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를 찾아서#20] 다시 역사를 시작하는 명작 RPG, '발더스 게이트'
오랜 시간 별다른 소식이 없어 팬들 사이에서는 명맥이 끊겼다고 여겨지는 시리즈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역사를 시작하는 건 참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IP를 찾아서 코너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이렇게 다시 시리즈가 부활해서 역사를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진 코너이기도 하고요.
오늘은 서론부터 밑밥을 깔고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유저들도 알고 있고, 게임 역사상으로도 의미가 깊으면서 최근 시리즈의 부활을 알린 게임이 오늘 IP를 찾아서의 주제입니다. 클래식 RPG의 대부격 존재이자 수많은 '정신적 계승작'을 만들어낸 게임, '발더스 게이트'가 오늘 IP를 찾아서에서 다시 추억을 살려볼 게임입니다.
'발더스 게이트'는 어떤 게임인가?
CRPG의 대중적인 성공을 알린 기념비적인 명작
'발더스 게이트' 1998년 12월 바이오웨어에서 출시한 게임으로, 어드밴스드 던전 앤 드래곤 2판(AD&D2)의 룰을 채용되어 제작된 RPG입니다. 한국에도 1999년 1월 영문판으로 출시되었고, 같은 해 여름에는 한국어판으로 유통되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CD 5장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라서 기억에 남네요. 과거 게임 잡지가 크게 유행하던 시절에 PC파워진에서 두 달에 걸쳐 CD를 풀 사양으로 제공했던 적도 있어서, 아마 이를 통해 접해보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는 국내 PC 패키지 시장에서 북미 RPG중 디아블로와 함께 당시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이 뒤섞인 혼돈의 세계와, 게이머들의 선택에 따라서 달라지는 캐릭터의 변화 등등 발더스 게이트는 자신만의 개성과 서양식 RPG의 느낌 모두를 한국 유저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발더스 게이트는 타임 오브 트러블의 혼란 시기에서 플레이어 캐릭터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정확하게는 '바알스폰 사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혼란의 시기에 필멸자가 된 신들이 만들어낸 자식들의 이야기죠. 아무튼 주인공은 계속해서 다양한 여정을 거치며 성장해나가고, 플레이어가 어떤 가치관을 선택했느냐에 따라서 게임의 양상과 보상이 크게 달라지는 구조를 갖습니다.
플레이어는 캔들킵에서 시작해 세계의 다양한 지역을 탐험하면서, 많은 조직들의 비밀스러운 음모를 조사하고 이에 맞서면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나가는 여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정이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게임 자체의 룰은 D&D를 많이 차용했지만 실시간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형룰도 존재하죠.
물론 발더스 게이트가 쉬운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조작해야 하는 캐릭터가 매우 많았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일시정지 기능으로 세밀하게 명령을 내려야 했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실제로는 실시간 전투는 애니메이션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턴제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D&D의 룰을 잘 모른다면, 알아가야 하는 과정도 꽤 있는 편이라서 난이도가 결코 낮다고 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었죠. 게다가 잠시 한 눈 팔면 늑대한테도 물려죽을 정도의 높은 난이도는 초심자들에게 고통이었습니다. 게다가 맵도 엄청 넓고 퀘스트도 정말 많은데, 이를 편하게 해줘야 할 길 찾기 시스템이 오히려 끔찍할 정도로 나빠서 별로 도움이 안됐죠.
이러한 난이도나 불편함에도 발더스 게이트가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선택'과 '결과'라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끊임없이 플레이어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이에 대한 결과에 따라서 게임이 달라지는 비선형적인 구조.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고,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폭력을 동반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 따라 이야기가 변화하는, 플레이어의 경험의 다양해질 수 있는 비선형적이며 동적인 내러티브가 발더스 게이트의 매력이 아닐까요.
또한 D&D의 성향 시스템으로 플레이어의 진행과 이야기, NPC의 반응 등 다양한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앞서 말했던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미래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플레이어 주변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플레이어가 만나고 경험하는 수많은 NPC와 인물들 모두에게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변화였죠. 게다가 CD가 4장이었던 만큼, 방대한 볼륨은 이러한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발더스 게이트는 거대한 인기를 구가하며 또 다른 RPG의 부흥을 알린 기념비적인 타이틀이 됩니다. 그래서 '바이오웨어'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각인시켰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클래식 RPG의 기준이 됩니다. 이후로도 올드 RPG, 클래식 RPG를 표방하는 게임들은 대부분 발더스 게이트식 디자인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죠.
아마 발더스 게이트를 잘 모르지만 현대에 출시된 CRPG를 플레이해본 유저들이라면, 발더스 게이트의 분위기나 전체적인 모습 자체는 크게 낯설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작품이자, PC 게임의 역사에서는 절대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요.
1편의 성공 이후, 발더스 게이트는 확장팩 '테일즈 오브 더 소드 코스트'로 한차례 세계를 확장했고, 1편의 스토리를 이어가는 후속작, '발더스 게이트2: 섀도우 오브 암'이 2000년에 발매됩니다. 그리고 2001년에는 확장팩 '쓰론 오브 바알'도 출시됐습니다. 물론 성과는 성공적입니다. 시리즈와 확장팩을 모두 합쳐 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죠.
2000년 9월에 발매된 발더스 게이트2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어마어마한 볼륨의 콘텐츠는 여전했고, 무엇보다도 전작에서 꽤 호불호가 갈렸던 전투는 크게 개선되어 훨씬 편안하게 전투가 가능했습니다. 다만 동료로 선택이 가능했던 캐릭터들이 크게 줄었는데, 반대로 이런 캐릭터들의 개성과 상호작용은 크게 증가해서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유저들은 캐릭터들과의 대화나 상호작용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이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멤버들의 성향에 따라서 파티에서 이래저래 다양한 대화와 이벤트들 발생하는데 이게 참 때로는 불안하면서 두근거리는 볼거리였습니다.
밸런스나 전투가 좀 단순해서 비판받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변화와 함께 난이도가 전작에 비해서 할만해서 초보자 진입장벽이 아주 낮아졌습니다. 시작 레벨이 1이 아니라서, 어느정도 성장이 되어 있어서 전투에 적응하기도 편했고, 성장 상한도 높았죠. 이런 변화점에 있어서 1편의 캐릭터를 가져올 수도 있고, 새로 생성하는거보다 좀 더 높게 시작할 수 있는 소소한(?) 특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발더스 게이트2'는 전 편의 명성을 이어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았죠.
1996년 발매된 '디아블로'가 이미 PC 시장에서 RPG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PC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면, 발더스 게이트는 이를 증명하고 수요가 확실히 있다는 점을 재확인 시킨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D&D 룰 기반의 RPG를 성공적으로 PC 게임으로 만들어냈다는 점도 큰 의미가 됩니다.
'발더스 게이트'의 IP 소유는?
정통성의 핵심은 D&D,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게 있다
발더스 게이트의 IP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던전앤드래곤'이라는 세계관과 설정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애초에 발더스게이트가 던전앤드래곤의 세계관과 룰을 차용한 게임입이니까요. 정확히는 던전앤드래곤 '포가튼렐름'을 기반으로 하죠.
'포가튼렐름'은 서양 판타지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중세 서유럽 느낌을 갖고 있는 세계관입니다. 이러한 포가튼렐름 세계관은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가 있는 편이고, 게임 뿐 아니라 소설과 미디어 믹스 등으로 많은 콘텐츠가 생산되었습니다. 던전앤드래곤 세계관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포가튼렐름 세계관의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세력 다툼 등의 서사로 표현되는 다른 세계관에 비해서 포가튼렐름의 세계관 자체는 개인과 모험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편입니다. 강력한 개인, 혹은 단체들과 개인의 대립과 갈등이 주요 서사가 되죠. 던전을 탐험하고, '악'을 물리치면서 보물을 챙겨 보상을 받는 던전앤드래곤 세계관의 본연의 모험 컨셉이 잘 살아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여진 세계관 만큼은 다른 세계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설정과 역사를 가진 세계관이 '포가튼렐름'입니다. 대충, 판타지 세계에서 상상할 수 있을만한건 포가튼렐름에 다 있습니다. 동방 무협, 남미 느낌, 모래 사막의 아랍 컨셉, 우주관을 통한 차원 이동까지 다채로운 문화들이 전부 잘 섞여있어서 뭐가 나와도 별 위화감이 들지 않아서 아주 좋은 세계관이죠.
결과적으로, 발더스 게이트 IP는 '던전앤드래곤' 세계관에 종속되어있어서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발더스게이트 IP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던전앤드래곤 세계관이 꼭 채용되어야 하죠. 그리고 이러한 던전앤드래곤 세계관은 현재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의 소유입니다.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WotC)는 1990년 창립된 회사로, 1999년에 해즈브로의 자회사로 편입된 출판사입니다. 주로 TRPG, TCG, 보드게임을 다루는 게임 회사죠. 초창기 아주 작은 회사였지만 MTG의 성장으로 던전앤드래곤 시리즈를 만든 게임회사인 TSR을 인수 합병하여 던전앤드래곤의 모든 권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크게 보자면 던전앤드래곤과 매직더개더링의 지적재산권을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관리하고 있지만, 돈법사 또한 해즈브로의 자회사이므로, 해즈브로의 소유라고 할 수도 있죠. 현재 던전앤드래곤 IP는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개발 업무에 주력하고 있고 판매와 유통은 해즈브로가 주로 다루고 있는 편입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부활하다
19년만에 다시 시작된 시리즈의 역사, '발더스 게이트3'
사실 IP를 찾아서에서 발더스 게이트편은 꽤 오래전부터 작성하려고 마음먹었던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국내 시장에서 인기가 높았고, GOTY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PC게임의 역사를 짚어볼 때 절대 빼놓을 수 없을만큼 의미가 깊은 작품이니까요. 올드 게이머들 중에서는 당장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분명히 난 발더스게이트를 플레이 했다는 경험을 가진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발더스 게이트의 역사는 마침내 재개되었습니다. 발더스 게이트2의 확장팩이 발표된 2001년으로부터 약 19년만에, 2019년에 '발더스 게이트3'의 공식 트레일러가 E3를 통해 공개됐죠. 그동안 계속해서 시리즈를 개발해왔던 바이오웨어가 아닌, '라리안 스튜디오'가 이 공식 계보를 이어가게 됩니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그동안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으로 클래식 RPG를 꾸준히 개발해온 개발사입니다. 클래식 RPG하면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게 본 기사의 주제인 발더스 게이트죠. 디비니티는 이러한 클래식 RPG의 계보를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매력을 잘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이러한 라리안 스튜디오에서도 발더스 게이트의 팬인 개발자들이 많이 있는 편이죠.
재미있는 건 이 발더스 게이트3의 개발 비화랄까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개발할 당시부터 라리안 스튜디오는 발더스 게이트 개발을 위해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 접촉을 했던 사실이 인터뷰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꾸준히 클래식 RPG로 성과를 이루고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2'를 개발하고 있을 무렵에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서 역으로 제안을 해온 것이죠. 즉,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2가 개발되고 있던 도중 라리안 스튜디오에서는 이미 '발더스 게이트3'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라리안 스튜디오의 창립자이자 CEO인 스벤 빈케(Swen Vincke)는 이 프로젝트를 전 직원들에게 직접 발표하고 싶었고, 그렇게 발표했을때 직원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엄청 크게 놀라면서 멋지다고 환호한 인원이 있는 반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속삭이듯이 '발더스 게이트가 뭡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고 하죠.
그만큼 세월히 흘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시리즈 명맥이 19년이나 끊겼으니 그럴만 합니다. 발더스 게이트 이후로 이러한 CRPG의 계보를 잇는 명작들이 많이 나왔고, 정신적 계승작도 나오긴 했으나 확실히 점차 시대가 흐르며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만큼 이제는 '발더스 게이트'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요.
현재 라리안 스튜디오에서 제작하고 있는 발더스 게이트3는 기존 시리즈와는 다르게 던전앤드래곤 5판의 룰을 따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최신 룰을 따라가는게 맞을지도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이자 팬들의 논란거리는 전투 방식의 변화입니다.
발더스 게이트3는 일단 전작과는 비슷하게 쿼터뷰 시점을 채용했지만 전투는 턴제 택틱스로 변경되면서 완전한 턴제 게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의견이 주로 갈리죠. 원작이 실시간 액션을 지향하는 턴제 느낌이었는데, 이에서 완전히 벗어나 턴제 게임이 되었으니까요. 물론 지형의 고저차나 아이템 활용 등의 전술적 요소라던가, 다양한 사물을 이용한 상호작용으로 전략적 요소들도 늘렸죠.
하지만 오리진 캐릭터가 있다거나 첫 플레이 영상 공개 이후로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웠습니다. 애초에 같은 게임 개발사니 그럴 수 있긴한데, 발더스 게이트만의 느낌이 사라지는건 팬들도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발더스 게이트는 나름대로 틀을 잡고 확보한 높은 자유도,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이 아주 매력적인 요소입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른 비선형적인 구조는 내러티브는 게임으로서의 매력 요소일 뿐 아니라 시스템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도 쓰이기도 하니까요.
아무튼 개발중인 '발더스 게이트3'는 플레이어의 1레벨~10레벨까지의 여정과 모험을 다루게 되며, 현재는 그래픽 업그레이드 및 모델링 개선, UI 변경 등 초기 버전과는 다른 많은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발에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큰 문제 없이, 모션 캡쳐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네요.
현재 얼리액세스 버전을 기준으로 공개된 내용으로는, 캐릭터를 생성할 때 다양한 배경설정을 지정할 수 있고 6종의 클래스가 선택되는것으로 보여집니다. 정식에는 플레이어 핸드북에서 등장하는 클래스가 모두 등장할 예정이고, 각 종족들은 능력치들이 조금씩 다르고 여러가지 개성들도 추가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게 설정을 잡고 컨셉플레이하기 좋은 느낌이라 매우 기대가 됩니다. 커스텀 캐릭터는 다소 스토리가 부실할 수 있는데, 발더스 게이트3에서는 오리진 캐릭터가 아니라 커스텀 캐릭터로 플레이해도 스토리를 좋게 느낄 수 있도록 강화(디비니티 오리지널 신2에 비해서)한다고 합니다. 또한 대사 스크립트 방식에서 다양한 컷씬 방식으로 변화하여 캐릭터 하나하나의 제스처나 표정도 볼 수 있어서 더 강하게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팍스 2020에서는 직접 개발자들이 노트북을 꺼내 시연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D&D 시리즈의 룰이자 특유의 변수로 시연에서 난리가 났었죠. 막판에는 버그도 그대로 노출되는 등 불안한 개발 빌드의 모습이 날 것 그대로 공개되어서 실망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인 모습이 솔직해서 좋은 것 같기도 하네요.
간혹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시작하는 시리즈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시리즈들도 있었어요. 대체적으로 과거 시리즈의 매력을 잘 알고 있는 개발자들에게서는 실망스러운 작품이 덜 나오는 편이니까요.
그래서 라리안 스튜디오의 '발더스 게이트3'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존 시리즈 팬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는 분명히 있겠지만, 그동안 라리안 스튜디오는 발더스 게이트의 계보를 잇는 CRPG들을 만들어왔고, 좋은 반응들을 얻었으니까요. 그들이라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발더스 게이트'의 감성을 보여주지 않을까요?
발더스 게이트는 2020년 8월 스팀 얼리 액세스와 구글 스태디아를 통해 출시될 예정이므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빨리 8월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GDC2015]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 개발후기, “벼랑 끝에서 우리는 부활했습니다"
“지루하고 형편 없는 게임은 잘 팔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체득한 교훈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GDC 2015 강연장, 라리안 스튜디오의 CEO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스벤 빈케’(Swen Vincke)가 강단에 올라 내뱉은 첫 번째 말이다. 금번 강연의 제목은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 개발후기”. 어떻게 라리안 스튜디오가 절망적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재기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었는 지를 전 세계 개발자들에게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Divinity: Original Sin)은 벨기에 개발사 라리안 스튜디오가 개발한 PC 롤플레잉 게임으로 2014년에 출시됐다. 발더스 게이트, 아이스윈드 데일 류의 고전 RPG를 표방하면서도 혁신적인 던전 탐험과 전투시스템을 담아 평단과 게이머의 호평을 동시에 받았다. 100시간이 넘는 긴 플레이시간과 함께 싱글 플레이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는 멀티플레이까지 지원하는 것도 강점. 스벤 빈케에 따르면 디비티니: 오리지날 신은 35명의 개발팀에 의해 3년에 걸쳐 개발됐으며, 라리안 스튜디오가 자체 퍼블리싱한 두 번째 게임이다.
“13년 경력 , 40개의 게임을 출시한 라리안 스튜디오가 대격변을 맞이하게 된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한 최악의 악몽 '디비니티2: 에고 드라코니스’의 출시 때문입니다. 첫 번째 콘솔게임이자 첫 번째 공동퍼블리싱 게임이고요, 예정일보다 8개월 늦게 출시됐지만 미완성인 채로 세상에 나왔죠. 우리 회사의 전환점이 된 게임입니다."
2010년 출시, 메타크리틱 평점 62점에 머무르며 흥행에 참패한 '디비니티2: 에고 드라코니스'는 막대한 빚더미와 함께 라리안 스튜디오 전 직원에게 앞으로 회사가 계속 운영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깊은 의문까지 남겼다. 한동안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진 라리안 스튜디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개발하면서 외부 미들웨어에 너무 의존했고 반복작업도 많았습니다. 목표 없이 산만하게 개발하면서 팀원간의 불화도 있었죠. 재무사정도 좋지 않았고 공동 퍼블리싱이다보니 프로젝트에 대한 통제권도 잃었습니다. 게임의 정체성이 오락가락했던 겁니다.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회사를 재시동(Reboot)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금니 깨물며 새로운 각오를 다진 스벤 빈케는 재시동의 첫 실행 단계로 후속작 ‘디비니티2: 더 드래곤 나이트 사가’를 선택했다. 우선 명확한 계획부터 세웠다. '그동안의 피드백을 수렴하여 게임을 완성도 있게 출시한다. 채무를 정리하고 라리안 스튜디오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메타크리틱 82점을 기록한 '디비니티2: 더 드래곤 나이트 사가’는 여러 매체에서 베스트 롤플레잉 게임으로 꼽혔으며 게이머들에게도 호평을 받아 어느 정도 실추한 명예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재미있고 완성도가 높은 게임은 역시나 통했습니다. 앞으로도 완성도에 있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이를 계기로 라리안 스튜디오는 새로운 철학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비전을 고수하고 우리 자신만의 기술력을 키운다. 우리가 직접 퍼블리싱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세운다. 다시는 미완성인 채로 게임을 출시하지 않는다.’였습니다."
이때부터 스벤 빈케는 회사의 구세주가 되어줄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는 큰 규모, 다른 하나는 작은 규모로 두 개의 게임을 동시에 개발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즉, 작은 규모의 게임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으로 큰 게임을 만들 자금을 계속 투입한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스벤 빈케가 예상치 못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게임의 완성도를 높힐 수록 투입되는 자금의 규모도 계속 커진다는 사실이었다. 애초 투입 가능한 자금이 150만 유로가 있었고, 개발과 퍼블리싱 비용 모두 합해 투입 가용 자금의 두 배인 300만 유로로 예산 계획을 세웠으나 '디비티니: 오리지날 신의 출시가 임박하자 총 비용은 450만 유로(한화 약 55억 원)까지 증가했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일단 평가가 좋았던 디비니티2: 더 드래곤 사가의 XBOX360 버전과 이전에 출시했던 게임들의 리패키지 한정판을 출시했습니다. 라리안스튜디오가 지분 51%, 투자자들이 지분 49%를 가지고 있는 특수목적회사(SPV)를 세웠고, 팀원들 사기를 높히고 사전에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을 여러 매체에 홍보하기 위해서 게임쇼에도 지속적으로 참가했습니다. 2013년에는 킥스타터를 통해 약 100만 달러(한화 약 10억 원) 가량의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디비니티 : 드래곤 커맨더’도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보다 늦게 출시하는 계획이었는데 출시를 앞당겨 자금의 희생양으로 만들었죠. 거의 악마와 거래를 시작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을 위한 자금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성우 녹음과 현지화, 출시 작업을 위한 자금이 여전히 모자란 상황에서 킥스타터, 투자자, 돈을 빌렸던 은행들로부터 빚 독촉은 물론, 갖가지 스트레스까지 받게 된다. 결국 라리안 스튜디오를 자금 압박에서 구출해준 것은 ‘디비니티 : 오리지날 신’의 스팀 얼리엑세스(Early Access) 출시와 스팀 여름세일로 벌어들인 수익이었다.
“개발자금뿐 아니라 실제 개발 과정에서도 난항이 이어졌습니다.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을 개발하면서 게임 디자인 철학을 세웠습니다. 강하게 몰입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가져야하고, 게임 내 월드는 체계적이면서도 다채롭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반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도전할 만한 전투시스템과 다양한 플레이에 대한 보상시스템까지 함께 들어가 있는 협동(Co-op)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개발하기 어려웠냐고요? 멀티플레이어 롤플레잉 게임은 단조롭고 멍청하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부셔야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의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벤 빈케는 “N+1 디자인”이라는 콘셉을 꺼내들었다. 풀어 설명하면 모든 게임내 개별 상황에서 항상 N가지 경우의 해결방법과 함께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빠져나올 수 없는 곤란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추가 해결방법'(+1)을 준비해야한다는 것이다. 협동 롤플레잉 게임이기에 특히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황 자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이것 외에도 스벤 빈케는 극심한 자금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혁신적인 게임을 완성하기 위한 초심과 노력을 시종일관 유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개발법(Player-driven design)도 효과가 꽤 좋았습니다. 얼리엑세스로 출시하자 스팀 게시판에 엄청난 유저 피드백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적극 수렴하느냐 혹은 무시하느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저희는 적극 수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게시판 모든 글에 적힌 피드백을 표로 만들어서 업무로 정리했고 매번 패치때마다 최대한 반영해 나갔습니다. 정말 진이 빠지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었죠. 물론 이로 인한 출시 연기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스벤 빈케는 '다듬기 작업’(Polishing)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공개테스트를 통해 UI, 튜토리얼, 접근성, 밸런스를 반복해서 다듬었다. 이외에도 자체 QA팀을 통해 QA 효율을 크게 끌어올렸으며, 게임 DVD에 실행파일은 빼고 스팀 인스톨러만 넣어서 대부분 버그를 해결한 Day 1 패치를 모든 플레이어가 다운로드 받도록 강제했다. 이 모든 것이 플레이어 대부분이 첫 인상만으로 해당 게임을 평가하고, 메타크리틱 평점 7점과 9점은 판매량에서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이 모든 노력 덕분에 디비니티: 오리지날 신은 대부분 해외 매체에서 ‘혁신적인’ 턴제 협동 롤플레잉 게임으로 인정 받았고, 스벤 빈케는 9점에 가까운 메타크리틱 평점과 높은 판매량, 두 마리 토끼를 한 꺼번에 잡을 수 있었다.
강연의 마지막에 이르자 스벤 빈케는 현지화와 홍보 전략을 짜고 앵그리조와 같은 유투브 네임드와 트위치 실시간 방송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언급했다. 유저 대응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특히 목소리를 높혔다. 유저들의 게임 평가, 비판에 대해서는 반응하는 게 좋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어가면 멈출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절대 유저들에게 부정적으로 대하지말고 항상 정중할 것을 당부했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여전히 펜& 페이퍼 롤플레잉 게임 느낌이 물씬 나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고자 노력 중입니다. 저희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훌륭한 인재를 채용하고 있고, 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보다 발전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 실험도 진행 중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라리안 스튜디오에서 미공개 롤플레잉 게임 신작 2종을 발표할 예정이니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세계기행] 선택의 자유 고집한 장인 라리안, 그리고 '디비니티'
올해 발매를 앞둔 대작 중, 유독 고전 RPG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 최신작 '발더스 게이트 3'다. 워낙 오랜만에 돌아온 대형 브랜드인지라 덩달아 누가 이 게임을 만드는 지도 화제에 올랐는데, 라리안 스튜디오라는 다소 낯선 이름이 나왔다.
아마 디비니티 시리즈를 만든 스튜디오라고 하면 감을 잡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그것도 RPG 마니아 이야기. 여전히 많은 게이머가 이 라리안 스튜디오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몇 해 전 화제가 된 디비니티는 정확히 어떤 게임인지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다. 이에 이번 주에는 발더스 게이트 3 개발을 맡게 된 라리안 스튜디오와, 지금까지 이들의 간판 타이틀로 자리매김해온 디비니티 시리즈가 대체 어떤 게임인지 알아보자. 아마 이들이 개발 중인 발더스 게이트 3의 방향성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감이 잡힐 것이다.
6년 방황, 3번 개명… 그 끝에 간신히 출시된 ‘디바인 디비니티’
라리안 스튜디오 하면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의 성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얼핏 승승장구 중인 개발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라리안은 그리 순탄치 않은 세월을 겪어 온 뿌리깊은 중견 개발업체다. 이런 라리안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단연 이들의 간판 시리즈 디비니티가 있었으니… 사실상 디비니티의 역사가 라리안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짐작했겠지만 디비니티는 결코 순탄하게 탄생한 시리즈가 아니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1996년 벨기에의 스벤 빈케(Swen Vincke)라는 개발자에 의해 설립됐다. 어린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게임 만드는 것을 취미로 삼던 그는 회사 설립 당시에도 이미 혼자 몇 개의 게임을 만든 독립 개발자였다. 그는 울티마 5의 높은 자유도에서 영감을 얻어 ‘언리스: 더 트레처리 오브 데스(Unless: the Treachery of Death)’라는 RPG를 구상했고, 이를 제작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 게임은 재정적 문제로 실제 개발까지 진행되지 못했다. 많은 신생 개발업체가 흔히 겪는 것처럼, 라리안 스튜디오도 게임 개발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해줄 유통사를 찾아다녔다. 당초 유통사로는 아타리가 물망에 올랐고 계약 체결을 앞둔 상태였지만, 당시 이미 아타리는 몰락하는 중이었다. 결국 아타리는 계약서 서명 며칠 전, 돌연 PC플랫폼에서 손을 떼겠다 선언했고 투자를 백지화시켰다.
이후로도 라리안 스튜디오는 자신들에게 투자해줄 유통사를 찾아 헤맸다. 그 결과 독일 개발업체인 애틱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와 공동 개발하는 조건으로 ‘언리스: 더 트레처리 오브 데스’를 계속 개발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게임 이름은 ‘더 레이디, 더 메이지 앤 더 나이트(The Lady, the Mage and the Knight)’로 바뀌었다. 여기에 독일 TRPG ‘더 다크 아이즈’ IP를 사용하는 등 많은 외부 개입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더 레이디, 더 메이지, 더 나이트’ 역시 중도에 유통사의 불화로 개발이 취소되고 말았다. 1997년 출시된 블리자드의 디아블로가 큰 성공을 거두자, 독일 개발업체와 유통사가 게임을 디아블로처럼 다시 만들자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개발할 여유가 없던 라리안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프로젝트는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결국 라리안 스튜디오는 직원들 월급이라도 챙겨주기 위해 당장 돈이 될 만한 소규모 게임이나 교육 소프트웨어를 만들며 버텼다. 그러던 1999년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서든 스트라이크를 유통해 큰 돈을 쥔 CDV라는 독일 회사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다만 ‘더 레이디, 더 메이지, 더 나이트’ 라는 이름은 브랜드 권리 문제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에 또 한 번 게임 이름을 바꾸어야 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디비니티: 더 소드 오브 라이즈(Divinity: the Sword of Lies)’였다.
그러나 CDV 역시 라리안에게 그리 우호적인 파트너는 아니었다. 이들도 게임 개발과 홍보에 있어 여러 황당한 요구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CDV는 서든 스트라이크가 ‘S.S.’로 불린 것처럼 똑 같은 앞 글자 두 개가 이어지는 게임 이름을 원했고, 게임 이름을 ‘디바인 디비니티’로 바꾸길 원했다. ‘D.D.’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또한 CDV는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게임과 상관없는 헐벗은 금발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기도 했다.
철저한 을이었던 라리안은 이러한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실 이 정도는 약과였다. 적절한 투자를 받지 못해 개발 도중에 정리해고까지 단행해야 했던 것이다. 30명으로 시작한 디바인 디비니티 개발팀은 스벤 빈케 본인을 포함해 3명으로 확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CDV는 게임을 예정보다 6개월이나 빨리 출시하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해외 웹진 게임인포머와의 인터뷰에서 빈케는 그 시기가 가장 끔찍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벤 빈케와 단 두 명 남은 개발자는 악전고투 끝에 게임을 완성했다. 그렇게 디바인 디비니티는 세 번 기획이 바뀌고 유통사도 바뀌는 고난 끝에 2002년 간신히 출시될 수 있었다. 빈케는 디바인 디비니티가 언리스: 더 트레처리 오브 데스와 더 레이디, 더 메이지 앤 더 나이트를 계승한다고 했으니, 사실상 6년의 방황 끝에 만들어진 게임인 셈이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에 출시 직후 빈케는 게임 개발을 그만 두고 회사 문을 닫을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게임은 출시됐고 어느 정도 수입도 나왔다. 여유가 생기자 스벤 빈케는 더 나은 게임을 만들고 싶어졌다. 사실 디바인 디비니티는 금전적인 문제로 오랜 세월 방황한 끝에 많은 제약 속에서 급히 만들어낸 게임이었다. 보다 안정된 상황에서라면 훨씬 더 완성도 높고 그럴 듯한 게임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그는 추가로 개발자를 채용해 11명으로 구성된 팀을 만들었고, 디비니티 시리즈 제작을 본격화했다.
디비니티 시리즈 첫 세 게임, 전부 장르가 다르다?
앞서 디비니티 시리즈가 어떤 배경 속에서 시작됐는지를 간단하게 짚어보았으니, 이번에는 이 시리즈가 어떤 내용인지 확인해보자. 시리즈 첫 게임 디바인 디비니티가 제작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게임은 라리안 입장에서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라리안은 후속 게임들을 계속 다른 장르로 만들며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그 결과 디비니티 시리즈의 처음 세 게임은 전부 다른 장르로 제작되는 묘한 결과가 나왔다.
첫 게임인 디바인 디비니티는 디아블로 2와 비슷해 보이는 아이소메트릭 시점과 인터페이스 탓에 출시 당시 디아블로 아류라는 오해를 받았다. 하필 이 게임이 출시된 2002년이 디아블로 2: 파괴의 군주가 RPG 시장을 거의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 달리 디바인 디비니티는 디아블로 시리즈와 큰 차이가 몇 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전투와 아이템 수집에 중점을 둔 디아블로와 달리, 선택지와 퀘스트 수행 방식에 따라 스토리가 바뀐다는 점이었다.
디바인 디비니티의 스토리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게임은 ‘리벨론’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시작한다. 이 세계는 과거 사악한 흑마술사에 의해 악마에게 팔아 넘겨질 뻔했지만, 이른바 ‘칠인회’라는 이들이 나타나 스스로를 희생해 구원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게임 시작 시점에는 다시 한 번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무명의 주인공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억을 잃은 채 한 마을에서 깨어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와 정치적 음모 등을 몇 번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실은 자신이 리벨론을 다시금 악마에게서 구하기 위해 지상에 강림한 신성한 반신적 존재 ‘디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이미 인간들의 배후에서 암약 중인 ‘거짓의 악마’가 광신도들을 모아 디바인에 대적할 최강의 악마 군주 ‘케이어스’를 소환할 준비를 하고 있음도 확인한다. 결국 주인공은 새 칠인회의 도움을 받아 디바인으로 각성하고, 숙적 거짓의 악마와 일전을 치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디바인 디비니티 줄거리는 전통적이라면 전통적이고, 범상하다면 범상한 이야기다. 다만 이 게임의 강점은 메인 스토리가 아니라 다양한 서브 스토리에 있다. 서브 퀘스트마다 다양한 선택지가 제공될 뿐 아니라 같은 퀘스트도 전투, 대화, 도둑질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사실 디아블로 보다는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전체적인 완성도는 약간 낮았지만, 디아블로 느낌 전투 시스템과 발더스 게이트를 연상시키는 방대한 퀘스트 선택지를 조합한 구성은 차츰 컬트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에 라리안 스튜디오는 회사의 세를 가다듬고 2004년 확장팩 ‘비욘드 디비니티’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게임은 전작에서 20년 후 한 성기사가 사악한 마법사를 쫓다 악마의 저주를 받아 죽음의 기사가 되고, 이 저주를 풀기 위해 또 다른 성기사와 함께 모험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디바인 디비니티와 비욘드 디비니티는 둘 다 메타크리틱스 기준 70~80점에 해당하는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시간이 흐르며 이 게임은 디아블로 아류라는 오명을 조금 벗어내며 나름 팬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발판으로 라리안 스튜디오는 2009년, 후속작 ‘디바인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를 출시했다. 디바인 디비니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원만한 과정 속에서 제작한 게임이었다.
그런데, 디바인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는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었다. 디아블로와 발더스 게이트를 떠올리게 했던 데 반해, 이 게임은 마치 위쳐나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 가까워 보였다. 카메라 시점이나 인터페이스는 물론이고, 게임 구성도 크게 변화해 전작 팬들은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면 전작으로부터 수십 년 후를 배경으로 한다. 전작 주인공은 악마 군주 케이어스가 강림할 그릇으로 선택된 아기인 데미안을 구해 아들처럼 키웠다. 그러나 악마를 섬기는 광신도 ‘검은 결사’는 매혹적인 여성 마법사 ‘이그레인’을 보내 데미안을 유혹해 내면의 악을 깨우고자 했다. 이에 디바인은 이그레인을 붙잡아 참수했지만, 이로 인해 데미안은 디바인에게 직접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리벨론의 여러 왕국은 반신 디바인과 악마 군주의 숙주 데미안 파벌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고대 드래곤의 힘을 받은 ‘드래곤 나이트’들은 처음에는 디바인 측에 가세했지만, 이후 디바인을 배신해 암살하는 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게임 시작 시점에 드래곤 나이트들은 디바인의 충실한 성기사로 이루어진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사냥 당해 거의 전멸한 상태다.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의 주인공은 바로 이 신입 드래곤 슬레이어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주인공은 심한 부상을 입은 최후의 드래곤 나이트를 만나고, 우연한 과정을 통해 그 드래곤 나이트의 힘을 흡수하게 된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드래곤 나이트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탓에 주인공은 동료들에게 쫓기며 자신이 드래곤 나이트가 되어야 했던 이유와, 과거 드래곤 나이트들에게 씌워진 음모를 파악하고, 외차원에 감금된 전작 주인공 디바인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는 전작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다양한 스토리 선택지와 퀘스트 수행 방식을 진화시켜 계승했다. 선택지에 따라 메인 스토리까지 다소 다르게 진행되는 등,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실제 게임 플레이가 달라지도록 해 플레이어가 게임 스토리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보다 확대했다.
이후, 2013년 나온 세 번째 게임은 또 장르가 바뀌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RPG조차 아니라 아예 RTS가 됐다. 디비니티 시리즈의 세 번째 게임인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는 디바인 디비니티로부터 약 8,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문명을 배경으로 삼았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악마의 음모로 황제가 서거하고 여러 후계자들에게 찢겨 나가는 중인 제국에서, 황제의 마지막 사생아이자 드래곤의 피가 섞인 영웅이 되어 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황제가 되어야 했다.
독특한 점은 게임 장르가 RTS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이 게임 스토리에 반영되는 시스템을 또다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드래곤 커맨더는 전투 시작 전에 몇 번 정치적 단계를 거친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여러 종족, 왕국, 조직에서 온 특사나 동맹들과 대화하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자원 및 기술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 다음 어느 지역을 놓고 누구와 싸울지를 턴 기반 전략 게임처럼 정한 후에 비로소 RTS 전투가 시작되는 식이었다. 정치, 영토전, RTS를 잘 섞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나름 주목받은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지만, 큰 상업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디비니티 3부작을 거치며 라리안 스튜디오의 명성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어떤 게임을 내놔도 준수한 게임성을 보장하고, 플레이어 선택이 흥미로운 게임 시스템을 통해 스토리에 반영되게 한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라리안은 착실히 회사 규모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라리안 스튜디오는 슬슬 디비니티 시리즈가 아닌 다른 게임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벤 빈케가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으면서, 라리안은 지금까지 쌓아온 디비니티의 명성을 계속 이어 가기로 했다. 그 모델은 바로 크라우드펀딩이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개화한 라리안 스튜디오의 잠재성, 그리고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북미와 유럽에서는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킥스타터를 필두로 한 크라우드펀딩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크라우드펀딩은 창작자가 거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끔 해주는 후원 플랫폼의 역할을 한다. 옛날부터 자본 문제로 고통받아온 독립 개발자 스벤 빈케가 크라우드펀딩을 주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본래 라리안 스튜디오는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 이후 슬슬 새로운 브랜드를 개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을 모은다면 거대 유통사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들자, 라리안은 다시 한 번 디비니티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쌓은 디비니티의 명성과 신뢰도라면 충분히 크라우드펀딩으로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라리안은 2013년 3월 시작된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으로 신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개발 비용 일부에 대한 모금을 시작했다. 당초 라리안은 40만 달러를 모금할 예정이었지만, 한 달 간 그 두 배를 훌쩍 넘은 95만 달러가 모였다. 킥스타터가 아닌 별개 후원도 들어와 최종 모금액은 1백만 달러(약 12억 원)에 달했다. 이에 고무된 라리안은 즉시 개발에 착수, 이듬해인 2015년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출시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지난 시리즈가 대체로 그러했듯, 전작과의 연계성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게임은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와 디바인 디비니티 사이의 어느 시점이지만, 줄거리상 주요 소재가 되는 원초적 힘인 ‘근원(Source)’은 거의 새로 조명된 설정이었다. 본래 ‘근원’은 리벨론을 창조했던 태초의 힘이지만 어떤 외계의 존재가 침략할 때 오염됐고, 이제는 ‘근원’를 끌어내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위험한 인물로 간주돼 사냥 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의 주인공은 이러한 ‘근원술사’를 사냥하는 두 명의 ‘근원 사냥꾼’이다. 게임이 시작할 때 플레이어는 두 주인공의 상세 사항을 설정할 수 있고, 실제 게임도 이 두 주인공이 주요 분기점에서 서로 대화하며 쌓은 관계에 따라 스토리와 결말이 달라진다. 시놉시스는 근원술사들이 일으킨 사건을 두 근원 사냥꾼이 쫓아 전말을 파헤친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세부 스토리는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내러티브가 달라진다.
이 게임은 초기에만 해도 많은 버그와 크라우드펀딩 당시 언급한 일부 요소 미구현으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몇 해에 걸친 피드백과 패치로 해결하고 풍부한 읽을 거리와 선택지를 통해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제공하는 RPG로 극찬받았다. 라리안의 신뢰도 역시 더욱 높아졌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2019년까지 250만 장이 판매됐고, 이 수익으로 라리안은 오랜 빚더미에서 해방됐다.
라리안은 이 기세를 몰아 바로 다음 작품 제작에 돌입했다. 2014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2015년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을 개시한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가 그 주인공이었다. 다만 이 게임도 시리즈 전통대로 전작인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과 깊은 관계가 있지는 않았다. ‘근원’이라는 소재를 이야기 중심에 두었을 뿐, 줄거리는 시리즈 첫 작품 디바인 디비니티와 더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게임성 면에서 전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대신 게임 플레이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다양한 요소가 추가되고 그래픽과 오디오에서 큰 향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게임에서 각 캐릭터는 자신의 기원(Origin)을 정할 수 있는데, 그에 따라 게임 곳곳에서 자기 과거와 관계된 NPC들을 만나고 고유한 이벤트가 발생한다. 또한 캐릭터 동기와 목표도 저마다 기본적으로 다르게 설정됐기에 플레이어가 이입해 즐길 여지도 더욱 늘어났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디바인 디비니티 주인공이 반신이 되어 검은 결사의 음모를 막은 후 일어나는 일을 다뤘다. 시기상 디바인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 이전이기 때문에 디바인은 드래곤 나이트에게 암살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친자인 알렉산더’가 주교가 된 상황이다. 디바인의 사망 이후 리벨론에는 여러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근원’의 힘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에 알렉산더는 각지의 근원술사를 모두 잡아들이도록 지시한다.
게임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알렉산더 휘하 병사들에게 체포된 네 근원술사를 주인공으로 한다. 즉 이번에는 주인공이 네 명인 셈이다. 게임이 진행되며 주인공들은 죄수를 호송하던 배가 공허의 괴물에게 난파당해 가까스로 탈출하게 되며, 이후 세상에서 ‘근원’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물론 신들이 힘을 잃고 있다는 비밀까지 알게 된다. 종국에 주인공들은 신들을 대신해 ‘리벨론’의 운명을 영원히 결정하게 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전작에 비해 한층 더 흥미진진해진 줄거리에 더해서, 캐릭터에게 이입하게 해주는 각종 시스템을 다수 추가해 높은 인기를 얻었다. 전문가들도 이 게임을 우수한 퀘스트 디자인과 풍부한 선택지 덕에 여러 번 다시 플레이 할 가치가 있다고 극찬했는데, 이는 다양한 요소와 선택의 중첩이 기하급수적으로 다양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였다. 그 결과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다수의 ‘최고 내러티브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이 게임은 상업적으로도 여태껏 라리안 스튜디오가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 2019년까지 약 300만 장 이상 판매됐는데, 이는 기존 최고 수익을 올린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훨씬 앞지른 수치였다. 이에 라리안은 또 한 번 디비니티를 제작할 계획이었고, 아예 ‘디비니티: 폴른 히어로즈’라는 이름까지 정해 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예상치 못한 제안이 들어와 이 게임은 개발이 취소된다. 다름아닌 발더스 게이트 3 제작을 맡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라리안 스튜디오와 디비니티 시리즈가 걸어온 길: 다양한 장르, 한 가지 철학
사실 디비니티 시리즈를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앞서 본 것처럼 시작은 실시간 ARPG였고, 그 다음은 위쳐 스타일로 제작됐으며, 턴 기반 RPG나 복합적 RTS 장르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디비니티 시리즈를 장르나 게임 형식에 따라 정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시리즈를 관통하는 철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스토리와 시스템의 조화다.
스벤 빈케는 게임 웹진 록 페이퍼 샷건과의 인터뷰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행한 행동이 게임 내에서 의미를 띄게 된 것을 깨달을 될 때 보상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스토리 중심 게임들이 스토리 전개를 위해 플레이어의 선택이나 존재를 옆으로 미뤄두는 경우가 많다. 디비니티 시리즈는 이러한 방식을 거부했다. 이 시리즈가 보여준 지향점은 늘 플레이어가 스토리에 뛰어들어 이입하고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플레이어를 스토리에 뛰어들게 만들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인터뷰에서, 스벤 빈케는 그 해답이 게임 시스템에 있다고 말했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정밀하고 상세히 만들고, 다양한 행동 지시가 가능하고, 여러 선택지가 있을수록, 그리고 그 행동들이 게임 내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수록 자유도가 높아지고 몰입도도 증대된다는 이야기다. 지금껏 디비니티 시리즈는 그러한 기준에 늘 완벽히 부응해온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지향점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철학 덕에 디비니티 시리즈는 ‘작은 벨기에 회사에서 만든 디아블로 아류 게임’이라는 오명을 벗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리고 라리안 스튜디오의 이러한 철학은 이들을 발더스 게이트 3 제작사로 선정되게 하기도 했다. [세계기행] 다음 편에서는 발더스 게이트에 대해 다루며, 이들의 어떤 점이 발더스 게이트라는 브랜드와 맞아떨어진 것인지 확인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