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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토는 눈을 떴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둥근 원형의 방. 벽 근처에는 촛불이 빙 둘러서
일렁였다. 그리고 바닥에는 붉은색 육망성이 그려져 있었다. 어쩐지 소름끼쳤다. 아키토는 으스
스한 느낌에 양 어깨를 끌어안고 몇 번 문질렀다. 정면을 바라보니 마름모 형태의 출구가 보였다.
아키토는 천천히 출구 밖으로 나갔다.
출구 밖은 어두운 복도였다. 복도 양편으로는 마름모 형태의 출구가 쭉 늘어서 있었다. 아키토는
출구 안쪽을 봤다. 모든 방이 아키토가 있던 방과 똑같이 생겼다. 기분 나쁜 곳이다. 아키토는 수
없이 많은 방들을 지나갔다. 그리고 복도 끝의 커다란 출구로 나왔다. 출구 밖은 넓은 발코니 같은
곳이었다. 어두운 밤. 그 발코니에는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여자들도 있었고, 남자들
도 있었다. 대부분이 16세에서 20세 정도의 소년소녀들이었다. ‘뭐지? 이 상황은?’ 아키토는 주변
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모임 같은 건가? 아니면 사고? 사고가 나서 경찰의 구조를 기다린다던가.....잠깐, 그런데, 경찰
이라니. 경찰이 뭐였지??'
아키토는 기묘한 느낌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째서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한 여자
애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저기요. 여기가 어디에요? 왜 이런 곳에 제가....저...."
그 말에 주위의 몇 사람이 그 여자애들 쳐다봤다. 하지만 그들도 상황파악이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다들 불안해보였다. 그 때였다.
"여기 모여 있는 자들이 전부인가?"
누군가가 출구 쪽에서 걸어나왔다. 중년 남성. 그는 턱수염을 길렀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키는
175cm 정도에 몸이 제법 굵직하고 단단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엄청 강해 보였다. 남자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중에 자기가 누군지 기억나는 사람이 있나?"
뜬금없는 남자에 말에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아키토 본인도 자신이 누군지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 완전히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저는 일산고등학교 조세황입니다. 여긴 어디죠? 제가 왜 이런 곳에...."
중년 남성은 그의 말을 탁 끊으며, 고압적으로 말했다.
"그만! 너는 여기 남아있어라! 나머지는 따라와!"
그러더니 남자는 휙 돌아서서 출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체 그 남자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걷던 아키토는 뒤를 돌아봤다. 출구 쪽 철창이 천천히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드르르륵. 쾅!" 철창이 완전히 닫혔다. 그러자 이름을 말했던 남자애는 창살을
잡고 이쪽을 쳐다봤다. 순간, 아키토는 불안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아이들은 중년남자를 따라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이 있던 곳은 돌로 만들어진 높은 탑이었다. 어
째서 이런 벌판에 이런 탑이 있는 세워진 걸까? 어쩐지 불길했다. 아키토는 중년 남자에게 대체 무
슨 상황인지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주변을 둘러
보니 다른 아이들도 아키토와 비슷한 것 같았다.
중년 남자가 도착한 곳은 일종의 병영이었다. 넓은 연병장이 있고, 그 주변에 자잘한 운동기구들이
보였다. 연병장 뒤편으로는 2층짜리 건물 두 채가 보였다. 그곳에선 각각 20명씩은 생활할 만했다.
아이들이 모두 도착하자 중년남자는 연단위에 올랐다. 그리곤 열중쉬어 자세로 사람들을 쭉 둘러봤
다. 그는 낮고 근엄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범죄자다!"
그 말에 아이들은 당황한 듯 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아키토도 당황한 듯이 '내...내가 범
죄자?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지만, 도통 과거가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는 아이들을 쭉 둘러 본 후
다시 말했다.
"그것도 전쟁 범죄자들이다! 너희들은 우리 아르덴 국경에 넘어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약탈했다!
성범죄를 저질렀다. 그 죄는 사형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들에게 죄를 뉘우칠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들은........."
그 말에 한 남자애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잠깐만요. 아저씨! 저 학원가야 되는데요?"
그 말에 중년 남자는 한 동안 그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갑자기 프로레슬링 선수처럼 연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남자애의 면상에 주먹질을 했다. 남자애는 기습적인 일격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중년남자는 넘어진 남자애를 발로 서너 차례 밟았다. 남자애는 괴로운 듯 굼벵이처럼 바닥
을 기면서 토악질을 했다. 중년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또 질문이 있나??"
남자가 내뿜는 살기에 일동은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 남자는 다시 연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남자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연병장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범죄자다. 그들은 죄를 뉘
우칠 기미가 없어 아예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들이 속죄하고 아르덴 사회에 봉사하는 길은 하나다. 의
용병이 되어 싸우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일주일간 훈련을 받아야 한다. 훈련이 끝나면 그들은 모두 자
유다. 싸우고 싶은 방법으로 싸워서 돈을 모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시민증을 살 수 있다. 어엿한
이민자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아키토는 혼란스러웠다. 그런 건가? 나는 정말 범죄를 저지른 건가? 그래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가? 왠지 속고 있는 기분이 든다. 뭔가 다른 진실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것
도 잠깐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혹독한 훈련이 시작됐던 것이다.
훈련일과는 단순했다. 일어나서 아침채조. 식사. 근력운동. 식사. 무기 훈련. 식사. 그리곤 조금 쉬다
취침 이었다. 보기엔 단순하지만 훈련 하나하나가 힘들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 없이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남자애들은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여자애들이었다. 남녀 가리
지 않는 평등한 훈련방식에 여자애들이 따라온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중년남자는 결코 봐주
지 않았다. 안되면 될 때까지 시켰고, 조금의 눈물이라도 보이면 주먹질과 발길질로 구타했다.
첫날부터 여자애들은 병영을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구에는 경비병이 있었고, 창문은 쇠창살로 막
혀있었다. 그 누구도 탈출할 수 없었다. 견디기 힘들어도 견딜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이 지나자 다들 어느 정도는 눈빛이 달라져있었다. 중년남자는 마지막 날 아침. 아이들을 연병장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말했다.
"훈련 기간 중에 날 죽이겠다고 한 놈들 있었지?"
아이들은 중년남자의 위압적인 태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없군. 그럼 이상!"
그것을 끝으로 남자는 연단에서 내려와서 자기 집무실로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아키토는 당황스러
웠다. 뭐랄까. 중년남자가 마지막에 가서는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게 뭔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 아닌가? 게다가 앞으로는 뭘 어쩌라는 건가?
아키토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세디스트 같은 중년남자에게 쌍욕을 하거나 침을 뱉었다. 그러면서
이제야 풀려났다 하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해방감? 물론 아키토도 지긋지긋한 훈련이 끝난 건 좋았다. 하지만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냥 이 상태로
밖에 나가버리면 큰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아키토는 생각했다. ‘내가 마물들과 싸울 수 있을까? 하다못해
고블린 한마리라도 이길 수 있을까?’ 아키토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벌써 몇몇은 무리를 지어서 연병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훈련 중에도 가장 강해보이던
녀석들이다. 저들은 어떻게 해야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파악한 것이다. 강자들끼리 모여 성장해
나간다. 그런 생각으로 뭉친 거겠지. 아키토는 왠지 모르게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키토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자애들의 무리 속에 몇몇 남자애들이 섞여있었다. 그들은 평소에 식사시간
이나 휴식시간만 되면 같이 놀던 애들이었다. 평소에 말주변이 없고, 사람을 잘 대하지 못하는 아키토로써
는 조금 부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다 그들 중 한 무리가 연병장을 떠났다. 여자 넷에 남자 하나.
그것을 보며 아키토는 생각했다. '아아. 저 덩치 큰 남자애가 손해 보겠구나. 저 녀석은 아마도 괜히 쓸대
없는 일에 폼 잡다가 다치거나 죽게되겠지. 저건 아무리 봐도 바보짓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부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키토도 일단은 건강한 10대 남자아이였으니까.
아키토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남은 녀석들은 아키토를 포함 남자 다섯에 여자 다섯이었다. 연병장을 나가서
마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어찌됐건 어느 쪽으로나 들어가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아무하고나 친하게
지낼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그때 한 남자 녀석이 다가왔다.
"어쩔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아키토는 남자애 쪽을 바라봤다. 180정도의 키에 몸이 좀 마른 녀석이었다. 머리칼은
단정한 단발이었고 눈매가 좀 매서웠다. 꾹 다문 입매무세가 굉장히 냉정해 보였다. 이 녀석이라면 운동신경이
괜찮은 편이었다. 아마도 가장 약한 마물과 싸운다면 1대1로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수준은 됐다.
이 녀석의 이름은 겐지였다.
"글쎄."
아키토는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 어쩔 거냐고 물어봐야 어쩔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겐지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곤 다시 물었다.
"남자애들이 몇 명 안 남았어. 5명. 이걸로는 부족해."
겐지의 그 말에 아키토는 조금 놀랐다.
"너 정말...마물과 싸울 셈이야. 마을로 내려가서 일하는 방법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순간 아키토는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그렇다.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아키토는 진심으로 그렇게 할 생각
은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간 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아키토는 어렴풋이 알게 됐다. 어디를 가도 무시당하리란
사실을. 반대로 말하면, 믿을 사람은 이곳의 아이들뿐이라는 것이다.
아키토는 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할게. 싸우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해. 뭐,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은 어쩔 수가 없는 거야."
그 말에 겐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렇군. 하지만 싸우려면 강한 애들이 필요해. 내가 찜했던 애들은 전부 떠났지만."
"이상한데. 너는 꽤 괜찮잖아? 왜 애들이 너를 끼워주지 않은 거야?"
"성격 때문이겠지. 난 좀 뭐랄까 냉정한 인간이니까."
아키토는 그 말에 '너는 정말로 그래 보여.'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어찌됐건, 남은 애들끼리 라도 힘을 합
쳐야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마도 먼저 간 남자애들도 아키토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분란은 자멸을
의미한다. 그리고 겐지는 분란을 일으키기 딱 좋은 놈이다.
"이름이 아키토라고 했나?"
"너는 겐지 맞지?"
"그래. 일단 이것으로 2명은 됐고 나머지를 모아야겠어. 더 머뭇거리다간 바보 녀석들이 여자애들이랑
무리를 지어 버릴 테니."
그 말에 아키토는 왠지 불편해졌다.
"어째서 여자애들은 싫은 거야?"
"몰라서 물어? 여자는 약해. 게다가 여자가 있으면 다들 야한 생각밖에는 안 할 거 아니야?"
"그런가!!'
"너도 솔직히 쟤네들 보면서 잘 때 그 짓 했지? 그런 식으로는 살아남지 못해. 여기서."
"큭!"
돌 직구에 배려라고 없는 말투. 겐지는 남의 마음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녀석 같았다.
‘그렇구나. 이래서 먼저 떠난 애들이 겐지를 끼워주지 않았구나.’ 아키토는 불쾌한 기분이 됐지만
일단은 참았다. 그때였다. 한 여자애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아키토 맞지?"
"으응.."
왜일까. 아키토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우리랑 같이 가자."
"우리라니?"
"그러니까 여기 전부랑."
아키토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 둘에 여자 다섯이었다. 일단 숫자가 많으니 안심이긴 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인다? 이런 식으로도 과연 사냥이 가능한 걸까? 게다가 수입은 어떻
게 나눈다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쪽에 있던 남자하나가 다가왔다.
"아키토. 어찌됐건 뭉칠 수밖에 없지 않아? 살려면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다니는 건 좀 위험할 수도 있어. 어쨌건 눈에 띄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여자애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혼자서도 마물과 싸울 수 있다는 거야?"
"그건 아닌데...."
그 말에 잠자코 지켜보던 겐지가 말했다.
"다들 불안해서 몰려다는 거잖아?"
"뭐?"
"특히 너네. 여자들. 남자들을 이용하겠다는 거 아냐? 맞지?"
그 말에 겐지 주변으로 애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 한 여자애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이용?"
"아니야?"
"하. 재수 없어."
"뭐? 내말이 틀려?"
"허!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듯 다른 애들이 다 들리는 목소리로 '존나 재수 없다. 병신 아냐.' 등등의
소리를 내뱉었다. 아키토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다들 진정해봐. 우리끼리 싸우는 건 안 돼. 나는 사이좋게 지내자는 둥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
니야. 이 세계에서 우리들은 범죄자야. 아무도 우릴 돕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는 우리끼리 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말에 근처에 있던 한 남자애가 귀찮다는 듯이 한 손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었다.
"무슨 말인 줄은 알겠는데. 나는 이상한 녀석들이랑 얽히긴 싫어."
"나도 그래."
"어. 나도."
그 남자애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것 같았다. 겐지는 한숨을 쉬었다. 아키토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아키토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애들은 다들 병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병영에 남은 것은 아키토와 겐지 그리고 또 한명의 남자애였다.
녀석의 이름은 토마스. 머리칼은 금빛이었고, 눈은 파랬다. 피부는 하얗고 얼굴엔 주금께가 있었다.
턱은 주걱같이 넓었고 이마는 좁았다. 코는 뭉툭했고 입술은 두툼했다. 빈말로도 잘생겼다고 이야기
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키는 170정도에 체구는 왜소했다. 토마스는 약했다. 연병장에서 보여준
모습으로는 밖에 나가자마자 죽을 것 같았다. 토마스는 1주일 내내 그다지 말이 없어서 어떤 녀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말이 없는 것이다.
"토마스."
아키토가 말하자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상황은 정해진 것이었다. 운동장에
남은 떨거지는 셋이었고 그들끼리 어떻게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로써 무리가 정해졌다.
덩치 큰 남자들이 다섯인 무리.
덩치 큰 남자 하나와 여자 넷인 무리.
남자 둘에 여자 다섯인 무리.
그리고 남은 떨거지 삼인방.
3인방은 일단 곧바로 사냥에 돌입하기로 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는 건 살길이 없다는
것과 같다. 먹고 자고 입고하는 데는 돈이 든다. 돈이 없으면 그냥 죽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
마물과 싸우는 건 어려웠다. 이런 떨거지들 셋이서 고블린 하나라도 잡을 수 있을까? 아마, 분명 누구하나
크게 다치던지 죽을 것이다.
처음부터 살길은 딱 하나였다. 다른 무리에 빌붙는 것. 그것 외에 방법은 없었다. 3인방은 여자 다섯 남자
둘의 패거리의 뒤를 따라갔 다. 패거리들은 뒤따라오는 3인방을 눈치 챘는지 빠르게 움직였지만, 3인방은
집요할 정도로 따라왔다. 한 동안 신경전이 계속됐다. 그러다 그들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3인방
쪽으로 몰려왔다.
"뭐하자는 거야?"
그들 중에 제법 다혈질인 여자애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겐지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뭐가?"
"야? 너네 필요 없다고 했잖아? 꺼지라고! 어?"
그 여자애가 언성을 높이자 근처에 있는 다른 여자애가 말렸다. 그때 남자애가 다짜고짜 겐지의 멱살을 잡았다.
"말로할때 꺼져라? 엉?"
그 보습을 보고 아키토는 '아아..싫다.' 하고 속으로 말했다. 멱살을 잡은 녀석은 단지 여자애들 한태 잘
보이려고 오버하는 거였다. 얼굴을 보니 희멀건 도련님 스타일인데, 쓸 때 없이 거칠게 나오다니. 아키토
는 정말 진지하게 너희도 우리들만큼이나 최악이다. 하고 생각했다. 겐지는 잡혔던 멱살을 가볍게 풀며
말했다.
"싫은데."
너무나 태연하고 뻔뻔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주눅이 들었던지 남자애는 우물쭈물 거렸다.
"그. 그래.."
"잘 들어. 난 너희한테 아무 관심 없어."
"그럼 왜 이러는 거야?"
"몰라서 물어? 요컨대 너네는 고기방패다. 우리보다 앞서가다가 고블린들에게 당하는 거야. 그때 우리는
남은 고블린을 정리하겠다는 거다."
"미친....."
겐지의 말에 흥분한 애들이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3인방을 둘러쌓다. 그 중에 키가 175정도 되고 덩치
가 중간정도 되는 남자애가 짜증난다는 인상을 찌푸리며 겐지를 살짝 밀쳤다.
"새끼야..뭐? 고기방패?"
"고기방패가 싫어? 그럼 죽는 역할? 정도로 바꿔줄까?"
"씹새끼가 진짜....."
아키토는 이러다가는 진짜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겐지 앞에 나섰다.
"잠깐만. 겐지가 말이 너무 심했어. 사과할게."
"넌 또 뭐야?"
"제발 부탁할게. 여긴 고블린들 진영이야.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우리끼리 싸우다가는
결국 고블린들한테 당하고 말거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너희 필요 없다니까? 거치적거리지 말고 꺼지라고. 말 안 들려??"
"숫자만 믿고서 안심할게 아니야. 사실, 아르덴에서 고블린이 가장 약하다고 하지만, 우리들 중에서는
누구도 고블린을 본 사람이 없잖아. 그 새디스트 아저씨도 그랬잖아. 너희라면 고블린 한 마리에
대여섯은 죽어나갈 거라고."
아키토의 말에 잔뜩 열을 올리던 남자애도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여전히 짜증난다는 듯
아키토를 쏘아붙였다.
"그럼 이건 어때? 너네가 고기방패가 되는 거야? 엉? 우리보다 앞에서 걸어가라고! 그럴 수 있어? 안
할 거잖아? 결국 니들은 우리가 해놓은거 따먹기만 하겠다는 거 아냐? 그렇잖아?"
"확실히 니가 맞아. 미안해. 사실은 우리도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다 같이 가는 게 어때?"
"이제 와서 아쉬우니 우리 쪽에 붙겠다는 거잖아? 졸라 치사하게..."
그때 여자애 하나가 흥분한 남자애의 등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하자. 어차피 여기서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야. 그냥 다 같이 가자. 나는 그 편이 더 좋아.
솔직히 나는 고블린을 죽인다는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될 수 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났으면 좋겠
거든. 그러려면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하지만...."
그때 또 다른 여자애가 말했다.
"토마스랑 아키토만이라면 괜찮을 거 같아. 갠지는 빼줘."
그러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쟤네들은 전부다 재수 없다는 둥. 토마스가 병신같이 생겼다는 둥.
아키토가 졸라 씹선비질 한다는 둥 오만가지 소리가 다 들렸다. 하지만 3인방은 뭐라고 대꾸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아쉬운 것은 3인방 쪽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결론이 났는지
여자애 하나가 말했다.
"그럼 다 같이 가자.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숫자가 많은 편이 좋을 테니까."
아키토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자 또 다른 여자애가 말했다.
"단, 겐지가 젤 앞에 서야 돼."
그 말에 겐지는 군말 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대뜸 등에 매고 있던 방패를 꺼내들었다. 그것
으로 일단 상황은 종료됐지만, 다들 석연치 않은 듯이 보였다. 아키토는 속으로 이 상태로는 위험
하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차마 말로 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