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 못해 동의”… 美 설득으로 면죄
전범재판서 日 정부 주장과 배치
‘대원수’로 군부의 설득 매일 들어
전쟁에 대한 결의 지나친 것 같다
개전 걱정에 잠 못 이루고 초조
전쟁 경위 기록한 자료로도 가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전쟁 책임을 묻는 재판이 진행되자, 일본은 히로히토(裕仁) 일왕을 지키기 위해 “정부나 군부의 진언으로 마지못해 전쟁에 동의하게 됐다”며 미국을 설득했다. 이런 논리가 전적으로 주효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히로히토는 전범 처벌을 면했다.
하지만 그가 전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는 자료가 최근 연구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1936∼1944년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청 고위직인 시종장을 지내며 히로히토를 가까이서 보좌한 햐쿠타케 사부로의 일기에서도 전쟁에 적극적인 일왕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햐쿠타케는 1941년 10월 13일 일기에 “바짝 다가온 시기에 대해 이미 각오하신 것 같은 모습”이라는 이야기를 마쓰다이라 쓰네오 궁내대신으로부터 들었다고 적었다.
아사히신문이 5일 보도한 햐쿠타케의 일기 내용은 80년 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며 미국과 전쟁을 시작할 즈음 “전쟁에 관해 고민하고, 심적으로 동요하다 점차 개전 용인으로 기울어가는” 히로히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일기는 햐쿠타케의 후손이 도쿄대 근대일본법정사료센터에 일기, 수첩, 메모 등을 기탁한 것을 계기로 알려지게 됐다.
햐쿠타케의 일기를 보면 히로히토는 동맹국 독일이 소련(현 러시아)과 전쟁을 시작하고, 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외교적 교섭에 진척이 없자 상당히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독일·소련 전쟁 개시 후 “개전의 영향을 걱정한” 히로히토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1941년 7월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반도 침략과 관련해 미국이 석유 금수 등의 경제제재를 취하자 추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실현되지 않은 것 등을 두고 “외교에 대한 피로가 겹쳐 걸음도 활발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대원수’로서 “군부의 설득을 매일 듣는 사이에 점차 개전 용인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일기는 1941년 9월 6일 회의에서 “10월 상순까지 일·미 교섭이 정리되지 않으면 개전을 결의한다고 한 ‘제국 국책 수행 요령’이 결정되었다”고 전하고 11월 20일에는 “폐하(히로히토)의 결의가 지나친 것처럼 보인다”, “외무상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평화의 길을 다해야 한다는 인상을 주는 발언을 하도록 부탁했다”는 기도 고이치 내(內)대신의 발언을 적었다.
아사히신문은 자다니 세이이치 시가쿠칸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천황의 자세가 개전을 향해 경도되고 있는 것에 대한 측근의 우려가 드러난 기록은 종래의 사료에는 없었다”며 일본 지도자가 전쟁에 이르게 된 경위를 기록한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가토 요코 도쿄대 교수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 육군이 반발할 것’이라고까지 압박해 온 것이 천황이 개전을 결정하는 하나의 큰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일기 내용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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