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다
- 리코, 어린왕자(하편)
- 에필로그 : hom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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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날 어린왕자를 다시 읽기로 마음 먹었다.
어릴 적에 자주 읽었었고 표지 안쪽에 직접 크레용으로 낙서를 한 추억도 있어서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책이었다.
'너는 누구지? 넌 참 예쁘구나......'
'난 여우야.'
'이리 와서 나와 함께 놀아. 난 정말로 슬프단다......'
'난 너와 함께 놀 수 없어.'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으니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그리운 감각.
그 감각 때문인지 꽤 늦은 시각임에도 요우짱과 나누었던 이야기 속 어린왕자의 챕터를 몇 번이고 정독했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이란다.'
'하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
그리고 꿈을 꾸었다.
왜인지 꿈의 배경은 어린왕자와 같은 사막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척 이국적인 곳이네. 일단 좀 걸어볼까.)
친구가 되어 줄 장미나 여우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 홀로 모래벌판을 계속 걸어나간다.
'사박사박'
태양을 등지고 외로움과 싸우며 걷는 길.
그렇게 얼마 쯤을 걸은걸까.
전방에 커다란 음영의 형태가 나타났다.
무언가를 기대하며 다가가자, 점차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커다란 언덕이 드러난다.
(저 위에 올라가면 이 근방이 다 보이려나.)
각오를 다지고 등교길에 있는 언덕과 닮은 그 경사를 오르기로 했다.
왠지 전학 온 첫 날을 떠올리게 하는 비탈길.
천천히 기어가듯 오르니 첫 날의 두려움이 흘러들어온다.
('새로운 친구들 사귈 수 있을까나' 했었지.)
그런 감정들이 다시 찾아온 탓인지, 정상이 생각보다 높았던 탓인지
중간중간 쉬어가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 꼭대기에 도달했다.
겨우 도착한 정상에서, 이마에 땀을 훔쳐내고 넘겨다 본 언덕 너머.
거기에는 놀랍게도 Aqours의 모두가 모여서 원을 그리는 형태로 신곡의 안무를 추고 있었다.
(혼자라서 점점 무서워져 가고 있었는데 다행이네. 일단 저기까지만 가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파른 언덕을 다시 내려가기 위해 아래 쪽으로 고개를 향하니.
반무를 이어나가는 멤버들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왔다.
평소의 연습복이 아닌, 교복을 입은 채 저마다 짓고 있는 진지한 표정.
어떠한 음악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하나의 협주를 연주하듯.
존재하지 않는 리듬에 맞추어 모래벌판 위를 뛰노는 그 광경은.
어딘가 즐거워 보이기도 하면서
신에게 바치는 의식처럼 엄숙해서.
...
갑자기 좀처럼 가까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려가려는 발걸음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나 같은 게 저기 들어가도 되는 걸까.)
이윽고 알 수 없이 슬퍼진 내가 체념한 채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을 때,
원 안에서 홀로 춤을 추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던 요시코짱이 밖에 서 있던 이쪽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요시코짱?)
어떠한 메세지를 전하려는 그 열띤 얼굴을 그저 바라보았다.
평상시처럼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짓는 자신있는 낯빛이 아닌,
그렇다고 타천 컨셉으로 Aqours와 잠깐 활동 후 합류를 망설이던 저녁 노을의 슬픈 얼굴색도 아닌.
진지한 표정의 그녀가 이 곳까지 목소리를 전하려 포기하지 않고 외친다.
그러나 나는 들리지 않음에도, 귀기울여 듣기 위해 그 쪽으로 다가가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리코쨩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 않아?'
문득 떠오르는 요우짱과의 대화.
그리고 우물쭈물한 내 태도에 차츰 변해가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둘이서만 있을 때 나누는 대화에서의 그것과 비슷해 보여서
미안한 감정을 깨달아갈 때 즈음,
꿈에서 깨었다.
2
그런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요우짱과의 점심시간 일 때문일까.
정신이 들고보니 일주일 내내 그 아이를 눈으로 좇게 되었다.
「원, 투, 쓰리, 포!」
일주일이라 해도 내가 그녀를 볼 수 있는 주된 시간은 역시 아이돌연습을 할 때.
다행히도 학년별 연습이 진행되고 있는 요즘은 자연스럽게 관찰하기가 편했다.
카난씨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다시 돌아본 그녀는
평소의 들뜬 행동이나 어쩐지 가볍게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매번 내 시선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항상 진지하게 댄스에 임하고 있었고
그런 점은 여지껏 보지 못했던, 아니 보지 않아왔던 부분이어서 평범하게 놀랐다.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거기에 사람의 감정적인 부분을 잘 캐치해내는,
보기와 다르게 섬세한 요우짱과의 대화가 계속 떠올라서
여태껏 '츠시마 요시코' 라는 인간을 넘겨짚어 판단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지각에.
「수고했어. 그럼 잠시 쉬었다 하자.」
나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는 것 같은 그 아이를.
'타천사'라는 가면 뒤 숨겨진 그 아이에 대한 것을,
이제는 나 역시도 알고 싶게 되었다.
「휴우. 뜨거웠다.」
「요시코짱, 수고했어유.」
이전에는 그저 중2병의 하급생.
Aqours 합류 이후로는 평범하지 않은 자신을 그려가는 약간 특이한 후배.
그 정도의 인식으로 충분했었고.
부끄러운 첫만남도 있어서 깊게 관여되지 않도록 해왔지만.
이렇게 주욱 그녀를 지켜보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뭐야, 즈라마루. 타천사에게는 물 같은 건 필요없다구.」
「다이야씨로부터의 지령이에유. '수분보충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연습할 수 없습니다!'」
「...그거 성대모사?」
알고보면 노래할 때 굉장히 멋진 저음을 내기도 한다던가.
가위바위보를 할 때 남들과 다른 특이한 가위 손모양을 한다던가.
「그럼 지는 루비짱이랑 부실에 수건을 가지러 내려가니까, 요시코짱은 모두에게 물통을 건내주는 걸 잊지말아유.」
「잠깐, 떠맡기는거냐!」
누마즈에 계속 살고 있는데도 지역 특산인 귤을 굉장히 싫어한다던가.
자신이 시골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도시에 대해서 자격지심이 있다던가.
하는 것들을 저절로 알게되어가는 사이에 그 아이가 더욱더 가깝게 느껴져서.
「...저, 리코선배? 듣고 있어?」
「응, 아? 미, 미안.」
진짜로 가까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니야? 얼굴이 빨개.」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래도 몸이 안좋은거라면 너무 무리하지마.」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통을 건네주는 그녀를 쳐다봤다.
경단에 깃털을 꽂은 장난스러운 헤어스타일과 땀으로 달라 붙은 귀밑머리.
자색의 가까운 투명한 눈동자와 높고 예쁜 콧날.
상기된 뺨을 지나 길고 얇은 입술까지.
모두 예전에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았던 그녀의 일면.
꾸미지 않은 그 자연스러움이 좋아 나도 모르게 머릿 속에서 스케치를 해나간다.
(채색할 때는 전체적으로 푸른 계열의 색을 조금 섞어서 한다면 좋겠네. 그리고 입가에 자꾸 음영이 지는데 이걸.)
상상만으로 마음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와중에,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듯 옴짝달싹 하고 있는 그녀의 입이 신경쓰여 잠겨있던 감상에서 깨어났다.
그림자가 져있다고 생각했던 요시코짱의 입은,
마치 뭔가를 덧붙여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고민하는 것처럼
혹은 하려는 걸 주저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건.....그동안 내가 완고하게 굴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여기선 먼저 얘기를 이어나가지 않으면.)
하지만 그런 나 역시도 그녀와 같이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만 어버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단순히 요시코짱이 다가와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인지.
이제와서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는 겁쟁이 같은 성격이 나온 것인지.
아아, 나도 참.
이럴 때는 어두운 자신이 항상 고개를 내민다.
부끄럼쟁이에 긴장을 자주 하는 나.
그래도 스쿨아이돌을 하며 바뀌기로 결심했으니까.
힘을 내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내며 시야에 들어오는 그녀를 담아내는 특징들과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 단어들로 어떻게든 말을 이었다.
「저기, 요시코짱. 그 머리 위에 깃털 나한테 주지 않을래?」
...?
어, 내가 지금 뭐라고 한거야?
「에?」
「엣?」
용기를 내어 겨우 꺼낸 말인데, 단숨에 다시 이상한 사람으로 확정된 것이 틀림없었다.
3
「저질러 버렸다.」
창피해, 정말.
몸부림치다 캔버스에 머리를 박았다.
이젤 앞에 앉아, 말라붙어 있는 테레빈유 냄새에 조금 차분해지기를 기다리며 방금 전에 상황을 다시 떠올려본다.
옥상에서 진지하게 연습하는 모양을 관찰했던, 피사체 요시코짱과 갑작스럽게 시작된 대화. '뿅' 하고 튀어 나온 말실수.
그 실수에 상대방은 '쓰던 거라도 괜찮다면 줄게.'하고 평범하게 반응했지만,
정작 질문을 했던 자신은 연습이 끝나기까지의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그렇게 도쿄전학생의 스마트한 이미지는 이미 온데간데 없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미술실에 도망쳐오고 나서야 겨우
부끄럼쟁이 사쿠라우치 리코의 괴짜 이미지만이 남았다는 것이 사태의 진실이라고 할까.
(따지고 보면 첫만남에서부터 아웃이었지.)
그래도 이제 막 친해져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참이었는데, 스스로 기회를 차버린 꼴이었다.
더 이상 평범한 얼굴로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도쿄로 조용히 돌아가는 건 어떨까하는 부정적인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리고.
(...받아오긴 했는데.)
구부렸던 몸을 일으켜 앞머리를 정돈하고 있으려니 이젤에 놓아두었던 검은색 깃털이 눈에 띄었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쳐왔던 자신의 손보다 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전해준, '츠시마 요시코'의 상징.
검지로 집어 손바닥에서 빙글하고 굴리니, 말을 주저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돌려주면서 얘기를 걸어볼까?)
가끔 심하게 풀이 죽어있긴 하지만, 그래도 항상 당당하게 표현하고 드러냈던 것과 달리
어느새 자신과 마주할 때마다 짓게 된 그녀답지 않은 모습에.
받아온 것을 다시 돌려줄 만한 배짱도 없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이럴 때 치카짱처럼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소극적인 자신은 무언가에 이유를 부여하지 않으면 움직이기 어려운 것 같았다.
(결국 난 뭐가 하고 싶은 거지.)
원하는 건 단지 그녀가 내 앞에서 제 모습을 찾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과는 정반대로 당당한 그녀의 성격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와의 관계일까.
...
「역시 여기있었구나.」
뒤에서 불쑥 들려온 귤색의 목소리에, 깊게 빠져있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치카쨩?」
「몸은 좀 괜찮아?」
터벅터벅 걸어온 치카쨩이 이마와 뺨을 더듬는다.
「으응, 몸? 아무렇지도 않은 걸?」
「다행이다~ 요시코짱이 걱정했다구. '리코선배가 어딘지 좀...' 하면서 챙겨달라구 했어.」
「요시코짱이?」
치카짱의 입에서 고민 속 인물의 이름이 나오자, 앉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설명을 재촉하는 눈빛을 보낸다.
「'멍하게 있고 얼굴이 빨간 게 역시 감기일지도 몰라요.' 라고 하던걸? 그래서 리코짱을 도우러 내가 온거야.」
아무래도 요시코짱은 갑자기 깃털을 달라고 했던 것보다 이쪽의 몸상태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역시.
요시코짱이 그런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일일이 소심하게 신경쓸 필요는 없었구나.
「그러니까 이거!」
「에...」
「감기에는 역시 귤이라구. 먹어보면 감기도 '에귤귤'하고 물러난다구?」
「...으....응...고마워.」
「아, 지금꺼 이해못했구나? 방금 껀 '에구구'하는 감탄사에 '귤'을 더해 만들어진 합성어로...」
그래.
부끄러운 모습이라던가 그런 체면치레는 이제 됐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현실이, 책이, 꿈이 알려줬으니까.
「재미가 없어도 깃털만 주욱 쳐다보는 건 좀 실례 아니야~? 으응? 리코쨩~」
그러니까.
움직여야 하는 이유도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지 않아.
그녀로부터 건네받은 것을, 나만의 형태로 다시 돌려줄 때까지.
그렇게 서로, 길들임에 이르기까지.
이제 조금의 기다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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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코와 리코는 어떻게 친해졌을까.
어느 순간부터 욧짱과 리리라는 칭호를 썼을까.
그 계기는 역시 길티키스의 유닛활동일까.
아니면 두 사람이 친해져서 길티키스로 같이 활동하게 된 것일까.
라는 부분이 제게 있어서 늘 궁금한 점이었습니다
비교적 소극적이고 차분한 도시출신 전학생과
존재감을 감출 수 없는 중2병의 시골학생
서로 많이 다른 두 사람이 처음으로 이어진 계기
이 SS에서는 그 부분을 밝히려는데 주목하다보니 아무래도 단 부분이 많이 빠져버리고 말았네요
하지만 요하리리의 당분은 다른 이야기에서 또 보충하려고 합니다ㅋ
남은 것은 이제 에필로그
에필로그는 3학년 세 사람의 'Episode 0'처럼 대화문으로 작성했습니다
과정에 대한 후기는 에필로그에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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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오토노키자카 출신은 다릅니다ㅋ | 17.06.24 00:5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