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주의 행위는 인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중국 부흥은 역사의 필연이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달 서울을 방문한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한국 내 중국 ‘우호인사’ 100명을 앞에 두고 강조한 말이다. 왕 부장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이후 4년 만의 단독 방한에서 줄곧 ‘패권주의 타파’를 강조했다. 미국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사드 사태 이후 지난해 말부터 모처럼 한·중 관계는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다. 2020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 방한은 이 같은 무드에 정점을 찍을 전망이다. 하지만 표면적 한·중 관계 개선 속에 숨겨진 더 큰 도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7일 “중국의 한·중 관계 개선 움직임은 미·중의 전략경쟁 구도 심화와 떼놓고 볼 수 없다”며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요구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한국에 손 내미는 이유는
지난해 12월 초 왕 부장 방한과 같은 달 말 청두 한·중·일 정상회의, 베이징에서의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정상회담, 그리고 시 주석의 2020년 상반기 방한까지 한·중 관계는 몇 달 새 급물살을 타고 있다. 벌써 시 주석 방한에 맞춰 ‘한한령’이 해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이 모처럼 한·중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이유에 대해 신중한 분석을 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이 중국에 ‘3불 약속’을 했지만,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 유예를 본 중국으로선 미국의 강력한 압박이 있으면 고도의 의지를 갖고 한 정책결정도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3불 약속은 중국의 사드 반발에 대해 한국 정부가 2017년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체계 참여,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동맹 참여 세 가지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말한다.
중국으로선 무역 갈등, 태평양 전략경쟁, 홍콩·신장(新疆) 인권 문제 등 곳곳에서 미·중이 부딪치면서 본격적인 미·중 패권 싸움이 시작되는 때 한국을 다시 한 번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미국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탈퇴한 뒤에는 한국에 미국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계속 나온다. 그러면서도 왕 부장 방한 다음날 중국 군용기가 바로 KADIZ(카디즈·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한 것은 중국이 한국을 포섭할 필요를 느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략적 선택 요구받는 한국
전문가들은 단순히 미·중 사이 기계적 중립으로는 사태를 헤쳐나가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취했던 ‘전략적 모호성’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은 “사드 사태에서 한국이 보인 우유부단한 태도는 동맹인 미국 내에서도 한국이 믿을 수 있는 동맹인지에 대한 문제를 야기했다”며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포지셔닝 전략’에 한국이 좀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정책적 원칙을 명확하게 세우고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지난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역내에서 이 전략이 어느 한 국가를 배제하거나 분열을 만드는 것은 반대한다고 밝혀 중국의 지지를 끌어냈다. 싱가포르와 우리가 처한 외교적 상황이 같지 않지만 우리도 우리만의 원칙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지난달 23일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정상회담 뒤 중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문 대통령이 ‘홍콩과 신장 문제가 중국의 내정’이라는 입장에 지지했다고 설명한 데 대해서는 보다 원칙적 대응을 그 자리에서 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양국 관계의 일시적 악화를 우려해 민주주의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일에 대응을 지연하면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외교부는 나흘 뒤인 27일 중국 외교부에 수정을 요청했다. 정부가 지난해 6월 외교부 내에 국장급을 반장으로 하는 ‘미·중 전략조정지원반’을 꾸렸지만 더 포괄적이고 범정부적인 대책기구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북한 문제, 한·중 관계에 영향 줄까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북한 문제다. 일부 전문가는 북·미 관계가 경색되면서 다시 북핵 문제 해결에 중국 변수가 커졌다고 보고 있다. 이상숙 국립외교원 교수는 “2020년 한국과 중국은 북한 도발을 관리해야 한다는 동일한 이익이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 문제가 한·중 관계 자체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이성현 센터장은 “2019년 한·중 간 최대 외교 이슈라 할 수 있는 북핵 문제에서 양자 간 협의가 줄어들자 외교 전반에서 양국 간 접촉이 대폭 줄었다”고 설명했다.
정부로서는 북·미 대화가 재개되지 않고 북한이 남측을 배제하는 상황에서 2020년 중국을 통한 대북 협력의 필요성이 작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 연말 문 대통령의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에 리커창 총리가 힘을 보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 역시 미국과의 관계에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지점이다.
◆겉으론 반대 표명 … ‘새로운 길’은 우회적 지지할 듯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 새로운 전략무기 개발을 언급하는 등 대미 강경노선을 유지할 뜻을 천명하고 나서면서 북한의 우방국인 중국의 반응이 주목된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북한과 언제나 대화가 가능한 중국의 역할론이 대두돼 온 상황이다.
중국은 우선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하지 않는 한 전략무기 개발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한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서는 공개석상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분석된다.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2일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전략무기’가 언급된 것과 관련해 “현 한반도 정세에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자제를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중국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실험을 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는 분위기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은 지난 6일 논평을 통해 “이는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될 경우 북한이 쓸 수 있는 ‘옵션’이며 그럴 경우 북한이 중국에 사전에 통보해 줄 것이라고 본다”며 “미국이 먼저 적대적 정책을 썼고, 이에 북한이 ICBM을 통해 ‘반응’하는 것이라는 점을 중국에 알려 설득한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ICBM 발사실험을 강행할 경우 미국이 한국 또는 일본에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는 명분을 줄 수 있다. 중국 역시 미국과의 대치상황에서 이러한 위협 요소는 달갑지 않을 것으로 보여 북한도 이를 감안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이 센터장은 “김정은 스스로도 미국과 교착상태는 ‘장기화가 불가피’라고 판단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대중 의존도는 더욱 심화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한반도 3대 정책의 한 기둥인 ‘비핵화’를 북한이 쉽게 위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고 전망했다.
중국은 북한이 전원회의에서 내비친 ‘새로운 길’에 대해서는 우회적인 지지를 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크게 중국을 난처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미국 견제 차원에서라도 북한 편을 들 수밖에 없다”며 “이는 최근 러시아와 함께 안보리에 북한에 대한 제재완화 결의안에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다만 결의안을 보면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유예했고 그것을 명분으로 제재를 완화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는 북한에 ‘도발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로도 읽힌다”고 덧붙였다.
홍주형·이정우 기자 jh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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