렀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로돈 님, 일어나보세요! 로돈 님!"
"으음, 무슨 일입니까?"
"레아나 양이 사라졌어요...!"
"그럼 화장실이라도 갔겠... 뭐라구요?!"
비몽사몽해서 정신을 못 차리던 로돈의 잠이 단박에 깨버렸다.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모닥불은 꺼져있었고 레아나는 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런..."
"대체 어디로 간 거죠? 우리가 얼마나 잠든거예요?"
"일단 침착하세요. 주변에 도검이 없는 걸 보면 가져갔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어떤 위험이 닥치건 그녀는 대항하고 있을겁니다. 혼자 오래 버티진 못할테니 그 전에 우리가 한시 바삐 찾아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로돈은 급히 내려놓은 짐과 방패를 집어들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까보다 주변의 안개가 훨씬 걷히긴 했지만 문제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는 것이다.
'큰일이군. 태양이 없으면 힘을 많이 받지 못하는데...'
지금 더운 밥 찬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레아나의 흔적을 찾다가 레자는 문득 귀에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로돈 씨, 지금 저 소리 들려요?"
"소리라뇨?"
"...아아아아아악..."
아주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비명소리였다. 로돈과 레자는 직감할 수 있었다.
"달려요! 당장!"
둘은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달릴수록 비명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확실히 안개가 옅어져서 길이 훨씬 잘 보였다. 비명소리가 귀청을 찢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쓰러진 레아나가 저 멀리 보였다.
"레아나!"
로돈이 레아나를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미처 구울들을 신경 쓰지못했다. 로돈에게 달려드는 구울을 향해 레자가 급히 성스러운 일격을 날렸다.
"조심하세요. 지금 사방에 구울 천지예요!"
"아, 이런..."
로돈은 급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가운데에 레아나, 그리고 레아나의 곁에 있는 밴시, 그 주위를 가득히 메우고 있는 구울들... 솔직히 저들을 다 물리칠 수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이거 큰일이군요. 구울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건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예?"
"저런 구울들 정도야 처치하는게 얼마나 어렵다고... 지금 당장 레아나 양 걱정만 하시는게 좋을거예요."
로돈은 레자의 말이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레자는 소매를 걷고 로돈의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비켜 계세요. 제가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황천빛 사원의 비밀결사를 무슨 낙하산 타고 들어간 줄 아세요?"
레자는 하늘 위로 손을 뻗어 정신을 집중하였다. 곧바로 그녀의 온 몸에 빛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곧 온 몸이 빛으로 덮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빛이 사방팔방으로 멀리 퍼져나가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었다.
"신성한 빛이여!"
레자의 외침과 함께 구울 중 상당수가 신성한 폭발에 휘말려 먼지가 되어버렸다. 그때까지 로돈은 별 활약을 보이지 않고 은빛십자군 병사들에게 돈만 걷어가던 레자를 그리 좋지 않게 보고 있었지만, 그 순간 그녀의 신성력은 가히 감탄할 정도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감탄은 나중에 하세요.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유일하게 밴시만이 반마법 보호막을 쳐서 자신을 막았다. 얼마나 큰 지 레아나까지 가리고도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밴시는 상당히 강력해요. 지금까지 어떤 언데드의 보호막도 제 빛을 막지 못했는데."
일종의 자기자랑처럼 들릴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당장 레아나가 너무 위험했다.
"사제님, 지금 당장 레아나의 상태를 볼 순 없습니까?"
레자는 아무 말 없이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로돈은 순간 무언가 직감한 듯 했지만, 정말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방패를 다잡았다.
"일단 어떻게든 밴시부터 처치하죠! 엄호를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가세요!"
로돈은 방패에 신성력을 담아서 던졌다. 태양빛이 없어서 평소의 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역부족이었지만 어떻게든 밴시를 도발할 수 있었고, 밴시는 그때부터 로돈을 집중적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밴시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서 로돈은 방패에 신성력을 쏟아부어 자신을 보호하며 밴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사제님! 좀 있으면 밴시가 본격적으로 큰 공격을 준비할 겁니다. 그 틈을 노려주세요!"
"알겠어요!"
로돈의 말대로 밴시는 슬슬 강력한 기술을 준비하는 듯 했다. 로돈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으려 했지만, 순간 발에 뭔가 채이는 걸 느끼고 바닥을 쳐다보았다.
"어?"
그것은 뚜껑이 열린 채, 빛이 꺼진 수정이 담긴 상자. 레아나의 오르골이었다.
"이건...?"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으윽!"
"으악, 시끄러!"
로돈의 눈이 오르골에 가 있는 걸 본 밴시는 엄청난 비명을 질렀다. 순간 방심하던 로돈이 그대로 흐트러졌고 레자도 빛을 모으다가 급하게 귀를 틀어막았다. 둘 다 비명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방패로 막아도 소용 없었고 신의 권능으로 보호막을 칠 여유도 없었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비명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더 이상 비명소리가 아닌 구슬프게 우는 소리로 변해갔다. 로돈은 그제야 귀 막은 손을 내려놓고 밴시를 바라보았다.
밴시는 쓰러진 레아나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무언가가 떠오른 로돈의 동공이 커지고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땐 순식간이었어요. 수 많은 언데드들이 제가 사는 마을을 휩쓸어서 집을 불태우고 이웃을 학살하면서도 저는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죠. 그저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로돈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로돈은 방패를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오르골을 줍고는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그 설마는 기어코 확신이 되었다.
''괜찮아. 걱정하지마. 모든게 잘 될거야' 도망치던 내내 엄마가 저에게 해주신 말이었어요. 저에게 웃어보이셨지만 슬픔과 절망 가득한 두 눈 만큼은 감추지 못하셨죠.'
"로돈 씨, 지금 뭐하시는거예요?! 정신 차려요!"
아무것도 모르는 레자는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밴시가 로돈에게 정신 지배를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밴시를 향해 성스러운 일격을 날리려 했지만 로돈이 말 없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레자는 아까보다 수 십배는 심각해보이는 로돈의 표정을 보자 급히 빛을 거두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로돈은 절대로 뭔가에 홀린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로돈은 오르골을 들고 아주 천천히 밴시와 레아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밴시는 로돈의 기척이 느껴지자 바로 비명을 질렀다. 눈물을 흘리며, 슬픔 가득한 비명을. 더 이상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로돈은 개의치 않았다. 귀에서 피가 흐를 지경이었지만 결코 막으려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다가갔다.
'행여 놓칠까봐 항상 제 손을 꽉 붙잡아주셨던 엄마는 어느 순간 제 손을 놓고 제게 이걸 쥐어주셨어요. 그리고 웃는 얼굴로 꼭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약속을...지켜주셨군요. 다시 만나자는 그 약속. 결코 이런 상황을 바란 건 아니였겠지만..."
로돈은 밴시의 앞에서 다시 오르골을 열었다. 오르골 안의 작은 수정이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고 음악소리가 울려퍼졌다.
"레아나에게 들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향수가 담긴 물건은 이 오르골 뿐이라는 걸 제게 보여주었죠. 그녀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어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계속 보고 싶고 그리워한다는 걸. 하지만 레아나는 단 한순간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받은 사랑만을 간직하고 있었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해주고 지켜주었던 어머니가 너무 슬퍼할 것 같다고..."
"아아아...아아아아...!"
순간 밴시의 몸에서 먼지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로돈은 레자 쪽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로돈은 다시 밴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에 아주 조금의 빛을 담아서 밴시를 향해 뻗었다.
곧바로 빛은 반응했다. 밴시에게 먼지가 날리는게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어서 손 안의 빛은 짧게 폭발했고 로돈은 순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밴시가 없었다.
"으흐흑...으흐흐흑...!"
밴시가 있던 자리에는 엘프의 영혼이 레아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정말 레아나와 완전히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있어 레자도 저 멀리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녀가 레아나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혼자 두고 떠나서... 우리 딸을 몰라봐서... 정말 미안해..."
영혼은 마치 편히 잠들어 있는 듯한 레아나의 얼굴에 손을 대고 싶었지만 실체가 없는 손은 얼굴을 통과해버렸다. 로돈은 영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손 밑의 레아나의 얼굴은... 차가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켜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로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제야 사태를 어느정도 파악한 레자가 레아나에게 다가왔다. 레자는 그녀의 옆구리의 상처와 시체의 상태를 어느정도 확인한 다음,
"살릴 수 있어요."
"네??"
로돈과 영혼의 입이 거의 동시에 맞춰서 소리를 내었다.
"사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레아나 양의 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치유를 하면 될 정도였는데, 저희가 도착했을땐 이미 시체가 되어있었죠. 그 때 구울들이 시체를 훼손할까봐 엄청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이네요."
레자는 레아나를 바로 눕힌 뒤에 옆구리에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진액의 독을 빼내고 벌어진 상처를 빛으로 치유하니 언제 다쳤냐는 듯이 말끔해졌다.
"아까 말했잖아요. 제가 괜히 비밀결사가 아니라고. 게다가 썩기 시작한 정도만 아니면 별 문제는 없을거예요. 다만 힘이 조금 들 뿐이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혼은 레자의 앞에 엎드려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 전에."
레자는 영혼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빛으로 감쌌다.
"혼자서 성불하는게 힘드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그래도, 따님과 재회의 시간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 말을 들은 영혼은 레자와 로돈의 얼굴을 한번씩 보다가 이어 레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결정을 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괜찮... 습니다. 정말... 우리 딸 목소리 듣고 싶지만... 한번 듣기 시작하면...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전... 저는... 떠나야 하는데..."
영혼의 목소리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로돈은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럼 레아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라도 없습니까? 제가 어떻게든 전해드리겠습니다."
"......"
영혼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레아나만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예쁘게 자라줘서 고맙고... 혼자 두고 떠난 걸 원망하지 않아서 고맙고... 그저 살아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고... 항상 밥 잘 먹고 건강하게...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줘... 이 못난 엄마 몫까지..."
기어코 다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로돈은 마음 같아선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안아줄 실체가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레자도 마냥 좋은 심정은 아니었다. 그녀도 내심 모녀 간의 상봉을 바랬지만, 거절 의사를 표하기도 했고 영혼의 감정이 폭발하면 수습이 힘들다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성불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흐음... 그럼 시작할게요."
레자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이어 수많은 빛 알갱이가 영혼을 감싸 이어 하늘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로돈은 고개를 올려서 영혼이 올라가는 걸 지켜보았다. 영혼은 로돈과 레자에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고 로돈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지막에 보인 영혼의 표정은 슬픔을 완전히 걷지는 못했지만, 미련은 털어낸 듯 가볍게 웃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편안한 얼굴로 저 무수히 많은 새벽 별들 중 하나가 되었고, 로돈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짧게 기도를 올렸다.
"성스러운 빛 속에서 우리는 하나요... 언젠가 다시 만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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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요?"
로돈은 레아나에게 부활 주문을 걸고 있는 레자에게 물었다.
"왜 레아나는 영혼이 되지 않은거죠? 방금까진 죽은 상태지 않습니까?"
"다 죽어서 시체가 된다고 그게 무조건 영혼으로 나오지는 않아요. 영혼은 원한의 감정이 형체를 갖춘 것이라, 삶에 미련이 남아있거나 억울한 죽음 등을 겪게 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게 보통이죠. 품은 원한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법을 부릴수도 있고 다른 이의 몸에 빙의될 수도 있죠. 그래서 사제나 흑마법사, 주술사가 아닌 자들이 영혼을 잘못 다루면 미쳐버리기도 하고요. 방금 밴시 같은 경우에는, 레아나 양을 남겨둔 것에 대한 미련에다 리치 왕의 힘까지 영향을 받았으니... 이 지역을 안개로 덮어버린 것 정도는 어느정도 납득이 되네요."
이윽고 부활 주문이 끝나자 레자는 한 껏 기지개를 올렸다.
"으그극,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별 일 없으면 이따 아침이 되기 전에 깨어날거예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어느샌가 안개가 정말 말끔하게 사라졌다. 아직 동이 트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경치가 한 눈에 쫙 들어왔다. 로돈은 곤히 자고 있는 듯한 레아나를 자신의 등에 업고 레아나의 오르골과 다른 짐들을 모두 챙겼다.
"그럼 이만 돌아가요."
"알겠습니다."
길이 확 트이니 이번에는 레자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가면서 로돈은 이번에 일어난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일단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레아나에게 비밀로 하는게 맞다고 느꼈다. 마침 목격자도 자신과 레자 뿐이라 유지만 잘 되면 좋겠지만, 문제는 레자가 고블린이라 비밀을 지켜주는 조건으로 막대한 금액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냥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그녀가 살아 숨쉬는 것 만으로도 지금 모든게 너무 감사했기에, 그는 레아나를 업은 상태에서 그대로 호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냈다. 오그리마에서 받은 의뢰비에서 숙박비 등의 여행 경비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건 대충 50 골드 남짓이었다. 그래도 그는 당장 이거라도 먼저 드려야하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레자를 불렀다.
"사제님, 이거 받으세요."
레자는 그대로 로돈이 건넨 돈뭉치를 받아들었다.
"지금 이것 밖에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도, 나중에 레아나가 깨어나면 아까 있었던 일은 함구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돌아가면 제가 좀 더 드릴테니..."
로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자는 돈뭉치를 그의 가방 안에 도로 집어넣고 다시 등을 돌려 앞장 서 걸어갔다. 순간 로돈은 방금 자신이 본 상황을 의심했다.
"사제님...?"
"왜요? 아까 무슨 일 있었나요?"
레자는 그저 해맑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한편 은빛십자군 기지에서는 난리가 났다.
"대장님, 나와보세요! 안개가 걷혔습니다!"
"뭐? 정말이냐?"
맥켈라르는 귀를 의심했지만 이어서 두 눈으로 확인하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웃었다.
"하하하, 빛에게 감사를! 드디어 태양빛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구나! 아, 호드 용사님들은 지금 어디 계시지?"
"지금저기 오십니다!"
맥켈라르는 지금 본인이 맨발에 잠옷차림이라는 것도 잊은 채 헐레벌떡 로돈에게로 달려갔다.
"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모두 그대들 덕분이오!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 내 나중에라도 대영주 님을 뵌다면 당신들의 극찬을 아끼지 않도록 하겠소!"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그 등에 업히신... 블러드 엘프는 상태가 좋지 않은 듯 하오. 지금 좀 쉬어야 하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쉬는 건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하죠. 지금 다들 한시 바삐 돌아가고 싶어할텐데요?"
"아, 그렇지. 자, 다들 기상! 안개가 걷혔으니, 이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다! 빨리 짐 싸라! 빨리!"
맥켈라르의 우렁찬 함성에 그간 잠들어있던 병사들이 모두 깨어났다. 짐을 싸는 건 쉬웠고, 안개 한 점 남아있지 않은 줄드락을 빠져나가는 건 더욱 쉬웠다. 아침 해가 얼굴을 들기 전에 병사들은 일자 대형에 맞춰 저마다 설레는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레아나도 그 즈음에 일어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이.
"으음... 여긴...?"
"깨어나셨습니까?"
레아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가... 왜 지금 여기 업혀 있는 거예요?"
"홀로 구울들의 습격을 받으셨더군요. 겨우 물리치고 그쪽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밴시... 밴시는 어떻게 됬어요?"
"밴시라면... 사제 님이 잘 처리해주셨습니다. 참으로 가엾은 영혼이라 잘 달래주었고 무사히 성불할 수 있었죠. 그 밴시가 안개의 근원이라, 성불하니 안개도 말끔히 걷혔구요."
"그래요...? 물어 볼 게 좀 있었는데... 아쉽네요."
"물어 볼 것이라뇨?"
레아나는 좀 실망했다는 듯이 축 늘어졌다.
"그냥... 그때 그 시끄럽던 비명소리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어요. 그냥요."
로돈은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놀라운 척 연기를 하는게 오히려 더 어색할 것 같았다. 다행히 레아나는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참 신기하죠. 전 엄마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나지, 엄마 목소리는 정말 조금도 기억나지 않거든요? 근데, 왜 그게 엄마 목소리 같이 들렸을까. 아니, 왜 엄마 목소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냥 미련이 남네요."
로돈이 반응하지 않자 레아나는 심통이 나서 그냥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식으로 이어갔다.
"에휴, 어차피 말도 못하고 비명 밖에 못 지르는 불쌍한 밴시에게 뭘 물어보겠어요? 그래도 무사히 성불했다니 다행..."
"레아나."
"네?"
"만약에, 어머니를 다시 뵙는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보고 싶었다던지..."
"다시 만나면요...?"
레아나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냐고 되물을 수 있었지만 웬일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리고는 로돈의 등을 짚고 허리를 쭉 펴면서 대답했다.
"읏차,'딸내미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 흐음, 이 정도? 아니지... 뭐가 좋을까..."
"후훗."
"뭐예요, 나름 진지하게 고민한건데! 그렇게 비웃을거면 대체 왜 물어본거예요?"
"그냥... 뭐랄까..."
로돈은 이제 아침이 되가면서 희미해지는 별들을 보며 나지막히 말했다.
"저기 어딘가에서 보고 계실 그 쪽 어머니에게 언젠가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억!"
레아나는 대뜸 로돈의 뿔을 잡아당기고 소리쳤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죽어서 우리 엄마랑 만났으면 좋겠다는거예요, 뭐예요!"
"아야야야!"
"나는 오래 살거라구요! 당신보다 오래 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천년 만년 영원히! 약속 제대로 못 지키고 떠나버린 우리 엄마 몫까지! 정말 열심히 행복하게 살거라고요. 알겠어요?!"
"아오, 이제 팔팔해진 것 같은데 좀 내려오십쇼! 힘 진짜 장난 아니네!"
"싫어요. 업혀갈건데요? 저 정도도 못 업고 징징거리면 앞으로 어떻게 다니시려구요? 빨리 앞으로 가요. 뒤쳐지겠어요!"
로돈과 레아나는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줄드락을 빠져나가고 회색 구릉지에서 은빛십자군들과 헤어질 때까지. 이어 용의 안식처로 들어서니 레자를 찾는 고룡 사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거, 대신 찾아서 지켜주시니 감사할 따름이군."
"아닙니다. 우연히 동행했을 뿐입니다."
"그럼 갑시다. 전령이여. 노즈도르무 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그러고보니 레자는 아까 줄드락에서부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며 광적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받을걸그랬나받을걸그랬나받을걸그랬나받을걸그랬나받을걸그랬나받을걸그랬나받을걸그랬나...'
"저...사제님?"
"예에에?"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요.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뵙죠. 안쉬의 영광이 함께하길."
로돈은 환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건넸다. 레자는 직감했다. 돈을 달라고 하려면 지금뿐이라는 걸. 그녀의 본심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막 뱉기 시작 할 즈음이었다.
"저도 매우 감사했습니다! 빛의 가호가 함께하길!"
레자는 굉장히 딱딱한 어투로 급하게 악수를 받고 그대로 등을 돌려 황급히 고룡 사제들과 함께 떠났다. 그 누구도 그녀가 마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세상에는 저 분 같은 고블린도 계시는군요. 당신처럼 말입니다."
"흥, 웃기지 마요. 제가 무슨 별종도 아니고..."
"자 움직입시다. 드라노쉬아르 요새로 가려면 갈 길이 머니까요."
줄드락을 빠져나가는 거대한 행렬에서 남은 건 로돈과 레아나 단 둘 뿐이었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레아나는 간만에 미소를 지었다.
"로돈."
"왜 그러시죠?"
"전 애초에 당신을 믿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만났던 자들처럼, 당신도 똑같은 줄 알았거든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절 험담하는 걸 그대로 들었어요. 우리가 어둠에 틈에서 만났을 때."
로돈은 순간 뜨끔했다. 하지만 레아나는 개의치 않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그때 당신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어요. 딱 제가 기대한 그대로였으니까. 대신 대영주 님을 의심했죠. 진정으로 평화와 화합을 바라는 성기사가 있고, 그 자라면 저의 굳게 닫은 마음의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고 하셨거든요. 근데 원래 블러드 엘프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무슨 평화와 화합인지. 화도 안 나고 그냥 헛웃음만 나왔죠. 그렇게 속았다고 생각했던 와중에 저는 평소에도 다름 없던 일을 겪었고 그냥 실컷 욕하라는 식으로 있었는데, 당신이 저에게 와줬어요. 그렇게 싫어한다고 했으면 무시했을 법도 했는데."
"아..."
로돈은 레아나와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기껏 도와줬더니 쌀쌀맞게 굴었던.
"그 때, 당장 고마웠던 것도 있었지만 당신의 진심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나왔던거예요. 그건 정말 죄송했어요."
"아, 아닙니다. 다 지난 일인데요. 뭘."
"그리고 비행장에서 만나도 될 법 했을텐데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와서 끝까지 기다려준 것도 당신이 처음이었고, 가는 길에 먼저 말을 걸어준 것도 당신이 처음이었고, 그냥 좀 아플때 등 두드려줬던 것도 처음이었고, 저를 위해서 그렇게 맛있는 식사를 차려준 것도 처음이었어요. 게다가 저와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 까지 비슷한 것도 당신이 처음이었구요. 모종의 사건으로 가족을 잃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아픔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 까지."
로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기가 해주었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고 이마저도 처음이라고?
"정말, 그 누구한테도 하지 않았던 얘기까지 다 털어놓게 만들 줄이야... 게다가 안 좋은 기억을 털어놓는게 후련하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네요."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신겁니까?"
"엊그제 말한 그대로예요. 전 항상 혼자였고, 거기에 익숙해졌죠. 그래서 배려받은 적도 없었고, 배려를 한 적도 없었던거죠. 이번에 당신을 통해서 배웠네요. 게다가... 이렇게 듬직하고 멋진 친구도 만들었구요. 안 그래요?"
레아나는 로돈의 어깨갑주를 탕탕 치면서 말했다. 그 말에 로돈은 살짝 들떠서 대답했다.
"후훗, 아닙니다. 그나저나... 곧 죽을 것 같이 이야기하십니다?"
"뭐라구요?"
그녀는 그대로 다시 로돈의 뿔을 잡아당겼다.
"아까 제가 했던 말 그대로 다시 듣고 싶어요? 예!?"
"아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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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태양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는 어느새 그들을 드라노쉬아르 요새를 거쳐 오그리마로 도착하게 만들었다.
"이제 작별이네요. 전 이대로 빛의 성소로 돌아갈 거예요. 대영주 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알겠습니다. 대영주 님께 안부 잘 전해주세요."
"그럼."
레아나는 살짝 목례와 함께 로돈에게서 등을 돌렸다. 로돈은 곧바로 등을 돌린 레아나를 불렀다.
"레아나?"
"네?"
"대지모신의 가호와, 안쉬의 영광이 함께하길."
그녀는 로돈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 이어 흐뭇하게 웃으며 터프하게 그의 손을 턱 잡았다.
"Anar'alah belore, Al diel shala."
레아나는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그녀를 배웅하는 로돈도 덩달아 흐뭇하게 웃었다.
둘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나는 듯 했다. 혹시 모를까. 앞으로 둘은 다시 마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얼라이언스와 호드 처럼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이해해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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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제가 소설 쓴다고썼던 것들 중에서 완결까지 제대로 써 본건 이게 처음이군요.
초등학교 중학교때까진 만화가가 꿈이었는데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 저주받은 손이라 작가로 타협을 봤죠.
그때 아버지가 작가 된다는 녀석이 책도 안 읽고 허구한 날 게임만 해서 무슨 작가 되겠냐고 하셨는데
아들이 알파벳 떼기도 전에 저그 테란 프로토스 쇼미더머니를 알려주시고
리분 때는 사신 칭호까지 따신 아버지셨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습니다.
(전 불성 때 시작만 하고 제대로 한건 드군부터)
확실히 그때 제 필력은 절망적이었거든요. 소재 찾을 줄만 알고 제대로 써놓은 건 없으니...
그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느끼지만 그냥 쓰고싶은대로 써보자는 식으로 휘갈긴 걸
다들 재밌다고 해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레아나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이 너무 신파극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애초에 그 부분을 시작으로 살을 붙인 이야기니 과감하게 넣기로 했습니다.
후기 쓰는 와중에도 계속 퇴고를 했지만 잘 쓰여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욕심 같아선 이게 만화로 그려진 걸 보고 싶지만... 가능할련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스무살이라...
아무튼 지금까지 부족한 소설 읽어주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재 찾고 시간 되면 다른 작품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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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돈! 아직 거기 있어요?!"
레아나는 저 멀리 지나가는 언더시티행 비행선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방금 여기서 스튜 한 그릇 사먹었는데 엄청 맛 없어요! 그냥 다 때려치고 저 따라와서 밥 좀 해줘요! 로돈!"
레아나는 계속 소리치면서 멀어지고 있었다. 로돈의 대답은 듣지 못한 채. 물론 오그리마 길거리 한복판에서 소리지른다 한들 저 멀리 멀어져가는 비행선에 닿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로돈은 대답 대신 레아나를 향해 미소를 한번 지어주었다.
"하하, 못말려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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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 18.06.03 20: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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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18.06.05 18: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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쌉벌레
넵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8.06.06 16:4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