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출저: https://wjdrb823.blog.me/221526096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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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중독
Workaholic
이렇게 걷다 보니 집에 있을 때보다 오늘 하루가 더더욱 을씨년스럽다고 느껴졌다. 아마 햇빛 없는 하늘이 날씨에 대한 내 감상에 한몫하는 듯했다. 나는 지난여름에 이런 날들이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내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른 이들이 그곳을 차지한 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보다 늦게 왔으니 바보라도 그 이유를 알 텐데. 나는 할 수 없이 그곳을 벗어나 좀 떨어져 있는 도로에 차를 세우고, 옆 좌석에 있던 짐들을 챙겨 내렸다.
날씨에 관해서 실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건물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입구의 투명색 유리문은 흐린 하늘과 대조되어서 마치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처럼 보였다.
나는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겨준 것은 안내원의 농인지 진심인지 모를 인사였다.
“글쎄다.”
나는 문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방금 뭐라 하셨어요?”
“신경 쓰지 마. 그저 혼잣말이었으니깐.”
그녀는 내 대답을 개의치 않는지, 내가 자신에게 다가가는 동안 본인의 머리색만큼 붉은 입술로 미소를 띠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은 아침이야, 에리얼. 물어볼 게 있는데, 내가 오기 전까지 나 찾던 사람 있었어? 여기서든 외부에서든지 말이야.”
“아직까지는 없는데요.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으신가요?”
난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으나, 잠시 동안 내 대답을 곱씹어 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더 하지. 오늘 하루 동안 누군가 나와 연락하고 싶다고 한다면 힘들다고 말해. 이유는 네가 알아서 둘러대면 좋겠어, 알겠지?”
나는 알겠다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등 뒤에서 콧노래가 들려왔다.
내가 향한 곳은 현재는 비워진 사무실이었다. 겉으로 봐선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끊긴 것치곤 청결해 보였다. 여기는 갑작스럽게 떠나야 했던 전 주인들이 다시 돌아올 때를 위해 그대로 방치됐는데,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고, 이 사무실도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다. 적어도 나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그랬다. 나는 아무 자리나 골라 그곳에 앉았다. 내가 짐 속에 있던 샌드위치를 꺼내들자 뒤에서 누군가가 그것을 낚아채며 훼방을 놓았다.
“난 네가 어째서 이런 거 좋아하는지 모르겠더라. 싸구려 냉동식품보다 나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가 있지도 않는 걱정을 늘어놓는 동안 난 그에게서 샌드위치를 되찾아 왔다.
“안나가 나에게 준거야.”
그는 진정하라는 듯 양 자신의 두 손을 들어 올렸지만 얼굴의 웃음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야, 피츠허버트? 여긴 내가 먼저 왔으니 낮잠 잘 거라면 다른 곳으로 가.”
“멋대로 단정 짓지 마. 그저 우연히 너를 발견해 따라온 거니깐.”
그는 고개를 외로 꼬면서 대답했는데, 아마 그게 멋스럽다고 생각했나 보다.
“뭐, 굳이 말하자면 네가 이런 인적 드문 곳으로 향하길래 호기심으로 따라온 것도 있지만, 실은 내 개인적인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 왔거든.”
호의? 지금 이 새끼가 호의라고 했나? 유진 피츠허버트, 사람들에게는 항상 자신 쪽으로 판을 기울이거나, 자기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는 이기적인 속물로 낙인찍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 그러니 ‘호의’는 그의 사전에서는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이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해?
처음엔 난 그에게 꺼지라고 말할 셈이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결국 입만 아플 거 같아 할 수 없이 참기로 했다.
“금방 끝나니깐 인상 좀 펴.”
이제서야 알아차렸지만 난 그의 손에 무언가 들러져 있는 걸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 속에서 사람 손바닥의 절반만 한 갈색의 물건을 꺼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건 작은 과자였다.
“요 며칠 전에 예전에 같이 지냈던 친구 2명이랑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지. 우리 셋은 꽤 이른 시간 때부터 마셨기 때문에 일몰 전부터 이미 술기운이 올라왔었는데 아마 분위기 때문에 평소보다 쉽게 취해버렸던 것 같아.”
그는 잠시 자신의 뒷머리를 긁으며 앞으로의 대화에 쓸 적절한 문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런 상태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길거리에 웬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었지. 마침 차량의 뒷문이 열려 있길래, 우리들은 호기심에 그 안을 들여다봤어. 보아하니 어느 식품 업체의 차량 같던데, 차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더라. 사실 그렇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 내 말은 운전사가 잠시 볼 일을 보러 자리를 비웠거나, 문을 잠그는 걸 깜박했다거나, 아니면 우리들로썬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업 절차인지 누가 알겠어? 원래라면 우리들은 이 일에 신경 끄고 우리 갈 길 갔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의 우리들은 알코올 때문에 사리분별을 못 했다는 거야.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먼저 말을 꺼낸 건 친구 두 명 중 하나였어.
‘이런 골 빈 놈이 두 다리 뻗고 자는 꼴은 못 봐주겠다.’
······뭐, 그런 비슷한 말이었어. 그 말이 떨어지자 우리 셋은 트럭 위에 올라타 각자의 눈에 먼저 들어온 물건들을 하나씩 챙겨 달아나기 시작했지. 나중에 지쳐 멈췄을 때야 처음으로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내가 챙긴 것은 ······어.”
“행운 과자.”
“아, 그래. 바로 행운 과자였지.”
그는 정열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봉투 안에는 한 달 동안은 꼬박 매일 읽어야만 동날 거 같은 장난 점괘 과자들만 가득 차 있더군. 나는 충일감이 생겨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웃었지. 그런데 나중에 제정신 차려보니 내가 한 행동이 전혀 뿌듯하지도, 웃기지도 않더라. 이런 거나 훔쳤다고 경찰 나리들께서 소매 걷고 분주히 뛰어다니진 않겠지만, 세상일이란 게 모르잖아?”
“그런데 아직까지 버리지도 않고 이렇게 버젓이 가지고 나타났으니, 이것들을 처리할 겸 남들에게 떠넘기는 게 너에게 있어서는 호의를 베푼다는 거냐?”
“딩동댕, 정답입니다! 진실의 문을 연 자, 그는 바로 한스 웨스터가드!”
결국 참고 있었던 한숨이 나와 버렸다. 도대체 이 인간은 뭐가 문제지? 나는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 중 하나가 이 자식 헛소리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피츠허버트. 왜 내가 너와 너의 공범들의 덜 자란 정신 연령 때문에 생긴 그 허무맹랑한 종이 쪼가리나 든 과자를 받아야 하는데?”
짜증 섞인 내 대답에 그는 헛웃음을 짓고서 자신의 왼손에 들려 있던 과자를 으스러뜨린 후 손을 털었다.
“아, 그러셔? 요즘 잘 나간다 이거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가 내 손을 가리켰다.
“그거 애인이 해준 거라며?”
“내 집 사람은 내가 이런 부탁할 때마다 프라이팬 들고 소리 나 지르는데, ‘염병할! 야, 유진, 너 오늘 하루 종일 한 거라곤 그냥 뒹굴뒹굴한 게 다잖아. 그럼 배 채우는 건 스스로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이야.”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마침내 그가 파티션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 생각과는 달리 웨스터가드 씨한테는 골칫거리 같은 건 없나 보네. 항상 운이 따른다니깐. 다른 사람들은 그걸 찾으러 절도까지 저지르는데 말이야. 뭐, 그렇다고 하루 종일 여기 틀어박혀 있지는 말아라.”
피츠허버트가 떠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그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곧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 들자 그 혼자만 참가한 대화를 돌이켜보았다. 허풍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술 취한 인간의 모험과 자기 부탁 안 들어준다는 부인 이야기. 솔직히 후자는 사실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이렇게 쉽게 물러날 거라면 굳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다. 그의 의도에 대해 고민해봤지만 이내 관뒀다. 애초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내 알 바가 아니었으니깐.
피츠허버트는 틀린 게 두 가지 있었다. 첫째, 난 입에도 대지 않은 샌드위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난 결코 이런 걸 부탁한 적 없었다. 둘째, 나한테도 큰 문제가 있다. 그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착각하든 간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깐. 만약 문젯거리가 없었다면 평소에는 볼일 없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댄 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안나를 떠올렸다.
난 황급히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하자 난 그곳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래봤자 그리 큰 위안이 되진 않았지만. 2층의 내 방은 작은 장소였다. 그저 소형 책장 1개랑 책상, 의자, 사람 1명만 들어가 있어도 여분의 공간이 없는 곳이다. 문은 여전히 내가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위치해 있었고, 그 문 바로 뒤쪽에 있는 사람도 그만큼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난 결코 팔을 문을 향해 뻗지 않았다. 그리고 문고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겨진 문고리는 그저 위아래 반복적으로 움직여질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했다. 곧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내가 기억 못 하는 옛날부터 어젯밤까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들었던 말이 들려왔다.
“한스, 제발 문 좀 열어줘요!”
안나가 울면서 외쳤다. 그러나 난 결코 문을 열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이번에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예전처럼 그저 며칠 동안만 서로를 죽은 사람 취급을 하다 언젠가 다시 마음을 열기 시작할 거라고.
그러나 내가 틀렸었다.
“한스, 미안해요.”
오늘 아침 안나가 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자, 지금까지 결코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수없는 나의 외면에 지쳐버린 그녀는 결국 죄인은 내가 아닌 자신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기로 한 거다. 난 그런 말을 한 안나를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난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녀한테서 등을 돌려 도망쳤다, 지금까지 내가 항상 문을 닫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난 끝까지 안나를 외면해버린 거다.
다시 눈을 떴다. 집을 나온 순간부터 왜 그랬었는지 계속 자문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고 제자리걸음으로 끝나버렸다. 이제 와서 다른 기회가 있을리가······.
뭐지? 뭔가 이상한데. 갑작스러운 위화감이 내 머릿속의 고민들을 물리쳤다. 대신 그것이 대신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는데 난 곧 그 위화감이 어디서 오는 건지 알아차렸다. 책상. 책상 위가 처음에 왔었을 때랑 틀렸다. 분명히 원래는 없었던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난 그것을 잡았는데, 그게 빵가루가 묻은 흰색의 종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자 기억이 났다, 피츠허버트의 왼손에 들려져 있었던 행운 과자가, 그리고 그가 그걸 으스러뜨린 후 손을 털었던걸. 그는 일부러 이걸 주기 위해 나를 따라 왔었지만, 난 그의 장단에 맞춰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에 대한 내 날선 태도로 인해 현재 이게 내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피츠허버트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그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 바보 같은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 때문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피츠허버트의 행운 과자를 얻었다고? 그래서, 뭐? 애초에 관심 없었던 일이잖아. 난 여전히 그의 장난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나로서는 그저 이 종이 쪼가리를 읽지 않고, 이 사무실 어딘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찢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다. 내 속마음과 달리 작은 흰색 종이는 여전히 내 손가락 사이에 쥐어져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에 대한 내 열망이 강해지고 있었다. 한심스럽게도 난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받아들였다. 난 안나와 나,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그것도 이 종이의 문구에서. 기왕 이렇게 된 거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말이다. 내가 결심을 굳히자 단 하나의 생각만이 남겨졌다.
‘맙소사, 내가 정신이 완전히 나갔나 봐.’
난 손가락에 있던 흰 종이를 완전히 펼쳐 보았다.
‘후회 속에서의 방황. 그대는 남은 한평생을 그렇게 보낼게 될 것이오. 그러나 진실된 용서를 바란다면 문을 여십시오.’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 글에 겹쳐 들렸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