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아르실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나보다 뛰는 속도도 느리고 힘도 약한 꼬맹이.
그런 녀석이 대가문의 경비를 뚫고 노예를 탈출시키고 은빛 늑대 기사단 앞에 섰다?
핸슨은 내 심정을 이해하듯 피식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죠, 저와 기사단원들은 그녀들을 곧장 포위했습니다, 저항하면 바로 죽일 기세로요.”
“노예 탈출을 도운 이는 중죄니까요.”
“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죠, 저와 기사단원들은 결국 아르실 그 아이한테 손도 못대고 노예들도 그냥 놓아줬습니다.”
“네?”
뭔가 중간에 이야기가 상당히 빠진 느낌이다.
일반 용병 단체도 아니고 무려 황제의 비밀 기사단이다.
기사단원 하나가 웬만한 용병단체를 박살낼 무력을 가진 집단이 어린 꼬마 하나를 어쩌지 못했다고?
심지어 아르실과 쫓았던 노예들도 건들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농담하지 말라며 화라도 내고 싶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난 이마를 매만지며 핸슨에게 물었다.
“아르실이 대체 뭘했길래?”
“허허, 알고 계셨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공주님께선 아직 젊은 손님에겐 비밀로 하고 싶은가 보군요.”
“비밀이라니요.”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금은 안 되겠군요.”
핸슨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핸슨의 옆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아르실이 있었다.
아르실은 볼을 부풀리며 내게 다짜고짜 화를 냈다.
“야! 왜 안 쫓아왔어?”
“…….”
“뭐야, 날 또 무시하는 거야? 진짜 너무하잖아!”
난 입을 다문 채 아르실을 응시했다.
핸슨의 말이 진짜일까.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지만, 핸슨이 한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내 눈앞에서 볼을 부풀리는 토끼 같은 녀석이 기사단으로부터 노예들을 지켜냈다.
오래 생각하기 힘들었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아르실의 볼을 잡아당겼다.
“무시할만해서 했다 왜?”
“우씨! 이게 몸이 다 나았다고 나한테 막 대하네, 치료해준 내가 고맙지도 않냐?”
“고맙다고 했잖아.”
“그게 다야? 좀 더 성의를 보이란 말이야!”
떼까지 쓰며 징징거리는 아르실을 보며 난 확신했다.
이런 일은 단순하게 생각하자.
핸슨의 말은 허구였다.
장난으로 날 놀리려고 한 말이 틀림없다.
저런 바보 같은 아르실 녀석이 그런 일을 해냈을 리가 없다.
‘나도 여기 있으면서 너무 긴장이 풀렸나, 이런 말을 믿으려 했다니,’
“우윽, 그만 잡아당겨! 계속 그러면 나도 할 거야!”
“으윽? 이 꼬맹이가?”
“꼬맹이는 너지!”
아르실의 볼을 잡아당기자 녀석도 응수하듯 내 볼을 잡아당겼다.
서로의 볼이 늘어졌다.
이건 자존심 싸움이다.
누구도 한 치의 양보 없이 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나와 아르실의 팽팽한 신경전은 서로의 볼이 빨갛게 부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마침내 산장에서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 미르는 산장의 두 주인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허허, 뭘 고맙기야.”
“흥, 빨리 가버려.”
핸슨과 아르실의 반응은 상반되었지만, 이젠 신경쓰지 않는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볼일은 없겠지.
그저 기억 속에서 존재는 할 것이다.
날 사람으로 대해줬던 미르외의 두 사람으로 말이다.
미르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빨리 자 가온.”
“알겠어, 미르, 너도 잘 자.”
“응.”
미르는 환한 미소와 함께 날 침대에 눕혔다.
미르는 침대에 누운 내 옆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미르는 안 자?”
“가온 너 먼저 자면 나도 잘 거야.”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가서 자.”
“후후, 나한텐 애로 보이는 걸.”
미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말했다.
그녀의 손길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내게 부모님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난 정말 미르를 믿고 있구나.
삶의 의미가 되어준 그녀, 난 그녀를 누구보다도 믿는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며 미르와 눈을 마주쳤다.
“미르, 고마워, 이런 날 믿어줘서.”
“어머, 얘는 오글거리게 갑자기 왜 이래.”
“하하, 그러게 말이야, 피곤해서 그런가봐.”
“……피곤해서 그런 거 맞아, 어서 편히 자.”
“응.”
요 며칠간 어두웠던 그녀가 저렇게 환히 웃는다.
행복하다, 앞으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아도 그녀와 함께라면 괜찮다.
내 눈은 천천히 감겼다.
날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난 깊은 심연의 밑바닥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꿨다.
꿈속에서 미르는 웃고 있었다.
잠들기 전 내게 짓던 미소와 똑같은 미소였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입이 간질 간질거렸다.
웃고 싶지만, 차마 미소가 지어지지가 않는다.
웃지 못하는 날 보며 미르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 가온, 내가 부족해서.”
“무슨 말이야?”
“미안, 정말 미안해.”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다, 그녀가 내게 사과할 일 따윈 없다.
손발이 떨리고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진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가 내게서 멀어져간다.
안 돼, 그녀를 멈추게 해야한다.
난 이를 악문 채 외쳤다.
“……!”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달려가 보려고 해도 몸조차 움직이지가 않는다.
쇠사슬에 꽁꽁 묶인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몸에 억지로 힘을 준다.
힘을 줄수록 몸에 가해지는 압박이 강해진다.
더 힘을 주었다간 혈관이 터져나갈지도 모른다.
‘상관없어.’
난 입술을 깨물었다.
이까짓 구속 따위 몸이 반쯤 박살나도 괜찮다, 그녀를, 그녀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우드득.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내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좀만 더, 멀어져가는 그녀는 아직 내 시야에 있다.
구속만 풀면 당장 달려가 그녀를…….
“그만 해, 가온 이제 푹 쉬어.”
어디선가 달콤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꿀보다 달콤하고 꽃보다 향기로운 목소리.
꽃에 홀린 벌처럼 그 목소리에 내 몸에 힘이 자연스레 풀렸다.
정말 쉬어도 될까.
“그래, 뭐 하러 아프게 힘을 써,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다치는 건 상관없어.
“다치는 건 상관없다고? 미르가 싫어할 텐데.”
아, 그래 그녀는 날 항상 걱정하지.
무리하게 힘을 줘서 다치면 싫어할 거야.
“그래, 어차피 이건 꿈이야, 자고나면 기억도 못할 그런 꿈.”
‘꿈, 그래 이건 꿈이었지.’
달콤한 목소리에 내 정신은 판단력을 잃었다.
미르가 슬픈 모습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도.
내게 등 돌린 채 가버리는 것도 전부 꿈이다.
흐릿하던 목소리는 점점 더 확실해졌다.
“어서 다시 자, 미르를 위해서 그리고 가온 널 위해서.”
‘그래, 나와 미르를 위해서.’
혼미한 내 의식 속 누군가 내 이마를 쓰다듬는다.
따뜻하지만, 내 손보다 작은 손바닥이다.
미르처럼 편안하지는 않아도 날 생각해주는 게 느껴지는 손길이다.
나쁘지는 않았다.
‘어라 잠시만, 작은 손바닥?’
미르가 아니다, 이건…….
“허, 허억!”
정신이 번쩍 든 채 잠에서 깨어난 난 숨을 헐떡였다.
눈앞이 트인 내 시야로 한 덩어리가 보인다.
금색과 회색이 뒤섞인 덩어리, 아직 눈이 다 뜨이지가 않았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내 옆에 있는 게 뭔지 알아보려 애썼다.
“뭐, 뭐야?”
시야가 또렷해지며 덩어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금발머리의 천 옷을 입은 장난기 가득한 소녀 아르실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평소 모습과 달리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르실은 내 이마를 쓰다듬던 행동을 멈추며 말했다.
“좀 더 누워있지, 뭐 하러 일어난 거야 바보 가온.”
“네가 왜 여기에?”
“알 필요 없어, 좀 더 누워있어, 아직 밤은 깊어.”
녀석은 평소와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꿈속에서 내게 달콤하게 속삭였던 그 목소리다.
아르실은 내 이마를 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다시 푹 자, 내일 산장을 떠나려면 더 자야지.”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마지막이니깐, 이러는 거야, 앞으로 이런 얼굴로 널 보기 힘드니깐……이게 내 진심이야.”
“이상한 소리좀 하지 마.”
난 아르실의 손길을 치우며 차갑게 말했다.
손을 치우자마자 아르실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차갑고도 차가운 표정이었다.
보는 사람의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그녀의 눈빛은 가라앉아있었다.
아르실은 날 가리키며 오싹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자, 다시.”
“무슨 소리야.”
그러나 정신이 또렷해진 내게 아르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꿈속에서 봤던 미르의 모습들, 꿈속이라고 하기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난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르의 자리를 확인했다.
그곳에 미르는 없었다.
가슴 속 심장의 박동소리가 급격히 빨라진다.
난 다시 아르실에게 돌아가 다급히 물었다.
“미르는 어디로 간 거야?”
“글세 난 모르겠는 걸.”
“거짓말 하지 말고!”
난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질렀다.
사과나 미안한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움찔하며 연기든 진심이든 당황했을 아르실은 냉소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미르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그 사람을 믿는다며? 그렇게 잘난 믿음을 가졌다면 어딜 가도 괜찮을 거라 믿어야지.”
“시끄러, 난 어딜 갔는지 물었어, 빨리 말 해.”
“네 믿음은 가식이야, 넌 그저 널 사람 대접해주는 그녀의 선함 때문에 신뢰가 생긴 것 뿐이지.”
“닥치라고 했지!”
난 아르실의 멱살을 잡아든 채 큰소리로 위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신 나간 짓이었다.
미르, 그녀가 이 자리에 없다.
그 사실만으로 내 이성은 반쯤 마비되었다.
쿵!
쿠구구구.
산장이 아닌 바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산장이 작게나마 흔들렸다.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만한 싸움을 일으킬 사람은 내가 알기론 한 명뿐이었다.
미르, 그녀가 밖에서 싸우고 있다.
난 아르실의 멱살을 놓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아르실은 팔짱을 낀 채 내 등에 대고 말했다.
“넌 가봤자, 도움 안 돼.”
“알아.”
“미르 언니가 알아서 다 처리하고 올 거야.”
“그건 몰라.”
습격자가 또 온 게 분명했다.
난 재주 없는 천한 노예다.
가봤자 그녀의 발만 붙잡았을 것이다 .
평소였다면 미르 그녀에게 맡기고 난 숨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꿈속에서 그리고 최근 미르가 보였던 이상한 모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다.
지금 나가서 미르를 보지 않으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걸.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