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믈라카티 맘루크
-토끼는 왜 살았는가.-
0. 투계장
1. 거미를 먹은 남자
2. 수확
3. 여정
4. 여름에 걸맞는 폭력
5. 폭력의 윤곽
6. 뿌린대로
7. 거두리라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0.
[이런 젠장할! 힘을 내라고 이 빌여먹을 수탉아!] 목에 들러붙은 닭똥 냄새와 묵은 먼지를 긁어내릴 겸 바이는 연달아 고함을 질러댔다.
벼슬이 찢어진 수탉이 날아오르자 날갯짓에 떠밀려온 바람이 주정뱅이의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준다.
면도날이 달린 발톱이 상대편 닭의 목 아래를 그어버리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리는 노동자도 보인다. 징그러워서가 아니라 잃을 돈을 보고 싶지 않은 게다.
목이 그어진 수탉은 눈을 한 쪽 잃었지만, 물러섬 없이 발악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는 건 변함이 없다.
[이런 제기랄! 야 이번 달 알바비 다 걸었다고, 이 닭대가리야 지면 치킨으로 튀겨버릴 테다!]
[어차피 지면 튀김옷 입는데 뭔 말뼉따구 같은 소리냐.]
[제가 질꺼라 이야기 했잖아요.]
[닥쳐!]
바이는 핏대를 세워 가며 고함을 질렀다. 찰나에 군중의 함성이 더 높게 울려 퍼졌다. 승부의 결과가 난 것일까.
눈을 잃은 닭은 여전히 코너에 몰린 체 온 몸을 부리로 쪼이는 중이였다. 함성이 울려 퍼진 이유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던 수탉이 무릎을 꿇어서가 아니라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용수철처럼 뛰어 오르더니 부리로 상대편의 눈을 쪼는 동시에 발톱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공세를 가하던 수탉은 기력이 온전하였기에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발목을 털어내지 못했다. 반격에 나선 닭은 모가지를 움켜준 체 머리를 맹렬하게 쪼았다.
[그래 이 세끼야 바로 그거야! 죽여 버려 아주 그냥!] 바이는 신이 나서 주먹을 치켜들고 휘두른다. 희비가 엇갈리고 열기가 드높아진다.
[죽기 전 발악이네요.]
수탉은 멱살을 풀기위해 격렬하게 푸닥거리를 했다. 그래도 여전히 발톱이 목으로 파고들자 모래판에 온몸을 던지고 뒹굴었다. 몸통을 험하게 굴린 덕인지 숨 돌릴 틈도 없이 반격을 퍼붓던 애꾸 닭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숨통이 트이지 않았다. 찢어져 나간 닭발이 목에 박혀있었기 때문에.
[워후!]
[사기다! 심판 눈은 어디에 달고 있는 거야!]
[먼 개소리야! 면도날 때문이잖아.]
옅은 피 냄새는 군중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제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단단히 박혔는지 발톱은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탉은 결심했다. 한쪽 발을 잃어도 투지를 불태우며 다가오는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부리로 멀쩡한 다른 쪽 눈을 노리고 두 발로 몸통을 움켜쥐고 찍어 누르려고 했다.
반격은 간단했다. 다시 한 번 목을 노리고 발을 치켜들었지만, 눈과 다리를 잃어 균형감각을 일어버려 목을 잡았지만 두 발톱에 몸이 움켜져 깔려버렸다.
부리는 가차 없이 머리와 눈, 목을 쪼아댔고 곳 가장 연약한 부분이 너덜거리면서 날갯짓이 점점 미약해져갔다.
[거봐요, 역배당은 확실할 때만 해야죠.] 바이는 내기에서 졌다.
심판은 죽은 닭발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수고를 하지 않고 승자를 치켜들었다. 이긴 수탉은 닭발을 메달마냥 매달고선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다. 패자는 이미 죽었고, 승자도 부상이 심했다.
심판은 수의사의 진료결과가 나오자마자 우승자의 멱을 비틀어 꺾었다. 승자와 패자 공평하게 털이 뽑혀져 나간다.
세 명의 아이들은 바닥에 뿌려진 배당표를 밟으면서 환전소로 향했다.
[아앙? 너 나랑 장난하냐? 이깠 좀벌래 가득한 책을 배당금이라 준거냐, 디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말 좆보다 빳빳한 현찰 뭉치를 가져오라고. ] 징크스는 바이의 반대쪽에 돈을 걸었었다.
[워워워, 진정해. ]
그녀는 환전소에서 머리가 벗겨지다 말고 배가 산처럼 튀어나온 중년 남성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가 공손한 이유는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의 으름장에 오금이 저린 게 아니라 걸은 만큼 받아간다는 암묵적인 규칙 때문이었다.
누구든 암묵적인 규칙을 어기면 신용을 잃기에, 환전소 사내는 새파란 애송이를 공손하게 설득을 해야만 했다.
[물론 너가 원하는 현금으로 줄 수도 있지만, 지금 현금이 많이 모자서, 알잖아 현금은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가는지.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지 않으면......, 내가 전당포도 겸하고 있어서 아는데 그건 값이 꽤나가. 보증할께.]
[오줌이나 먹어, 어떻게?]
[그건 아직 감정을 못 받았어, 이런데서 떠도는데 어중이떠중이들인데 책 벌래 녀석들이 있을리 만무해서 말야. 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걸 보면 허접스레긴 아니겠지. 한 번만 도와줘. 아님 가지고 있어, 나중에 현금의 여유가 생기면 바꿔 줄게. 알잖아, 내가 오늘 내일만 장사하는 얼치기 꾼이 아닌걸.]
[야, 나쁘지 않은데.] 바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월급을 몽땅 잃은 것 치고는 차분했다. 징크스는 파트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좋아. 대신 치킨값은 이자로 쳐줘.]
[저걸 먹게?] 교섭에 성공한 중년남성은 얼굴의 땀을 쓸어내리고선 바지에 문질렀다.
[승부사가 저런 걸 먹으면 재수 옴 붙을텐데.]
[남이사. 빛 달아 둔거다.]
[알았어 알았어, 이봐 그 두 마리 후딱 튀겨서 이 숙녀분들 드리라고. 면도날을 제대로 제거 안 했기만 해봐.]
협상을 마치고선 투계가 튀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환전소 사나이가 배당문제로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닭튀김이 들린 종이봉투를 들고 바이와 징크스는 투계장을 나왔다. 양철계단을 올라, 좌측 문을 열자 작은 방이 나온다. 사방에 문이 있고 바이는 직진하여 둥근 문고리가 달린 문을 검지손뼈로 두드렸다.
눈이 하얗게 뜨고 머리에 비듬이 달린 노인이 문을 열었다.
[레드]
[팝콘] 그는 답어를 듣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한쪽 벽면이 목제 약제함으로 가득찬 방이 나오고 그 너머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골목이 보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파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더러운 안드로이드.] 노인은 오리아나의 뒤통수에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랍쇼, 야 징크스 뭐하냐?]
[왘 시발, 깜짝이야.]
[죄졌어?]
[니 얼굴이다. 너야 말로 여긴 왜......,] 징크스는 공중에 살짝 떠있는 잔나를 째려보았다.
[마침 잘됫다, 여기는 너네 나와바리잖아.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그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가운데 구멍이 난 명함을 건넸다. 바이는 명함을 힐끗 내려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너 이쪽 취향이었냐.]
[음......., 교장선생님?]
[친구가 무슨 일 생기면 여기로 찾아오면 된다고 해서 찾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가계인가본데.] 잔나의 옆에 서 있던 제드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선 말을 했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 난 이해한다 이 똥꼬충 세끼야.] 징크스가 낄낄대며 명함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돌렸다. 명함엔 건장한 남자의 벗은 몸이 그려져 있었는데 성기가 있는 부분에 새끼손가락만한 구멍이 나있었다.
[그 친구가 설마, 이사장?]
[평소에 신드라가 어떤 이미지 인지 알겠는 걸.]
[딱 봐도, 그 사람이 갈법한 가계야. 번지수를 잘못 골랐어.] 바이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펜을 꺼내 판돈 대금으로 받은 낡은 고서의 빈 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쯤 일꺼야, 그렇고 그런 가계들이 그나마 모여 있는 곳이니까. 역겨워서 잘 가지 않아 자세히는 몰라. 어차피 거기 가서 삐끼들한테 명함 보여주면 알아서 찾아주겠지.] 설명을 마치고선 고서를 북 찢어 잔나에게 건넸다.
[잘? 간적은 있나보네.]
[죽탱이 맞고 싶냐?]
[괜찮아 언제 외로우면 말해.]
[꺼져, 실뱀같은 걸로 뭘 하려고.]
[아무튼 고맙다, 빨리 나가봐. 오리, 케잉, 이즈가 기다리고 있어.]
[알아 등신아.] 잔나가 손을 흔들자 징크스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중지를 들어올렸다.
아이들이 투계를 벌이고 나온 장터는 도깨비 시장이라고 불린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식자제부터 시작해서 출처가 불분명한 마법도구, 불법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무면허 성형수술 까지 온갖 것들이 있고, 그걸 파는 가게 역시 뒤죽박죽 섞여 있다.
정육점 옆에 애완동물가게, 불법도박장 옆에 학원, 등 앞 뒤 관계없이 생겨먹어 사람들이 도깨비 시장이라 부른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딱히 정해진 게 아니라 골목골목으로 알아서 들어간다. 케이틀린과 이즈리얼은 엿장수리어카 옆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백발수염이 길게 난 이 엿장수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약속을 잡는 장소로 활용된다.
[좀 늦네.]
[하여튼 시간 약속을 제때 지키는 걸 본 적이 없어, 이즈 그냥 갈까?]
[이왕 기다린 김에 한 10분정도만 더 기다려 보고.]
[그 말만 3번째야.] 케이틀린이 지루한지 발끝으로 튀어나온 보도블럭을 툭툭친다.
[찾으러 들어나 갈까?]
[길 알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렇게 커 보이지도 않고.]
[길 잃으면 어쩌려고.]
[넌 내일 모래 장가갈 나이가 되서 길 잃는 걱정이냐. 게다가 넌 여기 토박이잖아.] 케이틀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도깨비 시장은 쫌 그래.]
[언제는 아니었어, 겁쟁이.]
[괴담이 너무 많아, 실종된 사람을 사창가에서 찾았는데, 다음날 가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든지, 한 가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가서 보니 방사능 봉을 팔던 가게였고,] 이즈리얼은 여자아이한테 겁쟁이 소리를 들은 게 속상했는지 주워들은 도시전설을 줄줄줄 쏟아내었다. 케이틀린은 그런 친구를 놀려먹을 생각인지 갑자기 와이셔츠 손목 깃을 잡아끌어 시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조금만 들어가 보자.]
[어어어, 싫어.] 그가 발뒤꿈치에 힘을 실어 버티었다.
[야, 한번만 가자니까. 안 죽어.] 장난기가 도졌는지 케이틀린은 몸을 뒤로 돌려 양손으로 이즈리얼의 손목을 꽉 잡고 끌어당겼다. 그래서 골목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등으로 세게 밀어 버렸다.
바닥에 둔탁한 무게를 가진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신문지로 두껍게 포장된 것이었고 무개가 좀 나가는지 굴러가진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케이틀린은 황급히 떨어진 물건을 집어 주려 했지만, 주인이 더 빨랐다.
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 갔다.
[외국인인가?]
[아니, 제는......, 아니다. 너가 장난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쫌 미안하긴 한데, 기분이 별로다.]
[그렇긴 해.]
약간의 사건이 있은 뒤 오리아나, 징크스, 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투계장에서 있던 일을 약간의 허풍을 썩어 풀어 놓았고, 동아리 방에서 치킨을 뜯어 먹으면서 이사장은 도대체 어떤 남자 취향을 가졌는지 논의하였다.
1.
혐오감이 솟구치지만,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참아야만 한다. 일신을 위해.
[야, 이건 쫌 심한 듯, 자제 점.] 억지웃음을 지으며 도리개질을 쳐본다.
[껑껑껑껑.] 어곳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쯤 죽어 허공으로 힘없이 다리를 흔드는 호랑거미가 들린 젓가락을 잡은 체 물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낸다.
비굴함은 먹히지 않는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나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어번 같은 말을 해서 애원해 본다.
축제. 사지를 붙들어 매고 있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내가 당황하고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걸 감각적으로 알아차린 그들은 근육에 힘을 주어서 더욱 확고하게 구속한다. 눈동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반짝인다. 읽고 싶지 않지만, 보인다. 즐거움 바탕에 폭행, 억압, 가학, 눈치, 동질감이 가미된 쾌락이 거리낌 없이 눈에서 쏟아져 나온다.
잔치에 희생당한 돼지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없고, 있다면 그건 청승맞은 노인이거나 미친놈이니까.
고개를 돌려본다. 커튼이 있다. 바닥에 깔려 사지를 구속당한 내 주위에서 적극적으로 구경을 하는 같은 반 학생들이다. 인간 담장은 가담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방관한다. 내려다 보며 함박웃음을 띄고 박수를 치며 삿대질, 고함을 친다.
그냥 동네 사람들. 돼지가 해체 당할 때 주변에서 어느 부위는 어떻게 칼질을 해라, 염통의 색을 보니 피는 마셔도 되겠다 등의 조언을 담당하는 역할. 그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 콜로세움 가장 꼭대기에 앉은 시민은 사자나 검투사나 어느 쪽이 죽어도 아무런 상관은 없지. 아니지, 사자나 검투사는 적어도 나보단 힘이 세니 애초에 이렇게 사로잡힐 일도 없겠지. 바보 같은 비유였다고 생각해 웃음이 나왔다.
[자, 물개야 밥 먹자. 구구구구, 맛있졍?]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상념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코앞으로 거미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렸지만, 어떤 우악스러운 손이 머리끄댕이를 잡아 당겨 원위치 시켰다. 비굴함과 애원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듯 싶다. 다시 한 번 억지웃음으로 애원해본다.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된다. 알아서 기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더 심한 꼴을 당하니까.
소수는 다수를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무리이지만 나는 혼자이다.
입을 크게 벌려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팔을 휘둘러 저항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접는게 현명하다. 도움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열린 주둥이로 거미가 들어오는 게, 팔은 휘두르기도 전에 부러지는 게 1천배는 빠르니까.
장막에서 손이 나온다. 그러더니 볼을 움켜잡는다.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그 위로 무언가 떨어진다. 반쯤 죽은 거미다.
앞니 위에 떨어진 거미는 살고 싶은지 가느다란 앞발로 입술을 더듬어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일초정도는. 주둥이를 잡은 손이 재빠르게 손목으로 돌려서 입을 닫자 시큼하고 역겨운 액체와 악취 그리고 바스라진체 떠는 갑각류의 껍질이 느껴진다.
목적을 이룬 아이들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나는 비칠거리면서 일어나는데, 온몸이 뜨겁고 지끈거리는 게 느껴진다.
[와하하하하하하.]
[거미 먹었대요, 거미 먹었대요.]
[맛있어? 하나 더 줄까?] 삽시간에 웃음이 교실이 웃음바다가 된다. 끝도 없이 조롱, 계면쩍음, 희열, 성취감, 환호가 뒤섞인 각양각색의 웃음과 시선이 들끓어 오른다. 저 멀리서 상황을 외면하던 무리들도 피식거리며 웃는다. 아마 추억으로 남으리.
결국 난 화를 완벽하게 참을 수 없었다.
[에퉤퉤퉤, 아, 하지 말라니까.] 허풍스런 몸짓, 아무도 쓰지 않는 긴 의성어로 거대한 분노를 숨겨본다. 이게 최고 수위의 저항이다. 주변사람들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의 반항이다. 이 이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 이상은 마치 애벌래가 갑자기 자신을 김아무개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니까.
모두는 내가 이름 석자를 걸고 살아가길 원하지 않고 광대로 살아가길 원한다.
내 처지는 확실하게 부당하고 억울하다. 날 이렇게 대우하는 녀석들의 낮은 자존감, 짖궂음, 폭력성이나 가정환경도 알고 있다. 주변을 구경만하는 같은 반 학생들의 손익개산, 무관심, 끼고 싶은데 보는 눈치들도 안다.
알기에 이해가 된다, 아니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이 학교의 생태이고 내 위치이다.
입을 행구기 위해, 날 필요로 하지만 끔찍이도 있기 싫은 교실을 뒤로 하고 나온다. 웃음과 시선이 빠져나와 발목을 붙잡을 것만 같았다. 뒷문을 단단히 닫고 뒤돌자 바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같이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과 함께 복도 신발장에 기대고 있었다.
이상한 조합이다. 바이 같은 일진이 있는 그룹에 안 좋은 소문이 가득한 징크스가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오리아나 같이 학교에서 기대를 거는 우등생도 있었고 전학 온 잔나와 케이틀린도 있다. 잔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특기생이니 전학생이니 하는 것을 뛰어넘어 누구와도 잘 놀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케이틀린은 평범했고 저런 특이한 아이들이 많은 곳은 피하는 게 당연한데 떡하니 어울리고 다니었다. 그리고 나처럼 괴롭힘을 받던 이즈리얼도 있다.
이즈리얼이 시선을 피했다.
그 태도에 갑작스럽게 심정의 변화가 찾아왔다. 입안에 쓴맛이 감돌면서 간 밑에서 썩고 있던 증오의 악취가 꾸물꾸물 올라온다. 그의 행운을 시기한다. 나와 같은 처지었는데 어쩌다가 바이와 친해졌고 무리에 끼었다.
그는 탈출했다.
[야이 병신세끼야.] 바이가 분홍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칠게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에? 나?]
[그래이 세끼야, 넌 꼬추도 없냐? 들이받아. 쪼개? 웃지 마 개섹꺄. 웃음이 나와?]
[적당히 해.] 옆에 있던 잔나가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린다. 그녀는 거칠게 손을 처내고 팔짱을 단단히 낀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면서 화장실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자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늘 그랬듯이 빠지면 된다. 가장 찔리는게 많은 녀석이 은폐하기 위해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상담 중, 교무실에서 잡일, 아니면 부서진 형광등을 받으러 비품실에 갔다거나. 꼬리를 숨기는 데에는 이골이 난 녀석들이니까.
찬물로 입을 헹구자 벌래 부스러기가 쏟아져 나온다. 속이 역겨워서 토악질을 해 보려 했지만, 빈속에서는 노란 위액만 조금 나올 뿐이다. 이런 게 재미있나, 남에게 고통을 주고 힘들어하는 걸 좋아하다니 변태 같은 놈들.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리는데 수체구멍에 찌그러진 몸통이 걸린 거미가 보인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못살게 굴지. 아니면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휴, 거미는 또 뭔 날벼락이겠어.]
[혼자 비 맞은 중 염불처럼 궁시렁 거리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 하다못해 부모님한테라도.] 시선을 올려 세면대 거울을 보자, 그 속에서는 엉망진창이 된 거지꼴로 울상의 누군가가 서 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의 마의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고마워, 하지만 소용이 없어.]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핫! 자랑은 아니지만, 중학교 때부터 이런 일을 당해봐서 이것저것 다 해봐서 알아.]
[지금은 지금이야.]
[아니야, 실로 어른들은 불만이나 변화를 싫어해. 경찰은 신고가 들어와서 일거리가 생기는 걸 싫어하고, 교사들은 아이들의 호소에 귀 기울이기엔 박봉이라 여기고. 또 부모들은 가장 자랑스러운 자식이 약하고, 멍청한데다, 남에게 괴롭힘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모두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침묵하는데.]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는다.
[2년하고도 반년만 참으면 되. 내가 참으면 된다고. 그럼 모두가 편해.]
[하지만 너무 길어.] 거울 속 그가 따지고 든다.
[중학 3년도 버텼는데 뭐. 그리고 그때 보다는 애들이 나이도 먹었으니 덜 하겠지, 그렇겠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보았지만 어쩐지 조금 불안했다. 거울 속 친구는 상냥하게도 이런 불안을 느꼈는지 미소를 띠워 안심시켜 주려했지만, 그 어색한 미소는 울 수 없는 사람이 울고 싶을 때나 보이는 웃음이었다.
일교시는 벌써 시작했지만 교사는 들어오지 않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아이들은 이 틈을 노려서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속닥임 정도였으나, 십분이 지나도 이십분이 지나도 도통 선생의 코빼기가 보일 생각을 하지 않자 술렁이던 교실은 삽시간에 도떼기시장처럼 왁자지껄 해졌다.
미닫이문을 밀어 젖히며 반장이 들어온다. 그는 옆구리에 낀 갱지묶음을 풀어 뭉텅뭉텅 나누었다. 그에게 묶음을 건네받은 맨 앞자리 아이들이 가정통신문을 뒤로 넘겼다. 일순 조용해졌던 교실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종이가 교실에 뿌려지자 함성을 지르고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오, 수학여행을 아오니아로 간다고? 돈 깨나 썼겠네.]
[쳇, 다 세금에서 삥땅치고서 생색내는 거지. 그게 어디 지들 호주머니에서 나왔겠어.] 별것도 아닌 말에 바이는 언짢은 기분을 풀기위해 잔나에게 핀잔을 준다.
[너 참 말 잘한다.] 그는 비꼼으로 맞수를 두었다.
[우와 우와 우와 대박! 아이오니아 아이오니아! 어떻하지!] 케이틀린은 흥분했다. 닭이 물 마시 듯 통신문 한 줄 읽고 옆자리에 앉은 오리아나의 어깨를 흔들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또 짝지의 어깨를 흔드는 것이었다.
[케이틀린 진정하세요. 그냥 여행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처음이라고. 이렇게 친구들이랑 해외에 나가는 건 말이야.]
[중학교에선?] 바이가 의아해 한다.
[가긴 했는데, 알잖아 시골에서 살았던 거. 어딜 가겠어, 맨 날 가는 산이나 올라갔지.]
[첫 경험이네.] 징크스가 끼들끼들 웃는다.
앞자리에 앉은 잔나가 일어나 한껏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을 보았다. 오직 케이틀린만 빼고서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방아쇠를 당긴 건 오리아나였다. 그녀는 의아하게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이런 거대한 오해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니, 도대체 정부는 뭘 하는거야?] 신호탄을 본 잔나가 이마에 손을 얹고서 통탄했다.
[이해해줘, 케이틀린은 나보다 공용어를 몰라, 징스랑 삐까친다고.]
[다들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케이틀린, 수학여행의 수학은 이 교과서를 지칭할 때 쓰는 글자에요. 그러니까 숫자를 다루는 학문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수학여행은 여행을 다니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수학적 원리를 찾아 배운다는 의미에요. 예컨대 경작지 넓이에 따른 가용 젖소의 수,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어떤 방식으로 가지를 뻗는지, 건축물에 사용된 원리 등을 찾아내는 거에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철저한 탐구의 과정이지.] 잔나, 바이, 오리아나가 마치 대본으로 연습을 한 듯 손발이 척척 맞게 기만전술을 펼쳤다. 혀가 세 개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내는데 순박한 양 한 마리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다.
[뻥치지 마, 그러면 뭣 하러 여행을 가? 가만히 앉아서 책이나 읽지.] 너무나 말의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가서 그런지 따지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
[학교에서 보내 주는 거야 케잉. 곱게곱게 줄 것 같아?] 바이가 한술 더 떠본다.
[그래도......,]
[속고만 살았어?] 잔나가 쐐기를 박고 맞추어서 주변 친구들의 얼굴이 한결 차분해 진다. 케이틀린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지만 정확하게 어떤 지점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이즈리얼 자?]
[어허, 잘 자는 애를 왜 깨워.] 잔나가 막고 나선다.
[저기, 이즈리얼, 이즈리얼, 애들이 그러는데 수학여행이 여행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가는 거라는데 맞아?] 케이틀린은 어미에게 젖을 달라는 아이처럼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이즈리얼의 등을 흔들며 칭얼거렸다. 그는 깊게 잠들었는지 밀고 당기는 대로 흔들렸다. 하지만 웃음을 끝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금니를 꽉 물었지만, 튀어나가지 못한 웃음은 고무공처럼 몸속을 이리처리 튀어 다니는 바람에 전신이 유쾌함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날 속였구나!] 케이틀린은 고개를 휙 돌려 친구들을 보았다. 그들은 늑대처럼 히죽이고 있다. 분에 못이긴 그녀는 가만히 자고 있던 이즈리얼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 학교가 시장통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판단한 선생들은 일교시가 거의 끝날 때 들어왔다. 수학여행에 대한 기대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일상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각 반에는 해야 될 일이 하나씩 있다. 정원청소, 호수 물고기 밥 주기, 창고비품정리, 과학실 관리, 도서관 정리 같은 좀 큼지막한 일들 중 하나를 각 반이 하나씩 맡는다. 케이틀린의 반은 학교 뒷산에 있는 토끼우리를 관리하는 일이다. 사육장은 분리수거장을 지나서 오솔길을 따라 산을 조금 타면 나온다. 다른 일들에 비해서 힘이 많이 들긴 하지만 하루 종일 좁은 교실에서 복작거리는 교실에서 나와 어슬렁거리며 토끼도 구경 할 수 있어서 좋아하는 아이들도 꽤 있다.
사육당번은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케이틀린과 오리아나가 거의 도맡아 하기 때문에 교실에선 암묵적으로 바이의 그룹이 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꽃샘추위가 한창인 오솔길을 따라서 아이들이 사육장으로 향한다.
[근데, 우리가 여행가 있는 동안 토끼는 누가 돌보지?]
[사료를 잔뜩 부어 놓고 가면되지, 물통도 큰 거 하나 놓고. 아님 걍 냅둬.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한 오일은 물만 마시고 살아도 안 죽어.] 바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뒈지는 줄 알았지.] 징크스가 토끼 똥을 주워서 손가락으로 굴리며 대꾸했다.
[으, 힘들었겠다. 그래도 되는데 한 2일치 먹이와 물만 넣어 놓고 가면 되, 너무 많이 넣고 가면 밑도 끝도 없이 먹어 대서 배 터져 죽거든.
[사스가 농촌 소녀.] 징크스가 똥을 손으로 퉁기며 놀린다.
앞장서서 길을 가던 잔나와 바이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얼마만큼의 물과 건초를 넣을지 왈가왈부하던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이 앞에 있던 징크스와 이즈리얼과 부딪힐 뻔 했다.
[낯이 있은 뒤통수인데?]
[눈깔이 썩은 동태눈이구나, 제드 잖아. 어깨 사이에 있는 건 관상용이냐?]
[누가 몰라서 물어? 교장 나부랭이가 여기 왜 있냐는 거지.]
[뭘 쫄아, 죄졌어?] 징크스가 투닥거리는 두 친구의 엉덩이에 발길질을 한다.
[아, 그렇네 괜히 쫄렸어.]
[직업병이지, 경찰이나 군인 선생만 보면 괜히 피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빅 꼰대라서 그런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지.] 아이들은 어슬렁거리며 다시 오솔길을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오리아나가 붙임성 있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래, 밥은 먹었니?]
[예, 교장선생님은 뭐하고 계셨나요?]
[토끼 좀 보고 있었단다. 정말로 숫자가 불어나는 게 눈에 보이는 거 같구나. 조만간 암수를 구별해서 칸을 나누어야겠어.]
[히힛, 토끼니까. 빨리빨리 많이많이 짧게짧게.] 징크스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쪼개자 옆에 있던 잔나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굴을 파고 넘어갈 수도 있어서 소용이 없을 텐데.]
[그럴지도, 그렇다고 저렇게 늘어나는 것을 수수방관 할 순 없잖니. 그럼 고생하렴.] 제드는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솔길을 내려갔다.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잘 것이지.]
[입에 걸레를 무셨나.]
아이들이 자물쇠를 열고 토끼장으로 들어가자 아기토끼들은 잽싸게 굴속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건초 좀 씹어본 늙은 토끼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건초를 갈고 물통에 물을 체우는 아이들을 구경할 뿐이다.
2.
땅거미도 지고 야간자율학습도 끝났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학교는 학생들로 바글거리던 대낮의 생동감이 거짓말같이 을씨년스러워진다. 활엽수들이 잎을 틔우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다. 빼곡하게 산을 덮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습한 냉기가 맴돈다.
[이 녀석 힘내봐.] 토끼장 앞에 선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금속이빨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짧게 가로지른다. 자물쇠가 끊겼다.
[퉷, 수고했다고 못할망정 재촉질이야?] 절단기는 강철이빨을 두어 번 맞부딪쳤다. 말은 그렇게 해도 너무나 손쉬운 일이였는지 내심 아쉬운 표정이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지. 조금만 기다려봐 할 일이 태산같이 생길 터이니.]
[그래 친구, 잠시 쉬고 있으라고.]
사내는 토끼장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토끼들은 이제 침입자와 함께 갇혔다. 그는 절단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허리춤에서 칼등이 조금 휜 곡도를 꺼내 들었다. 그가 수줍게 웃는다.
작은 핏방울 하나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수직으로 튀어오르는 동안 습기를 먹어서 아주 조금 퉁퉁해진 다음 가해자의 얼굴에 가서 터졌다. 발치에 쓰러진 토끼의 털같이 하얀 그의 뺨에 시간이 지날수록 홍화들이 점점이 피어오른다.
[감이 좋아, 깔끔하게 잘들어.]
[시작이 좋군.] 칼날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검은 자신의 작품을 품평한다. 도살자는 그가 조금 더 성취감에 취해있도록 배려하며 다음 희생양을 물색했다.
두 번째 재물은 갓난아기만한 토끼다. 봄이 다가오자 털갈이를 시작했는지 군데군데 갈색털이 돋아나는 중이다.
토끼는 이렇게 죽었다.
우선 우악스러운 손이 양귀를 붙잡고서는 바닥에 수 번 패대기쳤다. 한두 번째에는 발길질을 하거나 앞발로 귀를 붙잡은 손을 긁었지만, 등뼈가 으스러지자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잔혹한 인간은 숨통이 완전하게 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났을 때 토끼의 왼쪽 귀는 뜯어져 나간 체 온몸의 중요한 뼈들이 으스러져 숨만 붙어 있었다.
[워후! 화끈한데!] 절단기가 전신을 떤다.
그 벽에 세워 두었던 칼을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배를 찌르자 그 차가움에 놀란 토끼는 숨을 멈췄다. 배가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자 아직 생명의 훈기가 빠져나가지 않은 내장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한밤의 중압감도 그를 억누르지 못했다. 냉엄한 밤공기 속에서 내장의 온기를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피내음을 음미했다. 그는 모든 것을 맘껏 느끼었다.
아직 부족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양배추를 담는 그물망을 꺼내서 작은 굴 앞에 벌려놓았다. 굴속에는 아직 여름의 무더위도 격어보지 못한 어른 주먹 두 개만한 어린토끼가 있다. 작은 둔덕위에 선 사냥꾼은 발을 구른다. 어린것은 지리적 이점, 공포스런 소음만 참으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기엔 너무 어렸고 공포에 맞서기엔 너무 약했다.
그녀는 도망을 선택했다. 굴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이내 초록색 그물망에 붙잡혔다. 사냥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망을 낚아챘다. 공중에서 대롱대롱 매달린 체 나일론실을 물어뜯었지만 도리어 가느다란 실에 이가 끼어버렸다.
그는 손을 집어넣어 뒷목을 붙잡은 다음 그물에서 거칠게 희생물을 꺼냈다. 반대편 손에는 어느 사이엔가 본드가 들려있었다.
그는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대각으로, 십자로, 노란 접착제로 꼼꼼하게 토끼의 입과 코를 막았다. 봉합이 끝나자 그는 토끼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닿자마자 그녀는 미친 듯 앞발로 주둥이를 할퀴어 숨통을 트이게 하려했지만, 도리어 말라가는 본드에 앞발이 주둥이에 붙어버렸다. 치명적인 화학약품의 악취는 머리를 점점 침식해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을 더디게 만들었다.
서서히 폐가 오그라든다. 잔혹하게도 생의 본능은 포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토끼는 흙바닥에 주둥이를 문지른다. 피부가 까지고 한쪽 눈이 돌부리에 찢어지더라도 한줌의 신선한 공기에 비하면 대수로웠다.
그러나, 이 모든 저항이 운명을 거스르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 맑은 한 줌의 공기를 허락받지 못했다.
순식간에 3마리가 죽었다.
[이제 공평하게 한 마리씩 조졌으니, 내 차례군. 이가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어.] 절단기가 잊지 말라는 듯 외친다. 물끄러미 발끝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주머니에 본드를 집어넣고 절단기를 들어올렸다.
[급하긴, 밤은 길어.] 그는 쾌감으로 가득한 웃음을 비추었다. 이 미소는 달맞이꽃처럼 밤이 깊어질수록 흐드러지게 피었다.
다음날 새벽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은 평소보다 일찍 학교로 들어오는 버스에서 내렸다. 사육당번으로써 책임감 때문에 수학여행을 위해 토끼우리에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려 했기 때문이다. 어떤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체 그 동한 헤아려 보지 않은 토끼들이 몇 마리인지 왈가왈부 하고 있었다. 숫자는 중요했다. 여행을 간 동안 얼마만큼의 먹이와 물을 두고 가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토끼장에 도착한 두 소녀는 할 말을 잃었다.
아마 제드가 올라오지 않았으면 두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장은 오리아나에게 자초지종 설명을 듣고서는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케이틀린을 돌보라고 이야기한 다음 그는 비품창고에 가서 삽, 빗자루, 마대자루, 고무장갑을 가져왔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토끼들이 발견되자 케이틀린은 쏜살같이 분리수거장에서 종이상자를 구해왔다.
[뭐 하시는 거죠?] 오리아나는 꽂아놓은 삽을 들고서 다친 토끼들에게 다가가는 제드에게 물었다. 제드는 그녀를 흘끔 보더니 삽의 꼭지 부분을 뒷발이 잘려나간 토끼의 목덜미에 가져갔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삽이 지면에 박혔다.
[고통을 덜어 줘야지.] 무뚝뚝한 대답이다. 그는 삽을 뽑아서 이번엔 네발에 못이 박혔던 토끼에게 다가갔다. 철망너머로 이 모습을 본 오리아나가 뛰쳐나가 삽을 움켜잡았다.
[누구마음대로요. 사육은 저희 담당이니 알아서 할게요.]
[쓸데없이, 고통만 늘릴 뿐이야.]
[알게 뭐에요. 그렇다고 죽여요?] 기계소녀는 교장의 눈동자에 맞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설픈 생각이야. 여기 애들 중 몇 마리나 살아남을 거 같아?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두 번 다시 뛰거나 정상적으로 살 수 없어. 나에게 맡겨.] 오리아나는 도리개질을 친다. 그리고 온갖 오물, 진흙, 털, 피, 소변, 대변, 살점 등이 묻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삽을 더욱 움켜쥐는 것이었다.
[싫어요.]
[수의학은 아니?]
[몰라요.]
[그렇다면 분명히 죽어. 너희가 제 아무리 열심히 헌신적으로 돌보더라도 반듯이 죽는다고.]
[누가 알아요.]
[어설프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누군가를 돕는 것은 때론 희생을 요구한단다. 대다수는 수의학의 화타가 오지 않는 이상 죽어. 나에게 맡겨, 너희가 힘써 도와준 토끼를 돌볼 일도 없는데다가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마음의 그림자로 드리울 일도 없단다. 때론 포기해야 다치지 않아.]
[싫어요.] 이번엔 케이틀린이 대답을 했다. 그녀는 마의를 벗어 상자에 깔고선 그 위에 다친 토끼들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저희가 돌볼께요.]
[좋다.] 제드는 삽을 든 손에서 힘을 뺐고 오리아나는 공구를 잽싸게 뒤로 숨겼다.
[트라우마도 경험이긴 하니까. 이따 내려가면서 내 방에 들려 구급약을 챙겨 가거라. 그리고 삽은 이리 주고. 묻어는 줘야지.] 오리아나는 미심쩍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삽을 건냈다. 그는 삽자루에 묻은 오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털어내고 묫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오리아나는 다시 사육장으로 들어가 마대자루에 사체들을 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룹에서 나름 성실한 두 사람이 조례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고 1교시가 끝날 때 까지도 함흥차사였다. 그래서 영문을 모르는 잔나, 바이, 징크스는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총과 가시 돋친 질문을 감내해야했다. 교육자들의 눈에는 순진한 어린 양을 타락시킨 범인이 눈앞에 있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2교시에 흙투성이가 된 두 사람이 나타나자 교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벌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떠벌리지 않았고 가까운 친구들한테는 나중에 이야기해준다고 얼버무렸다.
세 사람은 화가 났지만 참았고, 이즈리얼은 덤덤했다. 학교에서 풍문은 엄청나게 빠르게 퍼져나간다. 청소시간이 되자 나머지 네 사람은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짐작했다.
화창한 날이 지나간다. 봄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저녁 급식을 먹고 아이들이 동아리 방에 도착할 쯤에는 주변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동아리활동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런, 그래서 너네가 수업을 빠졌구만.] 오리아나가 토끼장에서 겪은 일을 풀어놓자 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쯧, 난 소시민의 일탈인 줄 알고 내심 기뻐했는데. 좋아해야할 일이 아니었네. 참나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 도대체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는지 모를 일이야.]
[나쁜 놈, 토끼가 뭘 잘못했다고.] 케이틀린이 울먹이자 오리아나가 어깨를 추슬러 준다.
[걱정 마세요, 범인은 금방 잡힐꺼에요.] 오리아나의 위로에 갑자기 동아리 방에 정적이 흘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오리아나, 잡을 생각은 아니지?] 잔나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오리아나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보이지 않는 검은 동공이다.
[아서라 아서, 미친놈을 우리가 왜 잡아.]
[잡는다니요, 다만 누가 범인인지 밝혀낼 뿐이에요.]
[어떻게?]
[단서가 어딘가에 있을 꺼에요.] 오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몇 일 전 도박장에서 딴 고서다. 징크스가 관리하기 귀찮아서 그녀에게 맡겼다.
[아아, 됐어, 됐다고. 사양이야.] 바이가 손사래를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징크스의 머리를 들고 앉은 다음 조심스레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이야기라도 들어주세요.]
[됐어, 쓸데없는 일이야. 그런다고 죽은 토끼들이 살아 돌아오는 일도 아니고. 걱정하지 말라고. 애당초 우리한테 잡힐 놈이면 이런 일도 하지 않아. 토끼야 교장이 더 사 오겠지. 쓸데없이 나 댈 필요는 없어.]
[바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케이틀린이 짐짓 화난태도로 따졌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 하고 소파에 몸을 파묻을 뿐이었다. 잔나는 부러운 시선을 바이에게 던졌다.
창문을 등지고서 케이틀린과 오리아나가 나란히 앉았다. 왼쪽에는 이즈리얼이 앉았고 오른쪽에는 잔나가 서 있다. 양철소녀는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 말하는 동시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입구는 열려져 있었어요. 마치 조롱하려는 것처럼 잘린 자물쇠가 걸려있었고요.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먼저 눈에 들어온 장면은 몸통이 세로로 반듯하게 잘린 토끼였어요. 어디서 왔는지 파리가 몇 마리 붙어있었고 쏟아진 내장근처는 질척했어요. 옆에는 곤죽처럼 늘어진 체 배가 갈린 토끼랑 주먹만한 새끼가 입에 본드칠이 된 체 죽어있었어요.]
[난 그때 너무 놀라서 잘 못 봤거든. 안쪽에 있는 녀석들이 더 걱정돼 지나쳤어. 그런데 안쪽은.] 케이틀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저도 무슨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지 몰라서 분간이 안갔죠. 그때 케이틀린이 안쪽에서 나와서 벽을 짚은 체 토를 하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그제야 코끝을 찌르는 비린내나, 미약한 파리의 날갯짓 같은 게 들렸어요. 안쪽 사육장 입구 벽엔 몸 한가운데 못이 박혀 토끼들이 매달려 있었어요. 끝에 몇 마리는 하반신이 불에 탔는데, 본드칠을 하고 불을 지펴서 그런지 탔다고 하기엔 그슬렸다 보는 게 훨씬 맞을 것이에요.]
[아 썅 닥쳐.] 징크스가 고개를 들고선 벌컥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픽 쓰러진다.
[뭘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딱 보면 몰라? 미친놈이잖아. 포기해.] 바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입맛을 다신다.
[아, 근데 그럼 너네 둘이서 치운 거야? 우리 부르지.] 잔나가 퍼뜩 물었다.
[아니 교장선생님이 도와줬어.]
[에이, 그 영감탱이한테 도와 달라 하지 말고 우리한테 오지.]
[그게 아니라, 올라왔어.] 케이틀린은 주저했다.
[뭐야, 교장이 범인 아니야?] 갑자기 징크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설마 제드가 그랬겠어, 평소처럼 토끼장 확인 차올라 왔겠지.] 잔나가 변호를 해준다.
[그러고 보면 되게 이상하기는 했어. 살아남은 토끼들을 죽이려 했거든.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려나?]
[진짜야?]
[사실이에요. 하지만 교장선생님의 말도 어떻게 보면 맞았어요. 도저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토끼들을 더 이상 고통 받게 할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얼어 죽을. 범인이네, 현장을 답사하고 다시 돌아왔네.] 징크스가 신명이 나서 나불거린다. 아무도 그럴싸하게 반박을 못하자 그녀는 더욱 기세등등해진다.
[아구가 딱딱 떨어지네.]
[그래도 교장선생님은 아닐꺼야.] 지금까지 조개처럼 입을 꼭 닫고있던 이즈리얼이 말했다.
[아앙? 죽고싶어?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자신의 가슴팍에도 키가 미치지 못하는 징크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하자 그는 주눅이 들었다.
[땅꼬마 그래도 노땅은 간혹 머리를 들이 밀었잖아.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해?]
[얼씨구.] 징크스는 소파에서 뛰어내려 오리아나 앞에 있던 고서를 붙잡아 흔들었다.
[우린 모두 어느 정도는 정신이 나갔어. 미친거지. 여기 적힌 대로 이따구의 구역질나는 일을 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놈들 정도야 저 뒷골목 창녀들한테 물어보면 쐬 빠졌다는 걸 알 수 있지!] 이상하게도 징크스는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붉은 눈동자에서 광체를 쏟아 냈다. 그녀는 책을 책상위에 던지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히히히, 끝내 주는데. 그 제드가 말야.] 징크스의 혼잣말이 끝나자 방은 다시 침묵에 쌓였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침잠한다. 누구는 범인을 추리를 하고, 토끼를 걱정한다. 어떤 이는 어두운 동질감을 느껴서 행복하고, 친구를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꼬이고 답답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든 게 하찮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과학준비실에는 한 아이가 앉아있다. 개수대에 버려진 화학약품들이 제대로 용해되지 않았는지 이상한 비린내가 감돈다.
그는 두꺼운 검은색 플라스틱으로된 실험대 위에서 조심스럽게 화학약품을 다루고 있었다. 메틸알콜을 천에 조금 적셔서 조심스럽게 팔뚝을 문지르는 그 장면을 유리병 속에서 속내를 전부 까보인 개구리가 지켜보고있다.
[젠장, 신박한 세끼들, 자는 동안 낙서를 해?]
평소 같으면 학교에서 아무리 졸려도 엎드려 자지 않는다. 하지만, 어제 개같은 수작에 걸려드는 바람에 날밤을 새서 어쩔 수 없었다.
[시발, 내가 친구 숙제 해주는 거랑 지들꺼 안 해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천으로 팔뚝에 그려진 해골무늬를 지우다 보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그때 이 말을 못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어제 밤에 숙제를 대신 해주느라 늦게 자서 어쩔 수 없이 쉬는 시간에 졸고 말았다. 승냥이 같은 녀석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뚝에 낙서를 한것이다.
반에는 특례로 입학한 친구가 있다. 말이 특례이지 자폐아이다. 한동네에서 오래 얼굴을 알고 지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챙겨주게 되었는데, 종종 망할 일진 놈들이 장애인과 찐따라며 놀려대어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괜찮다. 그 정도 놀림이야.
문제는 공부다.
시험을 대신 처 줄 수는 없어도 숙제정도면 내꺼 할 때 조금 힘써서 도와줄 수 있다. 그 녀석 부모님이 그가 여기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가 기억이 난다.
자신의 아들이 일반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울면서 같은 반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사서 돌렸다.
문제는 어머니는 입학이 곧 졸업인줄 아시는 옛분 이였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규정이 있어서 이 학교는 최소한의 점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가 없다. 입학은 시키되 졸업은 시키지 않는다. 보여주기 식이다.
오른팔의 낙서만 지웠는데도 따라 놓은 알콜을 다 썻다.
일어나 온갖 약품이 담긴병을 뒤적여 메틸알콜을 꺼냈다.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맞은편에 박제된 동물들의 표본이 보인다.
[젠장, 내 코가 석자인데 이게 무슨 짓이람.]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굴 보고 지낸 정이 있어서 힘닿는 대로 도와주던 것이 문제였다, 일진들은 평등이니 뭐니 운운하면서 빈번하게 숙제를 떠넘겼다.
[누가 그러기에 도와주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버려.] 클로로폼에서 내장을 전부 꺼내보이는 붕어가 말을건다.
[어차피 끽해야 3년만 보고 말 녀석들이라고. 이사장이 그랬지.]
[아아, 맞는 말이야. 이사장은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지. 하지만 난 그녀가 싫어, 책임감이 하나도 없는거 같아.]
[책임감? 그런건 없어, 누구도 책임을 지기 싫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책임감 있는 사람이되라고 가르치는것 아냐? 몇 일전의 그 사건만 해도 봐봐, 신드라가 어떤 책임이라도 진 적이 있어?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저런 자리까지 올라간거야, 너와는 틀려.] 생쥐가 비웃자 몸에서 떨어져 나온 여러 부위들도 그에 맞추어 각자의 몸을 떨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화학약품 때문이라 생각해 창문을 열었다.
[날씨는 끝내주게 좋네.]
두 번의 봄이 남았다. 세 번째 봄이 오는 날엔 여기에서 벗어나서 더 나은 곳에서 지내겠지.
[아닐껄? 사람은 바뀌지 않아. 어디를 가던 너보다 강한 녀석들은 있을꺼고, 누구도 너를 도와주거나 보호해 주지 않을꺼야, 왜냐하면 넌 약하고 겁쟁인데다 누구한테도 해를 끼치고 싶어하지 않잖아.]
[최악이군, 아 한 가지 더. 그런 주제에 힘든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해.]
좌우로 깨끗이 잘려 단면을 보여주는 하늘다람쥐의 부분들이 각각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주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뭘 고민해? 다 무시해 버려. 저 장애인이 졸업을 하건 말건 너와 뭔 상관인데, 너를 괴롭히는 녀석들? 우습지 않아?
[그만, 닥쳐 이 시발놈들아!] 고함을 질렀지만, 표본들은 대화를 멈추는 대신에 작은 속삭임을 불어 넣었다. 복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계획이 저 뱃속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올라왔다.
생각은 매의 발톱처럼 머리를 꽉 움켜잡고 뇌를 놓아주지 않았다.
[에고 깜짝이야. 너 보기보다 성깔이 있다?]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멱살이라도 잡았는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 끝엔 주황색 빗자루를 들고 있는 케이틀린이 서 있었다.
[어? 어어어어? 너가 왜?]
[무슨 소리야? 지금 청소 시간이잖아, 요번 달 청소 구역은 여기더라고, 여기는 잘 쓰지 않아서 아무도 청소를 하러 오지도 않고 검사 하러 오지도 않잖아. 그래서 내가 왔는데.] 케이틀린은 사내아이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긴 한데, 너도 왔잖아.]
[하긴. 도진개진이네. 청소나 하자.] 케이틀린은 어깨를 으쓱이고선 창가로 가서 문을 열었다.
빗자루들이 종횡무진 바닥을 누빈다. 두 사람은 별 말없이 바닥을 쓸어 먼지를 담고 휴지통에 버린다. 바닥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다 생각한 남자아이가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가져오자 여자아이는 과학실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대걸레가 화강암 바닥을 닦으며 지나갈 때 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먼지 가루가 사각이는 소리를 낸다.
[아까는 놀랐어, 너도 욕을 할 줄 아는 얘였구나.]
[하하하하, 나도 사람이니까, 일단은.] 남자는 맥아리가 없는 목소리에 계면쩍은 웃음, 확신 없는 단어선택을 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오라를 내뿜었다.
[의외였어, 엄청 순한 성격인줄 알아서 더 놀란거 같기도 하고.]
[그랬나?]
[매번 그런 일을 당하는 데도 화를 내지 않잖아.]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싸울 수도 없잖아.] 그는 쓰게 웃었다.
[왜? 그냥 싸우면 되지.]
[난 싸우거나 다투는 게 싫어.]
[그러면 맞는건 좋아?]
[그것도 싫지.]
[그러면 왜 참아?]
[다투거나 싸우는 게 싫어서. 참는 건 쉬워, 시간에게 모든 걸 맞겨 버리면 되니까.]
[바보 같아.]
[듣고 보니 그렇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아. 너가 무슨 황희정승도 아니고.]
[정승은 무슨, 그냥 결정장애지.]
대답이 영 시원치 않은지 여자아이는 실내화 코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아이는 묵묵히 걸레질을 해나갔다.
과학실 청소가 끝났고 각자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선 한 명은 교실로 다른 한 명은 화장실로 갔다.
그렇게 주중의 하루가 끝이 났다.
평화롭다 못해서 권태로운 주말이다. 학생들은 토요일 자율학습을 하러 학교에 나왔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기 힘든지 곳곳에서 조는 자는 아이들이 보인다.
공부 보다는 조금은 흥미로운 동아리 활동도 몰려오는 잠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인지, 동아리 방들이 모여 있는 별관도 간간히 들려오는 밴드부의 기타 퉁기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다.
[으함, 나른한데.] 바이가 사자처럼 하품을 한다. 기지개를 켜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동아리 부원들은 각자 할 일에 몰두하고 있거나, 마찬가지로 졸음에 겨워 고개를 꾸벅이고 있다.
[야, 그냥 자빠져서 쳐 자, 그러다 마빡 책상에 찧겠다.] 케이틀린은 잠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고개는 90도로 꺾였다.
[쓰읍, 나 안 잤어.] 그녀는 떨어지는 침을 한번 삼키었다.
[저거 봐 저거, 얼마나 편해 보여.]
바이가 엄지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잔나가 소파에 길게 누워서 잠을 자는 중이다. 키가 커서 팔걸이 밖으로 다리 한쪽이 튀어 나와 있고 반대쪽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 배 위에 왼손을 올리고 오른쪽은 머리를 받쳐 굉장히 편해 보인다.
[졸린 건 아닌데, 졸음이 쏟아지네.]
[그게 졸린거야. 이번엔 무슨 책 읽냐?]
[추리소설, 주인공이 어떤 책을 주워 읽게 되는데 그 내용대로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
[끔찍하네.]
막 수다가 펼쳐지려고 할 때, 탕비실에서 오리아나가 쟁반에 여섯 개의 컵을 올린 체 나왔다.
[여섯 개? 저기 두 마리는 자고 있는데?] 필요한 만큼만 준비를 하는 오리아나가 굳이 자고 있는 징스와 잔나의 몫까지 준비를 한 것이 이상한지 바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모양이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미안하지만 저 두 사람 좀 깨워주세요.]
[왜, 잘 자는데 뭣 하러 깨워, 자게 냅둬.]
[토끼와 관련된 일이에요.] 오리아나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녀의 옹고집을 아는 바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위에 길게 늘어져 있는 잔나를 발로 차서 깨웠다. 깜짝 놀랐는지 그는 일어나자마자 조금더 곱게 깨워줄 순 없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 불평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소파 뒤, 바닥에 담요을 깔고 웅크려 자는 징크스를 흔들어 깨웠다.
[야 이년아, 남녀차별 하냐? 나도 좀 곱게 깨워주면 안되냐? 무슨 알람이 엉덩이를 걷어차는 거야?]
[어허, 어떻게 개와 사람을 깨우는 게 같을 수 있겠나.]
약간의 소란이 벌어지고 나서 아이들은 책상에 모여 앉았다. 바이와 잔나는 말로 투닥이는 중이며, 징크스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책상위에 엎어져서 잠을 계속 자려했다. 이즈리얼은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고 케이틀린은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책을 읽는 중이였다. 회의를 소집한 오리아나는 그 장면을 잠자고 보고 있었다.
[다들 잠 좀 깨셨나요? 그러면 잠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오리아나가 조용하지만, 확실히 모두의 귀에 들리도록 말을 했다. 케이틀린은 책을 덮고서 팔꿈치로 징크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안자고 있어, 피곤해서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 해.] 징크스가 설득력 없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편한 데로 하세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토끼의 일로 시작할 게요. 안타깝지만,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토끼들은 몇 마리만 빼고 다 죽었어요.]
[그래도 몽당이랑, 궁예는 살았어, 카이져쏘세도 말이야.] 케이틀린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자못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럴 만도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토끼들을 가장 헌신적으로 돌본 사람은 케이틀린이였다. 비록 대부분의 토끼들을 묻어야 했지만, 가장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세 마리의 토끼가 전부 살아남았다. 양쪽 귀가 잘린 몽당이와, 한쪽 눈에 못이 박혔던 궁예, 그리고 왼발이 잘린 카이져쏘세는 지금은 토끼 사육장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잘됐네, 근데?] 바이는 무관심한 태도로 본론을 요구했다.
[그 이상한 고서 기억나죠?]
[아무렴, 내가 딴건데, 혹시 나 몰래 팔았냐 이 깡통아?] 징크스가 책상에 코를 박은 체 위협을 가했다.
[투계판에서 딴거 말하는 거면 알지.]
[나 만난 날 아니야? 교장이랑 그렇고 그런 가계 찾아간 날.] 잔나가 확실히 하기위해서 되물었다.
[그날 재미 좀 봤냐?]
[개뿔이.]
오리아나는 무릎에 올려놓았던 낡은 책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평범한 책이 아니에요.] 그녀가 선언했다.
문장은 풍랑처럼 몰아쳐 아이들 가슴에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호기심이 많은 징크스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촉이 온 것이다.
징크스가 손을 뻗어 문제의 책을 끌고 와 살펴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데? ] 징크스는 책을 휘리릭 넘겨보았다. 그 뒤편으로 어느새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펜 있나요?]
[어, 나 있어.] 케이틀린이 주머니를 뒤적여서 오리아나에게 볼펜을 한 자루 건넸다.
[징크스에게 주세요, 징크스 책에다가 아무 말이나 적어보세요.]
[아무거나?]
징크스는 볼펜을 놀렸다.
[배고프냐? 매점갈래?]
[이따 가자. 그런데 이게 뭐......] 책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숨을 삼켰다. 징크스가 적은 문장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야, 이거 설마 마도서야?] 바이가 징크스의 손에서 책을 낚아채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책 귀퉁이를 접었다 펴보기도 하고 겉표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기도 했다.
[이야, 그래도 이게 마도서면 꽤나 짭짤하겠는데, 경매 붙여.]
[바이 그만 살펴보고 책상에 내려놓아 보세요, 그리고 아까 글자를 쓴 쪽을 펼쳐 봐요.]
먹물을 삼킨 면을 다시 펼치자 먹은 것을 게워내듯 검은 글자들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인거 같네.] 징크스의 별 생각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곳에 있었다.
[마도서 맞네, 틀림없어.] 잔나가 중얼거렸다.
[정말 놀라운 일이였어요. 집에 와서 잡일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이걸 펼쳤어요. 돌보던 토끼들을 잊지 않기위해 그림으로 남겨 놓을 생각이었는데 앞발이 잘려나간 토끼를 그리자 마자 사라졌어요. 온데간데없고 웬 글자만 가득 올라 찼지만, 읽을 수는 없었어요. 처음 보는 글자들이였거든요.]
오리아나는 그 뒤 자신이 시험 삼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기다리고 이상한 글자가 떠오르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글자를 써 보면 어떨까 싶어서 가장 기본적인 안부인사를 적어보았고 그때부터 마도서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적어요, 이것저것 물어보아도 대답은 잘하는데, 유독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면 입을 다물어 버려요.]
[입이 어디 있다고.]
[닥쳐, 노잼아. 그래서, 뭘 알아냈어?]
오리아나는 팔을 뻗어서 마도서를 끌어당겼다. 펼친 후 그녀는 펜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모렐로미콘씨, 방금은 제 친구들이에요.] 그녀가 마침표를 찍자 누런 종이위에서 먹물이 스며들어 사라졌다.
[오, 안녕 오리아나, 친구가 배가 고픈 모양인데 먹을 것 좀 주렴.]
나중에요. 그런데 저번에 설명해 주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해주실 수 있나요? 왜, 그 성배이야기 있잖아요.]
[야, 펜으로 대화하니까 상당히 오래 걸린다. 말이 이렇게 편한 줄 몰랐어.] 케이틀린이 잔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게.] 잔나는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책에 몰두했다.
[아테나의 부정한 성배 말이야? 넌 똑똑하니까 굳이 설명을 다시 안 해줘도 기억할 수 있을텐데?]
[친구들도 듣고 싶어 하거든요. 부탁이에요.]
[못해줄 것도 없지.]
빈 종이 위에 검은 뱀들이 꼬여들며 그림과 글자를 만든다.
[아주 옛날, 두 나라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약소국 대 강대국의 전쟁이여서 모두가 금방 끝날 것이라 예측한 아주 사소한 전쟁이었어. 하지만, 약소국의 제사장은 자신의 조국을 너무나 사랑해서 절대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승리를 위해 전쟁의 신에게 기도를 드렸지.]
[보름간의 단식예배를 통해 마침내 그녀는 전쟁의 신에게서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무기의 제조법을 받았어. 성배. 아무리 사악하고, 극악무도하며, 갱생의 여지가 없는 악인마저도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 광적인 신앙 아래에서 목숨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버리는 무기였지.]
[궁지 끝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사로잡은 포로, 전쟁난민, 부상병,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성배의 강력한 마법에 지배당해 승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고 마침내 약소국은 강대국을 전부 점령했다. 그리고 제사장의 마음에 악이 깃들었지, 그 힘을 이용해 인접한 나라와 전쟁을 벌여 전 세계를 정복해 인간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려 들었고 결국 전쟁의 신은 그녀에게 저주를 내렸지.]
[영원히 성배에 봉인된 체 자신 때문에 흘러내린 피 만큼 성배에 담지 못하면, 죽지 못한 체 영원한 고독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저주. 그 뒤로 그녀는, 아니 성배는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살인을 부추겨 저주로부터 해방을, 죽음으로 한발 한발 걸어가는 중이야. 사람들은 이 저주받은 성배를 제사장인 그녀의 이름을 따와 아테나의 부정한 성배라고 부르지, 어때 늙은이의 옛날이야기는 재미있었나?]
모렐로미콘 위에서 글자들이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그 엄청난 입심에 혼을 빼앗긴 듯 한동안 얼타고 있었다.
[휴우, 엄청난데? 눈앞에서 생생하게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어.] 이마에서 배어 나오는 땀을 닦으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동감, 이야, 이게 마도서의 힘인가. 정말 책에 홀린다는 게 뭔 개소린지 이제야 알겠어.]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각자의 놀라운 감정을 이야기 하는 동안 오리아나가 손을 놀려 다시 모렐로미콘과 대화를 시작했다. 막간의 휴식을 취한 그들은 다시금 펼쳐질 이야기보따리를 기대하며 몰려들었다.
[고마워요, 친구들이 굉장히 재미있어하네요.]
[재미있으니까 다행이네. 그런데 그 일에는 진척이 조금 있어?]
[무슨 사건?] 케이틀린이 칼 같이 끼어들었다.
[토끼에 대한 일 말이에요. 이 성배에 대한 이야기도 학교에서 벌어진 두 사건을 말하자, 이분이 한번 의심해 보라고 조언해줘서 알게 되었어요.]
[외로웠냐, 왜 찐따처럼 고민을 책에다 끄적여.] 징크스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이즈리얼을 바라보자, 그는 시선을 피해서 마도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모렐로미콘은 이번 사건들이 성배의 소행이라 본다는거네?] 잔나가 허리를 숙여 작문을 했다.
[안녕, 이야기 잘 들었어, 난 오리아나 친구인데 넌 그녀에게서 들은 사건의 숨은 범인이 성배라고 본다는 거야?]
[너 글자 되게 못쓴다. 인성이 보이는 구나.]
[초면부터 시비를 터네?] 바이가 어처구니없이 웃었다. 고서는 귀가 없는지 그녀의 혼잣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사건? 글쎄. 세상은 워낙 넓고 미친놈은 많고, 그게 버금가는 괴상한 마법도구들 마저 넘쳐나지. 나라고 전부 아는 것은 아니야. 진짜로 미친놈이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마법도구들이 일을 벌였을 수도 있어.]
[뭐여 이 무책임한 녀석은. 얌마 그 벌 때 같이 드글거리는 미친놈과 정신 나간 마도구 중 왜 하필이면 성배를 콕 집은 건데.]
[너 말 잘한다.] 바이는 마법서가 맘에 들지 않는지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좀 상냥하게 말해보지.]
[신기해서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었지만, 그 두 사건에 대해 단박에 조언을 내놓았다는 게 마음에 걸려. 마도서야, 마법에 씌인 물건들은 언제든지 사람을 이용해 먹을 수 있어 의심하고 떠봐야 해.] 의외로 진지한 태도로 잔나의 농담에 대꾸한 다음 바이는 펜을 놀렸다.
[야,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옆에 앉은 멍청이가 그러는 건데,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성배냐고 물어보는데?]
[좋은 질문이야. 확실한 근거는 없어, 하지만 토끼가 죽었다며.]
[맞아.]
[굳이 사람의 피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지. 마도구들은 입맛이 까다로워서 편식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종종 잡식성이 있어. 그 중 피를 마시면서 종류를 가리지 않는 녀석은 성배 하나야, 적어도 내가 알기엔.]
[헤에, 그럼 이 녀석은 뭘 먹지?] 징크스가 오리아나에게서 펜과 모렐로미콘을 받아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는 뭘 먹는데? 혹시 오리아나는 사람이 아니여서 못 먹은 거야?]
질문이 사라지지 않은 채 종이 위에 있다. 좋지 않은 낌새다.
[야, 왜 그딴 걸 물어봐. 삔또 상했나보다.] 잔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바이도 말없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가죽장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꼈고, 케이틀린은 징크스를 끌고 이즈리얼 뒤에 숨어서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도서는 유치한 도발에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영특한 놈.] 바이는 혀를 차면서 장갑을 벗었다.
[별일 없을껄요.] 오리아나는 마도서를 덮고 책가방에 넣었다.
[참나, 명문고가 뭐 이래.] 잔나는 춘추복을 벗어 던져 티셔츠 차림으로 땀을 식혔다.
[그래도 재미있지 않아? 난 전학 오기 전의 학교보다는 여기가 더 흥미진진한데, 안 좋은 일들이 대다수이긴 해도.] 케이틀린은 전학을 오고 나서부터 격은 일들을 되새김질 해보았다.
[퍽이나. 그런데 오리아나 이게 신기한 일 이라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빌여먹을 이런 찝찝한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이야?]
[당연히 아니지요, 이제 실마리를 잡았으니 범인을 추리해야죠.] 오리아나는 1+1=2 를 왜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억양으로 담담히 말했다.
물론 오리아나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떪은 감이라도 씹었는지 표정들이 말이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초록색 땡감을 씹은 건 바이였는지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야 잔나, 나가서 골통 좀 식히고 오자, 피곤해서 그런지 헛소리가 들린다.] 잔나와 바이 그리고 징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식히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시끄러, 우연한 사고에 불과해.]
[누구도 우연히 생명을 죽이지 않아요. 다만 살생의 의미를 모를 뿐이에요.] 오리아나는 자신의 뜻이 반듯이 이루어 질것을 확신하는지 바이가 죽일 듯 노려보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연가들은 몸을 적당히 숨길 수 있는 뒷산의 공터로 가기 위해서 본관이 있는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가는 길에 매점에 잠시 들려서 간단한 간식을 샀다.
[젠장, 저 고집불통 년. 사람 깜보고 있어. 기분 더럽네.]
[어럽쇼, 야 먼저 온 손님이 있는데?]
[어떤 불상놈이 여기 우리 나와바리인걸 아직도 몰라? 와꾸나 한번보자.] 바이는 기분도 꿀꿀한데 잘 걸렸다는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을 마중한 것은 아주 흉폭한맹수인 고양이였다. 주말이라 급식실의 잔반통을 뒤적일 수 없어 최대한 편히 쉬면서 힘을 아끼는 중이였다.
[훠이, 절로가. 언니들 담배 필꺼니까, 훠이. 하여튼 짬타이거 애들 무서운 줄 몰라요.]
[그게 뭐 어때서?] 잔나가 징크스에게서 라이터를 건네받으며 주머니에서 매점에서 산 소시지를 꺼내 반으로 잘라 고양이에게 던져 주었다.
고양이는 경계를 하지 않고 다가와서 여유롭게 식사를 진행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고양이들이 길거리 한 복판에서 자도 아무도 건들이지 않았어. 뭐 그렇다고 딱히 챙겨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아, 너도 전학왔지. 미안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같이 다녀서 까먹고 있었네.]
그들은 한동안 시간을 즐길 뿐 대화는 하지 않았다.
잔나는 바닥에 꽁초를 비벼 불씨를 완전히 끈 다음 남은 소세지를 던져주고는 비밀장소에서 나왔다.
[똥마렵냐? 표정이 왜 그래?] 고양이를 만난 후부터 표정이 이상한 바이에게 잔나가 말을 걸었다.
[아, 아냐. 그냥 누가 호의를 보이면 의심부터 해야 하는 게 슬퍼서.] 뜬금없이 진지한 대답에 잔나와 징크스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야, 육개장 준비해라. 애가 헛소리 하는 것 보니까 갈 날이 멀지않았다.] 평소였다면 당연히 장난에 대한 응징으로 주먹이 날아왔었기에, 잔나는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바이는 묵묵부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를 식힌 아이들은 동아리 방으로 돌아가서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토끼를 죽인 범인을 잡는 다는 점까지는 모두가 만장일치 하였으나, 그 뒤 범인의 처리에 관해 의견이 갈렸다.
경찰이나 선생에게 넘기자는 온건파가 있었고, 혼구멍을 내 주자는 강경파로 크게 나뉘었는데, 강경파 중에서는 물리적인 제제로 신체의 일부에 심각한 훼손을 야기하자는 쪽과, 전교생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홀딱 벗겨서 방치를 해버리자는 패로 나뉘었다.
처벌의 수위로 협상이 난항을 격을 때, 중립파의 거두인 이즈리얼이 범인이 사람일수도 마물일수도 있는데 굳이 처벌을 지금 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여 자칫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회의에 마침표를 찍었다.
결론은 일단 범인을 잡는 쪽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렇게 주말이 끝났다.
3.
언제나 밝고 활기찬 곳이다. 사람들이 느긋하게 돌아다니면서 시식을 하고, 과일이 신선한지 들고 요모조모 뜯어보기도 하고, 괜스레 물건을 집어보기도 한다. 아이들은 깨끗한 복도를 뛰다가 지치면 부모가 끄는 쇼핑카트에 올라간다.
만물이 이곳에 있다. 과일, 육류, 채소, 곡식, 어류, 유제품, 같이 일상에 사용되는 기본적인 물품은 물론이오, 더욱 편한 생활을 제공하는 제법 덩치가 큰 오븐, 세탁기, 냉장고, 컴퓨터, 노트북도 있다. 큰 것만 있나? 아니다. 점점 작아질수록 성능이 좋아지는 마술과 같이 신비로운 기능을 가진 첨단제품도 그득그득하다. 심지어는 눈에 형태가 보이지 않는 각양각색의 보험, 풍족한 미래를 그리게 해 주는 예금설계도 한 켠에서 판매 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일이 없으면, 대형마트로 온다. 모든 게 있기 때문에 혹 행복이나 만족, 고독을 치료할 약 이 있을지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은 유난히 학생들로 북적인다. 수학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간식거리를 사고 괜히 들떠서 여기저기 기웃거려야 마땅한데, 생뚱맞게도 한 아이가 무리도 없이 혼자서 정말 동떨어진 장소인 철물코너에 있다. 피곤한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서 공구들을 살펴보는 중이다.
[왜 그렇게 시무룩해! 사내자식이면 어깨 딱 펴고 뱃때지에 힘을 이빠이 주고 다녀야지.] 진열장에 걸려있던 자동차용 몽키스패너가 너부죽한 아래턱을 실룩이면서 아이에게 말을 건다.
[내일 수학여행을 가야해.]
[엥? 그게 뭐.]
[......, 가기 싫거든.]
[쨔샤, 그럼 가지 마. 눈 한번 딱 감고, 3일 동안 PC방에 짱박혀 있어.] 짤막하고 단단한 해결책을 듣고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저거, 새파란 젊은 놈이 한 숨 쉬는 꼬라지 보소.]
[아 쫌 닥쳐봐. 왜 가기 싫은데?] 옆에 매달린 장도리가 핀잔을 주곤 조금 더 섬세하게 물어본다. 고등학생은 우려가 담긴 목소리에서 위로를 얻었는지 속마음을 털어 놓아 보기로 했다.
[그냥, 쉬고 싶어. 아무 이유가 없어.]
[흐음......,] 그의 대답에 장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런 이유 없이 하루 종일 쉬고 싶은 날이 있지. 하지만, 누군 꼭 그럴싸한 이유와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해, 예컨대 선생들 말이지. 그러니까 그런 이해력이 조금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준비 하는 건 어떨까? 가령.....,]
[설사.]
[고소공포증.]
[공황장애.]
[식중독.] 맨 아래에 진열된 못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 나도 한마디씩 거들고 나선다. 못대가리들 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시작으로 진열장에서 공구들끼리 언쟁이 붙는다. 어떤 핑계가 가장 그럴싸한지 입씨름을 하는데, 소년은 그 모습이 웃긴지 피시식 웃는다.
사물들은 언제나 친절해.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아. 수학여행에 가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를 털어 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여행은 들뜨면서도 낮선 곳에 간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이라, 마음 한편에서 그 공포가 불안의 가면을 쓴 체 떡하니 앉아 있게 된다. 장소며 옷이며 먹는 것 마저 익숙하지 않고 심지어는 공기까지도 맛이 다르게 느껴지니까. 이방인이 되었다는 느낌, 배척 받는다는 느낌과 일상에서의 해방감이 적절하게 사람을 반쯤 정신 나가게 만든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만 사활을 걸어 과격한 행동도 서슴없이 하는 아이들에겐 여행이 공포로 다가오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익숙하고 손쉬우며 확실한 방법을 사용한다.
[놔! 놓으라고!] 한 아이가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른다. 하지만 악을 쓸수록 양팔을 붙잡고 있는 동급생들의 얼굴은 활짝 핀다. 두 다리로 발길질을 할 수도 있지만,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체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악을 쓸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꼬마는 펑펑 운다.
[얼레리, 꼴레리 똥 쌌데요 똥 쌌데요.]
[오바이트 쏠린다 우웩.]
반바지 아래로 설사가 흘러내리자 여자아이고 남자아이고 약속이나 한 듯이 아이를 놀려댄다. 마치 좀 전에 그 누구도 화장실을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듯이.
꼬마는 서러워서 울었다. 소풍의 시작부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이유 없이 집적거렸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여자 아이가 와서 과자를 내밀었다. 맛이 이상했지만 주는 것이라 그냥 받아먹었더니 이 꼴이 된 것이다.
풀밭에서 올라오는 열기 주변을 강강술래하며 조롱하는 아이들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보이던 여자아이의 비웃음. 닫힌 마음 한 구석엔 촉감이 생생히 살아 있다.
[그때부터인가......,]
[엉? 뭐라고?]
[혼잣말이야.]
[으응 그렇구나, 얘 너 혼자 왔니?]
[그럼 때로 오나? 보면 몰라.]
[하긴.] 그는 이상함을 느끼고선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게 공구들이 말을 건줄 알았는데, 웬걸 옆에는 같은 반 케이틀린이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뒤늦게 뒷걸음질을 쳤다.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도 그랬지만, 자신을 알고 있는 같은 반 아이, 더해 이성이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혼자 왔다고 했지? 그러면 저기 우리랑 같이 다닐래? 너도 수학여행 준비하러 온 거 맞지?] 케이틀린이 말을 마치고 대답을 기다린다. 허나 남자아이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쭈뼛이며 가만이 있었다. 눈동자는 팔팔 끓는 물에 떨어진 계란처럼 것처럼 이리저리 부유한다.
[아, 아니야. 나 그게, 그러니까 미리 장을 봐서, 그 오늘은 그냥, 그래 그냥 구경삼아 나온거야.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 그래? 아쉽네.] 그녀는 멋쩍게 웃고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오던 유행가를 뚫고서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 그럼 나는 학원 갈 시간이라서 그만, 잘 있어.] 남자는 있지도 않은 학원을 핑계 삼아서 쏜살같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케이틀린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돌아갔다.
[차였네.]
[차였구만.]
[She was a car.] 케이틀린이 공구코너에서 비칠비칠 걸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동아리 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카트에 양팔을 걸쳤다.
[하, 뭐가 잘못된거지?]
[음....., 얼굴?] 잔나가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휴, 그래도 다행이야. 더 이상 호구의 비율을 늘릴 필요가 없으니까.] 바이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케이틀린의 등을 두드려준다.
[동감이에요.]
[다들 못됐어. 그중 너가 제일 나쁜 놈이야.]
[왜? 하필 난데 저 년을 내버려두고 내가?] 잔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이즈리얼을 끌고 과자코너로 간 징크스가 돌아왔다. 가방모찌 역할을 한 이즈리얼이 한 아름 안고 있던 과자를 카트에 풀어놓는다.
[뭐 이리 바리바리 주워 왔어?]
[질소덩어리라 발랑 까놓고 보면 얼마 않되.]
[넌 주둥이만 벌렸다 하면 구라냐? 이거 다 바다건너 온 거잖아. 양이 적긴 개미코딱지 만큼 하것다.] 잔나가 주워든 상자를 손바닥 위에서 던졌다 받았다 하며 말했다.
[칫, 난 너처럼 눈치 빠른 꼬맹이가 싫어. 꾀죄죄한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영입에 실패했나 보? 좋아, 좋아, 짐꾼은 요 녀석 하나면 충분해.] 징크스는 신경질적으로 웃으면서 이즈리얼의 옆구리 쥐어박으려했다. 다만 그는 가볍게 피해서 오리아나의 뒤로 숨었다.
[케이틀린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세상은 넓고 그 중 절반이 남자에요. 희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짝을 만나게 될 거에요.]
[에헤, 그런 거였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는데.] 바이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흐뭇하게 케이틀린을 쳐다보았다.
[그런 거 아냐 완전히!] 오징어처럼 카트에 걸려 축 늘어져 있던 케이틀린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대꾸했다.
[하앍, 알았어 알았다고. 그건 나중에 차차 생각해볼게. 순둥이를 뜨내기한테 넘겨줄 순 없으니까.] 바이는 웃으며 수레를 밀었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아이들은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웃는다.
[모렐로의 말을 믿어도 될까요?] 벌칙용이랍시고 레몬을 한망태기나 가져온 잔나의 등을 도로 떠밀고 나서 오리아나가 바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선은 과일코너에서 희희낙락거리는 친구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도서야. 믿기엔 너무 꺼림칙해. 무슨 꿍꿍이가 있을 줄 누가 알아.]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흘려듣기엔 맘에 걸려요.]
[계륵이구만. 아테나의 부정한 성배라, 찾으면 그거 가져도 되냐?]
[절대 않되요.] 오리아나의 강경한 태도가 바이의 삔또를 상하게 했는지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팔아 치우자고. 돈방석에 한번 앉아 봐야지. 그건 놔두지?]
[만약 이번 일이 그런 위험한 물건과 관련이 되어있다면, 지금 당장 손을 떼야만 해요.] 오리아나가 잔나가 몰래 가져다 놓은 소주병을 제자리에 놓으며 칼같이 선을 그었다. 잔나는 과장되게 절규하고 그 모습을 케이틀린이 배꼽을 쥐어 잡고 웃는다.
[가지자는 게 아니야. 나도 그 정도 깜냥은 있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처먹으면 죽는다고. 넌 앞날에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지고 살잖아. 하지만 나나 징크스는 아니야. 한탕 크게 하고 싶다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 삶의 태도랑 성배를 가지는 일과 무슨 관계지요. 모렐로의 말마따나 토끼의 일들이 성배의 힘에 의해 벌어진 것이면, 섣부르게 발을 놓아선 결과야 뻔하지요.] 바이는 오리아나의 대답을 듣고 혀를 찼다. 그녀는 카트를 내버려 두고선 주류코너에서 머리를 맞댄 체 끙끙거리는 잔나와 징크스에게 갔다. 세 사람은 어깨동무를 한 체 한동안 쑥덕였다.
애주가 세 명은 잔머리를 굴려서 소주를 따로 계산하는데 성공했지만, 위조민증을 가져오지 않는 바람에 계산대 아주머니한테 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이들은 짐 꾸러미를 나누어 가져가길 포기했다. 대신 가위,바위,보로 꼴지를 정해 몰빵을 하기로 했다. 물론 맨 처음 가위바위보로 짐 몰빵을 제한한건 잔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잔나가 졌다.
한명만 빼고 나머지 아이들은 몸과 마음 모두 홀가분해 져서 귀가했다. 그리고 부풀어 오르는 기대에 눌려서 각자 침대, 소파, 바닥에서 뒤척였다.
고대하던 수학여행 첫날의 아침이 밝아왔다.
[염병할, 그냥 후딱후딱 마법으로 넘겨다 주면 않되?] 바이가 투덜거리며 객실바닥에 가방을 집어던지고서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화물과 승객을 같이 나르는 배의 2등실은 기본적으로 네명이 한 방을 쓴다. 좁은 통로 양 옆으로 2층 침대가 있고 입구의 오른쪽에는 세면대와 변기가 있어, 샤워를 하기 위해서는 공용목욕탕을 이용해야 한다. 남자인 이즈리얼과 잔나는 뱃고물 쪽의 방을 배정 받았고 나머지 여자 아이들은 가운데쯤에 있는 방을 받아 하루 뱃길을 이 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잔나 녀석, 그럴싸한 핑계로 짐이나 떠맡기고, 이따 혼꾸녕을 내 주고 말테다.] 바이는 잔나가 책임지기로 한 과자가 가득 든 상자를 옮기느라 피곤해졌는지 팔을 주물렀다. 그러는 동안 오리아나는 침대 밑에 상자를 숨겼다.
[와와, 저거 봐봐 저거.]
[그래그래 바다야 바다.] 케이틀린이 작고 둥근 창문에 매달려서 들뜬 목소리로 감탄하자, 징크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해 주었다. 아침부터 그녀는 흥분해 있었다. 내륙지방에서만 살던 그녀에게 바다는 새로운 감각을 불어 넣어 주었다. 잔잔한 호수와는 다르게 다가갈 수로 짠내, 파도치는 소리, 피부에 와 닿는 끈적임, 모든 게 생동감 있게 육박해 왔다. 물 한잔을 마셔도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졌기에, 케이틀린은 끊임없이 경의의 시선의 보내고 감탄을 내뱉었다.
[아, 안되겠다. 씻으러 가자.] 바이가 벌떡 일어나 수건과 비누를 챙겼다.
[저녁은 조금 이따 내려가서 먹으러 가면 되는데, 내일 아침 도착 전 까지는 자유시간이니 여유롭게 움직여도 될 것 같네요.]
[넌 안가지?]
[여기서 쉬고있을께요.]
[오케이. 그럼 집 잘 지키고 있어.] 오리아나를 뺀 나머지 아이들은 목욕할 준비를 하고 방을 나갔다. 기계소녀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해류를 타고 온 바람이 배를 흔들자 닻의 사슬이 칭얼거렸다. 저 어디선가 제자리 달리기를 하는 엔진,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갈매기. 그녀는 아득한 소리들을 집중해서 들었다.
오리아나는 몸 씻기를 마친 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몸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면서 들어온 아이들은 젖은 머리카락 때문에 그녀에게 한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감기걸려요.]
[바보라서 괜찮아, 심심한데 애들이랑 입 털고 오자. 보급품도 나눌 겸.]
[좋아.] 케이틀린이 침대에서 내려와 상자를 꺼냈다. 징크스는 가방을 들고 와 케이틀린이 꺼내주는 캔 맥주들을 가방에 담았다.
딱히 만나자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아이들이 뱃고물에 갔을 때에는 이미 잔나와 이즈리얼이 난간에 기대어서 바닷바람을 쐬는 중이었다.
[여, 잉여들. 죽치고 앉아 뭐하냐?] 바이가 친근함의 표시로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사돈 남 말하시네.]
[야 어리바리, 이것 좀 얼려라.]
[응? 뭔데?]
[보리차, 시원하게 마시려고, 가방은 열지 마. 냉기 빠져나가면 오래 걸리잖아.]
[알겠어, 근데 냉기마법은 거의 안 써서 잘되려나.]
[곧 여름이니까, 연습하는 셈 치고 해.] 바이는 그럴싸한 핑계로 이즈리얼을 속였다. 그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마법장갑을 손에 끼고선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주 얼리지 않고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왼손은 한동안 가방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맥주가 적당히 시원해지자, 케이틀린이 이즈리얼을 데리고 음료를 사러 내려갔다.
나머지 아이들은 가져온 난간에 나란히 붙어 바다를 보면서 맥주 캔을 깠다.
[누구랑 방 쓰냐?]
[재수 옴 붙었어, 어곳이랑 그 똘마니들 약간 그리고 물개 녀석.]
[밥맛이 똑 떨어지는데, 안 봐도 비디오야.]
[그 멍청이 짓에 희희낙락거리는 놈들이랑 같은 방에서 같은 산소를 나누어 마실 바에야, 갈매기 똥을 머리에 뿌리고 말지. 그래서 나와 있었어.] 잔나가 혀를 차면서 맥주를 깠다. 날카로운 알류미늄 날이 빠져나오는 공기를 찢는다.
[간빠이 하자. 음......., 좋은 여행을 위하여?]
[걍, 건배로하자.]
[오케이, 이즈랑 케이틀린 온면 하자고.] 바이가 몸을 뒤로 조금 뺐다.
캔을 집은 갈색 손, 눈처럼 하얀 손, 마르고 창백한 손, 솥뚜껑만한 손, 마디마디가 굵은 손, 그리고 알루미늄 손 들이 모여들어 꽃송이를 이룬다.
[씨이이바아아아알 여행이다! 건배! 별안간 바이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고선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자 화물선의 거대한 굴뚝이 거대한 트럼펫이 되어서 고함을 지른다. 고동은 선채를 뒤흔들고 심장을 옥죄어 온다. 거대한소리 말고는 들리는 게 없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입을 놀렸고, 마음에 담겨있던 것들이 거대한 소음의 비호아래에 터져 나온다.
물방울들이 튀어오르고 항구가 뒷걸음질 친다.
[내가 볼 땐 말이야] 대양을 구경하던 잔나가 입을 열었다.
[어곳 정도면, 지 패거리 나부랭이들 앞에서 으스대기 위해 뭐든 할 것 같은데.]
[토끼일?]
[그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모랠로의 말은 좀 믿기 힘들어. 내말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라 할까, 그렇지 않아?]
[인정. 먼지 냄새나는 책의 전례동화보단 미친 또라이 새끼 혹은 터진 만두가 미쳐서 일 벌렸다는 게 더 그럴싸하다.] 징크스가 묶은 머리를 한손에 잡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개소리야, 그 세끼 간은 지 덩치의 오천분의 1도 않되, 겁쟁이에 진상이야.]
[관상가냐?]
[딱 보면 각이 않나와?]
[어곳은 아닐꺼에요. 차라리 본인보다는 주변에 있는 녀석들이 했을 가능성이 높네요. 지금까지 하는 행동을 보면 어곳은 자신이 압도적인 장소에서만 활개를 쳐요. 상대방이 자기랑 비슷하거나, 혹은 강하면 들어놓고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으니까요.]
[뭐야? 그럼 나 얕보인거냐.]
[어떻게 비벼볼만한가봐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더없이 강한 성격인 사람이 교장선생님이 아끼는 토끼장을 건들겠어요.]
[그럼 넌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모르겠어요, 하지만 누가됐든 뭐가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대가를 치루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오리아나의 백색눈동자가 경계가 사라져 바다와 구별이 않되는 육지를 응시한다.
심연이 있으면 광명이 있다. 밝고 따뜻하며 정겨운데 더해 흥이 절로 일어나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는 곳이 있으면, 춥고 무관심한데 숨 막히는 분위기에 축 늘어져 근처에 있기만 해도 절망에 빨려 들어가는 곳이 있다.
화물선의 심장은 중앙에 있다. 동력실엔 허가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잠가 놓지만, 바로 옆의 청소도구함으로 쓰이는 창고는 다 쭈글쭈글해진 종이 위에 바닷물에 의해 옅어져 잘 보이지도 않는 출입제한이 쓰인 종이가 간신히 붙어있다. 그런 허술함이 한 아이에게는 평화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다.
[휴......,] 창고속의 아이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 얼굴에 겹겹이 쌓인 피로와, 눈 밑에 새카맣게 찌들은 피곤을, 메마른 입술에 매달린 울상과 뒷목을 저릿하게 당기는 고통이 씻겨나가는지 수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루하루가 버거운 나날이지만, 오늘은 유독 힘든 날인가 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그 망할 녀석들.] 수학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부모님에게 말해봤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었지, 근데 실제로 새빨간 거짓말도 아니었어, 파랑과 빨강을 반반 섞은 정도, 굳이 말하면 보라색이겠지.]
일진 놈들의 심술이 불 보듯 뻔 한데 같이 여행을 가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심장이 미친 듯 날뛴다. 그래서 원흉인 일진 이야기만 빼 놓고, 아프니 여행대신 집에서 쉬고 싶다고 물어봤다.
[왜 남의 눈에 나는 행동을 하니, 품위 없게. 젠장할, 그거하나 못 참아서 어떤 큰일을 할 수 있냐고? 염병, 인내심이 부족해? 핫! 얼어 죽을.] 아이는 군데군데 소금이 하얗게 일어나는 바닥에 퍼질러 앉은 체 고등학생에 어울리게 자조적인 혼잣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이었다.
[훌쩍, 그러게 부모님이 너무 심하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증기관이 빨간 코를 훌쩍이면서 맞장구를 처 주었다.
[내말이, 몸이 아파서 쉬는 게 어째서 남들 눈에는 튀는 행동인지 모르겠어.]
[하루정도는 새발의 피야, 훌쩍, 한 일주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우리도 긴 항해를 마치고 나면 정말이지 다음 출항 때까지 하는 일 없이 훌쩍, 쉬거든. 에잇. 이놈의 감기 몸살.] 배관이 있는 힘껏 코를 풀자 증기가 풀피리 소리를 내면서 뿜어져 나왔다.
[빠져가지고는. 나도 한 번 푹 쉬어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놈의 청소는 안하면 어디가 덧나나.] 벽에 기댄 체 꼬름한 시선을 보내던 대걸레가 불평을 쏟아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폭풍이 치던 말 던 누군가는 반듯이 청소를 하였기 때문에 길게 쉬어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놈아, 그렇게 쉬고 싶으면 당장 벽에서 자빠져. 허리가 두 동강이가 나면 남은평생을 바다 위를 유유자적 떠돌아다니면서 살 수 있어.] 검은 치아를 가진 밀대가 그를 놀린다.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꺼니?]
[그 녀석들이 잠들면 돌아가야지. 한 12시?]
[이것 참, 유리 구두도 아니고. 일찍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널 괴롭히는 녀석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으니까 아마 그쪽에 있을 것 같은데.]
[음,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 차라리 여기에서 잘까? 방에서 이불 가져오면 잘만할 것 같은데. ]
[에헤이, 아서라. 서생원들이 워낙 많아야지.]
[저번에 배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발정이 나서 바다로 뛰어든 다음부터 아주 제 세상 만난 것 마냥 활개를 치고 다녀, 아주 살판났어.]
수다는 아이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을 나갈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나가자 창고는 눅눅한 공기, 증기펌프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 간혹 지나가는 쥐만 있는 공간이 되었다.
설사다.
버스를 타기 전에 먹은 과자가 분명히 문제였다. 물론 내가 먹고 싶어서 먹은 거라면 불만은 없겠지, 하지만 아니다.
[야 물개야, 이거 먹어.]
[고마워.]
[어, 왜 지금 안 먹어?]
[배 아파서. 이따가 먹을 께.]
망했다. 그 개자식은 역시나 여행을 와서도 날 잊지 않았다. 덤으로 그 패거리들도 말이다. 배에서 내리고 버스에서 내내 좌석을 발로 차거나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신경을 긁고 있다.
전부 장난이라는 단어 하나로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 용서한다.
[와 물개 인성보소, 친구가 챙겨주는데 무시하네.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맞아 물개새끼야. 빨리 처먹어.]
[배 아프다니까.] 그러자 의자 뒤편에서 손이 뻗어 나오더니 귀를 우그러트리며 잡아당긴다.
[먹을 때까지 안 놓을 꺼야.]
[아아아, 알았어, 먹으면 되잖아 먹으면.] 그 뒤로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화장실을 가야만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폐해진다. 조금 쉬려고 하면 배가 아프거나 차멀미가 시작되고, 피곤해서 눈을 감으면 일진 녀석들이 건드린다. 도대체 내가 쉴 수 있는 곳은, 마음편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 있을까.
[일단 숙소에 도착하면 선생님께 쉬어도 되겠냐고 물어나 봐야지.] 남자아이는 일진이 놓아준 귀를 주무르며 혼잣말을 했다.
숙소는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장소여서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기에 충분했다. 남자아이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자 복도에서 잔나와 이즈리얼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에게서 튀김의 냄새와 온기가 풍겨오자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오? 밥 먹었냐? 식당에서 안보이더라.]
[으, 그게 속이 좀 안 좋아서.]
[저런, 약 줄게 가자.] 그의 손을 붙잡고 방으로간 잔나는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면서 약을 찾기 시작했다.
[하여튼 그놈들은 전부 벼락 맞아 죽을 놈들이야. 심심하면 소금이나 퍼먹지 왜 가만히 있는 애를 건들이고 지랄이야. 아까 버스에서 먹인 과자 때문이지? 잠깐만, 자 이 약 먹어. 싹 쏟아내면 속이 편해질 거야.] 잔나가 유리병 속에서 동그란 환약을 몇 알 꺼내 그의 손바닥위에 올려 주었다.
[하하하하, 아무튼 잘 먹을게.] 그는 멋쩍게 웃는다.
[의자를 차고 머리를 잡아당기는 것도 모자라 그런 이상한 걸 먹여? 안 먹는다니까 뭐? 먹을 때까지 귀를 놓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리는 게 사람새끼가 할 소린가.] 말하면 말할 수 록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잔나의 음성은 점점 높아져갔다. 반면 피해자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장난인데 뭘......,] 한심한 대답에 잔나가 화를 터트리려는 순간 그때까지 조용하게 있던 이즈리얼이 말을 가로막았다.
[다 알면서 왜 그래. 화낼 대상이 바뀌었어.] 이즈리얼의 목소리는 음색이 없었다. 한때 같은 고통을 겪었던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단순한 성냄보다 훨씬 무거웠다.
[큼, 큼, 따로 약속이 없으면 저쪽 방으로 넘어 가는 게 어때? 포커나 도둑잡기 할 줄 아냐?] 잔나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의외의 일을 만나 눈이 왕방울 만해 졌지만, 이내 곤란한 낯빛을 띄웠다.
[음, 그게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냥 쉴려고. 뱃멀미가 조금 남아 있어.]
[그래? 많아 안 아프면,] 잔나의 제안에 그는 그저 계면쩍게 웃을 뿐이었다. 누차 거듭된 잔나의 권유에도 그는 이상하게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완곡하게 거절을 했다.
수학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이오니아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이다. 대륙의 북쪽 동토의 땅에서 바람에 뭍어오는 냉기로 밤에는 서늘하고, 낮에는 지열로 데워진 공기가 밍기적 거리며 대기를 떠돌아 따뜻한 기후를 가진 섬이다. 예전에는 오랜 항해 끝에 선원들이 아이오니아 대륙으로 들어가기 전 안전한 항해를 마친 기념으로 축제를 벌이는 잔치집이였다. 전쟁 중에는 물자보급의 중요한 거점으로 격전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이었지만 전후, 여전히 대륙과 아이오니아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고대의 선원들을 맞이하듯 이 섬은 어느 쪽에서 물을 건너 왔든 개의치 않고 편히 쉬고 놀고먹을 수 있는 관광지로 남았다.
[저거 저거, 봐봐!]
[그래, 그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양이네. 아이구, 신기방기해라!]
[아냐, 자세히 살피면 엄청 다르다고. 털이 더긴데, 바닷바람 때문인가?]
[이런 젠장맞을, 알게 뭐야.]
[근데 바닷가는 덥잖아, 털이 짧아야 시원하지 않나.]
[야 호구야.] 징크스가 옆에 있는 이즈리얼에게 말을 붙였다.
[가서 지퍼 좀 가져와라 입 꿰어 버리게. 닥치고 디비자면 안되겠냐!] 징크스가 빽 고함을 지르고선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케이틀린은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 뒷좌석 유리창에 달라붙어 밖을 계속 구경한다.
밤새도록 섯다를 쳤는데, 오리아나에게 본전에다가 아끼는 애장품들까지 담보로 잡히고 그놈의 가오 때문에 개평도 못 얻어먹은 바이와 징크스에게는 케이틀린의 행동이 짜증 그 자체였다. 바이가 등을 치고 옆구리를 찔러도 잠깐 뿐이었다.
별안간 버스가 어수선 해지더니 여기저기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야이, 병신 같은 물개새끼야. 빨리 빨리 안 다니냐?]
[쓰레기다. 시간 좀 지켜라.]
[아니 얘들아, 물개잖아. 육지에서는 느리게 다닐 수밖에 없다고.]
[인정합니다.]
병적으로 창백한 얼굴의 아이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버스 맨 앞자리에 앉는다. 아이들의 욕설과 가슴을 후비는 비꼼이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준다. 선생은 무어라 두어마디 던지고서는 버스를 출발 시켰다.
[머저리들, 일진 놈들이 지껄이니까, 조잘조잘 뭐 그렇게 지저귀는지.]
[골통이 빈 거지. 저런 기분 나쁜 놈이 나중에 수틀리면 눈 뒤집혀서 뭔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때가면 땅치고 후회하지.] 바이와 잔나가 맨 뒷좌석에 앉아 고까운 시선을 던졌다. 버스가 출발하고 잠잠해 지자 징크스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쪽잠을 이루지 못했다.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의 건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계속해 비닐봉지에 토를 했고 시큼한 냄새가 잠들만 하면 후각을 자극해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관광지는 항구였다. 원주민들이 이 항구를 신성시 여겼고, 그래서 침략자들의 괄목할만한 함선끼리 전투를 벌일 때 슬퍼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누가 승리를 거머쥐었고 그 결과 아이오니아 벼농사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의 설명을 대부분의 아이들이 귓등으로 들었다. 아무래도 좋다. 끼리끼리 어울려서 떠들고 노는 게 훨씬 재밌으니까.
여기 내려서 조금 관광을, 저기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점심 먹고, 다음 목적지에서 체험을 한 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잠시 휴식을 하기 위해 들른 번화가에서 사건이 터졌다.
제법 규모가 있는 항만이기에 화물선이나 군함 같은 거선들 말고도 개인의 깔끔한 요트나, 집어등을 주렁주렁 단 고기잡이 배 따위의 소형선들이 정박하는 작은 항만도 꽤나 많고 그런 곳에는 번화가가 생기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쉬는 그곳도 작은 선착장 중 하나였다. 무리는 선착장의 가장 끝자락, 한 걸음만 내딛으면 바다인 가장자리에 와글와글 모여 있다.
[물개야! 잠수해서 전복 좀 따와 봐!]
[물개야 물개야. 잠수 잠수해봐.]
[어이 누가 가서 생선 좀 사와 봐. 애가 힘이 없어서 물위에 시체마냥 둥둥 떠다녀.]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다. 입맛이 없어서 점심을 조금 먹어서 그런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면 아침부터 계속된 구토와 어지럼증 때문일지도, 둘 다인가? 아무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가에 서서 구경하는 아이들의 흥미가 사라져 흩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온몸이 축 늘어지고 옷과 신발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자꾸만 자꾸만 아래로 누군가가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지만, 무섭기는커녕 반갑다. 우악스럽지도 않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손길이다.
[그냥 가라앉는 게 어떻겠니?] 뭍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조롱을 던지는 소리가 흐릿해지고 멀어진다. 그리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온다.
뿔 없는 악마들이 웃으며 떠든다. 이상하다. 모두가 각기 다른 몸을 가지고 있을 텐데, 표정은 틀로 찍어낸 듯 하나다. 웃고 있지만, 그 음성에서 자비로움은 털끝만치도 없다.
생선좌판의 상인들도 웃고 있다. 고등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간에 의해 빛바래진 기억들. 과거 속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아이를 추억해 내고선 그런 일도 있었네, 참 시간이 빠르구나 하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회상할 때 나오는 미소다. 현제를 보지 않고 과거를 본다. 그들의 시야에 나는 없다.
[조금 있으면, 끝이 나겠지. 두어 번 올라가려고 실랑이를 벌였으니까 슬슬 흥미도 떨어졌겠지. 무엇보다 점심시간은 끝나기 마련이니까.] 물속에서 파도를 맞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물가의 아이들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한다.
행운이 따라준 걸까, 저 멀리서 육각모를 쓴 경찰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개헤엄으로 정박장 끄트머리에 있는 사다리로 간 후 육지로 올라가려했다. 세 번째 사다리를 밟고 반쯤 몸을 물 밖으로 내밀었을 때 누군가가 발목을 잡았다.
[그냥 여기에 있는 게 어떠니? 보아하니 뭍에는 반겨주는 친구들도 없는데.] 고개를 반쯤 돌려 희뿌연 물을 가만히 보니 얼핏얼핏 해류를 따라 흔들리는 다시마의 몸체가 보인다.
[그러고는 싶은데, 난 돌아가야 하는 집이 있어, 일단은.]
[그렇다면야.] 발목을 휘감고 있던 손이 슬그머니 풀린다.
[썩 나쁜 곳은 아니지. 여름에는 파도 부서지는 소리 사이로 폐가 터질듯이 호쾌한 바람을 타고, 겨울에는 온 세상의 고독을 다 모아 탈탈 털어 부어도 반도 못 채우는 큰 바다를 보며 고요히 지내자고.] 삐줄삐줄한 입을 놀리며 따개비가 설득을 한다. 녀석 덩치에 비해 포부가 크다.
모두가 상냥하고 배려해준다. 이 손만 놓으면 이 친구들과 여기서 영원히 살 수 있겠지?
[저 새끼들 너무 나대는데.] 돌 떨어진 연못에서 피라미들이 흩어지듯 도망가는 애들을 보면서 바이가 낮게 으르렁 거린다. 점심식사를 한 식당의 2층에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가 있었다.
[잔챙이들.] 징크스가 어곳과 에코가 슬금슬금 꽁지를 빼는 모습을 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쳇, 고추 단 놈이 맨날 당하고만 살아, 맘에 안 들어.]
[내버려둬, 언젠가 크게 엿 먹일 수 있는 건수가 돌아오니까. 보란 듯이 우리 앞에서 자꾸 힘자랑 하는데 언제 한번 꼬투리 잡아서 카운터를 먹여주면 되는 거야.] 잔나가 의자에 주저앉는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장난을 멈추게 하려 내려갔다. 그 길에 경찰이 다가와 상황이 끝난 것을 보고선 돌아온 것이다.
[정의의 사도 납시었네.] 징크스가 이죽이자 별안간 오리아나가 머그컵을 내려놓는다. 단호한 소리에 징크스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붉은 눈동자에 적의가 나타난다.
[괜한 참견이지. 비싼 밥 먹고 말이야.] 신드라가 어느새 잔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선 아이들을 내려보고있다.
[이런, 바다를 건너오면서 귀신이 씌었나본데, 어깨가 무거워.]
[오, 오오오! 뭔가가 보여. 처녀귀신이 보인다.] 명고수가 명창에 대답하듯 잔나의 너스레에 바이가 장단을 맞춰준다. 아이들의 조롱을 한귀로 흘려보내고선 신드라는 잔나의 어깨너머로 허리를 숙여서 테이블 위로 손을 뻗는다. 그리고 케이크 위에 올려진 있던 딸기를 집어서 입에 집어넣는다.
[아가씨들은 얌전하게 다과회나 즐겨. 멋쟁이 기사흉내는 어설퍼서 눈뜨고 못 봐주니까.]
[나라의 녹봉을 받는 선생 나으리가 할 일을 대신해드렸는데, 치하는 못해줄 망정 쉰내들의 부식이나 뺐어먹는 게요 지금?]
[이사장은 국가직이 아니란다 꼬맹아.] 신드라는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햝고 나서 다리를 길게 꼬고 앉은 바이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저런 유능한 아이는 꼭 반에 한명씩은 있어야하거든. 도움 따윈 필요 없어. 그렇지? 이즈리얼?] 탁자위에 팔을 반쯤 걸치고 신드라에게 등을 지고 있던 이즈리얼의 얼굴이 별안간 햇빛을 맞은 것 마냥 창백해졌다.
[너희도 알듯이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야. 누구는 노래를 잘 하고, 어떤 이는 힘이 세지. 머리가 비상할 수도 있고 다혈질 일 수도 있고 또는 늘 우울하고, 초조하고, 눈치보고, 생각이 깊고, 호르몬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여기가 조용하겠어? 절대로. 하여! 저런 아이가 필요해.] 그녀의 손가락이 부두에 올라와 옷을 벗어 비틀어 짜고 있는 아이를 가리킨다.
[치외법권은 가장 높은 자와 가장 비천한자의 것이야. 무조건적으로 짓밟히는 것이 존재의 이유. 증오, 분노, 짜증, 슬픔, 억울함, 죽음, 질병, 모든 끈적한 감정들의 종착역. 으흠, 넘 어려운가, 아무튼 들어두면 나중에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 차별은 없어지지 않아. 큰 조직이 움직이려면 꼭 필요하거든. 그러니 두 번째 이즐리얼을 만들어도, 세 번째 이즈리얼은 생기기 마련이야.] 그녀가 윙크를 하자 이즈리얼이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백사장의 열기를 머금은 열풍이 불어 닥쳤다. 간간히 섞인 모래가 유리를 미약하게 치는 소리가 난다. 이사장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으며 풍경을 구경하던 케이틀린이 입을 열었다.
[애들 버스 탄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던 신드라와 아이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한다. 이사장은 난간을 넘어 미끄러지듯 천천히 버스로 갔다. 구석에 숨어서 흡연을 하던 한 무리도 어슬렁거리며 버스로 다가간다.
마지막으로 케이틀린이 계단을 내려가기 전 뒤돌아 바다를 보았을 때 한 무리의 아이들이 바다로 옷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냐? 똥 쌌지?] 숙소에서 먼저 나와 해변에서 기다리던 잔나가 외쳤다. 그의 외침이 밤하늘과 꼭 같은 색으로 물든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어머니 때문에, 머리터럭은 그저 돌아다니면 마른다고 누누이 말해도 끝끝내 케잉이랑, 징크스의 머리를 말리더라.]
[감기 걸리면 본인만 손해니까요.] 오리아나가 바다를 보며 대꾸하였다.
[전부 머저리들인데, 감기 따위에 걸릴 것 같아?]
[너 포함이지,] 머리를 말리고 땋지 않아서 산발이 된 징크스가 투덜거린다.
[어디로 가려고?]
[뻔하지, 이 조합으로 어디를 가겠어?]
[에바, 세바 터진다, 여기까지 와서 피노당을 해야 해?]
[일단 움직이자, 어디 갈지 정하는데 한오백년 걸리니까.] 바이와 잔나가 모래사장으로 내려갔다. 해변의 중앙엔 번화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좀 됐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는 탈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해줄 일을 계획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불판처럼 뜨겁던 모래사장은 바다에서 슬금슬금 걸어 나오는 해풍들의 발밑에서 서서히 식어가고 별빛과 가로등은 서로 적당히 타협해 한쪽은 거리에서 다른 한 쪽은 수평선의 위에서 명멸한다. 냉기와 온기, 흐릿하고 밝음이 뒤섞인 바닷가, 경계가 사라지는 곳에서 정욕의 꽃봉오리들은 하나 둘 만개한다. 해변의 밤은 낮보다 뜨겁다.
[와, 봤어 이즈리얼?]
[못, 못 봤어.]
[못 봤다고? 설명해 주지, 둘이 아주 딱 달라붙어서 혀뿌리를 뽑을 기세로 물고 빨고 아주 그냥.] 바이가 이즈리얼의 머리통에 손을 올리고 연인들이 앉아있는 쪽으로 돌려준다.
[니는 여자냐 아니면 아저씨냐. 에라이 젠장 나는 어디 여자 친구 안 생기나. 부러워 죽것네.]
[안 생겨, 내가 볼 땐 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어. 얼굴을 봐, 이게 사람얼굴인지 소보루빵인지 구별이 안가잖아. 자살이 답이다.]
[귀신 씨나락 훑는 소리하고 있네, 넌 그럼 전생에 무슨 폐악질을 저질렀기에 그렇게 형성되었냐? 깡패? 건달? 밀수업자? 역적? 반항아? 이런, 넌 자살도 답이 아니네. 지금 다 하고 있으니까 다음 생에도 답이 없다.] 말로 이길 수 없었던 바이는 주먹을 면상에 꽃아 주는 것으로 응수 하려고 했지만, 잔나가 잽싸게 바다 쪽으로 뛰어가서 실패했다.
[아할랄라라랄, 나잡아 봐라.]
[허허허허, 이 귀염귀염한 세끼야, 지금 잡히면 반만 죽여 줄께.]
[앙 자기 야해.]
[십세야 넌 방금 요단강을 도하했다.] 잔나와 바이는 바닷가 쪽으로 뛰어갔다.
[오리아나, 잔나와 바이는 사이가 참 좋은 거 같지 않아?]
[눈이 삐꾸네.]
[바이가 쑥스러움이 많아요.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투르죠.] 징크스는 토를 간신히 참는 표정을 지으며 오리아나를 보았다.
[블루스크린이 떳냐? 저게 어디를 봐서 분홍분홍한 분위기야, 쫌 있으면 피칠갑이 될 껄, 곰이 사슴을 쫓는 모양세가 더 낫겠다. ]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에요.]
[꺼져, 야 캐잉 폭죽이나 사러가자.] 징크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는 번화가 쪽으로 걸어간다. 오리아나는 그 뒤를 쫓으려다, 바이가 잔나의 발목을 잡아 자빠트리는 장면을 보고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 명의 아이들이 번화가로 들어섰다.
거리의 중앙엔 포장마차의 행렬이 끝도 보이지 않게 길게 이어져있다. 가계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사이로 탈을 뒤집어 쓴 광대들이 찌라시를 뿌리며 호객행위를 한다. 케이스를 펼쳐놓고 기타를 치는 거리의 악공에게 10살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주머니의 동전을 살며시 놓고선 잽싸게 인파속으로 사라며, 그 옆에서는 소년의 툭 튀어나온 이마를 과장해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공이 앉아있다. 거리는 껌딱지 자국과 흘린 음료수가 마른 끈적한 흔적으로 지저분하지만 행인들은 들뜨고 흥분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 향기도 질 수 없다. 골목에서 풍겨오는 단내, 먹자골목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고기 타는 냄새, 메케한 매연이 있지만, 노점상에서 풍겨오는 튀김의 냄새가 가장 압도적이다.
[그런데, 폭죽을 팔까? 아까 보니 표지판에 폭죽을 쏘다 걸리면 벌금이라던데.]
[튀면 되. 아님 애당초 팔지를 말던가. 엌, 야이 장님아, 어디에 눈을 달고 다니는 거냐!] 케이틀린의 걱정에 핀잔을 주던 징크스는 행인의 허리에 코를 부딪쳤다. 중심지에 가까워지자 정말이지 한걸음도 마음대로 옮기기 힘들만큼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이들은 골목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징크스는 말이야,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 귀여울 것 같은데, 그치 이즈리얼?]
[호구야, 생각 잘 하고 주둥이 놀려라.] 징크스가 이즈리얼을 째려보자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뒤로 자빠졌는데, 뒤에 있던 케이틀린이 잡아 주지 않았으면 뒤통수가 깨졌다.
골목의 끝에서 징크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으슥한 골목길에 숨어서 포장마차 거리를 유심히 살피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아놔, 허접스레기들. 야, 잠만 기다려봐.] 영문을 모르는 두 아이는 징크스가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눈만 끔뻑였다. 잠시 후 그녀가 폭죽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자, 그들의 눈은 이번엔 등잔 만해졌다.
[가자.] 적장의 목을 부하에게 던져 주듯 징크스는 폭죽을 이즈리얼에게 던져 주었다.
[와, 이렇게나 많이? 징크스 돈 주웠어?]
[꽁으로 얻은거야.]
[설마 손장난?]
[받은 거라니까, 받은 거. 귓구멍에 좆 대가리를 박았냐?] 네모난 삼각형을 본 듯 이해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는 케이틀린은 보고서는 징크스는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프락치 노릇을 좀 했지.]
아이들이 해변으로 돌아 왔을 때, 잔나는 머리만 내놓은 체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었다.
[오호? 어디서 뽀려온 거냐.]
[에라이.] 징크스는 바이에게 감자를 날렸다.
[받았다는데, 잘은 모르겠어.]
[받아? 뭐 상관없지. 받은 거든 훔친 거든 푹죽은 폭죽이니까.] 바이는 혀로 입술을 햝으면서 잔나를 내려 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분수형 폭죽이 쥐어져 있다.
잔나는 머리위에 분수형 폭죽을 올려 놓은 체로 바이의 미모와 미덕을 극찬한 다음에서야 모래구덩이에서 꺼내질 수 있었다.
[야. 잔나 한턱 쏴라, 내가 이미 설계해 뒀다.] 모래사장에서 나온 잔나에게 징크스가 말을 던졌다.
[엉?]
[어제 폭죽 사는데 세끼들이 노점상에서 물건 쌔비는 걸 봤어. 바로 찔렀지. 지금쯤이면 기숙사에서 진술서가 기다리고 있을껄. 겔겔겔.]
[나이스 샷.] 잔나와 징크스가 하이파이브를 하며 사이좋게 웃었다.
불장난은 두 종류로 나뉜다. 능동적, 수동적. 이즈리얼과 케이틀린은 모래사장에 앉아 가만히 불꽃이 타 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전자 쪽이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서로를 향해 폭죽 막대기를 쏘고, 분수형 폭죽을 수류탄처럼 던지고 노는 후자 쪽이었다.
모래사장의 열기가 엉덩이를 타고 은근하게 올라오고, 시원한 해풍이 머리를 식혀준다. 잠이 올 법도 한데 전혀 졸리지 않다. 첫 해외여행이라 그런것 만은 아니다. 마음 한 켠에 걸리는 일이 있다.
[저기, 이즈리얼. 뭣 좀 물어봐도 될까?]
[어? 마음대로.] 그는 대답을 하고 불꽃이 타들어 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잠깐 뜸을 들이 수밖에 없었다. 이즈리얼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못된 녀석들이 어떻게 괴롭히는지 알고, 피하는 방법도 알지만, 맞서 싸워기는커녕 벗어나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드라, 이사장님 있잖아. 뭔가 생각이 이상한 것 같아.]
[어디가?]
[아니, 생긴 것 말고, 아까 카페에서 한 말 말이야. 아무리 교육을 하지 않는 이사장이라도 그런 말은 조금 아닌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이즈리얼은 불꽃이 사그러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막대기 폭죽이 다 탔다.
[난 이해가 되는데. 틀린 말은 아니야.] 그는 새 폭죽에 불을 붙이며 의외의 대답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한명이 괴롭힘을 당하는 게 맞는 소리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설마 내가 그렇게 생각하겠어, 다만......, 우두머리입장에서는 맞는 소리였다는 거지. 생각해 봐. 큰 무리를 한두 명 정도 희생시켜서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면 그건 참 남는 장사야, 당하는 한두 명은 죽을 맛이겠지만.] 그의 눈꼬리가 내려가고 목소리가 잠기자 명멸하는 불길이 그 슬픈 얼굴을 쓰다듬어 준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야. 학교에서 그런 게 왜 필요한데, 우리가 짐승이야? 그렇게 무리를 통솔 하고 싶으면 지가 희생하면 될 거 아니야.]
[누가 그런 걸 하고 싶겠어. 몸도 마음도 걸레짝이 되는데 말이야.]
[너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갑자기 화가 치미는지 그녀는 벌컥 성을 내고 말았는데, 이즈리얼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우는 것을 보고 이내 후회했다.
[맞아, 내가 그러면 안 되지.]
[미안.]
[괜찮아, 폭죽 다 탔다.]
그 후 그들은 말없이 폭죽을 태웠다.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이 놀러나가 없는 숙소는 조용하다. 객실엔 일반 손님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텅 비어있다. 그리고 2층에 있는 사인 일실 방으로 한 아이가 들어간다.
그는 한여름에 괴상하게도 가죽장갑을 끼고 있다. 방으로 들어온 다음 가죽장갑을 벗어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선 욕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세면대에 물을 받고선 얼굴을 씻었다. 매번 일을 끝내고 나면 달뜨는게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박수가 올라가며 온 세상이 머리위로 덮쳐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얼굴에 맺힌 물방울들이 화끈거림을 눌러주는 동안 주머니에 꾸겨 넣은 장갑을 꺼내 조심스럽게 닦는다.
[그래 거기 검지 쪽, 손가락 사이사이도 한번 봐 달라고.]
[으, 언제 이런 게 묻었지, 깔끔하게 했는데.]
[세 번째 녀석이었어, 유난히 발악이 심한 녀석이었어.] 먼저 몸을 씻은 왼쪽이 몸을 축 늘어트리고 대꾸했다.
냉수가 열기를 어느 정도 잡아주었지만, 혈관 속을 미친듯이 뛰어다니는 피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방에는 나 혼자 밖에 없고 같은 방을 쓰는 녀석들이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여름 밤공기가 불어 들어온다.
[시원하네.] 우피장갑이 창틀에 걸터앉아 젖은 몸을 말리며 중얼거린다.
[경치도 끝내주고 말이야.] 창자까지 서늘해 지는것 같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거 알어? 이 섬은 아이오니아령이긴 한데, 옛날부터 무역상이니 침략군이니 해적이니 이주민이니 오만 잡다구리한 것들이 다 흘러 들어와서 문화가 참 독득하데.]
[그래 보이더라. 건물도 어디는 높아봤자 3층 밖에 없는데, 우리가 머물고 있는 구역은 고층건물이 즐비하더라.]
[야 저 지붕 봐라, 아침엔 청색이었는데, 지금은 가로등 때문에 단풍처럼 울굿불긋하다. 높은 건물의 지붕은 저렇게 빛에 따라서 색이 변하지는 않는데 말야.]
[그렇네.]
[해변가도 즐거워 보여, 아까 애들이랑 같이 나가지 그랬어.]
[응?]
[나가서 놀지, 뭣 하러 거절했어? 모처럼 여기까지 나왔는데 그런 지저분한 일을 할 바에야, 손잡고 나가서 노는 게 훨씬 나았을 게야.] 창가에 걸터앉은 장갑이 손가락을 건들거리며 말했다.
[됐어, 어차피 늦었어. 그리고 오고 싶지 않은 여행이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의 뒤통수에는 후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키 큰 애가 잔나지, 착해보이더라.]
[맞아, 원래는 내가 일진 녀석들이랑 같은 방을 써야했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이쪽 방으로 내 이름이 올라와 있더라고. 나중에 물어보니까 웃으며 기업비밀이라 알려 줄 수 없다고 하네.]
[바이, 징크스, 오리아나, 다들 한가들 하는 애들인데, 너도 한 번 비벼봐, 이즈리얼처럼.]
[그건 안돼.]
[어째서.]
[균형이 깨지거든.]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래, 바이의 무리에 어찌저찌 낀다 쳐, 그럼 일진 놈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즈리얼에 이어서 나까지 손아귀에서 벗어나면 지들 딴에는 존심이 개 박살이 났을 텐데.] 말문이 트인 것 같다. 마음속에 있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힘든 건 나 혼자면 충분해. 견디고 참는 데엔 이골이 났다고.] 오한이 든다. 몸의 열기가 식어서만은 아닌 거 같아서, 장갑을 가방에 챙겨 넣은 다음 침대로 몸을 던졌다.
눈을 감자 손이 보인다. 잔나와 이즈리얼이 선생님의 눈을 피해서 놀러나가기 위해 창문에 서서 내민 손길이다. 두 사람은 능력과 마법을 쓸 줄 알아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다.
탈출의 손길을 잡아야 했나. 아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은 도움의 손길을 함부로 잡는 게 아니다. 짐이 되어서는 않된다. 족쇄가 되어서는 안되지 하면서 나에게 최면을 걸어 위로하지만 슬프다.
나는 다만 배신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도 이 지옥같은 생활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탈출을 위해 뻗은 내 손길을 잡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날 위해 손을 내민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 선생님, 경찰, 그리고 친구.
더 이상 희망을 가지고 잃는 반복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지금 당장 희망을 잃어버리기엔 나는 너무 위태로운 상황이다. 차라리 혹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기다리며 견디는 수밖에 없다.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먹먹하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내 처지가 새삼 원망스럽지만, 하루이틀 일도 아니다. 배계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죽여 울던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무거운 머리와는 다르게 몸이 노곤해 지면서 의식이 몽롱해진다. 멀어지는 감각 속에서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해도 이렇게 포근한 공간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면 아쉬울 게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4.
다음날의 일정은 민속촌 방문, 중식, 자유 시간, 석식, 레크레이션이었지만, 가계에서 물건을 슬쩍한 경범죄가 발각되어 아침부터 경찰들이 찾아 온 것도 모자라 여자아이들 가방 속에서는 죽거나 사지가 절단되었으나 아직 살아 있는 쥐들이 나오는 바람에 오전일과가 전부 오후로 밀린 것은 물론이오, 강당에 집합해 한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도 일과는 진해되어야 하기에 여행일정은 자유 시간을 없애고 수박 겉 햝듯이 의미없이 진행되었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온 아이들을 레크레이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지금 놀러온 줄 알아! 엎드려!] 빨간 육각모를 쓴 진행자가 악을 쓴다. 우락부락한 덩치가 고함을 지르니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체 시키는 대로 한다.
엎드려뻗쳐, 어깨동무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쪼그려 뛰기, 원산폭격, PT 8번, 등등 도대체 어떤 변태가 이렇게 힘든 자세를 알아냈는지 궁금할 정도로 온 몸이 아픈 얼차려를 아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수행했다.
강당이 얼차려로 뿜어져 나오는 체열로 후덥지근해지자, 강사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심을 쓰듯 화장실을 다녀온 뒤에 계속해서 진행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지랄 똥 싸고 있네.] 잔나가 양손을 들어 중지를 올려 보인 다음에 이즈리얼을 낚아채서 잽싸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소변을 다 쏟아 내었건만 불평주머니는 비워지지 않았다.
화장실 근방에서는 의회가 열렸고 주제는 진행자의 어머니가 계신지 안 계신지 였으며, 대다수의 토론 참석자는 없다 쪽에 섰다.
[허허허,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네, 놀러온 줄 알아? 시발 그러면 내가 너한테 바다 건너까지 와서 쳐 맞으러 왔겠냐?]
[뉘집 가시나 입이 이렇게 고운가 했더니 너냐?] 바이는 웃으면서 주머니의 라이터를 잔나에게 가볍게 던졌다.
[진짜 엿 같다, 어디로 쨀 거지?] 잔나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당근 빠따지.]
[여섯이나 째면 눈치 깔거 같은데.]
[어쩌라고.] 징크스가 걱정을 단번에 깔아뭉갠다.
아침의 일 때문에 덕을 보았다. 일진 놈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끌려가 진술서를 써야 해서 선생 몇 명이 동행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숙소에 들린 후 버젓이 현관문으로 자유를 찾아 떠났다.
전날 번화가를 탐방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 조용하지만, 고풍스러운 해변가를 거닐어 보기로 했다. 전적으로 오리아나의 의견이다.
[야, 여기에선 왠지 방정맞게 굴면 안 될 것 같지 않냐?]
[개소리를 왜 날 보고 하냐?] 옆에서 잔나가 또 깐죽거리지만, 일리 있는 말이라 가만히 있었다. 노천카페가 즐비한 이 거리는 정말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분위가가 가득해서 감히 시끄럽게 웃고 떠들 수가 없었다.
[어때요, 좋죠?]
[저쪽이랑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참 분위기가 확 바뀐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와, 저 인간 해변가 오는데 저렇게 차려 입고 왔어, 안 더운가?]
[따분해, 뭐 할껀데 그래서?]
[음, 차라도 마시죠.]
[나 돈 없어.] 징크스가 호주머니를 발랑 까보였다. 먼지 부스러기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싱긋 웃어 보이곤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서는 해변가에 위치한 가계로 들어간 후 바다가 잘 보이는 테이블을 잡아 아이오니아 말로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잠시 후 그들 앞에는 맥주가 놓였다.
[제가 살게요.]
[...... 여기 민증 검사 안 해? 아니 그전에 이 조합은 딱 봐도 고삐린데? 여기 장사 접고 싶은가?]
[사소한건 접어두고 지금을 즐겨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어떤 의미로 대단하긴 하다.]
[어떤 술수를 부린거냐.]
바이의 질문에 대답으로 오리아나는 턱으로 카페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제드와 낯선 여인이 있었다. 오리아나가 윙크를 보내자 제드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아하, 입막음이구나. 교장쌤도 정정하셔.] 잔나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신드라가 알면 섭섭해 하겠는데 안 그래 케잉?]
[그럴지도.]
[왜? 제드랑 신드라가 무슨 사이인데?]
[얘들은 가라, 얘들은 가.] 잔나의 호기심 넘치는 질문을 딱 잘라 대답하고 바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서 한 모금 넘겼다. 콧잔등에 거품이 조금 묻었다.
파도가 모래사장에 와서 사그라지고 풀숲에서는 여치울음이 한낮의 열기를 사그러트리는 시원한 밤이다.
[에라이 화상아, 못 먹는 술을 왜 처먹어.] 잔나가 이즈리얼의 등을 쳐준다. 그는 가계 뒤편에서 벽에 손을 짚고서는 속에든 것들을 게워낸다.
음식찌꺼기들이 겉에 묻어있는 쓰레기통 밑에서 한 마리의 고양이가 슬그머니 나온다.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한 모양이다.
[새끼 뱄다.] 케이틀린이 중얼거리면서 치마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녀가 소세지를 반으로 잘라서 고양이에게 던져 주자, 암고양이는 수염을 떨면서 경계를 잠깐하고서는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으적으적 씹어 먹는다.
[훠이, 언니들 연초 태우니까 절로가, 애한테 나쁘다. 참나, 무슨 길냥이가 저렇게 겁이 없어, 사람 무서운 줄 몰라.]
[사람을 무서워해? 왜?] 케이틀린이 고양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어본다.
[무서워해야지.] 징크스가 고양이에게 다가간다. 바이는 담배를 물고서는 담벼락을 돌아 어디론가 가버렸다.
[왜, 우리 동네 고양이들이 사람에게 다가오지 않는 줄 아냐?] 징크스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준비한 것처럼 키득인다. 감도 못 잡았는지 잔나와 케이틀린이 멀뚱히 바라보자, 징크스는 검지손가락으로 권총모양을 만든 다음에 케이틀린에게서 반쯤 남은 소세지를 낚아챘다. 새빨간 눈이 형형히 빛난다.
[네일건이라고 아냐?]
[가다판에서 쓰는거?] 잔나의 대답에 징크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한 쪽 손에 먹을 걸 올려놓고, 등 뒤에 네일건을 숨긴 다음, 땅땅땅 빵!] 징크스는 바닥에 떨어진 고기조각을 주워 먹는 고양이의 마빡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고양이는 도망은커녕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가만히 있는 고양이에게 왜 그래, 잔인해.] 케이틀린이 중얼거린다. 바이가 한손에 물이 담긴 참치캔을 가지고 돌아왔다.
[길냥이들은 깨끗한 물 구하기가 제일 어려워.] 그녀는 이즈리얼의 토사물을 햝아 먹으려는 고양이를 들어서 통조림 캔 앞에 놓았다. 고양이는 물 냄새를 맡고 날름날름 물을 마셨다.
[야,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둡냐? 똥 마려?]
[꺼져, 그냥......, 옛날 일이 생각나서.] 잔나는 바이의 낯선 표정을 바꾸기 위해 장난을 처 보려 했지만, 그만두고 이즈리얼의 등이나 계속 두드려 주었다.
낯선 지방으로의 여행, 맞지 않는 음식과 물, 냄새마저 다른 공기, 그리고 레크레이션 강사의 훈육이 겹쳐 숙소의 아이들은 엎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누구는 빼고.
바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몸의 피곤을 머릿속에서 맴도는 잡생각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게 억누르고 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이터와 담배를 챙겨서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 팔을 기대고 불을 붙였다. 뒤를 따라 계단을 타고 발걸음 소리가 올라온다. 오리아나였다.
[뭐냐, 늦게 자면 키 안 큰다.]
[다 컷어요, 머리가 복잡해 잠이 오지 않네요.]
[쳇, 잔나가 더 낫지.] 바이는 툴툴거리며 몸을 옆으로 조금 옮겼다.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구름이 그득하다. 바이는 조그마한 하얀 구름을 띄어 올려 농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았다.
[야 오리아나, 내가 재미있는 썰 하나 풀어볼까?] 그리고선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말을 잇는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한 꼬맹이가 살았어. 근데 그 녀석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는지 되는 거 하나 없고, 불알 두 쪽마저도 없었지, 시발. 그래서 어디를 가든 천덕꾸러기 취급이여서 얻어맞고, 욕 처먹고, 무시당하고 살았지. 한 번은 어느 교회에서 무료급식이나 얻어먹으려고 예배에 참석했는데, 목사의 엿 같은 설교를 듣던 와중 갑자기 의문이 고개를 불쑥 내밀더라고, 내가 선지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당하고 살지?]
[교회 밥 은근히 질도 좋고 양도 많이 줘서 괜찮지요.]
[얼라? 너가 그걸 어떻게 아냐?]
[동생들을 데리고 종종 갔어요. 하하하하, 대식구여서 집사님이 곱게 보진 않으셨지요.]
[한 술을 더 뜨네? 아무튼 그 꼬맹이 녀석 그때부터 골똘히 생각을 했지 답을 구하려고. 그리고 마침내,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답을 얻었지.]
바이가 주먹을 꽉 쥐자 담배 곽이 우그러졌다.
[바로 힘, 힘이었어. 약하고 볼품이 없으니 무시하는 거였어, 전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결심했지. 없어도 있는 척, 대수롭지 않게 욕을 던져 쿨해 보이기, 한번 깜보였다 싶으면 어떤 비열한 수단을 써서라도 복수하기, 등등등 효과는 굉장해서 차차 그 녀석을 얕잡아 보는 사람이 적어졌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아졌어. 덤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늘어났고.]
[행복한 결말인거 같네요.]
[그때는 해피엔딩이었지, 시간이 한참 지나 한 사건이 터졌어.]
[그 녀석이랑 어울리는 무리가 있었어. 쓰레기더미가 차라리 깨끗해 보일 정도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더러운 녀석들이었지. 어느 날 한 녀석이 고양이 한 마리를 산체로 잡아왔어. 그리고 죽였지 무참하게. 웃음이 나오고 어금니가 떨리는 희열을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녀는 의문과 마주쳤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만난 그런 의문 말이야, 그래서 발을 휙 돌려서 고양이 시체가 있는 곳에 가서 골똘히 살피며 스스로에게 물었어, 이게 왜 재미있었지?]
[비위도 좋네요.]
[억척스럽게 살았으니까. 강자는 약자에게 뭘 해도 용서 받으니, 강해지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지, 그건 옳은 말이었어.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당한 모든 일들이 설명이 되지 않았거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약자를 짓이기고, 비슷한 놈을 찍어 누르고, 쎈 놈을 교묘하게 꺾는 행동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더라고, 특히 짓이길 때......, 오리아나 혹시 토끼를 죽인게 이 꼬맹이가 아닐까 싶어. 자신도 모르게 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 일이 생긴 후에 소녀는 뭐랄까 성숙해졌다고 해야겠지, 불필요한 싸움은 피해 다녔고 말과 돈 그리고 인맥으로 문제를 해결했거든. 죽이거나 패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 희열을 그리워하고 있어. 설레여.]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네요. 사람은 매 순간을 의식하고 살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의식하고 있는 시간이 더 적죠.]
바이는 지긋이 오리아나를 보았다.
[눈치하나 드럽게 없네.]
두 아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또 다른 불면증 환자가 나타났다. 환자는 산책이라도 하려는지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씨앗을 뿌렸다. 어떤 건 자갈밭 사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해 말라 죽었고,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진 종자는 움 조차 틔우지 못했다. 양지바른 토지에 떨어진 씨는 새와 쥐들의 먹이가 되었지만, 그중엔 살아남아 수만의 낱알을 맺었다.
수확을 하러간다.
시궁쥐들은 워낙 더러운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마비약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취성분이 온 몸에 퍼지기는 했어도 완전하게 작용하지 않아서 다가가니 술 취한 주정뱅이마냥 갈 지 자로 도망가려 했다.
꼬리를 밟았다. 네 발로 바닥을 맥없게 긁을 뿐 도망치지 못한다. 반대쪽 발로 머리를 천천히 밟자 깔창 너머의 뼈들이 으스러지며 생긴 진동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기분 좋은 오싹함이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아쉽기 때문에 두 번째 덫을 살피러 갔다.
숙소식당 뒤 켠, 음식물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은 들짐승들에겐 뷔페다. 아까 몰래 가져다 놓은 고기 통조림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했을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못해도 고양이, 잘하면 들개나 너구리도 잡혔겠지.
덫을 논 장소에 가보니, 암코양가 옆으로 길게 누워있다. 약이 근육이란 근육을 전부 풀어 놓은 것이다. 만삭이라 눈에 띄게 배가 불룩하다. 고열량의 단백질이 필요해서 기름진 참치 통조림이 떡하니 놓여 있으니 의심할 겨를도 없이 먹어치운 것이겠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다.
[밝은 곳으로 가야겠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허리춤에서 네일건이 턱을 덜그럭 거리면서 대꾸한다.
[다들 정신없이 자고 있을 꺼야. 아까 개처럼 굴렀잖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지. 정 하고 싶으면 산에 들어가서 해, 등산로에는 가로등이 켜진 곳도 있으니까.]
[훌륭한 생각이야.] 남자아이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붙잡고서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가로등이 아주 드문드문 박혀있는 산길이 정상까지 이어지고 산길에서 벗어난 곳은 어둠이 아귀처럼 주둥이를 벌리고 있다. 하늘에 그득한 회색구름의 무게 탓인지 숨이 턱턱 막힌다. 아무 벌레라도 울어준다면 적막감이 덜 하겠지만, 온 세상이 다 질식해 죽은 것 마냥 조용하다. 동행이라고는 그림자도 없는데, 주위엔 온통 썩은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뿐이다.
[귀신이라도 튀어나올거 같네.]
[좋지, 말동무 하게.]
[이제 슬슬 하자, 돌아갈 길도 걱정해야지.]
남자는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주머니에서 나온 왼쪽 가죽장갑이 고목나무를 보며 감탄한다.
[오호, 느낌 있는 나무인데.]
[확실히, 한 백년은 넘어 보이네. 왜 허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있지?] 오른쪽이 물어본다.
[나무가 오래 살면 가지의 무게를 못 이겨서 몸통이 갈라지거든, 그거 막으려고 그런가 본데, 아마.]
[그럴싸해.]
고양이의 묵을 잡고서 나무에 바짝 들이댔다. 눈을 감았다. 희미한 윤곽을 가졌던 것들이 깨끗하게 어둠에게 잡아먹히고 촉각만이 남았다. 방아쇠의 차가움, 목덜미에 달라붙은 습기, 발밑의 부엽토, 장갑 너머에서 미약하게 떨리는 맥박.
[까짓것, 귀신한번 나오라고 해, 누구의 원한이 더 깊은지 한 번 보자.] 눈을 뜨자 멱살을 잡힌, 약기운이 더 퍼져 온몸이 축 늘어진 고양이가 보인다. 네일건을 들어올린다. 공이가 못대가리를 치고 파열음이 공기를 찢는다.
환상을 봤다. 뾰족한 끝이 가죽을 손쉽게 뚫고 들어가서 근육을 헤집는다. 단단한 뼈를 박살을 내고서도 못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하여 살의 바다를 항해해 나아가 마침내 항구에 정박했다. 나무가 못 뿌리를 단단히 감싸 안는다.
하나, 둘, 셋. 어깨에 맨 처음 쏜 한 방, 앞발에 한 발씩 총 네 개의 못이 몸을 꿰뚫고 고양이를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고양이는 마취 속에서도 고통을 느끼는지 낮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 격렬하게 저항을 하거나 탈출을 하기위해 손톱을 세우지 못한다. 마취가 고통을 압도한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조금 더 자세하게 살피고 싶은 욕망을 만족시킨다. 내 입김에 수염이 파르르 떨린다. 살을 찢어버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단단히 못 박혀있고,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발톱을 세우지만 무슨 소용인가. 절박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갈팡질팡함이 서려있는 그 표정은 정말 매혹적이다.
[울어봐, 도움을 요청해봐, 누가 손길을 뻗어 줄까?]
[청승맞긴.] 장갑이 핀잔을 주었지만,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 시마이 치자.] 네일건이 적막을 깨트렸다.
[그래야겠지, 대미는 어떻게 장식할래? 머리 아님 몸통?]
[이럴 줄 알았으면 나이프도 데리고 오는건데,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손가락으로 튀어나온 배를 찌르니 단단한 덩어리가 느껴진다.
[깔끔하게 머리로 가자.] 우리는 말없이 동의했다.
가죽장갑이 주둥이를 잡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켰고 미간에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 너무 바짝 붙이면 않된다.
그리고 타격이 발생했다.
바이가 다급한 마음에 던진 짱돌은 괴인의 어깨를 맞추었지만, 쇠막대기가 이마를 뚫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야이, 썅놈아,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골통을 부숴주마!] 바이는 고함을 치며 상처입은 투우처럼 맹렬하게 돌격했다. 남자는 자신의 신성한 의식을 방해한 무뢰배들을 붉게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이를 뿌득 갈고는 고양이의 배를 향해 방아쇠를 두 번 당기고는 숲속으로 도망쳤다.
[이 개자식아 거기 못 서.] 바이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웠고, 나란히 뛰어가던 오리아나가 조금 더 앞서 추적하게 되었다. 그렇게 능선하나를 넘는 순간 오리아나가 달리기를 멈추었고 뒤따라오던 바이는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못들이 금속판을 때리고 튕겨져 나간다.
[쥐방울만한 놈이,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숙소로 뛰어요.] 오리아나는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바이에게 한마디 던지고 범인을 계속 쫒았다. 그녀는 엉덩이를 털고서는 비탈길을 도로 내려갔다. 뛰는 동안 자신의 몸에 바람구멍이 날 뻔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범인에 대한 증오를 활활 태웠다.
한밤중의 추격전은 공권력이 개입하는 바람에 결말을 맺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오리아나의 예측대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나쁜 놈은 숙소 쪽으로 도망을 쳤다. 산비탈이 끝나는 부근의 나무 뒤에서 어떤 예고도 없이 그림자가 튀어나와 도망자의 옆구리를 들이 받았다.
[교장 선생님, 잡아요.] 그 먼 거리를 뛰어 왔어도 헐떡이지 않는 오리아나의 목소리는 그렇게 절박해 보이지 않지만, 도망치던 아이가 바닥에서 구르는 것을 보고선 무릎을 잡고서는 숨을 고르었다.
제드가 언제든지 몸을 던질 준비를 하고 서서히 다가간다. 그가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나서는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자신의 얼굴을 가려주던 모자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교장은 맹수의 눈이라도 보아 오금이 저린지 한발 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총구를 제드에게 향한 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교장선생님 뭐하셔요!] 오리아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땅을 박차고 뛰어 나가려 했지만 불쑥 뻗어 나온 손에 막혔다.
[뭐하시는 거에요?] 그는 땅에 떨어진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바이가 숨을 헐떡이며 두 사람에게 뛰어 왔을 땐 설전이 거의 끝날 즈음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왜, 헉, 교장, 허억, 여기에, 있냐?] 숨이 차 구부러지는 허리를 일부로 꼿꼿이 하고 턱을 최대한 당기고서 힘겹게 말을 뱉는다. 눈초리만큼이나 날카로운 턱을 따라서 굵은 땀방울이 내려온다.
[믿기 힘든데?] 제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리아나에게 대꾸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시던지요, 그럼 땅을 치고 후회하실껄요.]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쌩까냐? 휴우, 폐 터지겠네.] 그녀는 팔뚝으로 땀을 훔치고서는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는다. 오리아나는 교장 앞에서 콧방귀를 한번 크게 뀌어주고선 바이의 팔짱을 낀다.
[뭐여?]
[따라오세요, 보여드릴께요.] 교장은 군말 없이 뒤를 쫓아 산으로 들어갔다.
자정은 이미 지났지만, 밤은 사방팔방에 뻗은 촉수로 만물을 더 억세게 조인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울긋불긋 염색된 천을 가지마다 늘어트리고 흰 동아줄을 허리에 두른 신목의 뒤쪽으로 일행은 돌아 들어갔다. 바이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자 슬픈 장면이 어둠속에서 떠올랐다.
지포라이터의 휘발유 냄새가 어느 정도 태워버렸지만, 습한 공기 중에 피비린내가 살짝 배어 있다. 고양이의 양팔, 겨드랑이, 머리, 그리고 복부엔 쇠막대기가 박혀있다. 머리부터 훑고 내려온 라이터가 하반신을 비추자 비린내가 짙어진다. 어미의 뱃속에서 나온 새끼들이 탯줄에 매달려있다. 어미는 어째서인지 마지막 순간, 이 힘든 세상에 핏덩이들을 두고 갔다.
[라이터 좀 주렴.] 제드는 바이에게서 지포를 건네받고선 주머니칼을 불에 가져다 대었다. 그는 양수가 쏟아서 생긴 웅덩이를 밟고서는 조심스럽게 탯줄을 잘랐다. 오리아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교장의 옆에 서서 꼬물거리는 생명들을 양손을 포개어 받았다.
바이는 먼발치에 서있다. 숨은 고르게 쉬지만 눈에는 아직도 핏발이 서있다.
[지랄이 풍년이야, 이럴 시간에 그 세끼나 쫓아서 족칠 일이지, 맘에 안 들어.] 그녀는 돗대를 뽑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가 없었다. 되는 일이 하나 없어 심사가 배배꼬인 그녀는 가래를 걸쭉하게 끓어 뱉었다.
[한 마리는 아마 죽었을 거다.] 제드는 홀쭉해진 고양이의 오른쪽에 박힌 쇠못 밑이 유난히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고서는 혀를 찼다. 그는 피와 살점이 묻지 않은 검지와 새끼손가락으로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선 손바닥위에 펼쳤다.
[이쪽으로 옮기렴.]
[괜찮아요.] 오리아나가 손바닥에서 꼬물거리는 새끼 세 마리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음, 그러니까 이건 좀 말하기 그런데 넌 손이 차잖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성인용 부품으로 갈아끼운지 오래에요. 돌볼 동생들이 많아서 이곳저곳을 성인용으로 바꿨거든요. 손바닥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니까 괜찮아요.] 교장은 오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노친내의 옹이 박힌 손바닥 보다 좋겠지, 숙소로 가자꾸나.] 중늙은이는 생명의 허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손을 손수건으로 훔친 후 그것으로 오리아나의 손바닥을 덮어주었다.
그들이 숙소에 다 닿을 무렵에 하늘에서 애기 손가락만한 빗방울들이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계소녀는 오므린 손을 최대한 가슴팍으로 당기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서 비를 막았다.
깊은 밤 이사장의 방문을 교장이 두드린다. 두어 번 문을 두드리자 나타난 신드라는 씻지도 잠을 잘 생각도 없었는지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 그 복장 그대로인 청바지에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왔다.
[혼자가 아니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쪽의 두 아이를 보았다.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제드가 몸을 살짝 뒤로 돌려서 오리아나의 손을 덮고 있던 손수건을 치웠다. 백발의 여인은 핏덩이들을 보고도 덤덤하기만 했다. 다만 방문을 활짝 열었을 뿐이다.
빗방울들이 창문에 떨어진다. 막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들을 시샘하여 도로 데려가려는 듯이 뼈만 남은 손가락들이 유리창을 두드리는것만 같다.
대응은 미약하다.
대야에 끓인 물을 붓고 37.5‘C로 맞춘다. 떠뜻한 물로 수건을 적셔 새파래진 피부를 문질러서 오물들을 씻어낸 후 침대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갓등을 가져와 열기를 뿜게 하고 깨끗해진 새끼고양이들을 그 밑에 놓는다. 아이들은 이사장의 간호를 그저 넋 놓고 볼 뿐이다. 고귀함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그녀의 평소 행실과 언행을 알고 있기에 자상하고 능수능란하게 생명을 다루는 몸짓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중앙탁자위엔 수건으로 만든 둥지가 있고 그 속에서 세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곤히 자고 있다. 둥지의 옆에서는 중탕을 한 탈지분유가 담긴 젖병이 수건에 쌓인 체 놓여있고 신드라가 젖꼭지를 십자모양으로 째놓았다. 욕실에서는 제드가 몸을 씻고 있다. 안팎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가득한데 적막하기만 하다. 적막감과 돗대가 사라진 초조함을 견디기 힘든지 바이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오리아나는 잠시라고 고양이들에게서 눈을 떼면 하늘로 날아갈 것이라 생각하는지 계속 고양이들을 지켜보는 중이다.
[신드라 가운 좀.]
[내꺼 줄게, 예네가 입을 것만 가져왔었어.] 그녀가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들고 욕실로 갔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는다. 신드라가 젖병을 들고 뺨에 가져다 대어본다. 손을 뻗어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집고서는 젖병을 입으로 가져다 대자 아등바등 앞발을 젓던 녀석이 이내 양발로 젖꼭지를 꽉 붙들고는 필사적으로 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장이 찬다.
[밤이 늦었는데, 가서 자렴.]
[얼굴을 봤죠? 알려 주세요.]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드는 대화를 매듭지어버렸다. 오리아나는 교장을 흘겨보았다.
[좋아요, 저에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요.]
[억지는.]
그렇게 대화가 끊켰다. 신드라는 어느새 3마리의 고양이를 배불리 먹이고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였다.
[이건 어떻게 할꺼야? 내가 키워?]
[아서라, 선인장도 말려 죽였으면서, 날이 개이면 길거리에 내 놓아야지.] 제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저희 반이 사육담당이니까.]
[갔다버려, 길냥이 세끼가 한두 마리인줄 알아, 살려 준 것만 해도 어디야.] 바이가 사납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제가 따로.]
[아 젠장, 귓구멍에 좇대가리를 박았어? 갔다 버리라고. 우리가 무슨 성자야?]
소파에 몸을 파묻고 팔다리를 길게 늘어트린 바이는 오리아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선 그녀의 말허리를 나오는 족족 동강내버렸다.
오리아나가 발끈해서 따지려 들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안락한 공간 속에서 맘 편히 쉬는것 같았지만, 바이의 눈은 상처 입은 사냥감을 눈 앞에서 놓친 사냥꾼 마냥 억울함과 분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이따금 천둥과 번개가 울리고 쳤으면 이 적막과 신경과민을 깨트려 버릴 수 있었겠지만 비만 내릴 뿐이다. 배불리 먹은 새끼고양이와 신드라만이 안락함 속에서 비몽사몽하고 있다.
[머리 아파, 토끼 일부터 해결하고 이번 일을 이야기 하자고.] 바이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커피봉지를 찢어서 종이컵에 쏟는다. 지금 카페인을 먹으면 잠을 못자겠지만, 이 끈적한 무기력을 떨쳐 내려면 어쩔 수 없다.
책상 위에 커피를 네 잔 내려놓자, 쌉싸름한 향이 옅게 퍼져나간다.
[바이, 저는 이 일을 해결해야지 토끼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해요.]
[똥고집 봐라.] 바이가 혀를 찬다.
[그런 의미에서, 교장선생님 어째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을 다 잡고서는 놓아 주었죠? 이렇게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일전에 벌어졌던 토끼 사건과 아주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되지 않는데요.] 오리아나는 굳이 의심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범인을 잡아 죄를 추궁하기를 갈망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토끼들을 돌보는 동안 죽은 토끼들을 묻었고 흙으로 덮을 때 마다 범인을 붙잡아 죗값을 치루 게 하고 싶은 소망이 날로 커져만 갔다. 시간이 흘러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제드는 바이가 타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희와 함께 붙어 다니는 친구들은 말야, 꽤나 개성넘치지?] 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 없는 말 이 천리를 가니까, 오늘 있었던 일과 그에 대해 어떤 변명을 내놓던 그렇지 않건 삽시간에 교내에 풍문이 퍼지겠구나.]
[뭐야? 지금 우리 입 싼거 걱정하는거야? 나불대지 않을 테니까 다 털어 놔봐.] 바이의 호언장담에도 교장은 입을 조개처럼 딱 닫고서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부탁을 너희에게 하는 건 이상하지만, 이번 한번만 이 일을 나에게 맡겨줄 수 없니? 내가 해결할 테니 더 이상 이 일에 신경 쓰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구나. 물론 일이 끝난 뒤 오늘 이런 악행을 벌인 작자가 누구인지 너희들에게 밝히마.]
[아는 사람이군요.] 단도직입적인 추궁에 제드는 침묵했다.
[오호? 빽 좀 있는 녀석인가 본데? 얼마나 삐까뻔쩍한 금수저 나으리면 이렇게 교장이 쩔쩔 매려나? 용의자가 추려 지는데.] 바이가 상류층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하긴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변명 그 이상이 아니겠지,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해 입을 다물어 주면 좋겠구나. 부탁이야.]
[알겠어요, 교장선생님 말씀대로 더 이상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또 이 일을 전교에 퍼트리지도, 그리고 고양이의 죽음에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오리아나가 소견을 밝히자 교장의 얼굴은 화색을 띄었다.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야, 누구 맘대로 그걸 정해, 난 내 눈깔에 흙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찬성 못해.]
[단, 교장선생님이 제 3가지 질문에 대답하시면요.]
[흠, 꽤나 공평해 보이는 구나, 그래 뭐가 질문이 뭐지?] 제드가 턱을 쓰다듬는다.
오리아나는 왼손의 검지를 들어올렸다.
[아테나의 부정한 성배와 관련되셨나요?] 그 순간 교장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물끄러미 아기고양이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을 살피던 신드라도 고개를 돌려 오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관련이라, 일단 아는 것도 관련 되어있다고 볼 수는 있지. 답변이 됐나?]
[네, 그럼 두 번째 질문. 왜 교장선생님은 그날 토끼를 보러 온 것이죠?]
[잘 있나 확인하려고 그랬지. 내가 종종 그곳에 가는 것은 너희들도 알잖니. 이제 질문이 하나 남았구나, 약속을 지켜주길 바란다.]
[행, 난 약속은 지키지 않지만, 거래는 지켜. 공평하게 가야지.]
[마지막, 모렐로는 왜 제드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교장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주먹 쥔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새하얘졌다.
[모랠로라니, 마도서 모렐로 말이냐.]
[마지막 질문에 대답을 안 하셨어요.]
[대답해.]
[먼저 하시면요.] 오리아나는 물러섬이 없었다.
[마도서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만, 너희가 어떻게 그걸 알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도서관에 있던?]
[예, 제가 옛날 책 읽는걸 좋아해서 고서적들을 뒤적이다가 발견했어요.] 새빨간 거짓말을 내뱉어도 오리아나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다.
[도서관?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잠자코 듣던 신드라가 콧방귀를 뀌고는 새끼고양이의 배를 꾹 눌러본다.
[학교가 워낙 유서가 깊으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마도서는 위험하단다.] 제드는 팔짱을 끼고서 오리아나를 보았다. 당장 내 놓으라고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녀는 양손을 공중으로 향한 후 어깨를 으쓱였다.
[반납했어요. 이젠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질문 다 했으니 저희는 가볼께요.] 오리아나는 아기고양이가 담긴 상자에 손을 뻗었다. 바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앉거라. 성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마.] 교장은 성질을 누르는 목소리로 두 아이를 붙들었다.
[우선 너희가 아테나의 부정한 성배에 대해 얼만큼 아는지 알고 싶구나.]
[주제를 모르고 꼴값떤 여사제가 봉인된 잔.] 바이가 갈무리했다.
[비슷하네, 그럼 왜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려 하는지는?]
두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서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성배가 단순히 사람을 유혹해 잡아먹는 사악한 물건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는데요, 성배는 사람을 부추겨서 피를 맛보려 하는 사악한 물건 아닌가요?]
[이런, 모렐로가 대충 설명해 주었네, 아니야. 성배가 왜 만들어 졌는지 한번 생각해보렴.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린 무기야. 한 나라를 뒤 엎을 수 있는 힘을 가졌고, 비록 타락하고 저주받았지만, 그 힘은 여전해. 좋지 않다는 것은 백주대로처럼 명백하지. 이건 경고란다.] 교장이 두 아이들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주변 선생들은 대부분이 너희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본단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 겪는 과정을 가식 없이 겪고 있다고 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되.]
[세상은 너희가 생각한 만큼 인정 넘치고, 사람다운 곳이 아니야. 어떤 사람은 남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 없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해를 끼쳐서 자신에게 필요 없는데도 이익이 된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많아.] 제드는 손가락으로 오리아나 앞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지극히 사소한일에 불과해, 하물며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물건이 걸렸을 땐....., 더 이상 끼어들지 마.] 잠이 깬 신드라는 미소를 띄운 체 대화를 듣고 있다.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교장선생님, 저희를 좋게 보아 주셔서 감사해요.] 오리아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일어난 뒤 상자를 들어서 바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제드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 점을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교장선생님, 당신은 토끼들이 다 죽어가던 날 무슨 일을 하시려 했지요?]
[교장선생님은 분명, 삽으로 남은 토끼들의 목을 찍으려 했어요. 이렇게 말이지요.] 오리아나가 한손을 삽 모양으로 만든 뒤 반대쪽은 주먹을 쥔 체 그곳의 손목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어찌나 생동감이 있었는지 상자를 쥔 체 지켜보던 바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드는 쓴웃음을 뱉었다.
[내가 아무렴 범인을 토끼처럼 만들 것이라 생각하는 게니? 허허허, 그럴 리가. 혹시 죄 값을 제대로 치루지 않을 것 같아 그러는 거면 내가......]
[아니요, 죄를 묻는 게 아니에요.]
[그럼?]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슬슬 묻어 나온다.
[궁예, 카이저소세, 몽당이. 얘들은 그날 이후 저희가 돌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토끼에요. 전부 가망성이 없다고 말했던 무리 중 3 마리 씩이나 저희가 살렸어요. 만약 저희가 교장선생님의 손을 붙잡지 않았으면, 사육장은 텅 비어 있겠죠?] 학생의 눈동자를 보며 교장은 입을 다물었다.
[저는 오늘 본 그 사람을 증오해요. 아마 사육장 사건의 범인일 테고, 오늘도 이런 만행을 저질렀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교장선생님에게 복수와 처벌을 요구할거 같나요?]
[가능성을 멋대로 제단 해 버리는 당신에게 그 악인을 넘길 것 같나요.] 두 사람은 서로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좀 전의 3개의 질문에 대한 댓가가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이 사건에서 발을 빼는 게 골자였던 걸로 아는데.]
[그가 누구인지, 저는 상관 안 해요, 이 소문은 퍼지지 않을 것이에요,]
[허참, 처음부터 공정하게 거래할 생각이 없었네, 궤변인건 알지?] 제드는 진절머리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맹랑한 아이들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운지 얼굴에 큰 웃음을 띄웠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지만 한 가지 꼭 집고 넘어가자. 나는 분명 이 일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경고했고 조언했어, 이후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내가 반듯이 너희들 편을 들어주진 않아.]
[오리아나, 너의 말이 맞단다. 하지만, 난 그때 그 토끼들의 목숨을 끊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본다. 때론 죽는 게 사는 것보다 훨씬 안락할 때도 있으니까.]
[그건 교장선생님의 최선이고 저는 저의 최선을 다 할께요.]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라 밤이 늦었다.] 아이들은 상자를 가지고 방을 나갔다.
[맹랑하네.]
[요즘 애들 같지 않아, 키우는 맛이 있는데. 가끔은 말 좀 들었으면 좋겠어.]
[누가 할 말은 아닌거 같은데, 그나저나 모렐로가 여기까지 오다니, 그리운걸.]
[만나주지는 않겠지.]
[아무렴 뭐 어때, 자고 갈래?]
[먼저 자, 잠이 안 와. 늙었나 봐.]
[그래, 적당히 고민하고자. 옛교관의 가르침이 있잖아, 생각은 짧게 행동은 신속하게. 신드라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서는 옷을 전부 벗고서는 침대로 들어갔다.
제드는 비가 부딫히는 창가를 바라본다. 물방울이 매달린 밤하늘 위로 소파의 않은 노인과 하반신만 가린 반나체의 여인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