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무,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레이무.
돌층계를 오를 때마다 레이무를 향한 나의 마음은 뜨겁게 달궈져간다. 또각또각 하이힐로 딱딱한 바닥을 튕기며 우뚝 솟은 산문을 지나 레이무의 생활의 터전에 발을 들인다. 레이무. 레이무. 사랑스런 레이무! 지친 내 마음의 청량제여. 부디 내 사랑을 받아 주지 않겠니?
"뭐 하려 온거야?"
본전 앞에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레이무가 날 보며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별로 반기지 않는 어조지만, 솔직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뿐. 흔히 츤데레라고 부르는 귀여운 행동이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야 당연히 레이무를 만나러 온 거지."
"아. 그러셔. 하긴, 지금의 넌 은거 노인이나 다름 없으니까."
"적절한 비유네. 맞아, 난 지금 외로운 노인이야. 그러니까, 레이무. 내 말 상대가 되주지 않을래?"
"노인이 옮을 것 같아서 싫어."
너무하네.
레이무는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독설가이긴 하지만, 실은 상냥한 소녀. 나는 그런 레이무가 좋았다. 레이무는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언짢아하는 얼굴로 노려봤지만, 그런 시선 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레이무가 엉덩이를 끌며 나와 거리를 둔다. 레이무와 밀착하고 싶었던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데, 웬 일로 층계를 올라 온 거야?"
레이무가 불헌듯 그렇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레이무의 옆 얼굴을 쳐다봤고, 레이무가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스키마로 불쑥 나타나지 않고 정문으로 왔냐는 말이야."
"아... 그거."
묻고자 하는 말을 그제야 이해한 나는 입술에 검지를 갖다 붙이고, 곰곰히 생각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신사에 결계가 쳐져 있어서야. 지금의 내 스키마로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거든."
"뭐? 결계!? 여기에 그런 게 쳐져 있다는 거야?"
레이무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구나. 새삼스럽지만 레이무는 무녀이면서 신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아예 관심이 없는 거겠지. 나는 그런 무지한 무녀에게 가르치는 기분으로 설명했다.
"여태 모르고 있었구나. 이참에 알려줄 테니까,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해. 하쿠레이 신사에는 외적을 물리치는 결계가 쳐져 있어. 그래서 어지간한 요괴는 정문을 통해서가 아니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지. 물론, 나 같은 예외도 있지만 말이야."
"그런거구나. 그럼, 이제 너도 정문으로만 들어올 수 있다는 거네?"
"으응.. 아쉽게도 그렇게 됬어."
그래서 이전처럼 몰래 엿보는 것도 불가능해 져서 곤란한 참이라고. 그런 내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려난 것인지, 내 얼굴을 본 레이무가 피식하고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레이무의 표정이 쌤통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덕분에 안심할 수 있겠어."
"뭐가?"
"적어도 사생활은 보장 받게 되었으니까."
레이무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큰 걱정거리 하나를 덜었다는 듯이 선선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레이무의 시선이 돌연 이리로 향했다.
"이제 맘대로 엿보지 못해서 어쩌나?"
그리고는 도전적인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응답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별 거 아니야."
"헤에. 별 거 아니구나. 그런 것 치고는 되게 아쉬워 보이는 얼굴인데?"
".... 끄응.."
레이무의 말 대로 아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몰래 엿보는 레이무의 속옷차림은 내 인생의 MSG.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복의 한 때였는데. 이제 더는 보지 못하게 되다니. 그것도 뭐, 힘을 되찾기 전까지니까.
이후로 나는 레이무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어갔다. 환상향의 관리자라는 직책이 있으면서 엄청 한가롭네. 나나 레이무나. 솔직히 환상향이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 큰 이변이 없는 한 내가 할 일은 없는 셈이다. 결계 보수라던가, 이주 요괴를 입촌 시키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은 전부 란에게 떠넘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레이무는 좀 다르지 않아? 마을에서 일어나는 원인불명의 사건들도 레이무의 소관일텐데. 나와 다른단 말이지.
일해라 무녀!
라고 타이르기엔 찔리네 이거. 나 완전 기둥 주인이라 란만 죽어라 일시키는 입장에서 뭐라고 할 자격이 없어. 그냥 입 다물고 있자.
레이무의 온기를 곁에서 느끼며 무료하지만, 따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산문 너머로 손님이 찾아왔다.
이런 외진 신사에 찾아오는 손님이라면 뻔하지. 나와 동류. 즉, 레이무를 노리는 도둑고양이다. 옅은 분홍빛의 양산이 아침 해처럼 올라오는 걸 보니, 누군지 알겠네.
자칭 카리스마 흡혈귀가 나를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아앗! 내 특등석을 차지하고 있다니!"
"흐흥~. 빠른 게 임자지. 늦게 온 자신을 탓하라고."
나는 분해하는 레밀리아에게 승자의 미소로 으스댔다. 깜찍한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으르릉 대는 게 귀여운데? 하지만, 나는 레이무 일편단심. 아무리 흡혈귀 꼬맹이가 귀엽다 해도 바로 갈아탈 만큼 지조 없지 않다.
레이무는 귀찮은지 반개한 눈으로 레밀리아를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레밀리아가 나와의 눈싸움을 끝내고 거만한 태도로 인사한다.
"이 몸께서 모처럼 찾아와 줬으니, 기뻐하는 게 좋을 거야."
"눼이눼이. 알았어요."
여전히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이휘이 내젖는 레이무. 뒷간의 똥파리 같은 취급을 당했는데도 레밀리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거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자,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대접하는 게 인지상정. 할 일 없이 본전 앞에 앉아 있지만 말고 별채로 안내해주지 않겠어?"
"차라면 알아서 타 마셔. 난 여기서 꼼짝도 하기 싫으니까."
이야-... 정말이지. 나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레이무의 귀차니즘은 진짜였다. 이변이 일어날 때마다 주인공 포지션인 애가 이렇게 게을러 터져서야. 보다 못한 나는 레이무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여기 앉아 있어봤자, 엉덩이만 차가우니까 그만 방에 들어가지 그래? 덤으로 나도 차 대접을 받고 싶고."
"... 알았어. 하지만, 차 대접은 사절이야. 귀찮거든."
나의 보챔에 못 이기는 척 일어난 레이무는 께느른한 움직임으로 별채로 갔다. 그리고 나와 레밀리아도 그 뒤를 따랐다. 안방에 들어서자 먼저 들어와 있던 레이무가 코타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이 몇 월인데 아직도 코타츠라니.
아직, 새벽 아침으로 쌀쌀하긴 하지만, 낯으로는 이렇게 훈훈한데. 그것 만으로는 딱히 간섭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개어 놓지 않은 이불하며 벗어 놓은 옷들로 어지럽혀져 있는 방을 보면 나라도 한 소리 하고 싶어진다.
"여자애 방이 이게 뭐니?"
"응? 뭐가?"
"날도 이렇게 좋은데, 햇볕에 이불 좀 말리고. 이 옷들 좀 봐. 정리 좀 하고 살아."
"네가 내 엄마야? 란이라면 몰라도 너한테서 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
오죽하면 내가 잔소리를 다 하겠어. 살림 전반을 란에게 맡기고 있긴 하지만, 이건 진심 심해서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내 말이 설득력이 많이 부족해서인지 레이무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대충 내 앉을 자리만 치운 나는 뒤이어 들어온 레밀리아의 반응을 살폈다. 예상대로 레밀리아는 심각한 방의 상태에 당황한 눈치였다.
"이거 하루 정도 사쿠야를 빌려주고 싶을 정도네."
내가 란에게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메이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레밀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근처에 앉았다.
"후후.. 잘 들어봐."
시작이네. 레밀리아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잘 들어봐.'라는 말로 운을 뗀다. 그 뒤로는 지독한 자기자랑. 레이무와 대화의 물꼬를 틀기 위해 별거 아닌 일도 대단한 얘기인양 지어내서 자화자찬을 하는데, 솔직히 애를 쓴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그래서 사쿠야가 말이야. 뭐라고 했냐면─"
"응응."
"요즘 플랑이 많이 유순해 졌는지, 날 언니라고 부를 때가 많아졌어. 어제 밤에도 플랑이 내 침실로 와서는─"
"응. 잘됐네."
"최근 어깨가 걸리던데, 이거 혹시 가슴이 성장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후후후.. 조만간 나이스 바디가 될지도."
"그래그래."
본인 열심히 얘기하고 있지만, 듣고 있는 레이무가 완전히 건성이라는 것이다. 보나마나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리는 거겠지. 그런데, 저 흡혈귀는 적당히 쳐주는 맞장구에도 신나 있었다. 네 얘기 전혀 안 듣고 있다고. 메크로 답변도 구분 못하냐?
그 뭐냐. 흡혈귀는 몸에 피가 안돌아서 뇌세포도 죽어 있다던데. 저런 레밀리아를 볼 때마다 그런 가설이 신빙성을 더해간다. 가끔 유아퇴행을 하는 걸 보면 가설이 아니라 정설일지도 모르지만. 흡혈귀라고 해도 시체니까, 뇌가 썩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 신진대사도 없어 땀도 안 흘리고. 음. 그런 부분은 좀 부럽다. 나는 보기와 달리 땀을 잘 흘리는 체질이니까. 요전에도 란이 나더러 땀 냄새 난다면서 좀 씻으라고 잔소리 했었고 말이야.
레밀리아가 주도하는 대화에 좀처럼 끼지 못하고 있던 나는 불헌듯 팔을 들어 올려 겨드랑이 냄새를 확인했다.
킁킁. 좋아, 냄새 안 난다.
어제 목욕한데다가 향수까지 뿌렸으니까, 오히려 향긋한데?
킁킁킁킁.
뭔가 쬐끔 시큼한 거 같기도. 좀 더 맡아 보자.
킁킁킁 스-하- 스-하-. 오호호홓 중독성이 있어 이거! 킁킁.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냄새 삼매경인 내게 레이무가 차게 식은 시선으로 물었다.
핫! 하마터면 내 향긋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 뻔 했어. 그런 나를 레이무만이 아니라 레밀리아도 식은 시선을 보내온다. 레밀리아가 쯧쯧 혀를 찼다.
"어쩜 저리도 품위 없을 줄을 수가 있지. 현자 이전에 여자도 버린 듯한 저열함이야. 이쯤 되면 다른 의미로 대단하네."
시선에 이어 가차 없는 매도의 말이 나를 후려친다. 그런데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부끄럽지 않은 건 왜일까? 아니, 창피한 건 맞지만 그 이상으로 묘한 흥분을 느낀다. 마치, 오물을 보는 듯한 저 눈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시커먼 감정을 일깨웠다.
귀여운 여자애의 매도 최고야!
흥분으로 올라가는 심박수와 활발해진 신진대사. 그로 인한 땀의 증가. 나는 아까보다 시큼해져 있을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며 둘에게 묻는다.
"나 지금 겨드랑이가 굉장히 향기로워. 어때? 한 번 맡아보지 않을래?"
그렇게 내 겨드랑이를 맡아볼 기회를 준 나를 둘은 똑같은 말을 내뱉으며 짜증 냈다.
"아 ㅆㅂ. 더러우니까 좀 치워!"
"야 이, 더러운 년을 봤나! 저리 안 치워?"
내 겨드랑이를 보고 더럽다니. 이렇게나 향긋하고 감미로운데. 안 되겠어. 더럽지 않다는 것을 몸소 깨우치게 하는 수밖에.
나는 레이무를 기습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당혹으로 물든 레이무의 예쁜 얼굴에 땀으로 젖어가는 내 겨드랑이를 접근 시켜갔다. 몸부림치면서 저항하지만, 힘은 내 쪽이 위. 이대로 나의 페르몬에 함락되렴.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나의 시도는 레밀리아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작은 발에 면상을 걷어차인 나는 그 충격에 뒤로 데굴데굴 굴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둘 다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불제봉을 겨눈 레이무가 표독스런 얼굴로 소리쳤다.
"변태짓 할 거면 썩 꺼져!"
어째서?
내 겨드랑이는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최고의 보물인데.
"레이무. 내 겨드랑이 냄새를 맡는 건 흔치 않은 기회야? 전 세계의 남성들이 부러워 한다고. 그래도 싫은 거니? 이대로 기회를 걷어 차버려도 괜찮겠냐고?"
혹시나 싶어 물어봤지만, 레이무의 대답은 같았다.
"더럽다고 했잖아! 그 더러운 거 두 번 다시 들이대지 마!"
그렇게 까지 완고하게 거부할 줄이야. 씁.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레이무에게 내 겨드랑이의 감미로움을 맛보게 하는 걸 포기하는 대신, 다른 걸 원했다.
"알았어. 그 대신, 레이무의 겨드랑이 좀 맛보게 해주지 않을래? 나 레이무의 겨드랑이라면 밥공기 세 그릇은 뚝딱 할 자신 있는데."
바로 레이무의 겨드랑이.
하쿠레이 무녀라는 정식 명칭보다 겨드랑이 무녀라는 이명이 더 잘 알려진 만큼, 레이무의 겨드랑이는 특별했다. 애초에 겨드랑이가 노출된 무녀복도 그걸 노린 디자인이라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다. 만약, 이 사실을 본인에게 들킨다면 나는 사망 확정이겠지.
그 정도로 대단한 겨드랑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핥게 해 줘! 겨드랑이! 겨드랑이 포에버!!
"하악하악.. 겨드랑이.. 레이무의 겨드랑이 핥게 해 줘..!"
"기분 나쁘게 자꾸 겨드랑이 겨드랑이."
"레이무, 저 변태자식은 나한테 맡겨."
이성보다 본능이 강해진 나는 레이무의 겨드랑이를 향해 달려 들었고,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눈을 떴을 땐 험악한 얼굴의 란이 있었다는 것과 비웃음이 서린 레밀리아의 얼굴이 보였다는 것 정도.
란에 의해 집으로 끌러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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