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98244
-----
닥터를 만나고서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안드바리의 가슴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지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불편한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놈의 왕가슴은 며칠째 안드바리가 걷는 것은 물론이고 패널을 다루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원래와는 달라진 바디밸런스 때문에 몸을 가누는 것도 마뜩찮고 어깨가 결리는 건 덤이다. 도대체 어른들은 이 무거운 걸 어떻게 평생 달고 다니는 거지? 어깨 빠질 것 같은데?
몸의 불편뿐만이 아니었다. 안드바리는 사령관에게 앵기다 가슴을 부빈 그 날 이후 며칠째 사령관이 은근히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 뭐, 덕분에 사령관이 자원 삥땅치러 창고에 오지 않게 된 점은 좋은데...많이 아웅다웅하다보니 정이 들었던 걸까, 사령관의 얼굴을 못 보니 괜히 섭섭하다.
그러나 그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안드바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슴이 무겁다고 떼어낼 수는 없으니까.
"........"
그렇게 자신의 현재 상황에 손쓸 도리 없는 짜증을 느끼는 그녀의 눈에 익숙한 광경이 들어왔다. 너무 익숙해서 그 짜증을 배가시키는. 그녀는 쌀국수 박스에 상체를 기울이다 못해 거의 잠수하듯이 갖다박은 알비스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곤, 발로 걷어차는 대신(그랬다간 지금도 가슴 때문에 상체가 무거운 안드바리의 무게중심이 무너질 것이므로) 날선 말로 호되게 그녀의 엉덩이를 후려깠다.
"알비스 언니, 또 언니에요? 도대체 언제 정신 차리실 거에요!"
또냐. 이것이 알비스와 안드바리 둘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투덜거림이었다. 쌀국수박스에 한껏 고개를 처박고 바둥거리던 알비스는 약간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틀 전에는 안드바리의 가슴에 놀라 초코바를 가져오는 걸 잊었다만, 이번엔 놀라지 않을 거다.
"좀 있다 작전이야. 베라 언니도 줄 건데 조금만 챙겨가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요. 어린애에요?"
자기보다 어린 동생에게 어린애냐는 소릴 듣자 알비스도 그만 욱했다. 아까 말했듯이 그녀는 조금 있다 작전을 나간다. 사령관이 손수 작전계획서를 검토까지 해 가며 가능한 한 안전한 작전이 되도록 안배하지만, 결국 철충들과 맞서서 총탄을 교환하는 것이 생사를 오가는 위험한 일임은 변함이 없다. 당장 오늘 총 맞고 눈밭에 쓰러져, 못 먹은 쌀국수를 그리워하며 죽어갈 지 누가 알겠는가? 내일도 초코바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장담해 줄 수 있는가? 후방 지원하는 기행업무는 직접 사선에서 전투하는 전투부대의 심정을 몰라, 하고 알비스는 속으로 불평했다. 막내동생이지만 안드바리는 너무 융통성이 없다.
"작전 때 불출되는 수량은 규정에 정해져 있어요. 베라 언니가 먹고 싶어하시든 님프 언니가 그러든 안 돼는 건 안 돼요! 요즘 영양자원 부족하다구요!"
오르카 영양이 부족해진 데에는, 엄청난 영양을 잡아먹었을 게 분명한 안드바리의 가슴도 한몫했을 거 같은데. 쫑알쫑알 잔소리하는 그녀를 앞에 두고 알비스는 불만스럽게 두 손을 깍지껴 머리 뒤에 얹었다. 그러고선 입을 샐쭉하며 중얼거렸다.
"쳇. 가슴만 커졌지 마음은 하나도 안 커졌네"
사실 안드바리의 말이 정론이니 반박은 못하고 혼잣말이나 하는 가까웠으므로 알비스 자신도 안드바리가 그 말에 크게 반응할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좀 더 잔소리나 들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
"네?"
"윽, 미아ㄴ...에, 안드바리?"
"알비스 언니....."
...그랬기에 그녀는 안드바리가 그 말에 동공을 흔들며 어깨를 떨기 시작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은 옛날 옛적부터 흔히 가슴에 비유되었다. 가슴이 설렌다, 가슴이 철렁했다, 가슴이 아프다 등등. 그건 안드바리도 알았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알비스의 발언은 안드바리의 속이 좁다는 이야기이리라. 어른처럼 대범하지 못하고, 인색하며, 소갈머리 없고 쫀쫀하다는. 어른처럼 풍만해진 가슴답지 않게 그 마음은 거기에 따르지 못한다는. 어른다운 아량이 없다는.
"저, 저도, 저도..."
한참 더듬거리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떨리는 목청이 찢어지도록 크게 빽 소리지르고 말았다. 그 자신도 소스라칠 정도로.
"저도 이런 몸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에요!"
알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드바리가 이렇게 과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저 평소대로 지청구나 좀 듣고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민하게 폭발할 줄은 몰랐다. 알비스만이 아니라 창고 안에서 일하던 모두의 시선이 안드바리를 항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자 안드바리는 더더욱 울먹울먹했다. 갑자기 난데없는 설움이 북받쳤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어도 눈에서 눈물이 비식 솟았다.
"됐어요! 맘대로 하세요! 맘대로 하시라구요! 저도 이제 이런 거 하기 싫어요!"
그녀라고 알비스, 부식 삥땅치려는 옆부대 브라우니, 심지어 최고 통수권자답지 않게 메탈X어솔리드 처럼 숨어들어서 물자를 축내는 사령관과 씨름하는 게 즐겁지 않았다. 그녀라고 싸움을 좋아하겠는가? 남들과 얼굴 붉히고 싫은 소리 하고 싶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다들 그녀의 마음을 몰라준다.
"윽, 흑, 흐흑, 흑, 으아아아앙-"
안 그래도 가슴 커져서 힘들고, 사령관은 그녀를 피하고, 일은 잘 안 플리고, 몸은 피곤하고, 어깨는 결리고, 은근히 남들(특히 자기 부대의 보급품 건으로 응당 자신과 여러번 만나야 할 둠브링어 쪽 부관)이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아 슬픈데, 알비스 언니는 내 맘도 몰라주고선...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안드버리는 그만 주저앉아 꺽꺽 울기 시작했다.
"저, 저기 안드바리, 호, 혹시..."
알비스는 그 자리에 털썩 퍼앉아 엉엉 우는 안드바리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가슴이 그렇게나 예민한 문제였나. 설마, 싶었지만, 성장약을 먹고 몸이 자랐으니 무시할 수도 없는 가능성이었기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부대의 막내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생리하는 ㄱ"
알비스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면상으로 안드바리가 마구 집어던진 참치캔 무더기가 날아왔다.
머리가 아득해지는 중에 돌아서 뛰쳐나가는 안드바리의 뒷모습이, 알비스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레오나의 손이 가볍게 그러나 약간 초조하게 창고 문을 두드렸다.
"안드바리, 문 좀 열어 봐"
"....."
안에서 응답이 없었다. 이틀 전 알비스에게 소리지르고 뛰쳐나온 사건 이후, 안드바리는 발할라 전용 보급창고에 처박혀 문을 잠그고 나오질 않고 있었다. 한참이나 안이 잠잠하자 레오나는 약간 애가 타서 조금 더 성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사령관도 걱정하고 있어. 나 사령관한테 부끄럽게 할 거야?"
"......"
역시 한동안 아무런 응답이 없나 싶어 레오나가 다시 한 번 재차 노크해 보려는 순간, 선실 문이 작게 열렀다. 그리고 그 틈으로 퀭한 눈을 한 안드바리의 호수 같이 맑은, 아니 맑았어야 할 옥빛 눈동자가 메마르게 빛났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이틀간 안에서 울기만 했는지 안드바리의 몰골은 평소의 말끔깔끔한 모습과 달리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정돈되지 못하여 부스스했고 여기저기 뻗쳐 있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도저히 세련되고 기품 있는 발할라의 절도 있는 군수장교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레오나를 맞아들인 안드바리는 컨테이너 박스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레오나가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자상하게 안드바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안드바리는 그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지만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토라진 얼굴로 잠잠했다. 이런 점은 아무리 봐도 애같다니깐. 아무리 가슴이 자기보다 커졌어도 말이지, 하고 레오나는 속으로만 작게 한숨쉬었다.
"안드바리, 어른이 되고 싶니?"
"....."
안드바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 래오나의 무릎팍에 앉은 채 고개만 숙였다.
역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지휘관기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그렇다. 안드바리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좀더 멋있게, 좀더 당당하게 알비스 언니에게, LRL에게, 그리고 자원을 탕진하는 사령관에게, 그리고 보급품 좀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기타 등등들에게 맞설 수 있을 테다. 의연히 막아서서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에게(혹은 그에게) 엄격하고 근엄한 누나처럼 보일 수 있다면.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고,늠름하게 남을 타이를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다면. 레오나 대장님처럼 근사하고 늠름한, 성숙한 여성이 될 수 있다면.
그런데 이틀 전의 일은 뭔가. 아무리 알비스가 잘못했다 해도 그렇게 소리지르고 무책임하게 도망쳐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알비스가 잘못했고 태도가 아니꼬왔어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알비스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어른스럽지 못했다. 알비스가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어른처럼 처신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처신이었다. 안드바리는 알비스에게만 화난 게 아니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다, 이 가슴 떄문이야'
안드바리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고 또 스트레스 받게 만들게 하는 주범. 작은 행동 하나도 거북하게 만드는 그것. 그러나 또한 알비스의 말대로라면 그녀를 좀더 성숙하게 만들어주었어야 할, '어른'의 증거.
'어른'이란 과연 뭘까.
문득, 안드바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불편한 몸을 가지면서까지 어른이 되었는데, 왜 행동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몸은 어른처럼 변했는데, 왜 행동은 더 유치했던 걸까. 그녀는 그 말없는 불만 속에 자신이 고개를 파묻은 그 커다란 가슴에 시선을 모았다.
"다들, 도대체 이 거추장스럽기만 한 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저기, 안드바리, 그 말은 둠브링어 가서는 하지 마"
"네?"
안 그래도 요즘 나이트앤젤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한 게, 타부대인 레오나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나이트앤젤 입장에서는 안드바리의 지금 고민 - 가슴 때문에 어깨가 결린다든지 달릴 떄 출렁거린다든지 - 가 더없이 기만적이고 잔악무도한 사치, 조롱, 내지는 티배깅으로 보일 터다. 지금 가슴 큰 게 불편하다고 안드바리가 투덜대는 걸 들었다간 진짜로 그 까칠한 멀대녀는 발할라 숙소에다 폭격을 때려버리는 프렌들리 파이어(더 익숙한 용어를 쓰자면 팀킬)를 시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트앤젤의 피터지는 속마음이야 어찌되었건 안드바리는 이 가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른들이란 이런 무겁고 불편한 걸 짊어지고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왜 이런 걸 갖고 싶어서 다들 그렇게 안달인 건지.
"어른이 되면 마음도 자라는 거 아니었나요..."
그녀는 무심코 혼잣말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멸망 전 옛말이 있었드랬다. 정신이 몸을 따라가는 거라면, 몸이 자라면 마음도 자라는 걸까.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 가슴만큼은, 오르카의 누구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어른인 자신은 왜 어른스럽지 못한 걸까. 그러나 레오나는 마치 안드바리의 엄마처럼, 그녀의 윤기나는 남색 머릿결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어쩌면 정말로 몸의 성장이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지도 모른다. 갓 사춘기가 온 딸을 어르는 느낌인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꼭 몸과 마음의 성장이 비례하는 건 아닐 터다.
"안드바리. 누구나 실수를 해. 어른도 마찬가지야"
어른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아니, 오히려 어른들은 어른이기에 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드바리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땋아주는 레오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언제나 완벽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또 빈틈없는 예측과 연산모듈을 가진 그녀의 대장에게로.
"대장님도요?"
"흠, 이건 극비사항인데. 이 나도 정말정말 아주 가끔은 해"
그렇게 말하고선 레오나는 정말로 냉철한 포커페이스의 그녀답지 않게 싱긋 웃어보였다. 안드바리 앞이니까 이렇게 스스로 자존심 상할 만한 말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거다. 다른 이 앞에서는 (특히 사령관과 마리에게는)입이 찢어져도 자신은 완벽하다고 고집을 부렸을 터다. 하지만, 철혈의 레오나라고 전지전능에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다. 물론 그녀는 첨단 전황 분석 장비인 커맨드 프레임 '퀸스머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라고 오류를 전혀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니며 세상에는 늘 오차가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실수나 오류는 어른들도 피할 수 없다.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생각과는 달리 어른들도 실수투성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뭘까요'
어른도 아이도 실수를 한다면. 아니 오히려 어른이 더 규모가 큰 실수를 저지른다면, 누가 어른이 되고 싶어하겠는가.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대신 책임져줄 사람도 없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에, 레오나는 멸망 전의 인간들을 떠올렸다. 좋은 싫든 언젠가는 어른이 되고, 늙고, 그리고 죽어야만 했던 존재들을.
인간의 아이들은 언젠가 어른이 된다.
인간의 어른들은 모두 언젠가 아이였다.
인간의 아이들은 으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정작 인간 어른들은 어린 시절을 죽도록 그리워한다.
"멸망 전 인간님들은 그랬다고요? 왜요?"
"글쎄. 그걸 바이오로이드인 내게 물어도 알겠니?"
"비합리적으로 들리는데요"
"원래 인간들이 다 그렇지. 비합리, 모순, 비효율. 그래서 우리가 생겨난 것 아니겠니."
레오나의, 그 철혈의 레오나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포근한 엄마 같은 미소 아래서 안드바리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인간님들의 그 모순된 감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자란다는 것, 그리고 늙는다는 것에 대해.
바이오로이드들은 자라지 않는다. 그녀들은 처음 생산된 그 모습으로 영원, 아니, 정확히는 영원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간다. 어린 바이오로이드는 어른이 되지 못하고, 어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다. 그녀들은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다. 그것은,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안드바리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보급품 수량 셈하는 데 능한 군수과장이지 철학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안드바리가 하는 일은 원래는 '어른의 일'이지."
"저는 그렇게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니까요. 그리고 '어른의 일'이라니까 되게 이상하게 들리네요"
"그래. 실수는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처신은 어른다울 수 있겠지. 그게 '어른들이 일하는 방식'이 아닐까"
실수는 부끄럽지만, 그리고 가능한 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그게 어른들의 세상이다.
어른이 된다는 게 좋은 것만 있지는 않다. 어른이 되면 그에 따라 책임과 요구가 따라온다. 수많은 의무, 기대, 그리고 부담감이 어른들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그 와중에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을 테고, 상처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위에서 비틀거리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슬프더라도, 어떻게든 아득바득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또한 어른들이리라.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삶, 포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안드바리는 생각했다. 레오나의 말이 맞다. 그녀는 앞으로도 실수를 할 것이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토라질지도 모르고, 바보똥개를 외치면서 엉엉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토라졌다고 자기 해야 할 일도 손 놓고 틀어박혀서는 안 되리라. 언젠가 그녀는 다시 아이가 되겠지만, 그녀의 할 일도 아이가 되지는 않는다. 어른도 실수를 한다.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도 의무도 저버리고 도망치지 않는 것이 어른이라면, 안드바리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은 커다란 찌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소임을 묵묵히 다하는, 그리고 실수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리라.
"자, 다 됐다"
해달란 적도 없었는데 어느 새 레오나는 안드바리의 머리를 금란처럼 예쁘게 땋아 놓았다. 하지만 안드바리는 화내지 않고 그녀가 건네준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곱게 정돈된 머리를 가진 자신이 그 안에 있었다.
"저 유치해보이진 않죠?"
"전혀"
레오나가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안드바리는 그런 그녀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려 한 바퀴 돌아 보았다. 예쁘게 땋아진 머리가 그녀의 회전에 따라 빙글, 돌았다. 그녀는 호,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안드바리는, 그걸로, 털어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알비스 언니가 그러던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그리고 오르카에는 언제나 유능한 군수과장이 필요하다.
...그러면'유능하고 똑부러지며 어른스러운' 바로 나, 안드바리가 해야지 뭐.
"내일부터 다시 일할게요. 그 동안 쌓인 업무가 많죠?"
자원의 수급과 지출이 쉴 새가 없는 오르카는 물자의 변동량이 극심하다. 그러니 회계와 군수는 한시도 멈출 수 없는 행정업무다. 그러니 각 부대의 보급계가 돌아가면서(때로는 장성인 아스널까지 나서서) 이 중대한 임무를 맡는 것이다.
"실키에게 부탁해봐. 너 없는 새에 걔가 일했으니까. 고맙다고 말하는 거 잊지 말고."
"네"
안드바리는 빙긋 웃었다.
...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자 안드바리의 가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같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더 이상 나이트앤젤이 보고 나서 암에 걸리지 않을 만큼 납작하게. 그러나 가슴이 크든 말든 창고의 출납관리는 군수보급계인 그녀의 몫이고, 전날까지 물자의 수량을 맞춰둔 실키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안드바리는 오늘, 또 한 번 그 지엄한 대차대조표를 교란하는 천인공노할 쥐새끼를 '또' 발견했다.
"알비스 언니......"
"힉! 아...안드바리..."
알비스의 얼굴이 살짝 해쓱해졌다. 늘 배고프고 초코바 생각 한가득이긴 하지만 그녀라고 해서 마냥 뻔뻔한 철면피는 아닌 까닭이다. 지난 번에 자기가 한 말로 인해 안드바리가 상처입고 엉엉 울었는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알비스는 발할라의 자매 실격이리라. 그랬기에 그녀는 이번엔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안색이 변해서는 결국 조그맣게 사과했다.
"저기 음...잘못했어..."
부식 횡령도, 지난번에 그녀를 울린 것도. 안드바리는 뭐라 한소리 하려다가 잔뜩 쭈그러든 언니의 모습에 하, 하고 작게 한숨쉬었다.
"알았어요. 가져가요."
"응?"
믿기지 않는 반응에 알비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반어법인가? 막 화내기 직전에 하는?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안드바리는 먼저 엄하게 질책하고,
"알비스 언니, 그거 알아요? 군수물자 맘대로 가져가는 건 중범죄에요. 지금 같은 전시에는 즉결총살도 허용되죠"
"힉! 응...자....잘못했어..."
또한 온화하게 타일렀다.
"이번 한 번만 봐줄게요. 다음 달 부식 보급분에서 제외하면 되니깐."
"...화 안 내?"
"화났어요. 하지만 용서해 줄 거에요. 앞으로 잘 하면요"
"안드바리...."
"왜요. 이번에 나가는 작전, 철의 탑으로 가는 거라고 들었어요. 꽤 위험하다면서요?"
안드바리는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목숨을 거는 작전에 나가는 언니에게 조금 융통성을 발휘해 줘도 되리라. 그럼으로써 알비스가 더 힘내서 싸울 수 있고 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안드바리에게도 그 편이 훨씬 낫다. 미리 보고하고 미래의 보급분을 땡겨쓰는 개념이면 알비스도 안드바리도 편하기도 하다. 알비스는 팔자에도 없는 잠입액션을 매일 치루지 않아도 되고, 안드바리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예기치 않는 물자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보다는, 미리 보고받고 예측가능한 지출로 만드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대신, 앞으로는 꼭 저한테 와서 먼저 보고하고 가불을 받아요. 말도 없이 몰래 와서 가져가지 말고."
알비스의 눈에 갑자기 안드바리의 등뒤에 코헤이 교단 쪽 천사들처럼 날개가 펼쳐지고 천사링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만 무릎을 꿇고 지난 날의 대죄들을 회개할 뻔했다.
"안드바리, 아니 안드바리님!!"
...
알비스가 행복이 가득한 표정 - 당분간은 물건 뽀리러 긴장을 옥죄는 잠입액션 찍지 않아도 되고, 또 오늘은 안드바리에게 용서받았다는, 지극히 오늘만 바라보는 생각을 하며 - 으로 창고를 떠났다. 몇 시간 뒤면 생사를 가르는 전장에 나가는 자의 표정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오나와 사령관이 다가왔다.
"잘했어."
"조금 어른 같았어"
알비스를 다루는 것도,그리고 그 의연한 태도도. 솜씨 좋게 알비스를 다루는 걸 보면 이젠 누가 언니인지 모르겠다. 레오나는 그녀 특유의 차가운 냉소가 아니라 엄마 같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오히려 언니인 알비스보다 더더욱 듬직한 안드바리에게. 몸은 다시 작아졌지만 마음만은 더 훤칠해진 그녀에게. 안드바리는 다시 작아졌다. 그러나 몸은 원래대로 작아졌지만 마음은 조금 자라 있었다. 한 번 자란 마음은, 몸과 달리, 다시 작아지진 않았다.
"대장님. 얼굴 풀어지셨어요"
"흠흠, 더 분발하도록, 군수과장"
"방금 아무리 봐도 의젓하게 잘 자란 딸 보는 엄마 같았는데, 레오나"
"저, 절대로 우리 사이에서 난 애 같은 거 생각한 거 아냐!"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티격태격하는 둘 사이에서, 안드바리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그녀는 아이다. 그리고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히 어른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왜 인간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래놓고서 정작 어른이 되면 왜 다시 아이가 되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지에 대해 전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서로 만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레오나와 사령관 아래서 싱그레 미소지을 수 있었다.
가슴이 커져 본 게, 조금 자라 본 게, 꼭 나쁜 경험만은 아니었다.
< E N D >
-----
0. 출처에 대한 이야기
1) 가슴 커진 안드바리 그림은 '갦갬'님의 그림입니다(출처: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1683544)
2) 안드바리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는 설정은 'JAZZ JACK'님의 다음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따왔습니다. 원본 출처 링크를 달고 싶은데 찾기가 어렵군요. 아쉬운 대로 루리웹 라오게에서 찾은 링크를 달겠습니다: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2139
1. 잡담
이번 안드바리 이야기가 제가 라오게에서 쓴 100번째, 101번째 소설입니다. 어느 새 라오게에 쓴 소설이 100편이 넘었군요.
(IP보기클릭)211.44.***.***
사실 완결을 내고서 살짝 드리는 말씀이지만...우연찮게도 레오나 마망 시리즈도 안드바리랑 겹쳐서,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이 작가님의 저 가슴 커진 안드바리와, 반대로 아기가 된 사령관을 대비시켜서 써볼까, 도 했죠. 하지만 제 멋대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두 작가님의 설정이나 작품을 하나로 합치는 건 안 될 일 같기도 했고 상편을 쓸 때는 아직 레오나 마망 안드바리 이야기가 결론이 나질 않아(제가 상편 올리자마자 다음편ㄴ을 올리셨더라구요 ㅋㅋㅋㅋㅋ)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도 마땅치 않아서, 그냥 독립적으로 얘기를 썼지요 ㅎㅎㅎㅎ 레오나 마망 시리즈도 보다가 재미난 에피소드 있으면 후일담 써보겠습니다 ㅋㅋㅋㅋ
(IP보기클릭)223.62.***.***
그렇죠 그렇죠 ㅎㅎㅎ
(IP보기클릭)211.44.***.***
안드바리가 닥터 성장처럼 '어른이 되었다' 는 설정이면 무용도 등장시켜볼까 했는데, 일단은 가슴만 커졌다는 설정이어서 등장시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아이디어라곤 생각해요.
(IP보기클릭)125.176.***.***
재즈잭님 픽시브는 아마 저작권 문제 때문에 한번 ㅠㅠㅠ
(IP보기클릭)125.176.***.***
귀여운 안드바리로 돌아왔군욬ㅋㅋㅋㅋㅋㅋㅋ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11.44.***.***
안드바리가 닥터 성장처럼 '어른이 되었다' 는 설정이면 무용도 등장시켜볼까 했는데, 일단은 가슴만 커졌다는 설정이어서 등장시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아이디어라곤 생각해요. | 21.04.22 20:20 | |
(IP보기클릭)125.176.***.***
닭계꿩치
재즈잭님 픽시브는 아마 저작권 문제 때문에 한번 ㅠㅠㅠ | 21.04.22 21:15 | |
(IP보기클릭)125.176.***.***
귀여운 안드바리로 돌아왔군욬ㅋㅋㅋㅋㅋㅋㅋ
(IP보기클릭)211.44.***.***
사실 완결을 내고서 살짝 드리는 말씀이지만...우연찮게도 레오나 마망 시리즈도 안드바리랑 겹쳐서,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이 작가님의 저 가슴 커진 안드바리와, 반대로 아기가 된 사령관을 대비시켜서 써볼까, 도 했죠. 하지만 제 멋대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두 작가님의 설정이나 작품을 하나로 합치는 건 안 될 일 같기도 했고 상편을 쓸 때는 아직 레오나 마망 안드바리 이야기가 결론이 나질 않아(제가 상편 올리자마자 다음편ㄴ을 올리셨더라구요 ㅋㅋㅋㅋㅋ)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도 마땅치 않아서, 그냥 독립적으로 얘기를 썼지요 ㅎㅎㅎㅎ 레오나 마망 시리즈도 보다가 재미난 에피소드 있으면 후일담 써보겠습니다 ㅋㅋㅋㅋ | 21.04.22 21:43 | |
(IP보기클릭)125.176.***.***
저야 항상 환영인데 이번엔 타이밍이 너무 안타깝군요 ㅠㅠ 다른 작가님과의 의견 조율할 시간이 없는 텀이었다니!!!! | 21.04.22 22:37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223.62.***.***
Mental_Rider
그렇죠 그렇죠 ㅎㅎㅎ | 21.04.23 13:52 | |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211.44.***.***
훈훈하니 푸근하죠 으 발할라 가지고 매운맛도 언젠가 한번 써야 하는데... | 21.04.24 00:16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211.44.***.***
용자추종자
사실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지 좀 고민하다가, 훈훈한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제가 글쓰는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요... 맘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 21.05.01 03:00 | |