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힐F 분석 칼럼-5 : 츠네키 고토유키, 좁은 문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사일런트힐F 4회차를 플레이하며 즐겁게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되었군요. 다만, 아직 제가 할수 있는 일이 하나 남은 것 같습니다. 바로 남겨두는 일 말이죠.
여러분들은 사일런트힐F의 스토리를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이 게임의 스토리는 '해석의 여지'라는 말을 아주 폭넓게 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스토리를 해석하는 과정이 없으면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죠. 아무 생각하지 않고 진행하면 이야기의 앞뒤가 하나도 안 맞으니까요. 제작진들은 일부러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했으며, 엔딩 역시 각자가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하며 각자의 정답을 찾아 안개 속을 헤매이게 되었죠. 물론 저도 그 헤매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요.
그리고 이제, 저는 4회차 플레이를 통해 저 나름의 답을 찾아냈고, 제가 찾은 답을 정리해 이곳에 남겨두려 합니다. 제가 게임을 하며 찾아냈던 것, 해석했던 것, 그리고 고찰했던 것에 대해 정리해 남겨두는 이 몇 개의 칼럼은 사일런트힐F에게 바치는 제 작별 인사이며, 이 커뮤니티의 다른 분들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하기 위해 작성했던 글이며, 영어로 썼던 글을 다시 한국어로 수정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이제 본론인 "사일런트힐F 분석 칼럼-5: 츠네키 고토유키, 좁은 문”편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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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완전함의 불완전성
2. 문제를 숨기는 방식의 문제
3. 사랑의 형태
4. 주인공이 아닌 인물의 주인공 서사
5. 좁은 문의 너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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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전함의 불완전성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드나드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소해 찾는 이가 적음이니."
- 마태복음 7장 13, 14절
창작물을 처음 만들어보는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대표적인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을 너무 완벽한 캐릭터로 설정하는 것이죠. 사실, 창작물의 주인공이란 결국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모습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밸런스를 잡지 않으면 '완벽한 주인공'을 만들어내기 십상입니다.
완벽한 주인공을 만드는 것이 왜 실수일까요? 완벽한 주인공이 그 자체로 나쁘다기보다는, 그 주인공을 서사적으로 활용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슈퍼맨을 생각해봅시다. 슈퍼맨은 너무 완벽해서 활용하기가 어려운 대표적인 캐릭터입니다. 마음이 너무 정의롭고 올곧기 때문에 내면심리를 조명하기 어렵고, 힘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타락하는 스토리를 쓰기도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적은 슈퍼맨에 비해 너무나도 약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조성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슈퍼맨보다 강한 적을 등장시키려니 그 적의 강함, 슈퍼맨조차 뛰어넘는 강함을 묘사하기가 너무 어렵죠.
심지어 현실에서는 슈퍼맨 말고 다른 히어로까지 같이 있기 때문에, 슈퍼맨은 항상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슈퍼맨이 이야기 중심에 있으면 다른 히어로들이 할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슈퍼맨과 다른 히어로들이 같이 나오는 영화나 코믹스를 보면, 슈퍼맨은 대부분의 장면에서 크립토나이트에 묶여있거나, 주변사람들이 위협당하고 있거나, 더 강력한 적과 어디 멀리서 싸우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어요. 그러다보니 슈퍼맨의 스토리 자체가 어느 정도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슈퍼맨이 악당을 가볍게 때려잡는 이야기, 혹은 날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구하는 이야기 뿐인데, 그건 한두번 보면 금방 질리는 식상한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능숙한 스토리텔러일수록 주인공이 너무 완벽하지 않게, 여러 약점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배트맨은 불살의 신념을 지키기 때문에 매력이 있지만, 역으로 그 불살의 신념 때문에 수많은 딜레마에 직면하고, 수없이 위험에 빠지죠. 아이언맨은 그가 등장하는 어떤 영화에서든, 반드시 그 강철 갑옷이 작살나서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배트맨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약점, 아이언맨이 갑옷 없이는 일반인이라는 약점이 그들의 매력을 감소시키나요? 아니오,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인간적인 매력, 고통과 고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서사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어주고, 그래서 그들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약점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최고의 인기 캐릭터들인 것입니다.
< 급급여율령! >
자, 사일런트힐F의 고토유키를 봅시다. 고토유키의 약점, 혹은 단점이 뭐죠? 게임 내에서 고토유키라는 사람에 대해 주어지는 정보를 취합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대단한 부잣집의 후계자, 그것도 사생아인데도 불구하고 출신과 광견병을 이겨내고 후계자가 되었음.
2. 돈많음, 히나코네 빚도 단박에 갚아줬음.
3. 성격좋음, 항상 히나코를 우선시해서 생각하고, 히나코가 무슨 바보짓을 해도 이해해줌.
4. 아는것도 많음, 히나코에게 자세히 설명해줌, 히나코가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지만.
5. 오직 히나코만 바라봄, 몇년간 꾸준히 히나코에게 구애한 순정남.
6. 몇년간 꾸준히 구애한 끝에 마침내 히나코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 결혼식장에서 히나코가 징징대니까 바로 파혼해줌.
7. 얼굴 잘생김.
8. 키도 큼.
9. 목소리 섹시함.
10. 필살기 급급여율령을 쓸수있음. + 포즈가 멋짐.
전체적으로, 무슨 여성향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평범한 여자주인공에게 홀딱 반해 구애하는 미목수려한 재벌집 후계자'같은 설정만 잔뜩 모여있죠. 그러다보니, 고토유키 근처만 가면 이야기가 늘어져요. 약점이 없으니까 제대로 된 이야기도 없고, 히나코를 너무 사랑하니까 갈등도 없고, 시미즈 씨나 슈와는 급이 너무 다르니까 서로 얽히지도 않습니다. 결국 그가 게임 내내 하는 일이라고는 히나코를 토닥이면서 뭔지도 모를 설명만 잔뜩 해주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다크 쉬라인 파트는 에비스가오카 파트보다 훨씬 지루하죠.
2. 문제를 숨기는 방식의 문제
문제는, 이런 고토유키의 '불완전한 완벽함'이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게임 내에서 고토유키는 완벽하지 않은 부분, 그러니까 악행을 저지르는 듯한 부분이 두 군데 있어요.
< 세뇌광선 발사(왼쪽) / 그놈의 약(오른쪽) >
먼저 테미즈야에서 고토유키가 히나코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을 보면, 히나코의 머릿속에 지잉-하는 종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히나코의 표정이 갑자기 약을 한사발 들이킨 것처럼 변합니다. 원래 그녀는 심각한 수준의 약물 중독자임에도 불구하고 인지 능력에는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저 장면에서 고토유키에게 쓰담쓰담을 당한 후부터는 마치 좀비처럼 멍하고 느릿느릿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저 장면은 고토유키가 세놔광선, 저주파, 주술 등 뭐가 됬든간에 아무튼 뭔가 좋지 않은 것을 사용해 히나코를 조종한 장면이거나, 혹은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분명히 존재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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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여우의 혼례식 엔딩에서만 볼 수 있는 '약병'도 있습니다. 저 약병은 여우가면 히나코와 쇠빠따 히나코가 마치 자우스트를 하듯이 서로 마주보고 돌진해서 일격을 교환한 직후 튕겨나와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건입니다. 그 직후 고토유키가 달려가 저 약병을 주워 여우가면 히나코에게 먹이는데, 여우가면 히나코가 저 약을 마시자 갑자기 쇠빠따 히나코가 덜덜 떨면서 몸을 기괴하게 비틀어 꺾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더니 악령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려요. 그리고 고토유키는 그 히나코를 마귀라 부르며 주술로 소멸시키죠.
아주 좋게 해석할 경우, 저 약이 슈가 먹였던 ㅁㅇ의 해독제라서 쇠빠따 히나코가 사라졌다고 볼 여지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쇠빠따 히나코가 퇴치당하기 직전 마치 고장난 인형마냥 비명을 지르고 몸을 꺾어대며 고통스러워했던 점, 그리고 그 엔딩의 마지막 장면이 계단참에서 울부짖던 히나코의 얼굴이 박살나는 모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리봐도 그리 좋은 약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사적으로 보면, 슈의 ㅁㅇ 반대편에 있는 또다른 ㅁㅇ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사일런트힐 엔딩에서 슈의 ㅁㅇ으로 태어난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의 대척점에 여우가면 히나코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장면에서 가차없이 퇴치당하는 쇠빠따 히나코,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는 애초에 마귀나 악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ㅁㅇ으로 인해 분리되었을 뿐, 그녀는 진짜 히나코의 일면, 또 하나의 히나코니까요. 그런 히나코를 가차없이 퇴치하는 고토유키의 모습은, 마치 고토유키와 결혼하는 히나코를 인정하지 못해 ㅁㅇ으로 없애려 들던 슈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니까, 원래 기획은 고토유키 또한 슈처럼 히나코를 자기 마음대로 편집하고 재단해서 소유하려 했다는 식의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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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서사적으로 검토해보면 저 두 부분이 고토유키의 어두운 부분, 악행으로 구성된 점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슈의 대척점으로써 고토유키가 가지는 특성, 히나코가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로써의 요소 말이죠.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저 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축소되어있어요. 저 두 가지 부분과 연관되는 컷신, 대사, 메모 쪼가리, 기타 어떤 정보도 없고, 등장 장면에서조차 크게 부각되지 않고 단 몇초만에 휙 하고 지나가버리니까요.
심지어 고토유키가 히나코를 홀리려는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는 사일런트힐 엔딩에서도, 그 홀림은 어디까지나 여우신의 의지고 고토유키의 의도가 아니라는 식으로 처리됩니다. 죄를 저지르기도 전에 면죄부부터 받고 있는 꼴이에요. 이런 식으로 지나친 편애, 지나친 두둔을 받다보니,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잘못을 저지르는 전체 스토리에서 고토유키만 붕 떠버리는 간극이 발생하고, 그 간극 때문에 오히려 전체 스토리가 설득력과 완성도를 잃어버립니다. 그 어처구니 없는 피스트 범프 장면이 대표적이죠.
3. 사랑의 형태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 알리사, 좁은 문
고토유키는 대체 왜 그렇게 편애받았을까요? 제 생각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은 제작진 중 상당히 강력한 누군가가 고토유키에게 지나치게 과몰입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거말고는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창작자가 특정 캐릭터에 과몰입해서 그 캐릭터를 신격화하는 일은 굉장히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거기에 더해 그 신격화 때문에 캐릭터가 오히려 애매해지거나, 창작물 전체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일도 드물지 않죠.
앞서 짚었듯 게임 내에서 고토유키는 지나칠 정도로 좋은 장면만 나오고, 나쁜 장면은 축소되거나 힐끗 지나가버리다보니 뭐라 말하기 애매한 무색무취한 캐릭터가 되어버려요. '되게 잘난 부잣집 아들' 같은 식이죠. 여성향 창작물에서, 저 되게 잘난 부잣집 아들은 보통 싸가지없는 잘난 천재나 비뚤어진 나쁜놈에게 여주인공을 뺏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착하고 순해서 독자에게 매력어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사실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죠. 지나치게 착하기만 한 사람은 순식간에 이용만 당하는 호구가 되니까. 이 게임 내에서의 고토유키도 딱 그짝입니다. 잘나고 멋지고 잘생기기는 한데,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없어요.
그리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고토유키는 대부분의 엔딩에서 피해자가 됩니다. 자업자득 엔딩에서 그는 히나코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죠. 히나코가 쇠빠따로 머리를 후려쳤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호유기미 엔딩에서는 '되게 잘난 부잣집 아들'처럼 히나코를 슈에게 보내줘버려요. 사일런트힐 엔딩에서는 히나코의 징징거림을 받아들여 파혼해주고, 그 리스크를 혼자 떠앉습니다. 그 점을 생각해보면, 사실 굉장히 불쌍한 캐릭터에요.
4. 주인공이 아닌 인물의 주인공 서사
이 게임의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성차별이라는 테마를 핵심으로 삼아, 각 인물들의 지류가 그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얽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핵심 주제 이외에도 각 인물별로 서브 테마도 있죠. 그중 모든 등장인물이 얽혀있는 서브 테마도 하나 있는데, 바로 전통과 발전의 대립입니다. 이 게임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해당 주제에 대해 각자의 주장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어요.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A) 전통 긍정파(발전 부정파)
- 시미즈 여사: 완전한 전통복장, 전통적인 가치인 '남편에게 순종적인 여성', 한방약을 주문하며 양약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함
- 준코: 완전한 전통복장, 히나코 세대에서 유일하게 전통적 가치인 '결혼과 출산'을 모두 경험한 인물
- 사쿠코 : 쇠락해가는 전통, 가문의 신사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소녀
- 린코: 그녀의 우월감과 선민 의식의 원천은 그녀가 마을에서 제일 큰 부잣집의 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됨
B) 발전 긍정파(전통 부정파)
- 히나코: 가부장이라는 전통적인 제도를 거부함, 결혼에 대한 반발심
- 슈: 전통적인 약학과 사회 규범 및 법도를 쿨하게 무시하고 뒷마당 텃밭에서 캔 성분으로 ㅁㅇ을 만들어 배포
C) 중도파
- 시미즈 씨: 서양식 복장인 셔츠 위에 전통 복장인 하오리풍 재킷, 일본 전통주와 서양식 맥주를 동시에 마시고 있음
게임의 전체 스토리에서, 위의 인물들은 전통과 발전에 대한 입장이 바뀌지 않습니다. 처음에 나온 그대로 엔딩까지 가요. 그나마 마지막 엔딩인 사일런트힐 엔딩에서 히나코가 '나중에는 결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볼수도 있다'는 식으로 입장 변화가 미약하게 암시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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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인공이 아닌 붕 떠 있는 캐릭터, 고토유키의 입장은 어떨까요? 그는 게임 막바지까지 명백하게 전통 긍정파입니다. 입은 옷부터 하는 행동거지 일체, 말, 게임 내에서 그가 행하는 모든 과정이 전통 그 자체니까요.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사일런트힐 엔딩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로 전통을 거부하고 결혼식을 파토내버리죠. 그리고 그 행동에 감명받은 히나코는 고토유키를 동경하게 됩니다.
제 생각에, 스토리를 쓴 사람은 그 부분을 구성하면서 주인공 히나코보다 고토유키에게 심하게 감정이입한 것 같아요. 멋지고, 잘생기고, 배려심 넘치는 섹시가이가 여성을 속박에서 구해주고 동경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죠. 자신의 신념까지 꺾어가면서. 그야말로 주인공에게 어울릴법한 성장 서사죠.
다만 그 지점에는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고토유키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토유키의 고결한 행동은 멋졌지만, 바로 그 때문에 히나코의 정당성이 사라져버려요. 결국 최종적으로 히나코는 '백마탄 왕자에게 구해지는 공주'가 되버리니까요. 심지어 디즈니 공주들은 최종적으로는 백마탄 왕자에게 구해지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활약도 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히나코는 그조차 없어요.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고토유키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내 대답을 기다려달라"라면서 징징댄 것 뿐입니다. 앞서 짚은 부분들처럼, 이 부분도 지나친 고토유키 편애 때문에 전체 스토리의 설득력과 완성도가 망가진 부분입니다.
5. 좁은 문의 너머에서
"나는 평생을 그 좁은 문 앞에 서 있었다."
- 제롬, 좁은 문
결국 고토유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부잣집 도련님과 하녀가 벌인 불장난, 부도덕한 불륜의 결과물로서 세상에 태어났고, 어머니와 함께 가문에서 쫒겨났으며, 여우에게 물려 광견병 증상을 보이던 버려진 아이, 서글픈 외톨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우에게서 자신을 구해낸 히나코에게 사랑을 품었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러 상황으로 얻어진 기회를 붙잡아 출신과 과거를 이겨내고 츠네키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죠. 말 그대로로 의지와 노력의 화신입니다.
또한 그는 사랑의 성취를 위해 히나코에게 연단위로 꾸준히 구애했음에도, 히나코가 결혼식 당일에 한참 결혼식을 진행하다가 갑자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징징대자 주저없이 결혼을 파혼해버리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뭇 여성들이 꿈꿀법한 스윗가이 그 자체죠.
이렇게 배경만 설명하면 그는 정말로 주인공에 어울릴법한 멋진 사람이죠. 하지만 그는 이 게임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그가 받은 여러 서사적 편애는 오히려 그의 입장을 무너뜨렸으며, 최종적으로는 그를 고귀한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함께 망가져버린 게임의 스토리는 덤이고.
결국, 그토록 노력해서 좁은 문을 통과했으나, 끝내 구원을 얻지는 못한거죠. 정말이지, 씁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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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위의 해석은 '완전한 정답'이나 '유일한 해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작진들은 이 게임의 스토리가 여러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구성했다고 이미 밝혔어요. 그래서 게임의 수많은 요소들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도록' 굉장히 애매하게 짜여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 제가 해석한 것들은 그 애매한 것들 중 제가 마음에 드는 몇 가지를 골라내어 짜맞춘 결과물일 뿐, 정답이 아니에요. 말투도 굉장히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매번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를 붙이자니 글이 너무 난잡해져서 잘라낸 거고요.
그러니, 위 해석 또한 읽으시는 분 각자의 '정답'을 찾는 과정에서 재미로 읽어볼만한 여러 생각 중 하나로 여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한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고, 각자가 내린 결론이 진실입니다. 제 생각에, 스토리 짠 사람 포함해서 제작진 대부분(혹은 전부)도 하나의 완벽한 정답 같은건 모를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의 일관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못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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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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