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적으로 꽤 예전에 작성된 1장을 열심히 뜯어고치고 있습니다. 부족한 졸작이나마, 부디 많은 평가 부탁드립니다.
◇ Blog : https://blog.naver.com/n_sousi
◇ 이 졸작은 바탕체, 14px로 작성되어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선율이는 숙직실의 현관에 내려놓은 실내화 가방의 앞주머니에서 익숙한 종이뭉치를 꺼내어 내 앞으로 건넸다.
편한 자세로 앉아있던 나는 선율이가 떨리는 손으로 가져오는 그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떨리는 손끝과 표정으로 익숙한 종이뭉치를 건네는 선율이가 숙직실 안에 비춰지는 이유는 하나였다. 불과 5분 전 선율이와 했던 질문 주고받기 시간의 탓.
“한 장은 유실되었……지만, 끝장이 사라진 것이기에 아마도 별 문제는 없으실 것 같아요.”
“아, 응. 고마워.”
“별 말씀을……요.”
그녀는 귀여운 한숨을 폭 내쉬며 내 맞은편 자리에 정좌했다. 아직도 떨리는 감정이 남았는지 떨리는 손끝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것이 내 동공에 비춰졌다.
익숙한 종이뭉치……질문을 생각하면서 떠올린 그 익숙한 종이뭉치. 그것은 그녀와 나만이 엮여있는 도주사건의 잔재……라고 표현하면 괜찮을까.
소녀가 아름다운 향의 집중을 쏟아 내 시선을 빼앗았던 그 집중의 산물. 내 앞에서 주르륵 흘려버린 종이뭉치. 유실된 한 장은 그 당시 주르륵 흘러내렸을 때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그녀에게 첫 번째 질문으로 “선율이 네가 그 때 쓰고 있던 그것들은 뭐야?” 라고 가볍게 물어봤고, 질문을 받은 그녀는 많은 말을 남기지 않은 채 나에게 이 종이뭉치를 건넸다.
답변 대신 건넨 원흉이라니, 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도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선율이에게 희미한 죄책감과 배덕감을 느끼며 문제의 종이뭉치의 첫째 페이지를 훑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둘째 페이지도 읽어 내려가고, 셋째 페이지……아니, 다음 페이지들을 읽어내려가는 속도는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가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종이뭉치에 또박또박 읽기 쉽고 어여쁜 글씨들로 정리된 이 글자들은 서로 모여 하나의 <대사>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건넨 A4용지의 숫자는 10장이 족히 넘어 보였지만, 나는 6페이지만을 빠르게 읽고 종이뭉치를 내려놓았다. 확실히 이것은……
“아마도 그것만으로 충분한 답변이 되리라고 믿어요. 아마 아저씨가 저에게 물어보고 싶으시던 몇몇 가지의 질문 또한.”
“응. 용케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어떤 의미로 너에게 이 <대본>에 대해 질문했는지.”
그래. 확실히 그녀가 나에게 건넨 이 종이뭉치는 <대본>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 때를 떠올렸다. 당시 선율이가 흘려버린 A4용지의 몇 장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던 나 또한 대본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고 있었던 그 사실을. 순간의 추리나마 적중했던 셈이다.
몇 가지의 지문 또한 쓰여 있었다만, 크게 도움이 되는 문장들은 아니었다. 이 점은 역시 선율이의 나이가 어린 탓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그녀가 필요했던 구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본이기도 했다.
특히 조금 뒤쪽의 페이지를 따라 읽어가다 보면, 당시의 익숙한 대사들에 밑줄이 그어져 있기도 했다.
그녀의 대본은 꽤 많이 사용된 탓인지, 귀 부분이 너덜너덜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이걸로 대부분 설명이 되는구나. 그 날 네가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크게 목소리를 낸 일이라던가, 목을 푸는 행동이라던가, 정작 위협받는 것 같았던 네가 있는 교실에 뛰어든 내가 너를 제외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전부.”
말을 끝낸 나는 내려놓은 그녀의 대본 6페이지를 눈으로 읽었다.
「더 이상 가까히 오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아……나도 이렇게만 있지 않을 거야…….」
「날 나쁘게 생각하지 마……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줘……이렇게 갑작스레 일을 내버리면……죽을 수밖에 없잖아!! 너도! 나도! 모두다!」
그녀가 당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교실을 울렸던 그 대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선율이가 가진 그 종이가 대본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에 맞춰지지 않은 퍼즐조각들이 <대본> 이라는 단어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하여 완성되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 내 자신은 구태여 다시 그녀에게 질문했다.
되레 이런 당연한 것을 구태여 물어보는 내 자신은 심술궂은 악인에 가까울 것이라 나지막히 생각하며.
“내 생각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너는 ‘연기’를 하고 있었구나.”
“……네. 반 쯤 정답이세요.”
“반쯤?”
나는 그녀가 그러했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는 제가 ‘단지’ 연기를 했다고 말씀 하셨으니까요.”
“………‘단지’ 연기라고?”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그렇게 말씀드리면 괜찮을까요.”
“맞아. ………다른 거야?”
“예. 이것도 한번 맞춰보시겠어요?”
“용서해 줘, 머리 굴리는 것은 잼병이라서.”
간신히 이 분위기에 익숙해진 덕일까 부끄러움을 극복한 탓일까 편승해버린 탓일까, 장난스러운 눈빛을 담아 물어보는 선율이에게 솔직한 손사래를 건넸다.
선율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다시 천천히 내쉬면서 산뜻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편해 보이지만 불안함이 묻어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저는 말이에요, 아저씨. 성우로써 목소리 연기를 하고 있던 것이랍니다. TV에 나오는 배우나 연예인과 다르게.”
“성우………아하.”
이해하기엔 한없이 간단했다.
그녀에게 걸린 비밀을 푸는 단어는 <대본>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도 힌트에 불과했었던 것이었으니.
그 <대본> 이라는 힌트를 거쳐, 내가 직접 풀지 못한……결국 선율이 본인에게 들어버린 해답은 <성우>라는 키워드였다.
“수수께끼 풀이는 실패한 모양이신가 봐요.”
“그야 완패지. 본인에게 답을 들어버렸으니.”
“……방금은 조금의 유도신문이었어요. 역시 질문 주고받기 같은 것이 아닌 수수께끼 풀이 비슷한 것이었군요.”
“유도신문에 걸려준 것은 내가 숨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란다. 잘 기억해 둬.”
말을 우수수 쏟아내고, 장시간 뇌를 굴린 나는 찻물을 천천히 들이키는 것으로 목을 적신다. 이미 찻잔까지 차갑게 식어버린 차는 수분 보충으로는 적당한 음료가 되어있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질문을 드릴 차례군요?”
“윽. 훈훈한 분위기에 적당히 묻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직접 말씀하신 시점에서 아웃이랍니다. 그리고 얼마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잊어버릴 리 없잖아요………제가 이 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응? 뭐라고?”
“아…아니에요!”
그녀는 고사리 만 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질문이라면 딱히 뭐든 상관없으니까 맘대로 말해봐.” 라고 이야기하자 선율이는 그녀답지 않은……이라고 해야 할까,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레 웃더니 말수가 사라졌다.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몇 초 전까지의 목소리와는 온도 차이가 심하게 느껴져 왔다.
“제가 성우를 꿈꾼다던가,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한다던가, 내 자신이 그런 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느낌이셨나요?”
감정에 덮쳐진 탓일까, 꽤 격렬하게 말을 쏟아내던 그녀는 말이 끝날 때 즈음 풀이 죽어 기어가는 목소리로 문장을 끝맺었다.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 옳겠지.
나는 작은 탁상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선율이에게 손을 뻗어, 보드라운 뺨 위에 손을 올려─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그녀의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어디까지나 강제적이었다.
“뭐……뭘 하시는……에? 에?!”
얼굴이 또 다시 발갛게 달아올라 마음속으로만 바동거리는 것 같은 선율의 눈을 집요하게 쳐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시선을 맞추지 않은, 맞추지 못한 이유. 떨리는 손으로 건넨 대본. 풀이 죽어 바닥에 달라붙은 목소리. 그걸 전부 읽고 나서야 눈치 챌 수 있었던 나는 역시나 바보 멍청이였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시선과 싸우고 있었다. 너무 어른스러운 탓에 말이다.
자신의 옳음을 관철하려 자신에게로의 하찮은 시선 따윈 흘려버리고, 그럴 수 있다 생각하는 강인한 아이. 그 강인한 아이는 보이지 않는, 형체조차 불분명한 시선에 한없이도 약해져 있었다.
───너의 그게 뭐? 뭐가 어때서? 네가 좋아하잖아! 네가 추구하는 거잖아!
머릿속에 소생한 외침이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내 자신이 자신에게 외쳤어야 할 절규였다.
하지만 내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나 격정적인, 목이 갈갈이 찢어지랴 소리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닿지 않았다. 이미 그 소년의 마음은 아스라이, 평생 닿지 않을 듯한 별의 거리까지 도망친 뒤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선율이는, 그녀는 내 앞에 있었다. 나에게 보드라운 뺨을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두 걸음도 안 되는 거리다. 별 헤는 까마득한 거리감보단 알기 쉬운 정도로 가까웠다.
아직 늦지 않았다. 늦지 않을 수 있다. 아등바등 거리는, 조금은 세상물정 모르는 한선율이라는 여자아이가 내 시선 끝에 존재하기에
“뭐야 그게. ……그게 왜.”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방향을 잃었던 선율이의 시선이 약동을 멈추었다.
정말 작은 목소리였다. 적막한 숙직실에서도 들렸을까 말까 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조차 그녀에게……닿은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말은 마치 주워 담길 실패한 것 마냥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걸로 자신을 저평가 하고 누군가에게 무시 받을 거라는 녀석들은 충분히 봐왔어. 나는 네가 생각하는 대로의 널 생각하지 않아.”
“내가 바라보는 넌, 어제의 한선율보다 조금 더 대단한 녀석이야.”
자신감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애써 그런 말씀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거 참,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유ㅈ……아저씨는 상냥하신 분이니까요.”
선율이는 자기 나름 자연스럽게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 입속에는 미묘한 씁쓸함이 감돌았다.
“역시, 선율이도 아직 어린아이는 어린아이구나. 진짜 상냥한 사람이라면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고.”
“정말……이렇게까지 마음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이 공간은 저희 둘 뿐인걸요. 겉치레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거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
단지 그녀는 웃었다.
비록 선율이의 입 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것을 웃는 표정이라고, 긍정의 상징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은 내가 아는 범위 이내로는 없었다.
그것은 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한낱 어린 아이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선율이의 주변 환경에 얕은 살기를 느꼈다.
그 얕디얕은……그러면서도 끝없이 화가 치미는 감정이 차마 얼굴밖에 나올까 조심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끝의 떨림이 전해질 것 같던 나는 선율이 뺨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서로 피하지 않는 시선 속, 선율이의 눈동자에서 발견한 것은 불안과 떨림이었다.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이 않을까 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움직임이었다.
“선율아. 너는 굉장히 1차적인 착각을 하고 있어. 참 1차원적인 착각을.”
“간단한 착각…말씀이신가요?”
“그래. 너 같은 영리한 아이가, 어째서 이걸 잊어버리고 생각한 건지 신기할 정도야.”
선율이는 멀뚱멀뚱,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선뜻 보면 자신이 무언가를 실수해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처럼도 보였다.
“애초에 왜 나에게 그걸 숨기듯, 당당하지 못한 듯 말하는 거야?”
“그건……그…”
“……말하지 않아도 돼. 쉬이 말할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나도”라는 말에 선율이는 놀라듯 움찔했다.
그곳에 말을 덧붙이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녀를 지켜보는 것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영리하고 똑 부러지는 어른스런 그녀는 금방 답을 찾을 것이다.
자신이 금방 바라봤던 스케치북에 시선을 돌리는 선율.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단 판단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알겠지?”
“……….”
그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 삐걱거리는 모습이 마치 고장 난 관절인형처럼도 느껴졌다. 고장 난 관절 속에서 삐걱거리는 녹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는 조용한 비명처럼도 들려온다.
“알아. 안다고. 네가 어떤 생각으로 나에게 성우가 꿈이 라던가 애니메이션을 좋아 한다던가……그렇기에 되도록 진실을 말해주길 기대했어. 내 그림을 보고 굉장하다 해준 거잖아.”
“하지만 넌 사실만 이야기할 뿐 진심을 말해주지 않아. “어째서?”라는 의문보다……불쾌감이 앞섰어. 널 이해하니까 진심으로 대단하자 말한 거야. 그런데 내 진심을 단순한 겉치레라고 치부하는 건, 나에게 심한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아………”
“어제 말했던 건 전부 진의 없는 겉치레의 말이었던 거야? 나를……상냥하다 했었던 그 말조차도?!”
눈치 챘을 땐 말을 쏘아지고 있었다. 과열되어 발사 제어가 되지 않는 기관총처럼.
그리고 그 말의 한 마다 한 마디는 위협적이었다. 머릿속에 점점 차오르는 ‘폐색된 진의, 거품과 같은 겉치레의 아픔’ 이란 것에 말이 녹슬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엔 저도 모르게 목에 힘주어 쏘아붙일 만큼
익숙치 않았기에 숨이 차올랐다. 산소가 부족한 숙직실이란 공간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난 화를 낸 게 아냐. 그저 목소리를 크게 낸 것뿐이야.
“……”
“……”
서로의 시선이 뒤엉킨다.
적막.
무언.
가쁜 숨을 쉬는 내 한숨서리만이 공허하게 울린다. 그녀의 숨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대신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울린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귀로 하여금 들리는 소리조차 아니었다.
그 소리는 가슴 속으로 들려온 소리였다. 아까 들린 삐걱거리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자각한 것도 이 때였다.
조용한 비명이 아닌, 비탄과 규탄의 소리였다. 제 자신을 향한.
톡. 톡톡.
그 소리조차 실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가슴 속으로 들리는 희미한 파문.
그 질식할 듯한 소리가 귀로도 들리기 시작한 것도, 딱 그쯤이었다.
“죄송…해요……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발사된 녹슨 탄두는 그녀의 마음을 찢어두듯 꿰뚫어, 그 상처 사이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탄과 규탄이 콸콸 세어나오게 만들었다.
그녀의 감정이 극단으로 날이 서 자신으로 향하였을 때,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우둔함을 자각할 수 있었다.
“아……그, 달라. 아니야. 나는 그저…….”
이 말을 뱉는 도중에도 자신의 우둔함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이래봐야 단순한 변명이 아닌가.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한 무책임의 대표적인 대사를 뱉어버린 것이 아닌가.
“……….”
당황한 나머지 눈의 초점을 잃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게 되자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서서히 초점이 잡히는 눈에 가장 처음 보인 것은 그녀의 붉은 홍채, 그리고 붉게 충혈된 눈시울이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눈시울과 정반대로 안구는 점점 건조해지는 것 같았다. 강렬한 비탄과 규탄에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
그 아름답던 루비 빛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그리고 그 빛을 빼앗은 건, 다름 아닌 내 자신이었고.
단지 그것이……안쓰러웠다. 너무나도 가련하고 불쌍하고 안쓰러웠기에, 내 자신의 마음속에 불이 질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그녀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해 주셨듯이.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내 뇌를 지배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윤리의식과는 별개의 무언가가 ‘그래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며 내 몸을 붙잡고 있었다.
몸을 떨고 있는 그녀의 원인은……깊게 파고 들어가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과거가 있을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의 직접적인 원인은 나에게 있었고, 그 죄책감은 내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기에─
“………에? 아읏.”
─나는 내가 쓰던 모자를 주워 그녀에게 강하게 눌러 씌웠다.
“모자 벗지 마. 모자를 벗고 올려다보면 내 얼굴이 보이게 되니까. ……서로 눈 마주치지 말자고.”
그리고, 그녀의 몸에 팔을 걸치듯 약하게 선율이를 끌어안았다. 내 머리를 그녀의 머리 위로 얹어, 유일하게 힘이 들어가는 오른쪽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좋은 향기가 코 아래까지 풍겨 올라왔다.
“……이런 일은 해선 안 되는 일이에요.”
내 가슴에 뺨을 맞대어 머리를 묻은 선율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 잘 익은 게처럼 붉게 물들어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자신조차 상황에 맞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까지 자신을 식힐 정도로 부끄러웠다.
“숙직실에서 울어버리는 건 사양이라고. ……갑자기 여자아이가 울어 버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겠으니까. 12년 전부터.”
“뭐에요……그게.”
퉁명스레 말하는 선율이는 좀 더 내 품으로 파고 들어와 옷 사이에 뺨을 묻었다.. 눈물이 세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숨겼……다고 생각할 선율이는 먹먹하지만 그녀다움을 잃지 않은 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끌어안기 직전에 선율이의 붉은 눈시울을 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정말로 마음속으로나마 울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두 가지 질문, 더 해도 괜찮을까요?”
“아까 말했잖아. 얼마든지 괜찮다고. 나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서.”
“뭐에요. 역시 상냥하신 분이셨잖아요.”
“난 죽어도 상냥한 사람은 못 돼.” 라고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를 즐기고 있던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녀는 여전히 듣지 못한 눈치인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를 내었다.
“다른 어른들은 성우라는 꿈을 가진 저에 대해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웃으시거나 웃음기가 없는 표정만 보여주셨어요. ……제 앞에서는 웃는 얼굴을 보여주셔도 제 뒤에서는 한탄만 늘어놓으셨죠.”
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꿋꿋이, 또박또박 소리 내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미의 끝으로 향할수록 떨림이 강해진다.
“다수의 어른들의 표정이 말하는 것처럼……제가 틀린 걸 까요?”
그녀는 말할 대상을 잃어 한참을 묵혀오던, 썩어 문드러진 한탄을 나에게 내놓았다. 한탄을 내놓은 그녀의 표정은 생각보다 많이 어두우리라.
나는 다시금 선율이의 머리카락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주면서 그녀의 말을 이어간다.
“성우……그리고 목소리라는 것은 단순히 애니메이션이라는 작은 틀을 뛰어넘어,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는 작품. 그 거대하고도 방대한 틀 안에 있는 것들의 색채 그 자체야. 단지 사람이라 하더라도 목소리가 없으면 그 사람의 주변은 무채색으로 보이듯이……아.”
“무채색…이요?”
“미안, 단어선정이 너무 불친절 했나……? 무채색이란 건”
“아하하, 알고 있으니 괜찮아요. 흑백을 생각하면 괜찮을까요?”
“응. 아무리 만개한 벚꽃이라 하더라도 벚잎들이 스치면서……서로에게 맞닿으며 스산거리는 소리가 없다면 무채로 보이겠지. 인간이라 하더라도 똑같아. 소리는 대상의 색채야. 자연과 인간은 같아.”
“………멋진 말씀이시네요. 철학적이며, 길게 말해주셨지만 저라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듯이.”
“누군가에게 빌려버린 말일 뿐이지만.”
소리는 대상의 색채. 꽃잎이 서로를 간질이고 박수치고 맞닿아 스산거리는 그 소리마저 없다면 제아무리 풍성 벚꽃이라 하더라도 무채의 공간. 무채의 뿌리.
……자연과 예술은 같다. 그리고 예술은 항상 자연와 인간을 모방한다. 그 반대 또한.
어릴 적부터 달팽이관에 구멍이 3개는 더 생겼을 정도로 들었던 예술가 한규석의 말이었다.
오늘이 그 아버지의 기일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버지의 말이 뇌리에 계속 맴돌았다.
“누군가의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말은 멋지다고 생각해요.”
“동감이야. 그렇기에……”
그녀에게 꾹 눌러 씌운 모자를, 어여쁜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 않게 천천히 벗겨냈다.
“그런 말에 색채를 입혀, 한층 더 아름답게 전달하는 성우는……필시 멋진 직업이겠지. 안 그래?”
“……비겁해요, 아저씨. 저는 훨씬 더 건성에, 적당한 느낌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구요. ……예상하고 있었는데.”
모자를 벗어, 촉촉하게 젖은 눈이 빛나는 선율이의 시선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맑게 빛나며 물기가 가득한 눈이었지만, 감정에 겨운 듯 눈물이 흐르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녀는 올곧게 나와 시선을 맞춰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아이의 눈빛을 보면, 한마디로 격렬했다.
전에 내가 표현한 적이 있었나, 『폭력적』 이라고.
웃기지마. 여자에 관심도 없는 녀석이 저 작은 여자아이의 외모를 보고 “폭력적으로 아름다웠다.” 라고 표현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래. 내가 폭력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이제야 접해보았고, 무언가 깨달은 듯 속이 풀려나갔다.
단지 그 행동에 행복함을 느꼈다. 마치 거짓말과 같은 행복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았다.
선율이는 작은 몸짓으로 남은 눈물을 짜내듯 눈을 꼭 감더니, 다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내 티셔츠로 눈물을 닦으면서.
“아으앗……어이. 이보쇼.”
“아! 죄송해요! 이마로 뼈를 들이받지는 않았나요……?”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아직 어린 나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귀하게 자란 아이라서 그런 것일까. 남자에 대한 경계가 묘하게 약한 것 같이 보였다.
……실제로 오늘도 꽤 의식하는 모습도 보여준 것 같은데.
한선율. 저 아이와 같이 있으며 남들이 오해할만한 행동을 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말을 빌렸을 뿐이었지만, 좌우지간에 그녀는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완전히 눈물을 지우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내려둔 모자를 자신의 품에 꼭 안으며 그녀는 나에게 마지막 질문을 날렸다.
“……질문이라 말씀 드리는 게 옳을까, 제 바람이라고 말씀 드리는 게 옳을까 헷갈리지만.”
“뭐,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어.”
가령 자신을 그린 저 ‘스케치북의 내용물을 보여 달라’ 던가 말이지.
여하튼 이상하게도 지금의 내 자신은 꽤 통이 컸다. 그녀에게 느낀 행복감에 대한 사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아직 제 실력으론 민폐일 수도 있지만……아저씨에게 제 연기를 들려 드려도 괜찮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향해있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내 자신은 통이 꽤 큰 상태였다. 별다른 말없이 미묘한 표정으로 긍정을 표하며 고개를 세로로 저었다.
………조금,
아주 조금은, 허무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야.
“그것보다……그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듣는 것 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너의 목소리를 평가하는 것은 성우에 대해서는 선율이 너보다 지식이 부족한 나라는 한낮 그림쟁이야. 수많은 성우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따랐을 너에 비하면 나는 목소리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너는 그걸 모르고 나에게 평가를 요구한 거야? 아니면 그냥 신경도 쓰지 않는 거야?”
그녀가 기대하며 부탁한 것과는 반대로,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해 시니컬하게 의문을 쏟아냈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 이걸 깨닫고 물어보았을 리는 전무하다. 또한 내가 하고 있는 말 자체가 초등학교 5학년에게 할 말은 아니리라 믿는다.
아마 이해도 못하겠지. 보통의 초등학교 5학년이라면.
하지만 나는 무언가 대답 해 주리라 믿고 저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저 아이라면 무언가 대답 해 줄 것만 같다. 막연히, 내 기분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런 말씀 드리면 굉장히 의아하게 들으실 것 같지만……”
“상관없어.”
“……네.”
조금 침울해진 선율이의 표정이 보인다.
선율이는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변에 제 목소리를 들어주실 어른은 한 분도 없으셨으니까…아저씨가 말씀하시는 것은 잘 모르겠답니다.”
……또 실수 해 버렸다.
“……미안.”
“아, 아니에요! 왜 아저씨가 사과를 하시는 거예요.”
선율이는 당황한 듯 손사래 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사과해야 되는 부분이 맞을 것이겠지.
아마 맞을 거다. 적어도 내가 선율이와 같이 대답하는 상황이었다면 기분이 꽤나 침울해지지 않았을까.
“대신에, 말씀 해 주세요. 아저씨가 말씀 해 주시는 것이라면 괜찮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조금 부끄러운 듯 손가락 끝으로 뺨을 살짝 긁는 선율이.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발 딛을 구석조차 보이지 않는 일방적인 믿음을 보내주었다.
단순히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희미한 웃음을 띤 채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아저씨가 말씀하신 걸로 조금 생각 해 봤어요. 아저씨의 말씀은 타당하셨지만, 결국 제 목소리를 듣게 되는 사람들은 그런 전문가들이 아닌……아저씨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러네,”
졌다.
하하하……완패였다. 나는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피식 웃었다.
아무리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하고 듣고 고쳐서 쓴 소리를 듣더라도, 결국 보는 것은 우리 가족, 친구와 같은 일반인들. 그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웠다면 충분하다. 지금은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마치, 내가 그 아이를 자꾸만 멀리 바라보려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특별 취급하고 의식하려던 것과 비슷한…….
“그래. 그렇다면, 내 이야기라도 귀 기울여서 들어줄 수 있겠어?”
“네!”
‘내가 과연 저 아이와 마음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시원하게 답해 줄 수 있을까.
뭐, 툭 까놓고 말해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이미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으니까.
저 아이와 있으면 무언가 항상 끌려 다니는 느낌에, 내 자신이 주도권을 잡을 수 없어 서성이게 된다.
피곤하다. 초췌해진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귀찮지는 않다. 싫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무언가 도와주고 싶고, 힘이 되어주고 싶다……라고, 아직 그 정도의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저 아이는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올 수 있지?
내가 하는 눈치 없는 행동과 오만함은 선율이의 좋지 못한 기억과 창백한 과거를 계속 찌르는데도, 저 아이는 어째서 나를 용서하고 계속 다가올 수 있는 것일까.
생각 해 봐도, 또 생각 해 보아도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저 아이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리라.
………실제로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우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