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의통화량 3092조… 2020년 165조나 늘어
넘쳐나는 돈, 부동산·주식 등에 ‘쏠림’
美 등 주요국도 코로나로 ‘돈 풀기’ 경쟁
경기 부양 대신 ‘저물가·저성장’ 나타나
중기·소상공인들 ‘돈 가뭄’
통화유통속도 지속적 하락… 0.61로 ‘뚝’
생산·투자·소비 늘지않는 ‘유동성 함정’
부 불평등 심화… 자산버블 터질 위험도
정부, 기업 투자 유인 근본책 강구해야
◆통화량 늘어도 돌지 않는 돈
18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7월 말 광의통화량(M2·평균 잔액)은 3092조7800억원이다. M2는 현금과 요구불예금, 머니마켓펀드(MMF) 등 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금융상품을 포함한다. 시중 통화량을 보는 주요 지표다.
올해 1월 2927조4500억원이던 M2는 7월까지 약 165조원 늘었다. 코로나19가 본격화한 2월부터 따지면 136조원이다. 연간 M2 증가량이 2018년 156조원, 2019년 183조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올해 풀린 막대한 돈을 짐작할 수 있다.
통화량은 늘었는데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은 여전히 ‘돈 가뭄’으로 아우성이다. 반면 자산가격은 넘쳐나는 유동성에 비이성적으로 치솟고 있다. 돈이 돌지 않는 현상은 통화유통속도에서도 확인된다.
2016·2017년 0.68이던 통화유통속도(연말 잔액 기준)는 지난해 1분기 0.69까지 올라갔으나 올해 1분기 0.63으로 내려앉았다. 2분기에는 0.61로 뚝 떨어졌다. 통화유통속도는 화폐 1단위가 얼마나 부가가치를 생산했는지 보여주는 가늠자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M2로 나눠 구한다. 통화유통속도 하락은 돈을 투입해도 국내총생산(GDP) 증가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뜻한다. 일부에서는 한국 경제가 유동성이 넘쳐도 생산·투자·소비가 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넘쳐나는 돈… 가보지 않은 길
올해 한국뿐 아니라 주요 선진국에서 일제히 유동성이 급증했다. 대신증권과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 주요국의 통화공급(M2)을 나타내는 블룸버그 글로벌 통화공급지수는 올 7월 87조달러(약 10경2330조원)에 달했다. 이 지수는 지난 3월부터 5개월 연속 올라 7월 증가율이 전년 동기 대비 13.2%를 기록했다.
‘무제한에 가까운 돈 풀기’를 선언한 미국의 상승세는 유독 가파르다. 2008년 금융위기로 ‘헬리콥터 머니’를 퍼부을 당시 미국의 M2 증가율은 2009년 10.29%, 2012년 10.25%였으나 올해는 단 7개월 만에 19.54%를 기록했다. 2013년 1월 10조4712억달러였던 미국의 M2는 지난 8월 1일 18조4118억달러까지 치솟았다. 게다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2023년까지 현행 0∼0.25%의 제로 금리를 유지하겠다고 지난 16일 발표했다.
세계 경제는 2008년 이후 양적 완화(QE)로 푼 돈을 미처 회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코로나19 위기를 맞았다. 미 연준의 보유자산은 2007년 1월 8700억달러에서 양적 완화를 거치며 2014년 12월 약 4조5000억달러로 불었고, 2017년까지 이 수준을 유지했다. 2017년 10월∼2019년 9월 실시한 보유자산 축소로 연준이 거둔 돈은 약 1조달러에 그친 것으로 추산된다.
양적 완화는 자산 거품으로 이어졌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2008년 돈을 풀면서 부작용으로 인플레이션을 예상했으나 오히려 저물가·저성장이라는 ‘뉴노멀’이 나타났다”며 “인플레가 없었다는 건 근본적인 경기 부양이 안 되고 풀린 자금이 자산시장으로 다 가버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미국 나스닥이 2009년 2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7.8배 상승하고 독일 집값이 2008년 이후 112% 올랐다”며 “건강한 조정이 한번 왔으면 좋았을 텐데 거품이 터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행이 2017∼2018년 통화량을 조였어야 했는데 실기했다”고 분석했다.
◆투자·소비로 ‘돈의 물꼬’ 틀 수 있을까
자산가격 급등은 불평등 심화와 부의 편중으로 이어진다. 미국 연구단체 ‘공정성장을 위한 워싱턴 센터’는 최근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연준에 따르면 미국 상위 1% 가구가 주식과 뮤추얼펀드의 39%, 상위 10%가 83%를 가졌지만 하위 90%는 17%만 보유 중”이라며 올해 주가 상승의 과실이 부유층에 편중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유동성에 힘입은 자산가격 거품은 불시에 터질 위험이 있다는 것도 문제다. 안 교수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자산가격이 횡보하는 사이 실물경제가 올라와 격차가 좁혀지는 ‘연착륙’”이라고 말했다.
정부 역시 ‘돈의 물꼬’를 부동산 투기가 아닌 생산적 투자로 흐르도록 고심 중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금융권의 대출·투자는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한 ‘돈 되는’ 영역에 몰릴 수밖에 없다. 결국 현금 여력이 있는 기업의 투자가 살아나야 한다. 안 교수는 “불확실성이 크니 실물경제로 돈이 흘러가지 않는다”며 “정부가 기업을 모아놓고 투자를 꺼리는 원인이 무엇인지 전면적으로 파악해 규제를 없애는 등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단 정부가 꺼내 든 카드는 ‘뉴딜펀드’와 대기업 벤처캐피털(CVC) 허용이다. 그러나 뉴딜펀드는 수익을 낼 투자처 발굴이 쉽지 않다는 점, 시장 효율에 맡겨야 할 투자대상 선택을 정부가 한다는 점에서 벌써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
◆“돈 무제한 찍어도 괜찮아”… 코로나시대 재조명 받는 MMT
“정부 지출이 세수를 초과할 수 없다고? 아니다. 세금을 거둬야만 지출을 할 수 있다는 통념은 잘못됐다. 중앙은행이 돈을 발행해 부채를 갚을 수 있기 때문에 재정적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주류였던 현대화폐이론(MMT)이 코로나19로 재조명받고 있다. MMT는 정부가 재정적자에 얽매이지 말고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최근 각국이 공격적 돈 풀기에 나서면서 MMT가 언급되는 횟수가 늘었다.
MMT의 주장은 화폐를 보는 관점 차이에서 시작된다. 주류 경제학은 화폐가 시장에서의 가치교환을 위해 도입됐다고 여기지만 MMT는 국가가 세금을 걷는 수단으로 화폐를 발행했다고 본다. 화폐가 정부의 강제력에 기반을 둔 만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MMT가 더욱 관심을 끌고 있는 건 이 이론의 가장 큰 약점인 인플레이션이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화량이 무한정 늘면 가치가 폭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이 ‘헬리콥터 머니’를 뿌리듯 달러를 공급했음에도 인플레이션은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지난 6월 말 기준 국가부채가 20조5300만달러(약 2경3480조원)를 기록해 지난해 말보다 20% 이상 늘었지만 물가 상승률은 0%대였다.
MMT는 그나마 일본, 미국 등 기축통화국에서나 시도해볼 만한 이론이다. 환율 등 대외 변수에 취약한 한국에 적용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돈 풀기’ 유혹에 약한 정치권에서 최근 잠시 입에 오르내렸다.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에게 “추후 금리정책이 더는 실효적이지 않으면 한국형 양적 완화나 MMT도 적극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총재는 “상당히 부작용이 더 크게 보여 본격적으로 채택하는 나라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MMT의 부작용에 대해 “정부가 ‘이번에 돈 좀 써야겠다, 찍어라’하면 중앙은행은 윤전기 역할밖에 못하고 재정이 방만하게 편성될 위험이 있다”며 “그렇다고 중앙은행이 ‘우리가 찍어서 사용처도 결정하겠다’고 해도 안 되기에 중간에서 최적점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송은아·이희진 기자 sea@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IP보기클릭)211.36.***.***
(IP보기클릭)110.70.***.***
(IP보기클릭)18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