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으려면 개인 주방과 욕실이 있는 아파트나 원룸에서 사는 건 무리예요.”
수도권 소재 대학에 다니고 있는 김모(28)씨는 지난 3월부터 학교에서 도보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고시원에서 살게 됐다. 집에서 통학하려면 5시간이 넘게 걸리는 탓에 자취를 해야 했고, 은퇴한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시원은 보증금 없이 월 27만원. 6㎡ 남짓한 공간에 침대와 책상이 전부이고, 화장실과 주방, 세탁실은 공용이다. 김씨는 “취업 준비에 전념하기 위해 고시원을 선택했지만 방음도 열악하고 채광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누워 있다 보면 몸과 정신이 병들어가는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사회초년생으로 대표되는 청년세대의 ‘보금자리’가 점차 열악해지고 있다. 소위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라는 신조어가 청년들의 주거공간을 대표한 지 오래다. 치솟는 주거비와 침체된 고용시장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주거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았다. 청년의 첫 출발이 사회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은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1학기부터 학교 인근 원룸에서 자취 중인 고려대생 이모(24·여)씨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은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대신 매달 통장에서 나가는 월세를 보면 가슴이 철렁한다. 룸메이트와 함께 좁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게 불편해서 보증금 1000만원에 월 55만원을 주고 19㎡ 크기의 원룸을 구했지만, 집세만으로 생활비의 절반 정도가 나가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씨는 “매달 55만원에 수도요금과 전기요금, 관리비 등 공과금에다 식비는 심지어 별도라 기숙사 살 때보다 지출이 급격하게 늘었다”며 “저렴한 곳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막상 보면 여자 혼자 살기에 위험하거나 노후해서 곳곳에 수리가 필요하거나 벌레가 출몰하는 등 열악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청년 5명 중 1명은 주거빈곤
12일 한국도시연구소가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를 분석한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 및 주거빈곤 가구 실태 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청년가구 256만4568가구 가운데 약 17.6%(45만565가구)가 주거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빈곤은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주거 환경이 열악한 고시원 같은 주택 외 거처 거주 가옥과 지하방이나 옥탑방 거주 가구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혼자 사는 청년 5명 중 1명꼴로 옥탑방이나 반지하방, 고시원 등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대학이 집중돼 있는 서울지역은 청년들의 보금자리 수준이 더 열악해지고 있다. 서울 지역 1인 청년가구의 주거빈곤율은 2000년 31.2%(7만2864가구)에서 2015년 37.2%(14만7533가구)로 늘었다. 전국 전체가구의 주거빈곤율이 2000년 29.2%(413만4203가구)에서 2015년 11.6%(227만6562가구)로 줄어든 것과 극명히 대비된다.
직장 또는 학업을 위해 사회초년생이나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도심으로 몰리면서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지자 비교적 시설이 좋은 원룸, 오피스텔은 이들의 지갑 사정으로는 감당하기 부담스러워졌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만 20∼34세 청년가구의 RIR(월 소득 대비 임대료 비율)는 2017년 18.9%에서 지난해 20.1%로 상승했다. 실제로 부동산 중개 애플리케이션 다방이 지난 6월 서울 주요 대학가 주변의 33㎡(10평) 이하 원룸 평균 월세(보증금 1000만원 기준)를 조사한 결과, 월세가 가장 낮은 지역은 서울대로 평균 35만원이었고 가장 높은 곳은 홍익대로 평균 55만원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민간 임대업자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방 한 칸’을 나눌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작게 쪼개고 나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청년들은 주거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지옥고’로 향한다.
◆‘지지부진’ 대학기숙사 증축, 체감도 낮은 정책
낮은 기숙사 수용률은 청년들을 민간 임대주택을 선택하게 하는 주요인이다. 기숙사는 원거리에서 통학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이 안정적인 주거공간에서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필수 교육시설이다. 그러나 기숙사는 대학설립·운영 규정에 강의실, 도서관, 학생회관 같은 ‘교육기본시설’이 아닌 ‘지원시설’로 분류돼 있다. 기숙사 수용 규모와 기숙사비에 대한 기준이 별도로 없다 보니 수용률과 기숙사비가 제각각이다.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최근 발표한 2019년 대학정보공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전국 일반대학 및 교육대학 196개교의 평균 기숙사 수용률은 22.1%다. 땅값이 비싼 수도권 지역의 대학기숙사 수용률은 17.7%로 비수도권 대학(25.5%)보다 낮다. 지난해보다 소폭 상승했으나 여전히 부족하다. 경기도 용인시에서 서울 관악구까지 통학하는 서울대 대학원생 A(26·여)씨는 “통학하면 거의 왕복 4시간이 소요되지만 기숙사는 지방 우선이다 보니 신청을 했다가 떨어졌다”며 “기숙사를 확충해서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각 대학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기숙사 확충에 나섰으나, 새로운 기숙사 설립은 곳곳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대학가 주변 주민들과 마찰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대는 2013년 학교 소유의 부지에 1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기숙사 신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산림 훼손과 주민의 여가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현재까지 답보상태다. 한양대 역시 2015년 1990명 규모의 기숙사 신축 계획을 발표하고, 계획안이 2017년 12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주민들이 임대수입 감소 등을 이유로 반대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청년주거난을 타개하고자 다양한 정책을 마련했으나 주거 취약층 청년들이 체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시는 대표적 청년주거정책으로 ‘역세권 2030 청년주택’을 마련했다. 대중교통이 편리한 역세권에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를 위해 민간과 공공이 협력해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정책이다. 지난 9월 강변역과 충정로역 일대의 역세권 청년주택이 첫 입주자를 모집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임대료가 주변 오피스텔과 비슷해 저소득 청년들이 혜택을 누리기에 문턱이 높다는 비판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청년주거정책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충분한 재정 투입과 부처 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민달팽이유니온 이한솔 사무처장은 “정부나 정치권에서 공공주택 공급 등 청년 주거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개선할 만큼 많은 물량이 공급됐던 적은 없었다”며 “문제는 정책의 부재가 아니다. 현재 나온 공공주택 공급과 월세지원대출 등의 정책들이 현장에 제대로 반영되도록 국회와 시의회에서 예산을 적절하게 배정하고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도시연구소 최은영 소장은 “대부분 청년은 민간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당국은 ‘쪼개기 원룸’ 등 민간임대시장의 문제를 방치하고 대학기숙사 설립도 손놓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서울시가 지난달 발표한 개선안처럼 청년주거를 위한 주거비지원책 등 즉각 효과가 나타나는 정책을 활발히 실시하고, 지지부진한 대학기숙사 신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계부처인 국토교통부와 교육부가 긴밀히 협력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한 정부 차원의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집주인 월세 맘대로 인상… 청년 평균 1.4년 살고 이사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조사한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청년가구의 51.7%가 월세가구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등 청년가구 대부분(75.9%)이 자가가 아닌 임차가구 형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청년가구의 평균 거주기간 역시 1.4년으로 일반가구(7.7년)에 비해 짧다. 세입자인 청년들은 전·월세 거래 과정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다거나 일방적인 집주인의 월세 인상 등의 문제를 적지 않게 겪는다. 이처럼 청년가구의 주거안정성이 불안정한 가운데 청년들은 세입자의 권리를 찾고 비적정주거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양한 운동을 펼치고 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촉구운동’이 대표적이다. 참여연대와 민달팽이유니온, 빈곤사회연대 등 100여개의 시민단체는 최근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 연대’를 출범했다. 이들은 “청년과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올려주지 못하면 2년마다 이사해야 하는 주거불안에 시달려야 한다”며 전·월세 계약기간을 기존 2년에서 4∼6년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을 신속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밖에도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계약갱신청구권 도입 △전·월세 인상률 상한제 도입 △전·월세 신고제 도입 △임차보증금 보호 강화 △비교기준 임대료 도입 등을 제시했다.
지난 9월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와 성신여대, 성공회대 총학생회 등 16개 대학 학생회와 학생단체가 함께 모여 출범한 ‘대학생 주거권 보장을 위한 자취생총궐기 기획단’도 “서울에서 자취하는 대학생들이 주거비로 생활비 절반 이상을 지출하면서도 좁고 열악한 시설에 살고 있다”며 “그럼에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민간임대주택에 대한 통제방안을 내놓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에 속한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가 지난 6월 발표한 ‘서울지역 대학 자취생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명 중 1명꼴인 22.6%가 ‘1인 최저주거기준’(14㎡) 미달 시설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 문제 중 가장 분노하는 부분’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55.2%)이 ‘너무 비싼 주거비’를 1순위로 꼽았다. 이어 ‘비좁은 주거면적’(47.4%), ‘열악한 주거시설’(43.1%)이 2, 3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권고한 월 소득 대비 주거비 비율 20%가 지켜지도록 보장해 달라”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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