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고 했던가. 나를 포함해 모두가 기다리던 레이무가 붉게 황혼이 지는 하늘 저편에서 그 모습을 드려냈다. 자유롭게 활공하는 그 모습이 흡사, 피터 팬을 보는 듯 했다. 아니, 아름답다는 점에서 팅커벨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마당을 지나 이쪽으로 곧장 날아와서 착지한 레이무는 조용히 모두의 면면들을 살펴보다가 한숨 같은 어조로 물었다.
「누가 설명 좀 해주지 않겠어?」
평소와는 조금 다른 구성 때문에 의문이 들었겠지.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나를 제치고 유카리님이 대신 설명했다.
「우연히 모여 있는 것뿐이야.」
「그럼, 왜 아저씨.. 아니, 소우지 씨가 있는 건데?」
「글쎄? 뭔가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온 게 아닐까?」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는 유카리님의 얼굴은 장난기 같은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레이무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어서 설명하라고 보채는 듯한 눈빛에 나는 긴장 되서 약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레이무. 그땐 미안했어. 입장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모미지가 다친 걸 보니, 머리에 피가 쏠려서 그만..」
「저기.. 그런 변명이나 하려고 온 거야?」
윽. 각오는 했었지만, 레이무의 반응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어떻게 보면 미워질 만한 모습을 보였던 게 사실이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면목 없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자꾸만 딴 데로 새려는 시선을 억지로 잡아 붙들며 나는 입 발린 변명이 아닌 진짜 용건을 말했다.
「사실, 오늘 널 찾은 건 부대장에게 받은 이 서신을 전해주려 온 거거든.」
품속에 넣어 뒀던 서신을 꺼내 레이무에게 보여 주었다. 그걸 본 레이무는 살짝 턱을 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서신을 째려봤다. 순간, 살기를 품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이무의 눈초리가 무섭다고 느꼈다. 역시, 화가 많이 나 있구나.
도와줘요, 유카리님!
저 아무래도 레이무에게 용서 받기 힘들 것 같아요.
속으로 도라에몽을 찾는 진구의 심정으로 유카리님의 도움을 바라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조금만 어려움을 느껴도 금세 누군가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게 바로 나란 텐구다. 이 백랑의 수치 같은 나는 서신을 거칠게 낚아채 가는 레이무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주시하면서도 옆에 계신 유카리님에게 틈틈이 도움의 눈빛을 보내는 짓을 반복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나의 심정을 유카리님은 가볍게 미소 짓는 것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결하라는 거겠지.
담담히 서신의 내용을 읽어 나가는 레이무를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레이무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들고 있던 서신이 반으로 쫘악-, 하고 찢어졌다. 이어서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웃기지도 않아.」
「.. 무슨 내용이길래?」
시시한 농담이라도 읽은 듯한 반응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레이무는 제 이마를 짚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아저씨, 그 부대장이란 사람한테 속은 것 같아.」
「부대장이 날 속여?」
「그래.」
의아해하는 내 모습에 레이무는 살짝 고개를 틀고 시선을 딴 데다 두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레이무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감더니 이내 결심한 듯 날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백랑텐구는 다 그런 거야?」
다소 엉뚱한 말이라 의아했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레이무는 다음 말을 했다.
「서신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나 더러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라고.」
「뭣!?」
내가 놀라하는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절제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핫-! 그게 뭐야? 바보 같잖아! 아저씨네들 정말 웃기네!」
저렇게 체면 안 차리고 웃어대는 건 마리사밖에 없다. 이부키님도 체면 같은 건 신경 안 쓰는 분이지만, 마리사처럼 큰 소리가 아니라 입을 찢고 비웃듯이 낄낄 거리고 있었다. 유카리님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어 웃고 있는지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레이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리사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맞아. 정말 바보같아.」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레이무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부대장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한편, 이런 악질적인 장난을 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이 마구 솟아났다. 그런 와중에도 백랑텐구를 폄하하는 듯한 의견을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어 따지듯 물었다.
「바보 같다니?」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짓까지 해가며 나랑 아저씨를 대면시키려 하겠어?」
「그건 부대장이 바보여서지. 우리 백랑텐구 전체를 싸잡아서 일반화 시키려면 곤란한데.」
아무리 내가 한심스러운 텐구여도 동족이 바보 취급당하는데도 가만히 있을 등신은 아니다. 바보인 것은 부대장만 그런 거지. 백랑텐구는 예로부터 요괴의 산을 수호하는 날카로운 엄니를 지닌 고고한 전사였다. 물론, 나도. 아마도.
레이무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전에 산의 신과 단판을 지으러 갔을 때도 날 가로막고 대들었던 백랑텐구도 엄청 바보였다고 생각하거든. 그 여자 왜 인지 몰라도 날 엄청 적대하고 있었어.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을 뿐인데 그렇게 까지 달려드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모미지를 말하는 거지? 그 애는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고지식하다고? 얼마나 고지식하면 하쿠레이 무녀를 상대로 살기를 풍겨대는 거야? 그리고 그 텐구, 아저씨와 잘 아는 사이 같던데.」
레이무는 그 날의 일이 생각났는지, 모미지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려냈다. 나는 레이무가 저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그만큼 레이무에 대한 모미지의 행동은 무례를 넘어 미친 짓에 가까운 폭주였다는 얘기다. 듣고 보니 모미지가 어째서 레이무에게 그렇게까지 대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느낄 정도인데, 나에 대한 모미지의 연심을 모르는 레이무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불평을 토로하던 레이무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무언가 해명을 요구하는 압박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모미지는 말이야. 부대장의 사촌 여동생으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그렇다고 연인 같은 깊은 사이는 아니고, 친구 사이 같달까? 걔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나는 레이무에게 왜 이렇게 까지 모미지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걸까? 괜한 오해를 받기 싫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그 보다 레이무가 모미지에 대해 이 이상 나쁜 인상을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았다. 이미 앙숙 같은 관계가 되어 있는 둘에서 서로에 대해 나쁘게 보지 말라는 건 무리에 가까운 일. 나에겐 둘 다 소중한 인연이라 그런 관계로 남아 있는 것이 싫지만, 현실은 참혹한 법이다.
내 변명에 가까운 말을 듣고 있던 레이무의 눈이 아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때 감싼 거구나.」
「.. 그게.」
「아니, 이해해. 그땐 나도 감정적이었으니까. 솔직히 나도 그때 조금 더 침착하게 행동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를 많이 했어. 그런데도...」
레이무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하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떨군 레이무는 두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속에 담아두고 있던 감정을 쏟아내듯 말했다.
「그런데도 분한 건 어쩌지 못 했어. 뭔가 그 동안의 노력들이 바보같이 느껴졌어. 내가 이럴려고 무녀가 되었나 싶었다고.」
내려가 있던 고개를 다시 똑바로 하고 날 쳐다보는 두 눈은 억한 심정을 드려내듯 촉촉이 젖어 있었다.
「하. 그러고 보면 나도 바보인건 마찬가지네.」
허탈한 듯 한숨처럼 내뱉은 그 말엔 자신을 향한 자조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레이무는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격해진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래도 이젠 괜찮아. 아저씨가 이렇게 찾아와 주었는 걸.」
그렇게 말하면서 살며시 지은 레이무의 미소는 무심코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예뻤다. 순간 숨이 멎인 나는 황급히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지. 여태 당돌한 아이 정도로만 생각했던 애에게 무슨 감정을 품는 거야!
나는 잠시라도 두근거린 자신을 질책하며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늦어서 미안.」
늦어도 한참 늦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