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 h
1
떠나기 전, 짐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질문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
듯 읽어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 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 인형 같은 모습의 첫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
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
무 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
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
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 할지
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
는 없다, 스물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가는 나의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 문학과지성 시인선 R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