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분들께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글을 올립니다
제가 10년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이 위로와 치료방향에 대한 힌트가 되길 바라며 글을 올립니다
이 내용은 본래 만화로 연재될 내용이었지만 리메이크 후 플랫폼에 투고하는 과정에서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안되면 연재를 안하면 되는 건데, 굳이 인터넷에 정리해서 올리는 이유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이 글을 보셨으면 해서이기도 하고
저 자신을 위해서 정리가 필요해서 이기도 합니다.
출판사에 투고하기 위해 글로 썼던 거라 독백체이고, 각색된 부분이나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부분이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입니다.
10여년 전. 학교갈 시간에 나는 내방에 있었다.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나는 왜 살까?’ 같은 생각들로 고통스러웠다. 낮인데도 방은 깜깜하고 어두웠고, 나는 잠에 들어 영원히 내가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방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일어나, 일어나! 젊은애가 집에 박혀서 뭐하는 거야! 밖이라도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
청소기를 든 엄마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머리도 좀 감고!”
기름이 흐르는 머리카락을 힘없이 흔들거리며 거실로 나가는데 엄마가 마저 덧붙였다.
난 바로 화장실로 갔지만,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하지는 않았다. 그냥 변기에 앉았다. 볼일이 보고싶은 건 아니었다. 밖에는 나갈 수가 없었고, 집은 엄마가 청소기를 돌리며 돌아다닐 것이므로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분노했다.
‘엄마는 나만 미워해. 머리 감으라고 하고, 맘대로 청소하고!’
조금 뒤 나는 엄마가 나를 찾는 소리에 변기에서 일어났다. 청소기 코드를 빼달라는 소리일 것이었다. 방문 입구로 청소기코드를 뽑으려고 다가가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방안을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창문.. 열어놨어?”
따스한 햇살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햇살이 너무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나는 엄마가 멋대로 창문을 연 것에 대해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했다. 엄마가 청소기를 거칠게 바닥에 내려놨다.
“언제까지 그럴거야!”
나는 재빨리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구석에 쌓아둔 신문을 집어서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금방 창문은 신문지가 덕지덕지 붙여진 상태가 됐다. 방안이 금세 엄마가 들어오기 전과 같이 어두워졌다. 엄마는 뒤에서 보고 있다가 한마디를 던지고서 나갔다.
“창밖에서 널 누가 본다니. 기가 차서 원…! 여긴 16층이라고!”
엄마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 16층이라도 충분히 밖에서 보는 방법이 있단 말이다. 망원경으로 보면 가능하다. 그시절 나는 가끔씩 안방 장롱에 있던 망원경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가늠해 보았다. ‘저 사람들도 망원경을 쓰면 날 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무서워져서 창문에 신문지를 더 붙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람들이 날 관찰하면서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저 애는 학교를 안다녀!’ ‘패배자 자식’ 학교를 안다닌다고 해서 패배자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낮춰 보는 시선이 있으니까 그런 욕을 먹을 거라 생각했다.
학교는 처음부터 안다녔던 건 아니고,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다.
학생시절 나는 한국의 여느 학생처럼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을 반복하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노력하면 성적은 나왔다. 하지만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공부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직업(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얻을 수 있다 했지만 뭔가 흘러가는 구름 얘기처럼 느껴졌다. 괴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되돌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성적관리를 하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으니까.
어느날 그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학원이 끝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나를 기다려주었다. 거실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책가방을 받아주는 엄마에게 말했다.
“나 학원 그만두면 안돼?”
“학원을 그만둔다고?”
“그만두면 성적은 유지할 수 있는 거야?”
그 말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다닐게.”
터덜터덜 걸어 당시 내방 침대에 교복도 벗지 않고 엎어졌다. 나도 성적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지 알지 못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내 부모님이 특별히 남들에 비해 딸의 성적에 예민하다거나 한 부모가 아니었다. 이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뭔가 속옷이 축축했다. 소변이 일부 새어나와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심해졌다.
나는 어쩔줄 몰라 했다. 매우 수치스러웠다.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고민하다가 생리대로 막는다는 생각을 해냈다. 소변이 한번에 많은 양이 나왔던 게 아니고 지속적으로 적은 양이 새어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희야 밥먹으러 가자!”
학교에서 친구들이 내 책상에 찾아왔다. 나는 막 생리대를 갈러 화장실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친구가 보고 물었다.
“아, 너 장미축제구나?”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생리를 은어로 장미축제라고 불렀다.
“응, 그래.”
‘내가 남자가 아닌게 행운이야. 남자였다면 생리대를 구하기도 어려웠을 테고, 생리대를 구했다 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거나 착용하고 있는 게 들키면 망신을 당했을지도 모르니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물론 여자여도 소변을 생리대로 막는다는 게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내가 요실금에 걸린 게 뭔가의 착각이라고,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믿어보려 했다. 그래서 일부러 물을 많이 마셨다. 내가 소변을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 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2리터를 마신 적도 있었다. 큰 물병 하나를 사서 정수기에 물을 가득 담아 교실에 가져다 두고 마셨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피부가 좋아졌으나 나한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낫고 싶었다. 정말 낫고 싶었다! 혼자서 물을 많이 먹고 아래에 힘을 주면서 시험해보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변은 계속 샜다. 나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계속 긴장하고 있었고, 마치 뒤에서 귀신이 쳐다보고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망쳐도 도망쳐도 그 귀신은 계속 따라왔다… 의자에 앉아서 계속 자세를 고쳐보며 어떻게든 소변을 막아보려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황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안좋은 상태로 흘러갔다. 요실금 때문에 나에게서 냄새가 났기 때문에 (생리대를 주기적으로 갈아주어도 냄새가 났다)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 애에게서 냄새가 난대!’
내가 복도를 지나가면 손가락질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내 주변에 오면 일부러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아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려 했고, 겨울이라 추운데도 창문을 일부러 열었다. 소문이 점점 퍼지는 과정에서 나는 아닌 척 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했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한참 예민하고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시기인 아이들인데 냄새때문에 고통받는 게 피해를 보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아이들의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싸늘했다.
내가 화장실에서 생리대를 갈던 때였다.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봐. 기저귀다 기저귀.”
무슨 소리지? 하고 돌아봤을 때는 화장실 문틈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는 여자아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귀여운 아이라 평소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반 아이였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남의 볼일 보는 모습을 훔쳐볼 수가 있지?
애초에 생리대를 쓰는 시기가 보통 생리기간보다 오래되니까 이상하게 보일 여지는 있었지만 화장실까지 쫓아와서 훔쳐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엄마에게 대화를 하자고 했다. 학교는 9시인가 10시쯤에 끝났는데 학원에 들렸다가 집에 가면 12시가 넘었다. 엄마랑 오빠가 안방에 모여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나…엄마, 나…”
“왜 그래?”
엄마와 오빠가 돌아보았다. 나는 힘겹게 말했다. 이 한 마디가 뭔가의 해결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 요실금 걸린 거 같애.”
엄마와 오빠는 이상하게 보았다. “요실금이라니?”
“소변이 조금 새는 정도야 그거 여자들은 누구나 조금씩 있다고. 심한 건 나이든 사람들이나 걸리는 거야.”
이 얘기를 할 시점에서 나는 요실금이 중증으로 발전된 상태였다. 더이상 방광에 모이는 소변이 없었고, 생기는대로 바로바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가족들은 내가 초기에 얘기를 꺼낸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며, 인지부조화 같은 것이 온 것 같았다. 어린애가 요실금에 걸린다는 얘기는 남의 얘기라고. 나는 그래도 급했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덧붙여서 했다.
“나, 병원에 데려다 주면 안돼…?”
“얘는, 여자면 누구나 조금씩 있는 거라고!”
엄마는 강하게 거절해서 그 당시 당장은 물러났지만 나는 그 이후로 며칠 졸랐다. 병원에 가면 나을 수 있을지도 몰라 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엄마는 내 조르기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영 탐탁치 않아 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요실금에 어떤 과목 병원을 가는지는 몰랐다.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다 산부인과라는 간판을 봤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산부인과는 또래 여자아이들이 가기 꺼려하는 장소였다. 산부인과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만으로 대기실의 아줌마들이 수군거리거나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 얘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꼭 임신 중절 수술이나 임신판단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도 사람들이란 지레 추측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조금 두려웠기도 했다.
의사선생님은 남자였다. 의사선생님은 나를 침대에 눕게 하고 살펴보았다. 그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다. 혹시 변때문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변이 방광을 눌러서 그런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불확실했다.
엄마는 병원을 나오면서 내게 화를 냈다. 과자 좀 그만 먹으라고 했다. 나는 꼭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 병원에서 준 책자에는 원인 중 하나로 스트레스가 쓰여 있었다. 내가 요실금이 걸린 이유로 학업스트레스라고 단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교나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버스안에서 방광에 힘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기할 정도로 집에서는 정상적으로 볼일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더 무신경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애들이 내게 냄새난다고 날 피해.’라고 말한다고 해도 가족들은 아무 냄새도 안난다며 나를 예민한 아이로 봤다. 나는 내 속옷을 벗어 엄마에게 보여주었는데도 엄마는 아무 냄새가 안 난다고 했다.
나는 요실금치료를 병행하며 학교를 억지로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요실금치료는 병원에서 기계로 치료를 진행해 보았으나 나아지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병원에 데려다주는 것조차 포기하면 더이상 탈출구가 없을 것처럼 느껴져 나아지는 것 같다고 거짓말했다. 그조차도 몇번 가다 말았다. 학교에서 점점 아이들의 괴롭힘은 심해졌다.
내 앞에서 ‘쟤 때려주고 싶어’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차라리 자퇴를 하고 싶었다. 그게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만 벗어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학교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자퇴하는 게 나았다. 나는 등교거부를 했다. 학교를 가기 싫다고 했다. 대놓고 말했다. 아빠는 날 때렸다. 축구공 다루듯이 주먹으로 막 때렸다. 나는 엉엉 울면서 맞았고 엄마와 오빠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끔찍한 밤이었다. 이 때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며칠 뒤 하교길에 문방구에 갔다. 용돈으로 커터칼을 샀다. 이걸로 자해를 하면 내 자해흔적 때문에 부모님이 주변에 창피해서라도 자퇴를 시켜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친척들이 집에 놀러와 있던 밤에 나는 울면서 화장실에서 샤워기를 틀어놓고 손목을 그었다. 나는 안심하면서 혹은 혼날까 불안해하면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나를 깨웠다.
“학교 가야지, 일어나! 지금까지 뭐하고 있는 거야. 몇 신데!”
“나 학교 안가. 아니 못가.”
“무슨 소리 하는 거니?”
나는 손목을 들어보였다.
“이렇게 됐으니까 나 못 가.”
엄마는 놀랐다.
“얘는! 이거 언제 그런거야?”
“어제 밤에.”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엄마는 억지로 날 일으켜서 학교에 보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내 손목을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학교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노력은 했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감기약을 아껴두었다가 수면제 대용으로 먹어서 야간자율학습 때 졸면서 버텼다. 학교를 안 갈 수 없다면, 내가 학교에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잊어버리려 했다.
중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보충반에 들어갈 정도로 하향곡선을 그렸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친구들은 아직 소문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친구들에게 소문이 전해지거나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나를 나댄다고 할까봐 두려웠다.
나댄다고 할까봐 나는 급식도 먹지 않았다. 왠지 활동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일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열심히 살면 애들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급식비가 아깝지만 그랬다. 학교에서 점심, 저녁을 먹지 않고 집에 올 때 슈퍼에 들러 과자와 컵라면 등을 끌리는대로 샀다. 화이트하임, 짜장범벅등이었다. 그러고선 내 방에 가져와 혼자 허겁지겁 입 속으로 쓸어넣었다. 이 때부터 폭식하는 습관이 생겼다.
학교를 자퇴하기 전까지는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했다. 자퇴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거부해서 바로 자퇴는 안되었기 때문에 내 상태는 점점 멍해져 갔다.
급기야는 나는 화장실을 더이상 가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도 의미가 없었다. 난 맘대로 살아버리기로 했다. 냄새가 날까봐 생리대를 가는 것도 그만두었다. 아이들은 더 날 싫어했다. 화장실을 안 가고 자리에서 볼일본다고 자기들끼리 비웃고 비명질렀다. 내 얼굴엔 표정이 없어졌다. 입꼬리는 축 쳐져 있었다.
부모님은 내심 걱정했던 거 같다. 자퇴를 허락한 날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 0년이나 지났으니까. 부모님은 반 아이들에게 간식을 돌려보기도 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지금은 왜 간식을 돌렸는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후 몇 년동안은 나에게 욕을 했던 아이들에게 간식을 돌렸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담임선생님은 나와 면담을 해보기도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최종적으로 자퇴서에 싸인을 했다. 사유는 병환이었다.
홀가분했다. 뭐 이제 더이상 신경쓸 거리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유였다…. 하지만 1,2년동안 요실금과 신경전하며, 아이들이 나를 욕하지 않는지 귀를 세우며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당분간은 좀 쉬고 싶었다. 부모님은 반대였다. 아무 것도 안하고 시간을 보내면 안된다고 했다. 나는 억지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였다.
학원은 분위기가 좋았다. 학원의 문제집들은 개념서로서, 학교의 교과서들보다는 세련되지 못한 흑백이었지만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강사님들도, 가끔 간식을 가져와서 나눠주기도 하는 학생분들도 좋았다. 학생분들의 반절은 우리 부모님 세대로서, 자식들을 키우다 여유가 생겨 공부를 시작하시는 것 같았다. 나머지 반절은 내 또래였다. 그래서 무서웠다. 하지만 아무도 날 모르는 거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소문’은 학교에서만 도는 이야기였으니까 모르는 거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아이들도 날 피하고 욕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의 소문이 바깥으로 퍼진 거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요실금에 악의적인 소문이 덮어씌워져 퍼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언젠가 따스한 낮에는 검정고시 학원에 가려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나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옆의 아이에게 속삭였다. “저 언니, 냄새난대.” 똑똑히 들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미친 듯이 검색창에 내 이름을 쳤다. 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검색제한을 걸고 내 얼굴사진과 함께 소문이 돌았거나, 그도 아니면 어떤 별명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쯤 되면 나는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나는 학원마저도 그만두겠다고 했다. 부모님에게 댄 명목상 이유는 나도 혼자 공부할 수 있다는 거였지만, 도저히 바깥에 나갈 수 없었다…. 바깥에 나가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있다. 무서운 일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말한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학원은 그만두게 해주었다.
집에서 공부하는 시늉을 좀 내다가 나는 내 방안에 드러누웠다. 핸드폰은 있었지만 스마트폰은 없던 시절이었다. 핸드폰게임을 좀 하다가, 책을 보다가, 천장을 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바깥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집은 16층이었다. 내 방을 보면서 웃고 있구나. 내가 학교 자퇴하고 집에만 박혀 있다고 비웃고 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생각은 강화되었다. 나는 방안의 신문지와 잡지들을 꺼내서 창문에 테이프로 다닥다닥 붙이기 시작했다.
금세 방안은 어두워졌다. 불을 켰다. 이걸로 햇빛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었다…. 바깥에 나가지 않는다. 창문도 가린다. 즉 햇볕을 받지 않는다. 우울증의 최적의 조건이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드러누워 놀았다. 컴퓨터도 매일 했지만, 하루에 정해진 시간이 있어 많이 하지는 못했다. 시간을 조용히 보냈다. 죽고싶다, 우울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 내가 오빠는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오빠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오빠 친구가 교회의 전도사님이었다. 전도사님에게 내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동생이 자퇴하고 집에만 있는데 걱정이 된다고. 전도사님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전도사님은 내 얘기를 들었다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했다.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쉽게 믿기 어려웠다. 어른들은 맨날 배신만 했는데,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지 않았는데 전도사님이라고 다를 바가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도와준다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전도사님은 나와 함께 손잡고 기도하자 했다. 함께 신에게 방법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전도사님은 우리집에 왕래했지만 내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겨울이 왔다. 수능을 칠 때가 되었다. 전도사님은 수능 며칠전 커다란 상자를 나에게 주고 갔다. 상자 안에는 과자가 잔뜩 들어 있었다. 하나하나 ‘윤희야 힘내.’ ‘수능 파이팅!’ ‘잘 찍어’ 등등의 메세지스티커가 붙어있는 정성어린 과자들이었다. 츄잉껌과 사탕과 과자…. 상자가 무거울 만큼의 양이었다. 나는 수능공부는 이미 때려친 상태였다. 머릿속으로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요실금은 낫지 않았고, 바깥에서는 여전히 날 욕할 텐데. 수능이 무슨 소용이람? 나는 방안에 앉아 과자만 꾸역꾸역 먹었다. 하루에 먹기는 힘든 양이라서 며칠에 걸쳐서 다 먹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있었다. 첫째로 나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둘째로는 집밖으로 나가질 않으니 소통할 사람이 필요했다. 셋째는 우울한 마음을 어디에든 털어놓고 싶었다. 허접한 소설이었지만 인터넷에 올리며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인터넷 사람들과 채팅을 하며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우울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모니터 앞에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 날, 전도사님은 또 다시 내게 선물을 주고 갔다. 크리스마스케이크였다. 전도사님이 직접 만든 수제 케이크였다. 그런 케이크는 처음 먹어보았다. 다쿠아즈를 두른 부드러운 생크림 케이크에 바닥에는 오레오 쿠키 조각이 오독오독 씹히는 맛있는 케이크였다.
대개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는 옛날부터 케이크에 식물성 크림을 써왔다. 식물성 크림은 화려한 모양을 내기 쉬운 크림이며 유통기한이 긴 대신, 맛이 기름져서 쉽게 질린다. 반면에 동물성 크림은 크림의 끝이 뭉툭하여 모양이 단순하고 유통기한이 짧으나, 쉽게 질리지 않고 맛있다. 전도사님이 주신 건 동물성 크림 케이크였다. 나는 처음으로 동물성 크림 케이크를 먹어보았다. 열심히 만든 맛있는 케이크…. 나는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않고 혼자 케이크를 먹었다. 베란다에 두고 두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꺼내서 숟가락으로 퍼먹고 그랬다.
하지만 역시 쉽사리 마음을 열기는 어려워서… 결국 그 문제로 전도사님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전도사님은 넌 나에게 마음을 연적이 없구나? 라고 말하고 내게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이 점점 뜸해졌다. 그렇게 갈라지게 되었다.
우울한 글을 올리던 즈음에 쪽지로 연락이 왔다. 걱정된다며 만나자고 했다. 어떤 끈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연락을 주고 받다 처음 만난 날 그는 내게 볼에 뽀뽀를 했다. 당황스러웠으나 연락이 끊길까봐 표내지는 않았다. 1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인터넷으로 사람을 여러번 만난 적 있지만 역시 인터넷으로 사람 만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사귀자고 했고, 남자친구는 내게 기본적으로는 잘해주려고 하는 편이었지만 가벼운 인물이었다.
내가 인터넷으로 알게 된 다른 여자인 친구가 레즈커플이라고 하자 집단 성관계 드립을 치거나 (19동영상으로만 레즈를 알고 선입견이 있는 남자들이 하는 오해인데, 레즈는 남자랑 관계를 맺게 되면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여자도 아니며, 성적으로 다른 여자들에 비해 성욕이 많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여자인데 여자를 좋아하는 것 뿐이다.) 잠자리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데 관계를 맺으려고 하다가, 내가 싫다고 울자 할맛 떨어진다고 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그를 싫어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 침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 일 때문에 더이상 남자를 사귈 수 없을까봐 겁이 났다. 몇년동안 내가 더럽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우울했다. 자다가도 화내면서 이불을 걷어차면서 울었다.
그렇다고 내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피해만 받은 건 아니었다. 나는 죽고 싶다거나 우울하다는 소리를 자주 해서 분위기를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헤어지자는 소리도 자주 했다. 속된 말로 ‘에너지 뱀파이어’라고 한다.
남자친구와는 생각보다는 꽤 오래 만났다. 정확한 기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은 내게 탈출구를 찾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든 바깥에 나가면 이 상황을 벗어날 터널의 끝이 있지 않을까. 주변의 시선 때문에 버스를 타고 시외로 나가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견뎠다. 덕분에 좋아진 게 딱 하나 있다. 요실금이 나아진 것이다. 언젠가부터 방광에 힘이 돌아왔고, 난 요실금에 한해서는 건강해졌다. 그건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금방 감정은 식어 버렸고,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용기를 내어 자퇴 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번호는 기억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한낮이었다.
“나 윤희야. 잘 지냈니.”
“너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말도 없이 자퇴해서 다들 놀랐다구! 쌤은 아파서 자퇴했다고 하고! 전화도 안받고!”
나는 구구절절 설명을 했다. 자퇴 직전 상황은…. 친구들이 소문을 알게 될까봐 일부러 멀리 했었다. 말을 걸어야 대꾸했다. 친구들이 식사 때마다 내 책상에 찾아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중식과 석식을 굶은 뒤에 집에 와서야 과자와 컵라면 등으로 폭식을 했고, 자퇴를 한 뒤에는 친구들의 흔적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친구가 선물해준 일기장, 저장된 전화번호들, 블로그 이웃,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들. 그것들의 존재가 왠지 괴로워서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때 딱 하나 버릴 수 없었던 스티커 사진은 친구가 사진의 포장을 벗겨 내 mp3 뒤에 붙여버린 것이었다. 그 mp3는 현재 고장나서 버리고 없다.
“괜찮아. 선물이야 새로 사면 되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친구가 말했다.
“난 네가 더 중요해. 그래도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야.”
“고마워.”
나는 울었다. 수능성적은 엉망진창이 되어서 나온 상태였고, 그 당시에도 나를 욕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수능을 보러 갔을 때 ‘쪽팔리지도 않나. 수능도 치러 나오네.’ 라는 소리를 들었고 공부도 안한 수능은 전화번호 등급이 나왔다. 나는 수능을 다시 치루려고 결심했다. 이 때 제일 친한 친구는 지방에 내려가 있어서 직접 만나기가 힘들었다. 나는 수능을 다시 치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남자친구와의 성관계 이후 어쩐지 의자에 앉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회음부의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의자에 앉을 때 그 부분에 뭔가를 깔고 앉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자를 바꾸어도 보고, 마트에서 동그란 도넛쿠션을 사와 앉아봐도 똑같았다.
훗날 나는 남자친구와의 성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해서 산부인과에 가보았는데, 산부인과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산부인과에서 정신과에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추천받은 것도 같다. 혼자 수능준비를 해보려고 난리를 치며 몇번(정확한 회수는 기억나지 않는다) 수능을 보다가, 친구들이 시간을 쪼개 내 공부를 도와주기로 했다. 한 친구는 영어를, 한 친구는 수학을 도와주기로 했다. 대가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냥 도와주는 거였다. 고마웠다.
하지만 고마운 것과 열심히 할 수 있냐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책을 읽으면 온몸이 가려운 느낌이 들어 몸을 북북 긁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몸에는 빨간 손톱자국이 났다. 앉을 수 없는 증상 또한 괴로웠다. 일어났다 앉았다 해봐도 회음부의 이물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로지 침대에 누울 때만이 그런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우울증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하겠지만 의사에게 우울증과 사회공포증을 진단받았다. 우울증은 의지력이 약해지는 질병이기도 하다. 공과금을 내러 간다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하는 간단한 행동도 우울증에게는 힘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3가지 증상이 있었는데도 수능준비를 시도한 것이다. 의자에 앉을 수 없는 증상. 책을 읽을 수 없는 증상. 우울하고 죽고 싶은 증상.
그 해 수능날 나는 침대에 누워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핸드폰 게임은 재밌는게 많았다. 타이쿤보다는 시뮬레이션이나 어드벤처류의 게임을 나는 좋아했다. 친구는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 3가지 증상을 해결해줄 수 없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나중에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나는 위에 쓴 이야기들, 그러니까 여러가지로 종합해본 결과 내가 공부를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공부를 하지 못한다면? 공부를 안할 거면 기술을 배우라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 공부이다. 무슨 일을 해도 공부를 해야했다. 자격증을 따든, 대학을 가든. 공부는 필요한데…. 나는 유서를 쓰고 ㅈㅅ시도를 했다. 목을 매달려고 했다. 매달았는데 목이 너무 아팠다. 죽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너무 죽고 싶었는데.
ㅈㅅ시도 다음날에도 부모님은 내 ㅈㅅ시도를 몰랐다. 부모님은 집에서만 있는 것보다 사회경험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보는 건 어떻냐고 권유해서 하루 3시간 하는 알바부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알바였는데 멀리서 사람이 다가오면 피하게 되었다. 난 목소리가 작았다.
“xx가게입니다~ 한번 들려보세요~”
나를 코치하는 직원은 답답해했다.
“더 크게 해야죠, 더 크게!”
눈을 감고 소리쳤다. “한번 들려주세요!” 사람들이 웃으면서 지나갔다. 무슨 일 때문에 웃는지 모르겠지만 나 때문에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 비웃고 있구나!’ 나는 덜덜 떨면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 들어가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역시 집이 제일 안전해!’
하지만 집에만 있으니 속이 메스껍고 우울한 생각이 강해졌다. 식구들이 외출하고 들어올 때도 나는 내 방에 있었다. 밥도 주로 혼자 먹었다. 혼자 먹으니 외로워서 신문을 보면서 먹었다. 나는 사회면을 좋아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읽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거나, 지식을 알기 위해 읽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는 거였다…. 새벽이면 신문이 현관문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몇달씩 집밖으로 안나갔다. 피부가 죽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보지 못한 피부가.
이대로는 안되었다. 용기내서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이 때 나는 원래 살던 서울시 a구를 떠나 b구로 이사간 상태였다. 부모님은 내 걱정에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나 때문이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 내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질대로 된 상태라 이사를 가던 말던, 내 인생 맘대로 되버려라 라는 생각이었지만서도.
나는 용기내서, 부모님의 소개로 동네 아주머니의 치킨집에서 일해보기로 했다. 홀을 관리하는 아르바이트였는데, 우울한 표정으로 있으니 손님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억지로 웃는 척을 했다. 다른 사람들을 기분좋아지게 돕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치킨집-을 행복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견딜 수 있었다. 치킨집에서 일하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무거운 맥주잔도 여러개 동시에 들어야 했고, 철판에 데일 때도 있었고, 커다란 대야에 설거지거리들을 잔뜩 들고 주방으로 들어갈 때는 손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열심히 살았던 시간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우울증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중증과 경증인 상태의 우울증이 다르고,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우울증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고 나선 집에 올 때 간식을 사와서 먹으면서 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괴로웠다. 우울증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빼고는 울기만 하다 세월이 흘러갔다.
공부는 할 수 없고, 우울증 탓인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 작가로의 꿈도 노력하기 어려웠다. 이러다 안되겠다 싶었다. 도서관에 갔다. 책을 펼쳐봤지만, 몇 장 넘길 때마다 몸이 가려운 것 같아 피부에 소름이 돋고, 긁고 싶었다. 나는 이빨을 딱딱거렸다. 벌레가 몸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영화 <미이라>에서처럼 피부 밑을 기어가는 것 같은….
그래도 그중 마음에 드는 책 몇권을 골라왔다. 펼쳤다 닫았다를 반복하면서 발췌독을 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빈 공책에 또박또박 옮겨 적었다. 남의 고통을 극복한 이야기를 필사하니 그 이야기가 내 일인 것만 같았고, 내 일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 중 인상깊었던 책 두 권을 소개하자면, <사랑받지 못한 소녀 어글리>와 <고통은 너를 삼키지 못한다>라는 책이다. <사랑받지 못한 소녀 어글리>는 나처럼 요실금에 걸린 여자아이의 이야기인데, 소변을 가리지 못한다 해서 엄마가 성기를 꼬집으며, 신체, 정신적으로 학대한다. 주인공은 결국 부모님을 벗어나게 되고 변호사가 된다. <고통은 너를 삼키지 못한다>라는 책은 아프리카의 르완다-부룬디 내전에서 탈출한 사람이 영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에 와서 의사가 되는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몸이 가렵거나 답답증이 들거나 우울할 때 간식먹기에 몰두했다. 자퇴전에 시작된 폭식이 계속해서 자기존재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간식은 주로 과자나 떡볶이, 피자였다. 낙지볶음같은 술안주류이기도 했고 (혼자서 술은 안먹었다) 음료수나 컵라면이나 아이스크림이기도 했다. 점점 나는 살이 찌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마르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내가. 가족들은 말렸지만 나는 말릴 수록 더 먹고 싶어졌다.
자퇴전부터 가족들과 시작된 마찰은 폭식 뿐만 아니라 모든 나의 생활에 적용되었다. 공부 안하면 뭐하고 살 거니, 그만 먹어라, 운동 좀 해라, 등등도 있었지만 바깥에 나갈 때 있었던 욕먹은 일을 이야기하면-a구에서 b구로 이사오고 나서는 어쩌다가만 욕을 먹었다-환청이라고 했다.
오빠와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적이 있다. 지하철의자에 앉아 있는데 반대편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나를 보고 비웃는 거 같았다. ‘저거 봐.’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덜덜 떨었다.
“오빠. 저. 저…. 저사람들 말야. 날 욕하고 있어!”
“뭔소리야. 너 욕하는 거 아니야.”
“욕하고 있다고! 다 들린다니까!”
“아니라고!”
오빠와 나는 말다툼을 했다. 그런 식의 말다툼이 흔했다. 친구들과 있을 때도 그랬다. 친구들과 어떤 가게에 앉아 있는데, 가게 주인이 아르바이트생과 농담을 하며 웃자 죽여버리고 싶었다. 친구는 날 욕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려는 공격성을 내 안으로 보냈다. ㅈㅎ하는 상상이라던지, ㅈㅅ하는 상상을 하며 참았다.
바깥에서 들은 소리들이 100퍼센트 진짜거나 100퍼센트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부는 환청이거나 잘못 들은 것일 것이다. 동행인이 있을 때는 대놓고 선명하게 욕을 듣는 일이 없었고, 꼭 혼자 있을 때만 분명한 욕을 들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데, ‘김윤희네. 오랜만이야?’하고 지나가는 여자아이. ‘김윤희다 김윤희. 나 쟤 누군지 알아.’하고 키득대면서 검정고시 학원앞을 지나가는 여자아이 둘. ‘너 xx역에 살지? 난 다 알아.’라고 표독스럽게 쳐다보던 여자아이 둘. 그런 이야기들을 가족들은 쉽게 무시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착각이라고 했다.
b구로 이사오기 전. a구에서 살 때도 가족들은 자꾸 나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가족외식을 하면 꼭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내가 나가기 싫다고 하면 화를 내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소리들이 들렸다. 나를 카메라로 찍는 여자아이도 있었다. 분명히 보았다. 내가 쳐다보자 카메라를 내렸다! 그리고 부모님은 내게 음식쓰레기를 내다버리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내 방 창문에 내가 열심히 붙여놓은 신문지를 떼어버리기도 했다. 나는 바깥에서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아빠나 엄마나 오빠가 멀리서 내 이름을 크게 불러 그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이름을 들으면 나를 아는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릴 거 같았기 떄문이다. 그럴 때마다 요실금이 재발할 것만 같고… 방광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괴로웠다. 내가 등교거부를 했을 때 때렸던 것도, 못 잊을 것만 같았다. 가족들이 미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는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는데,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하자 가족들이 못 그만두게 한 것도 그랬다. 당시 알바하던 곳은 1층이었는데 가게 외부에 파라솔을 펴는 것은 불법이었으나 그 가게는 파라솔을 피게 해놓고, 구청 단속이 뜨자 직원들이 눈치껏 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언질을 들은 적도 없어서, 치우지 않았다고 큰 소리를 들었다. 사장이 성희롱을 하기도 했다. 엉덩이 흔들면서 일하지 말라고 했다.
아르바이트의 장소나 업무를 바꾸는 것 외에는 나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답답해했다. 솔직히 게으르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날 여름 카페에서 친구들은 내게 말했다.
“너를 위해 뭔가를 해볼 생각은 없는 거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를 위해서?”
“집에서 놀지만 말고 뭔가 생산적인 걸 한다던지 말이야. 이대로 이렇게 살 건 아니잖아.”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언제까지 인터넷만, 게임만 할 수 없잖아. “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나보러, 뭘 어떻게 하라고…? 나도 뭘할지 모르겠는 걸.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그럼 하고 싶은 걸 찾으면 안되겠니?”
친구가 곤란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찾을지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화난 것 같았다.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건데, 언제까지 게임만 할 건데!” 언성이 오고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울면서 집에 왔다. 나보러 어떻게 하라고? 대학은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갈 수가 없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 왕따시킨 애들이 추적한다는 생각이 들면 가끔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는데!
사실 앞에서 친구들에게 내가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인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가 힘들었다.
그즈음 오빠가 내 운명을 바꿔놓을 어떤 책자를 주었다. <서울시 정신건강증진센터 홍보책자>. 주황색이었던 이 책자는 청년정신증환자를 모집한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자가진단항목을 살펴보며 내가 해당되는지 살펴 보았다. 평소와 다른 이상한 느낌이 든 적 있는지,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을 읽는 거 같은 느낌이 있는지 등등. 햇빛이 나를 때리려는 거 같아서 햇빛을 피해 도망친 적도 있고, 내가 창작한 스토리가 내 머릿속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읽어서 써버릴까봐 공포에 떨었던 적도 있었다. ㅈㅅ시도도 몇 번 한 적이 있고. 환청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난 제대로 들은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들 말에 의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다 바깥에 나와 책자를 보고 전화를 했다. 금방 약속을 잡았다. 센터는 서울 모처에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내 담당 사회복지사님은 상냥한 토끼같은 인상의 소유자였다.나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요실금에 걸려 자퇴했고, 히키코모리가 되어 우울증에 걸렸던 이야기를 했다. 밤마다 못자고 울면서 휴지산을 만들었던 이야기도 했다.
누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새벽에 일부러 바깥을 걸어다녔던 이야기도 했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카페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도 있었다. (이젠 길에서 기다려도 누군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사회복지사님은 그랬었군요. 힘들었겠어요.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끝까지 들어주셨다. 나는 말하다가 울음이 나와서 휴지로 닦으면서 털어놓았다.
복지사님과 나는 3회에 걸쳐 상담을 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 초기 3회가 상담대상자에 적절한지 평가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1대1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무슨 상담프로그램 짆행 동의서에 싸인을 했다.
복지사님은 병원에 가자고 했다. 병원비 지원이 나온다고 했다. 병원비는 무한정 지원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형편에 따라 지원된다.
병원은 좋은 곳이었다. 나는 깔끔한 그곳의 인테리어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의사선생님도 상냥했다. 그동안 의사들을 안만난 건 아니었는데, 약에 효과가 없다고 생각해 약을 중단해버리거나, 의사가 내게 훈계를 하듯 얘기해 울면서 뛰쳐나오거나 했다. 그리고 내가 만난 의사들은 사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상담도 짧았으나 이분은 최소 10분은 할애해주며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정신과 진료비는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1번 가는 데 1만 5천원 이하로 들었다.
병원 진료가 끝난 뒤 사회복지사님은 파스타와 피자를 사주셨다. 본래 병원비와 상담을 위한 카페 커피비는 지원이 나오지만 그건 사비로 사주신 거 같았기에 더욱 감사했다.
사회복지사님은 제일 먼저 안씻는문제부터 해결해보자고 했다. 나는 머리도 잘 감지 않았고 양치하는 것도 귀찮았고 힘들었다. 머리를 감기 싫어서 삭발을 하고 싶다고 하자 부모님이 화를 내며 반대했다. 담임썜은 표를 만들어서 가져오셨다. 표에 체크를 하다가 하는 게 점점 버거웠졌다. 사회에서 동떨어진 사람은 씻는 것이 어렵다. 당시 내 상황은.... 아르바이트를 쉬고 있던 상황이라 병원비 지원을 받고 있었고. 학교도 회사도 다니지 않아 사회에 나와 연결된 어떤 고리가 없던 상태였다.
이안닦고, 머리안감고 외출해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잘 보일 사람이 없다. 왜냐면 난 곧 죽을 거니까! 좀 삐둘어진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세상이 나를 괴롭혔으니 내가 맘대로 굴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이 부분은 나중에 해결되게 된다.
사회복지사님과는 인지상담도 동시에 진행했다. 나는 씻는 것 외에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첫번째는 다이어트(폭식). 두번째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것과 세번째는 직업적인 커리어에 대한 고민. 네번째는 가족에 대한 애증이었다. (등교거부를 했을 때 때린 일이나, 요실금 당시에 도움이 미흡했던 것, 환청에 대한 말다툼 등으로 인한)
첫번째는 당시에 해결할 수가 없어보였고 두번째 일을 예로 들자면 복지사님과 만날 때마다 하는 대화가 이랬다.
나 작가가 되고 싶어요.
복지사님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나 모르겠어요. 그냥... 죽어야할 거 같아요.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었고 그 상태를 벗어나려면 어찌해야되는지도 몰랐다. 답답하고 책을 읽을 때 몸안에 벌레가 있는 거 같은 느낌이 인지상담을 할 때 나타났다. 복지사님 앞에서 몸을 마구 긁었다.
인지상담을 해도 나아지는 거 같지 않자 나는 약을 끊어버리고 한차례 ㅈㅅ시도를 하려고 했다.
그즈음 아빠는 고함지르면서 집에만 있지 말고 일하라고 소리질렀고, 아니면 독립하라고 집을 나가라고 했다. 가족들에게 또 화가 났었다.
복지사님은 ㅈㅅ시도를 알게 된 뒤 나와 약속 하나 하자고 했다. 상담하는 동안은 ㅈㅅ하지 않기로.
마지못해 나는 알바와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복지관, 방송국 기부촬영, 사회복지단체 홍보영상 촬영봉사 등등.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집에 있는 것보다는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이 봉사활동을 하면 배우는 게 있을 거라고 했는데 믿지 않았다가, 봉사활동에서 배운 대파다듬기를 아르바이트에서 시키는 걸 보고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인지상담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집단상담도 진행되었다. 집단상담은 서울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에서 진행되었는데, 자원봉사자/복지사님 3인과 청년 3인으로 1대1 파트너를 정하여 진행되었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나무그리기. 서로의 의견이나 근황을 듣고 거기에 대해 도움받은 점이나 좋은 점 말하기. 서로의 전성기를 듣고 응원해주기. 다같이 손잡고 춤을 추거나 외부활동을 하는 등으로 진행되었다. 인지상담 복지사님의 말로는 이때 내가 많이 밝게 변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건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면, 서비스직은 너무 힘들었다. 우울증인데 억지로 웃어야 했다. 어쩌면 우울증이지만 외향적이라 서비스직이 잘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사무직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잘 안뽑혔으나 단기알바로라도 사무직을 계속하니까 경력이 쌓여서 장기사무직에 통과되었다. 주로 전화돌리는 알바를 자주 했다.
장기사무직에 통과되고부터 일이 술술 잘 풀려나갔다. 생활이 안정되자 병원비 지원은 끊겼지만 상담은 계속 진행했다. 인지상담에서도 내가 작가가 되지못할 거 같아서 죽고싶다는 대답을 주로 했었는데, 집단상담+장기사무직 효과로 작가가 되고싶어서 어떻게 해야될지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복지사님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되는지 방법을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몇가지 항목을 적었다. 학원을 다닌다. 그림을 매일 한장씩 그린다.
그 무렵, 혹시 웹툰에 대한 학원은 있는지 알아봤었다. 지금은 어떤 작가이든 괜찮지만 당시에는 웹툰에 가장 관심이 있었기에 무심코 검색을 했는데 모 학원이 걸렸다. 처음으로 방문한 학원은 나무벽과 따뜻한 조명이 푸근해지는 학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만드신 작가님의 수업으로 신청했다. 서로의 스토리를 발표하고 작가님에게 피드백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3-4개월 과정이었다.
나는, 10년동안 어딘가에 소속된 적이 없었다. 엉망진창으로 쫓기듯이 나온 학교를 다시 다니는 것처럼 느껴져서 감동받았다. 작가님과 수업 중에 피드백 때문에 옥신각신한 적도 많았지만, 나는 학원에 다니는 시간들을 매우 의미있게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사회적 위치가 없어 씻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도 학원을 다니며 점점 나아졌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더해져서.
웹툰학원에는 가명으로 등록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계속 또래 아이들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이것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게 상담이 길게 진행되었다. 자다가 꿈에 학교가 나왔는데, 학교를 발로 차서 핏물이 흘러나오는 걸 보고 기분이 좋았다.
별개로 우울했던 점은 학원에서 생각보다 내 작품의 상태가 부진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몇 주동안 한줄도 못 쓸때도 있었다. 작가님은 실망한 듯 보였고 나도 나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더이상 ㅈㅎ를 하거나 ㅈㅅ시도는 하지 않았다. 상담을 거치며 그렇게 훈련된 거 같았고 나는 폭식을 하거나 잠을 잤다.
학원수업이 끝나갈 때쯤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에게 만나자고 했다. 그 이후 있었던 일, 그리고 공부를 도와줬는데 못했던 것과 다투고 연락을 그만두었던 점에 대해 사과를 했다. 친구는 내가 우울증이라고 해서 우리가 인터넷이나 게임을 계속 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능공부를 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했다.
웹툰학원 수업이 끝났다. 고기집에서 회식을 했고, 작가님은 수업 이후에도 피드백을 원하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장기사무직으로 일하는 회사 근처에서 이른 아침에 사회복지사님을 만나 현재의 고민 이야기를 진행했다. 창작능력이 부족하고, 알바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가족과의 앙금(때리거나 우울할 때 함부로 대했던 일 등)이 남아있어서 가족을 순수하게 좋아하기 힘들어서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죽고싶다거나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머릿속이 깨끗하고 맑은 때도 있어서 나 자신에게 놀라웠다.
연말에 정신건강증진센터를 거쳐간 청년들의 파티도 진행되었다. 합정에 위치한 대여가 되는 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 과자와 음료수들과 도시락이 준비되어있었고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에 대해 강의를 해주셨다. 그곳에 참석한 청년들은 밝아보였다.
상황은 점차 나아졌다. 나는 웹툰학원에서 준비했던 기존의 스토리를 포기하고 내 우울증에 대한 만화를 그려서 웹에 올렸다. 많은 독자들이 보지는 않았지만 반응이 있었다. 12화 정도 올린 다음에 나는 링크를 웹툰학원 작가님에게 보내보았다. 작가님은 전에 없었던 칭찬을 많이 했고, 난 기분이 좋았다. 얼마전에 오설록 녹차스프레드 세트를 드렸다.
사회복지사님과의 상담도 종료되었다. 2년여간의 기간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문제들 (작가, 직장)에 대한 실마리는 좀 찾은 것 같았지만, 가족과의 앙금은 끝내 정리하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나는 서울시 정신건강증진센터가 아니라 가까운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로 이관되었고, 그곳에서 한달에 한번씩 상담을 받고 있다. 병원은 우울증 중증일 때 1주에 한번 가던 걸 3주에 한번씩 방문하며, 10년 전 요실금이 터지기 전 관람했던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를 최근에 10년만에 갔고, 가끔 요실금은 우울한 사건이 터질때마다 약간씩 문제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건강한 상태다. 앉을 수 없는 증상은 언젠가부터 사라졌고, 책을 읽을 수 없는 증상은 현재도 남아있지만 이북으로 읽으면 읽을 수 있다.
플랫폼에 연재하기 위해 그림작가님을 구해 여러곳에 만화투고를 했고, d모사에서 유일하게 수정하면 재고해보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사정상 할수 없게 되었다. 출판사 투고를 원했지만 글을 쓰다보니 모든 내용을 작성해도 출판분량에 못미치겠다는 판단이 내려 글을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다.
폭식증에 대해서는 학생 당시 몇키로였는지 알수없지만 지금은 비만인 80키로인 상태다. 치아 또한 우울할 때 잘 닦지 않아 잇몸퇴축이 많이 심해진 상태 (잇몸이 얇아져? 이가 드러나는 것)라 치과에서 꼭 양치를 열심히 하라고 권고했다.
현재는 그림연습을 하고 있으며, 글그림 분야에 종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국에는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가 있으며, 서울시 정신건강증진센터와 똑같은 서비스를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환자 사정에 따라 병원비가 지원되고, 나는 현재 지역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정신장애인 대상 취업교육을 받고 있다. (장애인증이 있는 중증은 아니지만 들을 수 있다)
10년동안 매일 우울하다 죽고싶다는 생각만 하다가 현재는 머릿속이 깨끗할 때가 종종 있어 서울시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