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업체들 사기·돌려막기 의혹 번져
전세자금 일부 넣었다 못 받아 ‘발동동’
업체 월 대출액 1년 새 44% ‘뚝’
업체당 2000만·부동산관련 1000만원서
9월 한도 50% 낮춰 신규영업 애로
“너무 침체된 상황이라 요즘은 투자하기 겁나네요.” “업체들이 내놓은 P2P 상품 마감도 잘 안 되고요.”
한때 혁신금융의 총아로 불리며 금융당국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개인 간(P2P) 금융이 침체기에 빠졌다. P2P는 말 그대로 플랫폼을 통해 채권자와 채무자를 바로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우리는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그 돈이 누군가의 예·적금인 걸 알지만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P2P투자자는 자신의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확인하고 자금을 넣는다. 전통 금융사에 비해 운영비를 줄일 수 있다 보니 수익률도 상대적으로 높은 게 장점이다.
지난 8월27일부터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법(일명 P2P법)이 시행되며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왔지만 가이드라인상 개인투자자의 투자한도가 축소되면서 업체들이 신규 영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은 업체들이 제때 돈을 갚지 못하자 상환연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부 업체의 사기, 돌려막기 의혹은 이 같은 상황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옥석을 가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진통이라지만 P2P업체들에 현 시간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에 일부 업체는 투자한도가 개인투자자보다 높은 적격투자자, 전문투자자를 모시는 등 활로 개척에 나섰다. 적격투자자 등록을 마치면 포인트를 지급하고, 전문투자자에게 은행처럼 자산관리(PB)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이다.
◆‘대출받아 투자했는데’…이사·차 구매도 미뤄
서울에 거주하는 최모(28)씨는 3년째 P2P상품에 투자하다 최근 쓴맛을 봤다. 이따금 상환연기가 발생하긴 했지만 추후 제대로 원금이 상환되는 걸 보고 P2P투자를 ‘믿어도 되겠다’ 싶었다. 이에 신용대출을 2500만원 받아 총 5700만원을 한 회사에 투자했는데, 어느 날 회사가 사전공지도 없이 경찰수사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알고 보니 회사는 투자금을 ‘돌려막기’한 혐의를 받고 있었고, 회사 대표 이모(46)씨는 사기 등 혐의로 구속됐다. 최씨는 “투자 상품이 상환연기된 것을 회사 홈페이지에 직접 들어가서야 알았다”며 “최근 계속해서 P2P상품들이 상환연기되다 보니 기존에 다른 업체에 넣어둔 돈을 다 뺐다”고 푸념했다.
투자금이 갑작스레 상환연기되면 당초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장모(39·여)씨는 올해 독립을 생각하며 돈을 모으던 중 P2P업체에 투자한 460만원이 갑작스레 묶이는 일을 겪었다. 장씨는 “올해 독립을 하고 중고차도 한 대 사려고 목돈을 모으고 있었다”며 “현재 460만원을 언제 돌려받을지 모르는 상태라 이사하는 걸 당분간 미뤘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인터넷에서 ‘P2P에 투자했다 연체됐다’는 글을 가끔 봤지만 ‘설마’ 했다”며 “남은 금액만 회수되면 다시는 발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주위에서 P2P투자를 한다면 뜯어말릴 것”이라고 밝혔다.
허모(35·여)씨는 새로 이사 가는 집 전세자금에 보태려 했던 투자금이 상환연기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보험약관대출을 받았다. 허씨는 “지난달 10일 650만원이 상환될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레 상환이 연기됐다”며 “전세자금에 보태려던 돈이다. 일단 급한 대로 보험약관대출을 300만원 받고 나머지는 따로 모아둔 돈으로 메꿨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문제 방지를 위해 나름 분산투자를 했는데 연체가 줄이어 발생하거나 업체 차원에서 돌려막기를 하면 피해가 투자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더라”며 “앞으로 쉽사리 P2P투자를 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쪼그라든 월 대출액…월 대출액 1000억원대로 감소
업계 분위기가 흉흉하자 P2P업체의 대출 취급액도 감소 중이다. 지난달에는 월 대출액이 약 1300억원을 기록해 올해 처음으로 두 달 연속 2000억원 이하를 기록했다. 26일 한국P2P금융협회에 따르면 44개 P2P업체의 지난달 월 대출액은 1289억원으로 전년 동기(2304억원) 대비 44% 감소했다. 1289억원은 올해 8월까지 평균 월 대출액(2170억원)보다 881억원 적은 수치다.
취급대출액이 갑작스럽게 줄어든 이유로는 개인투자자 투자한도 축소가 꼽힌다. 금융당국은 최근 가이드라인을 개정하며 업체당 2000만원, 부동산 관련 투자 1000만원이던 한도를 지난달 말부터 업체당 1000만원, 부동산 관련 투자 500만원으로 낮췄다. 투자 한도가 절반으로 낮아지면 투자금은 줄 수밖에 없다. 한 P2P업체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이 워낙 빡빡하고 P2P투자의 위험성이 강조되다 보니 정상적으로 사업을 해오던 업체들까지 이전처럼 제대로 사업을 영위하기 힘든 지경”이라며 “요즘 너무 힘든 상태”라고 밝혔다.
업체들은 내년 5월이 돼야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당국이 내년 5월 중앙기록관리기관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다. 중앙기록관리기관은 투자자의 투자한도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현재는 P2P 중앙기록관리기관이 없어 당국이 개인투자자의 총 투자한도를 확인할 수 없다. 개인 총 투자한도 대신 업체당 투자한도로 투자금을 제한하고 있는 이유다. 내년 5월 중앙기록관리기관이 설립되면 P2P법에 따라 개인투자자의 총 투자한도는 3000만원으로 늘어난다. 최근 금융위원회는 중앙기록관리기관으로 금융결제원을 선정했다.
◆적격·전문투자자 모시는 등 자구책 강구 나선 업계
업체들은 개인투자자보다 투자한도가 훨씬 높은 소득적격투자자, 전문투자자 모시기에 나섰다. 적격투자자는 업체당 4000만원까지 투자할 수 있고, 전문투자자는 한 상품에 40%까지 투자할 수 있는 것 외엔 투자액수 제한이 없다.
P2P업체 8퍼센트는 지난 5월부터 전문투자자들을 위한 블랙 멤버십을 운영 중이다. 블랙 멤버십은 일종의 PB서비스로, 전문투자자들은 △멤버십 전용 커뮤니티 초대 및 네트워킹 △절세, 상속, 증여를 돕는 자문 서비스 △웰컴 기프트 증정 △투자 현황 브리핑 서비스 등을 제공받는다.
어니스트펀드도 최근 적격·전문투자자 전환 이벤트를 시작했다. 일반 투자자가 적격·전문투자자로 전환 등록하고 이벤트 기간 내 100만원 이상을 투자하면 5만 포인트를 지급해준다.
어니스트펀드 관계자는 “일반투자자들의 투자한도가 줄어들다 보니 적격·전문투자자 요건이 되는데도 정보를 모르시는 분들이 줄어든 투자한도로 투자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벤트를 진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업체들 연체율 19% ‘역대 최고’ P2P법 시행에도 안정화 먼 길
개인 간(P2P) 금융이 제도권으로 편입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연체율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엔 연체율이 19%에 달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P2P법이 시행되면 업계가 안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안정화까진 다소 시간이 걸리는 모양새다.
26일 P2P금융 통계제공업체 미드레이트에 따르면 131개 P2P금융사의 연체율은 18.98%다. 이는 지난해 말(11.41%)보다 7.57%포인트 오른 수치다.
특히 누적대출액 기준 업계 1위인 테라펀딩의 연체율이 올해 크게 상승했다. 지난해 말 10.98%던 연체율은 현재 24.12%를 기록 중이다. 3위 어니스트펀드 역시 같은 기간 5.82%에서 9.63%로 증가했고, 4위 투게더펀딩은 1.17%에서 8.83%로 급등했다.
일부 업체의 사기·돌려막기 의혹도 업계 전체의 연체율을 끌어올렸다. 연체율이 0%로 알려졌던 넥펀은 지난 7월 사기 등 혐의로 대주주가 구속됐다. 넥펀은 신규 투자금으로 미상환 대출을 돌려막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연체율이 2%대였던 블루문펀드는 지난 8월 돌연 폐업을 선언했다. 블루문펀드 대표는 현재 잠적한 상태다. 금융감독원은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블루문펀드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은 지난 3월 현장검사를 실시했고, 투자금 돌려막기 정황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사기·돌려막기 의혹이 불거지고, 상위 업체의 연체율이 증가하자 금융감독원은 지난 3월 소비자경보 ‘주의’ 단계를 발령하며 투자자의 신중한 투자를 당부했다.
당시 금감원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동산 담보대출 등 부동산 대출상품 취급 비율이 높은 업체의 연체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며 “투자자들은 P2P대출상품이 원금을 보장하지 않는 고위험·고수익 상품인 점을 분명히 인식해 투자자 유의사항을 숙지한 후 자기책임하에 투자해달라”고 당부했다.
금감원은 과도한 투자 이벤트를 실시하는 업체를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리워드 과다지급 등 이벤트로 투자자를 현혹하는 업체일수록 불완전판매나 대출 부실화 가능성이 높아서다.
또 상대적으로 연체율이 높은 부동산 대출상품에 투자할 때는 차주의 자기자본 투입 여부 및 투입 비율, 시행사 및 시공사, 채권순위, 담보권 행사방식 등 투자조건을 상세히 살펴봐야 한다.
금감원은 “사업에 차주의 자기자본이 투입되는 경우 사업의 책임성을 확보할 수 있고 분양가 하락 시에도 대출금 보전에 유리하다”며 “시행사·시공사는 사업시행 및 공사를 책임지고 진행하는 주체인 만큼 신용등급, 사업시행이력, 재무현황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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