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적으로 꽤 예전에 작성된 1장을 열심히 뜯어고치고 있습니다. 부족한 졸작이나마, 부디 많은 평가 부탁드립니다.
◇ Blog : https://blog.naver.com/n_sousi
◇ 이 졸작은 바탕체, 14px로 작성되어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평소보다 일찍 취침한 금일 새벽으로부터의 단잠은 오늘도 어김없이 내 생체리듬을 낮 시간부터 돌아가게 만들었다.
물론, 발 구름 소리가 아닌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무진장 시끄러운 밴드 음악 소리로 일어났다는 것이 한 가지 다른 점이었고, 두 번째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이는 시계가 1시라는 정보를 나에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아아.”
매일 일어나는 시간보다 2~3시간 일찍 깨어난 것만으로도 인간이 이리 나태해질 수 있는 걸까.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어리였다.
물론 시간을 확인하기 전 부터도 피곤했기에 상체만이 겨우 움직이는 수준을 지키고 있었지만, 시간을 확인한 직후 절찬 쏟아지는 졸음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 굴복하고 싶어지고 말았다.
─스륵
하지만 난 진화했다! 고등학교는 물론 군대마저 전역했다!
물론 전체 한국 남자들이 전역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아침을 견딜 수 있다는 말은 전혀 아니지만,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가지는 것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니깐.
전 인류에게는 아직 이른, 지금의 내 유익하지 못한 생활습관이 정착되어 버린 것은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마의 늦은 아침이라도 기지개를 켜니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두 시간 정도 더 잔 게 도움이 된 것일까, 평소처럼 침구를 정리하는데 졸린 기색이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비몽사몽하면서 휘청휘청 이불을 걷거나 아예 주저앉아서 이불을 접었겠지만, 지금은 이 지면에 당당하게 서서 힘차게 이불을 걷을 수 있었다.
나라는 인간의 소소하고도, 생각해볼수록 참 보잘것없는 진화를 느끼며 곱게 접어놓은 이불을 창고 쪽으로 힘차게 발로 차버렸다.
─뻐엉.
◇◆◇◆◇◆◇◆◇◆◇
“끝났다……”
거의 다 써가는 볼펜을 힘없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곤 크게 기지개를 폈다. 무언가 큰일을 끝냈을 때 나오는, 기계적이고 본능적인 기지개였다.
그렇다. 그만큼 큰일이었다. 적어도 대학생의 입장으로는 말이다. 학기 초부터 주어진 과제의 무게감이란 다 그런 것이리라.
특히나……애니메이션 제작 과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나라고 할지라도 애니메이션 제작 과제의 악랄함은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 듣기만 해도 어렵고 번거롭다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 장 한 장 움직이는 셀 애니메이션. 그 악랄함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오죽하면 매일 주마등을 등불 삼아 작업한다고 할까.
흡연과 음주를 즐겨 하는 새 나라의 흔한 대학생이라면 수명이 10년 단위로 단축된다는 그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우리 팀원 그 누구도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말이다.
원래라면 복학 후 팀에 소속되어야 하는 몸, 이렇게 콘티나 시나리오 같은 걸 맡아 그 녀석들이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걸로 별다른 말없이 휴학하여 팀에 합류하지 못해 부담이 커진 동기에게 큰 힘이 보태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속 한켠이 조금이나마 맑아진 느낌이었다.
물론 전제적인 시나리오는 사촌동생인 한소운이의 몫이었지만. 결코 적지 않는 분량의 시나리오를 보며 기뻐해야 할지 분량이 폭발했다 말해줘야 할지 긴가 민가 했지만……일단 정말 감사했다.
짜식. 고맙다. 한소운.
나를 4일 동안 고생시킨 완벽……하다곤 말 못 할, 여하튼 최선을 다한 콘티를 시원하게 내팽개친 후의 오후 3시 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의 숙직실 앞 계단에서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가 되어버린 이 위화감과, 도주 사건 당시에 느꼈던 그 심장이 쪼그라들어 소멸해버릴 뻔한 긴장감으로 인해, 더 이상 저런 위화감 따위로는 이 지긋지긋한 숙직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오늘의 신체 컨디션과 멘탈 컨디션 두 쪽 다 최고였기도 하고.
이젠 미지의 존재인 통칭 '숙직괴물' 을 무서워하면서도 한 번쯤은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계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수근 거리는 저 모습들이 귀엽게 보일 정도니까.
……요약하면,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아……더 자고 일어날 걸 그랬나.”
이렇게 시답잖은 소리나 홀로 지껄이며 완충된 스마트폰을 열심히 두드리는 태평한 모습.
어느새 끓여놓은 전기포트의 뜨거운 물로 녹차를 진하게 우려내곤, 며칠 전 할인행사로 대량 구입한 쌀과자를 으적거리며 배를 채웠다.
그리고선 유라가 단체 채팅방에 올려둔 풍경화를 바라보며, 테이블 바닥에 드러눕고는 혼잣말을 뱉었다.
“……평화롭다.”
대학생이라면 흩날리는 벚꽃잎을 전부 밟아 뭉개고 싶다 생각하게 될 이 시간대에, 평화롭다 생각하며 누구보다도 여유를 쫓아가며 생활할 수 있는………휴학이라는 단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체감하기로 했다.
………역시 벚꽃은 즐길 수 없겠지만.
◇◆◇◆◇◆◇◆◇◆◇
격양되는 언성.
높아지는 말소리.
그리곤, 나에게 강하게 쏘아붙이는 듯한 말소리가 늘어만 갔다.
한 반의, 나를 제외한 32명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며……
아니, 노려본다는 것이 더 어울릴 듯했다.
가진 것이라곤 자신 있는 목소리밖에 없는 여학생 하나를 둘러싸며 추궁을 시작한다.
부담감과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강렬한 눈빛과 자신들의 환상을 무리하게 강요하는 그 눈빛들.
하지만 나는 내가 믿는 것을 굳게 믿어, 관철해 나갈 것이다.
아무리 대다수의 눈이 나를 짓누르려 한들, 나는 내 자신이 본 것을 믿을 것이다. 반드시.
◇◆◇◆◇◆◇◆◇◆◇
“흐아, 개운하다.”
화장실의 문을 열고, 화장실 내부를 가득 매웠던 수증기와 함께 머리를 말리며 나왔다. 방금 전의 내가 뱉은 그 한마디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온 개운함의 표현이었으리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능숙하게 털어내곤 서랍에서 드라이어를 꺼내 책상과 멀지 않은 플러그에 콘센트를 꽂았다.
급하게 말리는 머리칼이 아닌, 오랜만에 맛보는……여유롭게 머리카락을 건조한다는 소소한 사치를 즐기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 지어버리고 만다.
위이이이이이이이잉─
길다란 머리칼이 드라이어 바람에 나부껴 내 눈을 쿡쿡 찌르는 것에 몸을 조금씩 비틀던 도중, 잠결에 발로 차버려서 떨어진 건지 몰라도 책상 아래에 떨어져 있는 16절 크로키 북이 눈에 띄었다.
크로키 북 이라곤 하지만 정작 크로키는 한 점도 없이 의미 없는 스케치로만 가득 채워 놓았지만 말이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팟 하고 불이 들어와 충전 케이블에 매달아놓은 스마트폰 시계를 확인해보면, 빛을 내뿜는 액정에선 1시 40분이라는 답문을 주었다.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 2시간이나 넘게 시간이 남았네.”
아직 내가 일하는 시간인 3시 40분까지는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다만 녀석들의 대학 과제조차 중간 단계에 그쳐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2시간을 넘기는 것이 가장 큰 고비가 될 듯싶다.
까놓고 말해,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주 좋은 타이밍에, 책상에서 연필이 툭 굴러떨어져 내 앞으로 굴러왔다.
또르르 또르르 빠른 속도로 굴러오는 연필이 내 검지에 충돌해 굴러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 연필을 반사적으로 잡아들고는 떨어져 있던 크로키 북을 바라보았다.
“……?”
너무나도 절묘한 상황, 그리고 타이밍.
미의 신이 내 자신에게 무언갈 빚어내길 바라는 듯한, 또는 강요받은 듯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이 분위기, 그리고 기분.
그리고 지금 그림을 그려보면 좋은 구상과 스케치가 나올 것만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남자의 감……
아니, 그림쟁이의 감.
“그럼……속은 셈 치고.”
어딘가 찝찝시원한 기분만을 남겨두곤, 앉은 채로 엉덩이를 질질 끌어 몸뚱아릴 움직였다.
습관처럼 왼손이 나아가 연필을 잡으려고 하지만, 도중에 멈춰서는 왼손을 교차해 오른손이 지나간다.
“………흐음.”
나는 다시 오른손을 사용해 연필을 잡는다.
생각보다 크게 익숙해지지 않은 오른손의 파지법은 그림으로 하여금 새로운 기분이 들게 했다. 오른손에 힘을 꽉 쥐어본 나는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다. 무심코 연필을 놓치지 않을 강함이 깃들어 있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화판 위 크로키 북에 연필선을 신나게, 익숙하게, 막힘없이 그어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연필 선의 다발들이 속속들이 크로키 북 한 켠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조금 사그라든 듯한 교실 분위기지만 아직도 나를 죽일 듯 강렬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대부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할 수 없으니 노려보기라도 하겠다는 마냥 시선의 수는 늘어난 것만 같았다.
상냥한 부반장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았지만, 결국 직접 나를 돕는 일은 없을 것이라 어렴풋이 직감했다.
결국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던지는, 손톱으로 뜯은 것만 같은 작은 지우가 조각을 긴 머리칼에 조용히 품어가는 채로 마지막 6교시를 조용하게 곱씹어 넘겼다.
◇◆◇◆◇◆◇◆◇◆◇
“호오…오오오…….”
신들린 듯 움직이는 연필과 색연필, 그것을 잡은 손과 같이 크로키 북 위를 신나게 질주하며 선과 명암을 채워나간다.
평소와는 다른 수려한 선의 질주에 내 자신도 놀라가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타블렛 외의 도구로 그리는 그림은 정말로 오랜만이고 새로운지라 나도 모르게 빙긋 미소 지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같았다.
곧 여름에 접어드는 봄 날씨답지 않게 꽤나 서늘한 날씨였고 지하 주제에 꽤나 뽀송뽀송한 습도를 유지하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종이가 습기를 먹지 않아 선이 접질려지는 일 없이, 종이 속으로 연필심이 빠져버리는 일 없이 쾌적한 드로잉을 할 수 있었다.
고딕 풍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 캐주얼 한 복장의 소녀, 근육질의 남성, 초로의 노인까지, 남녀노소 종류가 다양한 캐릭터들을, 머릿속에 생각나는 이미지를 전부 다 끌어내어 그려간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끌어내다 보니, 어느새 잊으려 노력하던 기억까지 떠올려지기 시작했다.
‘긴 생머리에 단정한 눈코입, 학교에선 보기 힘든 캐주얼 드레스에 단화……’
머릿속에 생각해가는 대로, 그리고 그 소녀를 보고 나서 느낀 내 감정들을 담아서 작은 크로키 북에 선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서로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본 그 소녀의 얼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매력적이었던 목소리,
그리고, 그 급박하고 끝에 달한 것만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던 내 부족한 손끝.
그림을 그리는 것에 필요 없는 기억과 감정마저 떠오르기 시작해─ 어느새 그림을 그리던 손은 멈춰버려, 그 소녀를 생각하는 것만을 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소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소녀는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아이가 어디에 있을지조차 알 수 없을뿐더러 알 수 있는 방법부터가 불명이었다.
그리고……내가 그 소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소녀가 다시 내 눈에 보이게 되는 일 따윈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이렇게나마 작게, 소중히 남은 기억이 너무나도 큰 기쁨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붉게 물든 눈동자가 주시하던, 반짝 빛나던 그 모습은 석양의 그림자와 닮아, 화려하게 흐드러지는 흑발과 함께 서 있는 장소를 특별한 공간으로 바꾼다.
마치 벚잎이 흩날려, 상상하지 못한……내가 만들 수 없는 색의 벚잎을 자아낼 것 만 같은………
………………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아.”
순간적으로 이런 상상과 생각을 했던 나를 아주 몹쓸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다……아니, 지금도 나는 내가 아주 몹쓸 놈이란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지금만큼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풀어내지 못한 감정이 그대로 얽히고설켜 그것이 결국 꼬이게 되어 버린다면, 기어코 잡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란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녀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니 크로키 북에는 그 소녀의 윤곽은 물론 내가 목격했던 그 소녀의 특징적인 이목구비까지 전부 다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스케치북 안에서나마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소녀를 보며, 내 입가의 미소가 느슨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 모든 것이 잊혀지며 시원해지는 그때의 경험과는 다르다.
다르고, 너무 달라서.
잊혀지지 않는 그 아이를 떠올리며 따뜻한 감각을 오른손에 덮었다.
◇◆◇◆◇◆◇◆◇◆◇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듣다 보면 빨려 드는 강한 개성을 가진 목소리가 귓속을 맴돌아, 바로 내 뇌까지 빨려 들어온다.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토록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그 빛나던 사람의 모습을 유리 벽 너머에서 보았다.
그 사람에게……그 예술가에게, 나도 꼭 그렇게 빛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내 자신에게────
───톡.
귀에 걸려있던 이어폰이 빠졌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다.
익숙하지 못한 형태의 손이 강제로 내 이어폰을 끄집어 낸 것이었다.
당연히 나에게 불만을 품거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아이가 그랬던 일이었고, 뒤에도 남자 아이들이 4명가량 서있었다.
그리고선 그 아이들은 갑자기 강제로 내 손목을 잡아끌고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싫다고 말하며 손을 뿌리치려 해도, 손목을 잡은 손은 더 강하게 나를 죄여올 뿐이었다.
◇◆◇◆◇◆◇◆◇◆◇
헤드셋에서 팀파니의 묵직한 소리가 울리더니 호른과 첼로, 유포니엄의 웅장한 소리에 대비되는 매끄러운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온다. 낮게 깔리는 베이스기타의 음색과 피아노 소리까지. 마치 그 상황을 상상케 하는 웅장한 울림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듣고 있던 건 오케스트라 작업이 된 애니메이션의 OST였다. 작품성도 뛰어났지만, OST의 퀄리티가 훨씬 화제가 됐던 작품의 음악이었다.
문득 앨범 커버 뒷면의 이름을 보았다. 그곳엔 〈Special thanks HwaYoul-Yeon〉, ‘연화율’ 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생전의 어머니는 이상할 정도로 바이올린이란 것에 애착이 강한 분이셨다. 국내에서 손에 꼽는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더라도 말이다.
어릴 때의 나는 그 사실에 질투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도 그 유치찬란한 질투는 계속되었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보다 어머니는 날 더 사랑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날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바이올린과 아버지, 한규석을 사랑하셨던 것일까. 어머니의 바이올린 선율을 들을 때마다 불현듯 가슴속에서 떠오르는……
……답을 찾기엔 한참 때늦은 의문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도중에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나, 생각 도중에 방해받는 것을 특히나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위층, 정확히 본관 1층 홀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싸움 소리는 내 심기를 건들기에 충분하였고, 지금도 체내에서 피로물질이 희끗희끗 발산되어 감을 느끼며 당장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저렇게 큰 소리로 싸우는데 왜 뭐라고 하는지는 안 들리는 거냐고…”
이중문과 지하 자체의 방음으로 인해 저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불구하고 뭐라고 소릴 지르는 것인지 전혀 들리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무시할 수 있는 정도였겠지만 점점 커져가는 소리에 뛰쳐나가고 싶은 정도가 되어버렸다.
묘하게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지금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하필 근무시간이 다가오는 도중 이런 감정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심기가 많이 불편했으니까.
“……어디, 괴물이라고 불리는 모습을 한번 써먹어 보실까.”
주섬주섬 작업복 윗도리를 입고는 대충 던져놨던 모자를 눈이 보이지 않게 깊게 눌러 썼다.
어떻게 해야 무섭게 보일 수 있을까.
거울을 보며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이리저리 흩트려뜨리며, 결국 미역 귀신 마냥 보일 비주얼을 만들었다. 그런 내 기묘한 모습을 보곤 신묘한 만족감을 가슴에 품었다. 하고는 나 자신에게 만족해한다.
준비를 마친 후, 나는 여닫이 나무 문을 열고는 고의를 담아 미닫이문을 크게, 소리가 울리도록 쾅 하고 열어 제꼈다.
쾅.
지하 계단을 타고 1층까지 울려나간 이 문소리는 1층 아이들의 귀까지 닿았을 것이다.
역광으로 인해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3~4명 정도가 있어 보였다.
“으아아아으어아악!??!!!”
……그중 벌써 한 명은 도망쳐 버린 듯했다.
어쨌든, 나머지 3명의 남자 꼬맹이들 또한 움직임을 멈추고 당황하는 듯했지만, 유난히 여자아이는 나를 꼿꼿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굴하지 않은 나는 거침없이 계단에 한 발짝 내디뎠고, 다시 한 발 한 발……약진하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할 때마다, 내 얼굴의 실루엣이 명확해지기 시작할 때마다 아이들은 천천히 경직되어갔다.
그렇게 다시 한 발짝 한 발짝…… 아이들까지 거리가 4M 남짓 남았을 때 즈음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을 게슴츠레 뜨니 한쪽 눈이 가려지고, 썩어가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왼쪽 손으로 삿대질을 했다.
손가락이, 그 손끝만이 양지로 나온 상태로……
맨 왼쪽에 있는 남자아이를 지목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마치 부패되는 듯한 그 미소를 섬뜩한 웃음으로 바꿔치기한다.
아,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괴담 속 생물의 연기였다.
……그에 따른 아이들의 반응은 아주 보람차기 그지없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윽아아악!??!?!!”
뒷걸음을 치다가 뒤로 넘어지기까지 하면서 격렬한 반응으로 나에게서 멀어진다.
바닥에 꿈틀거리면서도, 콧물이 옷에 치덕치덕 발라져가는………차마 묘사할 수 없는 더러운 상황에서까지 도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보람찬 북새통 속에서도 한 여자아이의 눈은 나를 포박한 채 놓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신기할 정도로.
………그러나, 그 여자아이는 저 아이들과 같이 도망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맨 오른쪽에 있던 아이가 중간에 있던 아이와 부딪혀 밀려가는 것에, 그 충격에너지를 온전히 그 여자아이가 받아내었다.
“아읏……?!”
그 소녀는 균형을 다잡지 못하고는 그대로 접질려버려, 그대로 공중에 뜬 채로 나와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지고 말았다.
………소녀?
“어……?”
눈앞이 감자기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1층으로부터 내려오던 빛이 여자아이 앞으로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가려지는 빛은 늘어가기만 하여, 기어코 빛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그 여자아이가 나에게로 떨어져 오는 것이겠지.’ 라고.
단지 그렇게 생각했던 반동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양손을 뻗었다. 그 소녀가 떨어지고 있는, 봄의 볕을 가로막고 있는 그 방향으로.
내가 지금 손을 뻗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을 난제였다.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몸이 부족한 한유진이란 인간은, 모르는 사람을 내 한 몸 바쳐 받아줄 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을 테니까. 태훈과 유라의 상냥함에 콘트라스트를 느끼고 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거짓말처럼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또는 뻔뻔하게.
마치 예전부터 취미가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처럼…
마치 그 소녀를 알고 있어, 받아줄 수밖에 없는 그런 어른처럼.
그 소녀가…
‘……그…소녀?’
…아아……
그랬었던 것이었나………
그 작디작은 여자아이가 내 품에 안겨, 내 머리가 그 소녀의 깊은 흑발에 묻힌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떨어지는 그 여자아이에게 그 소녀의 모습을 겹쳐 보았던 것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내 그림 안에서 너무나도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내 품에 안겨 떨어져가는 것은, 그런 소녀를 투영한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그렇게.
그 소녀를 품에 꼬옥 끌어안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곧게 추락했다.
내가 소녀를 안고 떨어졌을 때의 그 묵직하고도 가벼운 충격음은, 좁은 지하실 안으로 넓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